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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군데의 어항을 지닌 갈릴리 호수
갈릴리 호수의 동편에 자리잡은 엔게브 키부츠에 라트비아 출신의 한 어부가 살고 있었다.1920년대 이스라엘로 이민온 그는 자신의 성을 ‘물고기’라는 뜻의 ‘눈’으로 바꿀 정도로 평생을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에 몰두했다.나이 일흔이 다 되어 은퇴할 무렵인 지난 71년부터는 그는 둘레가 66㎞나 되는 호수변을 샅샅이 뒤지며 고대 항구들의 흔적을 조사했다.20년간 직접 발로 뛰면서 연구한 그의 업적이 92년에 출판됐을 때 모든 이는 갈릴리 호수에 자그마치 16군데의 고대 항구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더욱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비록 그가 유대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신약성서의 복음서를 집중적으로 연구했고 나아가 ‘복음서에 나타난 고기잡이의 모습이 너무나 자세하고도 정확했다’는 그의 고백이었다.
세계 1차 대전 이후 형성된 양식비평을 포함한 최근의 성서 연구방법들은 대부분 복음서 내용의 신빙성에 이의를 제기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예수를 직접 대면했던 제자들의 기억과 기록 능력에 의구심을 품었기 때문이다.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도 베드로와 요한이 원래 ‘학문 없는 범인’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행 4:13).과연 예수의 수제자들이었던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무지한 뱃사람들이었을까?
생선은 매우 비싼 식품
신약 시대 지중해 지역의 기본적인 식사는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곁들인 빵과 생선이었다.예수의 말씀을 듣고자했던 갈릴리 호수변의 한 어린아이의 도시락도 빵과 생선이었으며 예수의 비유에서도 생선과 고기잡이가 자주 등장한다.하지만 문제는 더운 지역에서 싱싱한 생선은 항상 수요에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값이 비싼 편이었다.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 생선은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잡은 즉시 가공해서 보관해야만 상품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대부분 소금에 절이거나 말리고 연기로 훈제했고 작은 생선으로는 젖갈을 담갔다.실제로 이스라엘 지역의 발굴에서 이탈리아 ‘쿠메’산 생선젖이라고 기록된 항아리의 손잡이가 출토된 적도 있다.국제무역을 통해 여러 유통단계를 거치는 생선의 값은 더욱 비쌌다.서기 1세기의 역사가 플루타르크는 로마에서 훈제 생선 한 수레의 가격이 ‘한 마리의 황소가 이끄는 양 100마리’와 맞먹는다고 기록했다.
그렇다면 신약시대 갈릴리 호수의 어부들은 값비싼 상품을 취급하는 고급 상인들이었을 것이다.나아가 이들은 이방인들에 비해 이윤을 더 얻을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유대인들은 음식율법인 카슈루트(신 14:9∼10)를 지키기 위해 지중해의 이방인 어부들보다는 갈릴리 호수의 유대인 어부들이 공급하는 생선을 원했다.갈릴리의 어부들은 예루살렘 시장에서 생선을 팔기 위해 나흘길을 마다않고 판로를 개척했으며,유대인 특수 때문에 호황을 누렸다.따라서 갈릴리 호수에는 여러 군데에 항구가 있고 어업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어족의 보고 갈릴리 호수
갈릴리 호수의 대표적인 생선은 베드로 고기를 비롯해서 메기,정어리,잉어 등이다.정어리는 젖갈을 담그는데 오늘날까지도 대량으로 잡히며 한 해 어획량의 절반인 1000t을 차지한다.잉어는 정어리를 미끼로 해서 낚시로 잡으며 정어리와 베드로 고기는 그물을 이용해서 잡는다.베드로 고기는 지느러미가 빗같이 생겼다고 해서 아랍어로 ‘무슈트’로 불리는데 길이가 40㎝까지 자라며 어미가 수정된 알을 입에 넣은 채 치어가 될 때까지 2∼3주 동안 보호하는 독특한 습성이 있다.따라서 이 물고기는 히브리어로는 ‘물고기를 돌본다’는 의미로 ‘암눈’으로 불린다.
벳새다의 부유한 어부들
베드로와 안드레,그리고 빌립의 고향인 벳새다는 분봉왕 헤롯 빌립이 서기 30년경 로마식 도시 ‘율리아스’로 재건했으며 수많은 갈릴리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왔다.자연히 생선의 수요도 늘어났고 근처의 가버나움에는 대규모 시장이 형성됐을 것이다.실제로 벳새다를 발굴했을 때 한 저택에서 수많은 그물 추와 낚시 바늘들이 발견됐다.함께 출토된 로마산 고급 수입식기들을 통해서 이 집의 주인은 어업과 관련한 부유한 상인으로 추정된다.안드레,빌립 등은 원래부터 헬라식 이름이며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헬라 사람들과 대화할 정도로 고급 문화에 익숙한 자들이었다(요 12:20∼21).시몬 베드로는 전문적인 어부로서 동생 안드레는 물론이거니와 이웃 형제인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동업자로서 두 척의 배를 이용하여 조직적으로 고기를 잡았다(눅 5:10).야고보와 요한의 집에는 일당을 받고 일하는 품군들도 있었다(막 1:19∼20).이처럼 예수의 제자들은 경제적으로 자립한 비교적 부유한 어부들로서 생업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든지 자유 의지대로 고기잡이를 떠나 예수의 제자가 될 수도 있었다.
벳새다에서 가버나움으로
베드로는 왜 자신의 활동 중심지를 벳새다에서 가버나움으로 옮겼을까? 복음서에는 이 도시에 그의 처가가 있었다고 한다.하지만 갈릴리 호수 어업현장에서 사업장의 위치는 곧 경제적 이윤과 직결되는 것이었다.티베리아스 북쪽 5㎞ 지점에는 신약시대의 어촌 막달라가 있는데 헬라어 지명은 ‘생선 가공공장’이라는 뜻의 타리케아(Tarichea)였다.좀더 많은 이익을 올리려는 어부들은 생선을 잡은 즉시 타리케아로 수송해서 소금에 절이거나 훈제가공용으로 넘겼다. 벳새다의 어부들은 헤롯 빌립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헤롯 안티파스의 관할인 타리케아로 생선을 수송하면 가버나움 세관에서 막중한 통관세를 지불해야만 했다.따라서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어업의 근거지를 가버나움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가버나움은 타리케아와 같은 헤롯 안티파스의 영토이기 때문에 감세의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 성 교수 (협성대·성서고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