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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왕

영국신사77 2008. 9. 2. 18:04
                               헤롯왕

 

 흔히 헤롯왕이라 불리우는 이사람은 헤로데스 마그너스 별칭은 Herod the Great 우리가 헤롯대왕이라고 부르죠. 믿는 사람이든 안믿는 사람이든 이사람에 대한 기억은 오로지 성경을 기초로 한 정보만 주고 받는 것이 답답하여 이글을 올립니다. 이 글의 주요 내용은 71년도 출간된 마이클 그랜트의 책을 기초로 합니다.

 

 

 헤로데는 로마 제국이 임명한 유대의 왕(BC 37~4 재위)으로서 많은 성채·수로·극장·공공건축물을 세웠으며, 전반적으로 유대를 번영시켰지만 말년에는 정치적 음모와 골육상쟁의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신약성서〉는 그를 전제군주로 묘사하며, 나사렛 예수가 그의 왕국에서 태어났다고 전하고 있죠.(여기서는 그의 성경외적 활동이 기록된 서적이 라틴어인 관계로 헤로데라고 칭하고 있지만, 성경에 입각하여 헤롯이라 부르겠습니다.)

 

 헤롯은 팔레스타인 남부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안티파트로스는 에돔 사람(사해와 아카바 만 중간 지역에 사는 아랍인)이었습니다. 안티파트로스는 큰 영향력과 부를 지녔고, 당시 부흥하던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 페트라(요르단 강 남서부) 출신의 귀족 딸과 혼인하여 그 영향력과 부를 더욱 증가시켰습니다. 그러므로 헤롯은 비록 유대인 행세를 했으나 부계와 모계 둘 다 아랍 혈통이었죠. BC 63년 폼페이우스(BC 106~48)가 팔레스타인을 침공했을 때 안티파트로스는 그의 원정을 지원함으로써 로마와 오랜 관계를 시작했고, 로마로부터 그와 헤롯은 혜택을 받았습니다.

 

 6년 뒤인 BC 63년, 헤롯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만나 평생 친구가 되었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역시 헤 가문을 좋아하여 BC 47년 안티파트로스를 유대 총독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는데, 그 신분은 헤 및 그의 자녀들에게까지 계승되었습니다.

 

 

 같은 해인  BC 47년, 헤롯은 아버지로부터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받아 정치무대에 나섰습니다. 6년 뒤인 BC 41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그를 갈릴리 분봉왕으로 삼았지만, BC 40년 파르티아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을 침공하고 내전이 일어나자, 헤롯은 로마로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원로원은 그를 유대 왕으로 임명하고, 그 지역을 충분히 장악할 만한 군대를 주었습니다. BC 37년 헤롯은 36세의 나이에, 감히 아무도 도전하지 못하는 유대의 통치자가 되어, 32년 동안 그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헤롯은 권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아내 도리스와 이혼하고 그녀를 아들과 함께 궁 밖으로 쫓아낸 뒤, 하스몬 왕가의 공주 마리암과 재혼까지 했습니다. 그가 재혼한 목적은 유대 민족의 지도자이며 제사장 가문인 하스몬가(家)와의 불화를 끝내려는 것이었지만, 결혼한 뒤 마리암을 깊이 사랑하게 되어서 결과적으로는 나쁜 것만은 아닌게 되었습니다.

 

 두 집정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카이사르의 권력을 계승하기 위해 갈등이 생기자, 헤롯은 친구 안토니우스를 지원했습니다. 그는 안토니우스의 정부이며 이집트의 여왕인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에 대한 그녀의 영향력을 이용해 헤의 가장 좋은 영토를 많이 차지했어도, 안토니우스를 계속 지원할 정도로 신의가 깊었습니다만, BC 31년 악티움해전에서 안토니우스가 최종적으로 패배한 뒤, 헤롯은 승리한 옥타비아누스에게 자기가 누구 편을 들었는지 솔직히 고백했습니다. 이전에 로마에서 헤롯을 만난 적이 있던 옥타비아누스는 그가 로마가 원하는 대로 팔레스타인을 다스릴 유일한 인물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다시 왕으로 인정해주었으며, 또한 클레오파트라가 차지했던 땅을 헤데에게 돌려주기까지 했습니다.

