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어지간한 지도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도시로, 데살로니카 북서쪽에 있는 카발라에서 20 Km 떨어져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 당시에는 꽤나 번창한 도시였다고 한다. 빌립보 교회에는 바오로가 제2차 전도여행 때 마케도니아의 주요 도시 빌립보에 세운 유럽에서의 첫번째 교회이다.
이 도시에는 원래 크레미데스 (Kremides 작은 샘들) 라고 불리었는데, 기원전 358-354년 경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 빌립 2세가 은과 금광으로 부유해진 이 도시를 건설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빌립보라고 명하였다.
기원전 168년 로마인들이 이 도시를 점령하고 그로부터 20년 후에 로마의 속주도시로 되었다.
기원전 31년 빌립보 시는 이탈리아의 도시들처럼 자치권, 면세권, 절대사유권 등 로마의 권리를 누리는 자치시로 승격되었다.
주민 구성은 로마 군인의 파병 등으로 인해 인구의 절반이 로마인이었고, 유대인들도 소수의 구룹을 형성하여 살았다. 주민 분포상 종교도 여러 가지로 혼합되었으며 경제적으로 윤택하였다. 사도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시기인 50-52년경 실라와 디모데, 누가 등과 동행하여 (사도행전 16:10 이하) 이곳에 교회를 세웠다.
빌립보 인들은 바울에게 있어 '유럽에서 얻은 맏아들' 이었다. 바울은 이 교회에 각별한 애정을 지니고 제3차 전도여행 때도 두번씩이나 방문하였고, 그곳의 신자들도 사도 바울에게 감사와 애정의 표시로 물질적 도움을 주었다. 복음 선포에 장애가 될 것을 꺼려 어느 곳에 가서든 손수 노동하여 생계를 유지하던 바울도, 빌립보 신자들의 도움만을 기쁘게 받아들인 것은 극히 예외적이다. 따라서 바울이 빌립보 신자들을 얼마나 친근하게 대했고, 서로간의 신뢰가 얼마나 두터웠는지 알 수 있다.
바울은 다른 지역의 선교 활동 중에도 빌립보 교회와 계속 긴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어떤 교회보다도 이 교회를 특별히 사랑하였다.(사도행전 16:12-40, 데살로니카전서 2:2, 고린도전서 7:5-7, 빌립보서 4:15-16). 또한 빌립보 신자들 역시 바울을 스승으로 믿고 따랐으며, 데살로니카와 고린도에 있는 바울을 여러 차례 도왔다.
그런데 바울이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빌립보 신자들은 에바프로디도를 시켜 좋은 위안의 선물을 주었다. 바울을 도우러 왔던 에바프로디도가 병이 들어 죽을 고비까지 이르렀다가 회복하자 바울은 그를 보내며 빌립보서를 썼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신자들이 에바프로디도를 기쁘게 맞아 줄 것과 얼마 후에 곳 디모데도 보낼 뿐 아니라 자신도 방문할 계획임을 전하고 있다. 이에 곁들여 빌립보 신자들에 대한 자신의 특별한 신뢰를 표시하고, 공동체 내에 잔존하는 몇 가지 윤리적 폐단 및 악을 일삼는 이들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원수들에 대한 처신도 덧붙였다.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에 보낸 이 정감 어린 편지는, 바울이 순서 없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쓴 것이다. 이 글에서 바울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곳 신자들과 함께 신앙의 기쁨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나누고자 한다.
빌립보에서 바울은 먼저 유대인의 기도소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는 유대교 개종자요 옷감 장사인 루디아의 집에 머물렀다(사도행전 16:14-15).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반대자들의 고소로 투옥되었다가 기적적으로 풀려난 뒤 치안관들의 요청으로 이 도시를 떠난다(사도행전 16:16-40)
사도 바오로는 빌립보를 떠나 암피볼리스와 아폴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카로 갔다.(사도행전 17:1) 현재 빌립보에는 바실리카 회당, 리디아의 기념교회, 바오로가 갇혔던 감옥 등 유적지들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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