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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토

영국신사77 2008. 8. 8. 16:44
고린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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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에서 서쪽으로 83 km 내려가면 펠로폰네소스 반도 초입에 현대 고린토가 있고 거기서 서남쪽으로 6km 더 내려가면 옛 고린토 유적이 있다.

사도 바오로가 전교했던 고린토는 그리스에서 가장 활발한 상업 중심지로 국제적인 도시였다. 고린토는 천혜의 지리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었는데 즉 서쪽에는 이오니아해와 이탈리아로 향하는 레카이온 항구를 품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아테네를 바라보면서 에게해로 나갈 수 있는 켄크레아 항구를 품고 있었다.

아카이아 지방의 수도였던 고린토는 번창한 하우 도시였으나 심한 빈부의 차이와 퇴폐적인 윤리생활로 악명이 높은 곳이기도 하다.

현재 고린도라고 하는 시는 신 고린도로 1858년과 1928년의 대지진 후에 세워진 곳으로 아테네에서 서남쪽으로 80 Km 되는 거리에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전도했던 고린도는 그리스에서 가장 활발한 상업 중심지로 국제적인 도시였다.

고린도는 천혜의 지리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었는데 즉 서쪽에는 이오니아 해와 이탈리아로 향하는 레카이온 항구를 품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아테네를 바라보면서 에게 해로 나갈 수 있는 겐그레아 항구를 품고 있었다.

아카 지방의 수도였던 고린도는 번창한 항구 도시 였으나 심한 빈부의 차이와 퇴폐적인 윤리 생활로 악명이 높은 곳이기도 했다.

■ 고린토서
사도 바오로는 제 3차 전도 여행 중 에페소에 3년동안 머물면서 고린토 전서를 집필했고, 57년경 그리이스 북부 마케도니아에서 후서를 써 보냈다. 고린토 교회에 보내는 편지 내용은 교우들이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어 그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고 사목적인 대답을 해 주기 위해 쓰여졌다.

이 서간에서 다룬 문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고린토 신자들 중에는 의붓 어머니와 동거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이를 방관만 하고 있었고 (1고린 5:1-13), 어떤 교우는 자유를 구실 삼아 창녀와 관계를 맺었고 (1고린 6:12-20), 또 성행위라고 하면 무조건 죄악 시하는 극단적인 사람이 있었다. (1고린 7:1-10).
여기에서 사도 바오로는 결혼, 이혼, 독신 등 성윤리를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그 외에도 교우들 간에 분쟁이 생겼을 때, 이교도 법정에 가서 소송하는 문제 (1고린 6:1-11),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는 문제 (1고린 8:1-11), 성찬의 전례시 부자들은 그들이 가져온 음식을 배불리 먹고 가난한 사람들은 굶은 사례도 있었기에 올바른 성찬례를 가르쳐 주고 (1고린 11:17-34), 그 외에도 교회의 질서를 파괴하고 (1고린 14장), 부활 신앙을 부인하는 (1고린 15:12) 사례를 그리스도 부활의 근거로 삼아 주장하며 가르쳤다.
그러나 고린토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신자들간의 분쟁과 파벌 의식이었다. 신자들 간에는 바오로파, 아폴로파, 그리스도파 등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파벌 의식이 만연되었다는 교회의 소식을 듣고 바오로는 이 서간에서 그들이 전해 듣고 받아들인 복음을 상기 시키면서 교회 공동체가 무엇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역설하였다.

둘째 편지인 고린도후서는 첫째 편지를 발송한 다음에 고린토에 거짓 선교사들이 와서 바오로의 사도적 권위를 부인하였다. 사태가 다급함을 인식한 바오로는 직접 고린토 교회를 찾아 갔지만 이미 대부분의 신자들이 바오로를 반대하는 자들에게 동조하여 그를 맞아 주지 않았다. 바오로는 비통한 마음을 안고 에페소에 돌아와 '번민과 비통한 마음을 안고 울면서' 매우 격앙된 어조로 편지를 썼는데 이것이 고린토 교회로 보낸 '눈물의 편지'이다. (2고린 2:4).
바오로는 디도를 고린토로 보내어 이 눈물의 서간을 보내고 그 사이에 마케도니아로 건너가서 디도가 돌아 오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디도를 만나 고린토 신자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사도에게 순종하고 모든 적들을 엄하게 다스리겠다는 약속을 들었다. 이에 대한 바오로의 답신으로 나온 편지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편지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이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는 사도직에 대한 편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사도직의 본질과 역할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겸허한 태도로 자신의 약함 안에서 힘차게 역사하시는 하느님을 높이 기리고 있다.