 

 이후 헤롯은 아우구스투스의 대행정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절친한 친구가 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따서 손자와 증손자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황제와 대행정관은 헤롯에게 국빈으로 로마를 방문할 기회를 주어, 그는 다시 이탈리아를 2번 방문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에게 키프로스의 구리 광산 감독권을 주고 이익의 절반을 할당해주었습니다.

 

 그는 BC 22, BC 20년에 헤롯의 영토를 2배로 늘려주었기 때문에, 헤롯의 영토는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요르단 강 동편, 즉 오늘날 요르단 왕국의 일부지역과 레바논 남부, 시리아를 포함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원래 나바테아 왕국도 헤롯에게 줄 뜻이 있었지만, 당시 그 왕국의 권좌가 공석이었을 당시 헤롯이 정신과 육체 모두 쇠약해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임니다.

 

  헤롯은 자기 영토에 수많은 요새와 화려한 도시들을 건설했습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큰 두 도시는 주로 이교적인 새 도시로, 하나는 요파(야파)와 하이파 사이의 해안에 있는 팔레스타인의 항구도시 가이사랴로, 훗날 로마령 팔레스타인의 수도가 되었고, 다른 하나는 고대 사마리아의 옛 터에 세워진 세바스테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는 안토니우스 요새 웅장한 왕궁(그 일부가 성채 안에 남아 있음)을 지었는데, 안토니우스 요새는 그 일부가 오늘날 비아 돌로로사(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걸어간 길)에 세워진 수도원들 밑에 남아 있습니다.

 

  그가 지은 건축물들 가운데 가장 웅장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으로서, 그는 그 전체를 다시 건축했습니다. 넓이가 14ha에 이르는 성전 바깥 뜰은 오늘날도 '알 하람 아시 샤리프'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또한 베이루트, 다마스쿠스, 안티오크, 로도스 등 외국 도시들과 많은 성읍들을 장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헤롯은 올림픽 경기의 의장이 되어 그것을 후원하기까지 했는데, 자기 왕국에서는 유대교의 주도적인 파벌인 바리새파를 거스르는 것을 우려하여 마음껏 자기를 과시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바리새파(기독교에서 바리새인)는 그를 외국인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언제나 그와 대립해 있었습니다. 헤롯은 자기에게 감사해 마지않는 이교도들의 후원자로서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바깥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의 보호자로도 자임했고, 모든 힘을 동원하여 그 유대인들이 사는 지역 군주들의 환심을 사려 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헤롯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뚜렷하게 어둡고 잔인한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정서불안은 가정 내부에서 계속된 음모와 술수 때문에 더욱 깊어져버렸는데, 마리암을 깊이 사랑한 그는 질투심이 일어나면 과격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헤롯의 누이 살로메(그녀의 증조카, 즉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와는 다른 인물)는 남을 쉽게 의심하는 그의 성격을 교묘하게 이용해, 헤롯이 아내를 미워하게 만들어 두 사람의 관계를 깨뜨렸습니다.

 

 결국 헤롯은 마리암과 그녀를 통해 낳은 두 아들, 그녀의 오빠와 할아버지, 그녀의 어머니를 모두 살해했는데, 마리암의 어머니 또한 야비한 사람으로서 살로메의 음모를 종종 돕곤 했습니다. 이것은 너무 사랑한 나머지 살인을 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헤롯은 도리스와 마리암 외에도 8명의 아내가 더 있었으며, 그 가운데 6명의 아내를 통해서 14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헤롯은 말년에 동맥경화증을 앓았다고 알려지는데, 그는 1차례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고 이웃나라인 나바테아와도 분쟁을 겪어야 했으며, 결국 아우구스투스의 신망까지 잃고 말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통증에 시달렸고,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혼란을 겪었습니다. 또 3번이나 후계자 문제에 자기의 뜻을 번복하다가, 왕위를 물려주던 맏아들 안티파테르 마저도 살해했습니다.

 

 그가 죽기 직전에 베들레헴의 어린아이들을 학살한 일은 전적으로 그가 빠져 있던 혼란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여짐니다. 헤롯은 1차례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한 뒤에 결국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유언을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재가를 받는 것을 전제로 한 뒤, 자기 영토를 3명의 아들에게 나누어주어 아르켈라우스는 유대와 사마리아의 왕이 되도록 했고, 필립보와 안티파스에게는 분봉왕들로서 나머지 영토를 나누어 다스리도록 했습니다... 

 

출처 블로그 > 머리상자
원본 http://blog.naver.com/cprcpr82/1300176007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