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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를 찾아서 25-아라랏-우라르투

영국신사77 2008. 8. 20. 14:45

 

              성지를 찾아서 25-아라랏-우라르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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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http://blog.naver.com/plusgen/50006730567
1955년 프랑스의 탐험가 페르낭 나바라(F. Navarra)는 터키의 최고봉 해발 5137m 높이의 아라랏 산에 올라가 해발 4000m 지점의 얼음 구덩이에서 검은 역청이 칠해진 1.5m 길이의 나뭇조각을 가져왔다. 이 나무의 샘플은 정확한 연대측정을 위해 유럽과 미국의 여러 연구소로 보내졌다. 측정 결과 한 연구소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서기 7∼8세기의 것으로 판정했다. 단 한 군데 과학적인 탄소동위원소 측정법을 사용하지 않은 스페인 마드리드의 임업연구소만 나무의 색깔과 밀도를 기준으로 5000년전의 것으로 판명했다. 참나무로 밝혀진 이 샘플의 밀도는 1.1로 밝혀졌는데 살아있을 당시는 0.8 정도이므로 그만큼의 세월이 흘렀다는 것이다. 나바라는 1974년 “내가 손으로 만진 노아의 방주”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모험담을 책으로 펴냈다. 이로부터 저자들의 자유로운 상상이 추가된 노아 방주의 이야기가 다시금 전성기를 맞게 된다.

◇ 아라랏은 곧 우라르투

창세기에서 홍수 이후 노아의 방주가 처음으로 안착했다는 아라랏은 원래 우라르투 왕국의 히브리어식 표기이다. 서기전 900년경 터키의 동부 지역의 반(Van) 호수를 중심으로 하는 고원지대에 우라르투 민족이 강력한 도시들을 중심으로 왕국을 형성했다. 원래 우라르투는 지역 이름이었고 서기전 13세기 앗시리아의 샬마네세르 I세의 기록에서 우루아트리(Uruatri)로 처음으로 등장하며 반 호수 근처의 소규모 왕국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서기전 900년경부터 이 지역에 대한 앗시리아의 끊임없는 군사적 원정을 견디다 못해 우라르투 민족은 좀 더 서쪽에 위치한 반 호수 근처로 그 중심지를 옮겼다. 서기전 830년 사르두리(Sarduri) I세는 천연적인 바위요새인 반 칼레시를 수도로 삼고 이를 투슈파로 명명했다. 투슈파는 반 호수의 동쪽 평원에 주위보다 100여m나 높고 길이가 1.8㎞에 달하는 천연적인 바위요새이며 오늘날 볼 수 있는 성채는 대부분 서기 1000년경 셀주크 시대부터 건설된 것이다.

서기전 714년 앗시리아의 사르곤 II세는 우라르투의 중심부를 점령했고 이 사건을 기점으로 우라르투의 세력은 점점 약화됐다. 나아가 코카수스 지방의 유목민인 키메리아 민족의 세력확장과 서기전 590년경 스키타이 민족이 메대 민족과 함께 터키 동부지역을 장악함에 따라 우라르투 왕국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 아라랏 산지에서 아라랏 산으로

구약성서에서 모두 4회 등장하는 아라랏은 특정한 산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이나 왕국을 의미했다. 노아 홍수 사건에서는 ‘하레이 아라랏’, 즉 ‘아라랏 산지’로 기록된 만큼 넓은 의미의 고원지대를 일컫는 것으로 봐야 한다. 서기전 586년 이후 바벨론으로 유배된 유다의 종교적 지도자들에 의해 최종적으로 편집된 창세기의 홍수 이야기는 전통적인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신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메소포타미아의 지리적 관점에서 대홍수가 그치고 물이 빠질 때 가장 높은 고원지대에 방주가 안착한다면 바로 아라랏 산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앗시리아 왕 산헤립의 암살사건을 다루고 있는 열왕기하(19:37)와 이사야서(37:37∼38)에 의하면 산헤립이 니느웨의 한 신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그의 아들들에 의해 살해됐고 암살자들은 쿠데타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라랏 땅”, 즉 우라르투 지방으로 망명한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 우라르투가 앗시리아의 적대세력임을 감안할 때 이 기록은 어느 정도 역사적인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예레미아서(51:27∼28)에서는 아라랏 왕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구약성서의 아라랏은 특정한 산을 의미한다기보다는 고원지대에 위치한 지역 이름으로서 서기전 900년경 이후 300여년동안 번창했던 우라르투 왕국을 염두에 둔 것임을 알 수 있다.

◇ 베로소스의 아르메니아

서기전 590년 우라르투 왕국의 파멸과 함께 노아 방주의 안착 장소는 서서히 잊혀져 갔다. 서기전 3세기 바벨론 출신의 역사가 베로소스는 수메르 홍수설화를 인용하면서 창세기의 노아에 해당되는 지우수드라의 방주가 당시 아르메니아 지방에 있는 고르디예 산에 있다고 증언했다. 이 때부터 우라르투 대신 아르메니아가 아라랏 산이 있는 지역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중에서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두 산이 주디 산과 아르 산이다.

◇ 아르메니아의 주디 산

베로소스가 언급한 고르디예 산은 티그리스 강과 대 자브 강 사이에 위치한 해발 2114m 높이의 주디 산이며 이 지역의 네스토리아 기독교인들에 의해 노아의 산으로 신성시됐다. 따라서 해마다 9월14일 이 지역의 유대교인, 기독교인, 이슬람교인들은 모두 산 정상에 모여서 노아가 아라랏 산에 도착한 후 드린 첫 제사를 기념하는 의식을 가졌다. 이 전통은 서기 13세기까지 지속됐다.

◇ 아르메니아의 아르 산

서기 4세기 아르메니아에 기독교가 들어온 후 이 지역에서 구체적인 아라랏 산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베로소스를 인용한 서기 1세기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노아의 방주가 아르메니아에 있다고 기록했다. 서기 5세기 아르메니아 왕국이 아락세스 지역에서 독립한 후 이 왕국의 최고봉 아르 산이 최종적으로 아라랏 산으로 확정되게 됐다. 이 시기는 요세푸스의 기록이 아르메니아어로 번역된 시기와 일치한다. 터키어로 ‘아르 다으’, 즉 ‘아르 산’이라 불리는 아라랏 산은 터키에서 가장 높은 해발 5137m의 ‘대 아르’와 해발 3895m의 ‘소 아르’로 구성돼 있다.

주위와는 구분되는 우뚝 솟아있는 아라랏 산은 봉우리가 일년 내내 흰눈에 덮혀있고 정상은 대부분 구름에 가려져 있어서 신비감을 자아내게 하는 산이다. 창세기의 아라랏이 곧 우라르투 왕국을 염두에 둔 것이기 때문에 아라랏 산은 더 이상 특정한 봉우리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터키의 ‘아르 산’의 지리적 위치가 우리의 관심을 끈다. ‘아르 산’은 우라르투 영토인 반, 세반, 우르미야 등 3개의 호수를 연결하는 삼각지역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성서의 기록자들은 우라르투 왕국의 최고봉 ‘아르 산’을 염두에 두었을까.

/김 성 교수(협성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