■ 고린토의 역사

기원전 146년 로마군은 고린토를 점령하고 초토화 시켰다. 그로부터 거 의 한 세기가 지난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체사르(영어명 : 줄리어스 시 저, 그리스어 : 카이사르)는 고린토를 로마인이 사는 식민읍으로 재건했다.
마침내 기원전 27년 고린토는 아카이아 (지금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속 주의 총독부로 승격되었다. 당시 고린토는 그리스인, 로마인, 유대인, 동 방인 등 여러 인종이 어울려 사는 인종 박람회장과 같은 도시였다. 자 연히 종교도 매우 다양해서 마치 종교 전시장 같았다. 그리스인들은 각 각의 신들을 섬겼고, 로마인들은 율리우스 체사르, 초대 황제 옥타비아 누스 아우구스투스를 신격화하여 섬겼다. 고린토인들은 이집트 치유의 신 사라피스, 이집트 바다의 여신 이시스도 섬겼다. 유대인들은 물론 유 대교를 믿었다. 이런 상황들을 고려해 볼 때, 바올로가 전도한 고린토는 종교 다원화 사회였다고 하겠다.

■ 고린토 운하

이스무스(지금의 이스미아 지협) 는 에게해와 이오니아해 사이의 지협으 로 폭이 6m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작은 선박은 수레를 이용하여 이 쪽에서 저쪽으로 떠밀어 옮겼다. 선박 이동용 도로(Diolkos)에서는 지금도 수레 바퀴 자국이 남아 있다. 높이 70m, 폭 25m나 되는 암벽을 파서 만든 운하가 1893년 개통된 이래 수많은 선박이 자유로이 내왕한다.

■ 고린토 박물관

고린토 박물관 마당에 전시된 석물 가운데서는 '히브리인들의 회당 '(Synagoge Ebraion)간판과 일곱 가지 촛대가 새겨진 기둥머리를 눈여겨 볼 일이다. 박물관 안에서는 상을 당한 네로 황제의 두상, 비잔틴 시대 부호들의 모자이크를 감상하면 좋다.

■ 아폴로 신전

가장 돋보이는 유적으로 기원전 550-525년 사이에 세워진 신전이다.
신전 둘레 장방형 회랑에 도리아식 돌기둥이 38개나 있었는데 지금은 그 중에서 7개만 남아 있다.

■ 사도 바오로 기념 성당

바오로는 제 2차 전도여행 때(50-52년경) 오늘날의 터키에서 그리스로 건너가 네 개의 교회를 세웠다.
우선 그리스 북부 지역 마케도니아 속주에 필립비 교회, 데살로니카 교 회, 베레아 교회를 창설했다. 바오로는 실라와 디모테오를 베레아에 남 겨두고 베레아 교우 일행과 더불어 뱃길로 510km를 남행하여 문화도시 아테네에서 전도했으나 실패하여 교회를 세우지 못했다.(사도 17. 14-30) 실라와 디모테오가 아테네로 내려오자 바오로는 데살로니카 교우들의 신앙생활에 대해 궁금하기도 하고 또 한편 그들을 재교육하려는 뜻으로 디모테오를 데살로니카로 파견하고 바오로 자신은 그리스 남부 지역 아 카이아 속주의 수도 고린토로 내려갔다. 바오로는 아테네에서 서남쪽으 로 89km떨어진 고린토로 내려가 무려 18개월간 머물면서 큰 교회를 세웠다.(사도 18,1-17)
바오로는 51-52년경 고린토를 떠난 다음, 3차 전도 여행에 올라 54년경 에페소에서 활발히 전도하던 중(1고린 16,8-9)고린토인들에게 편지를 발 송한 바 있다. 이것이 오늘날 신약성서에 들어 있는 고린토 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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