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는 마게도냐 첫성으로 로마의 식민지였다. 바울사도는 네압볼리에서 이곳에 도착하였다
빌립보 유적지
빌립보는 그리스의 북쪽 네압볼리(Neapolice; 신도시)에서 로마로 가는 고대도로인 에그나티아(Egnatia) 길을 따라 북서쪽으로 약 16km 떨어진 레카니스(Lekanis) 산에 위치한 옛 마게도냐의 수도이다. 원래 크레니데스( i ; '샘')로 알려진 드라게(Thrace)사람들이 주를 이룬 마을이었으나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인 마게도냐 왕 빌립 2세가 이 도시에 사람들을 이동시키면서(주전 358-57) 자신의 이름을 따라 '빌립보'라고 명명하였다. 빌립 2세가 암살되고 그 뒤를 이은 알렉산더 대왕은 도시를 증축하고 많은 사람들을 이주 시켰다. 주전 167년 헬라가 로마에게 넘어간 후 빌립보는 로마의 한 도시로 편성되었다가 주전 42년, 빌립보에서 큰 전쟁이 발발한다. 율리우스 시이져를 암살한 부르터스와 카시우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안토니와 옥타비아누스의 군대가 충돌한다. 결국 빌립보 전쟁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황제의 자리에 올라 '가이사 아구스도'가 되었다. 빌립보 시민은 로마시민권을 가졌고 많은 시민들이 로마군을 제대한 사람들이었다. 빌립보 시민들은 변방에 있는 땅을 수여받고서 그 대가로 전방 지역 성읍에서 군사 임무를 수행한 퇴역 장병들과 로마전역에 용맹한 군인으로 이름이 나있던 드라게인(Thracian), 주변지역에 살던 헬라인, 그리고 소아시아에서 온 그리스인(예; 두아디라의 루디아)들이었다. 퇴역군인 및 정치적인 영향으로 라틴어가 많이 이용되었지만 주 언어는 헬라어였다고 추정된다. 역사가 람세이(Ramsay)는 의사 누가가 빌립보 출신이라고 하였다. 빌립보 성은 도시의 서쪽에 위치한 해발 1,956m인 팡게오(Pangeo) 산에 있는 금광을 생산한 도시로 유명하였다; 빌립 2세는 이 곳에서 년간 1,000달란트 이상의 금을 채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로마시대 특히 옥타비아누스 시대에는 로마가 바로 정복하였던 북쪽지역을 방어하기위한 군사도시로 또한 동방, 비쟌티움에서 로마로 가는 길목으로 이용되었다. 빌립보에는 다이아나(헬라의 아데미 신; 사냥의 신)와 관련된 드라게인의 바쿠스(Bacchus; 헬라의 디오니수스 신; 술의 신)과 말탄 영웅이 대표적인 우상이었다. 주후 1세기에는 시에서 서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수입된 값비싼 대리석으로 치장된 이집트 신들을 섬기는 장소가 세워졌다. 또한 에그나티아 길의 남쪽 400m지점에 위치한 목욕탕건물에서 나온 다섯 개의 비문에의하면 그 곳이 주후 1세기경에는 바쿠스신과 그와 관계된 리벨( Liber), 리베라(Libera), 헤라클레스(Herculus)를 섬기는 장소였음을 나타낸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고 하는 말을 이곳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침략하여 정복한 나라들의 노략물들을 수송하기 위해 만들었던 길이다. 바울은 이 길을 통하여 네압볼리에서 빌립보를 거쳐 데살로니가로 향했다고 한다
루디아 기념교회
루디아 기념교회 앞 냇가 세례터
바울 사도가 빌립보에서 안식일에 기도처를 찾다가 강가에서 기도하는 여자들을 만나서 말씀을 전하였다 그 사람 가운데서 자주장사 루디아의 마음을 주께서 열여서 주를 믿게 된다(행16:13,14)
바울사도가 자주 장사 루디아와 그의 집이 다 세례를 받은 곳으로 추정(행16:15)
빌립보 성문 밖에 있는 강; 기도처가 있는 곳
수량이 풍부하다; 유대인들은 강가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흐른다고 생각하였서 강가에서 기도를 하였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배하는 천사들의 모습
루디아 기념 교회 내부와 스테인드 글라스에 조각된 바울과 루디아
바울사도가 빌립보에서 전도의 첫 열매인 루디아의 집에서 머물게 되는데 이 집에서 초대 빌립보 교회 공동체가 예배를 드리는 곳이 되었다. 이 집을 기념하여 루디아 기념교회를 세웠다 빌립보 유적지 로마도로 출발점 표지 빌립보 유적지 루디아의 회심과 세례를 기념하여 지은 그리이스 동방정교 교회의 주요 돔의 모자이크로 요단강에서 예수님의 세례의 형상이다. 하늘로부터 비둘기가 내려오는 모습도 있다 유럽에서 예수를 믿게 된 최초의 결신자, 그녀는 바로 아시아에서 건너온 루디아라 하는 여인이다. 바울 일행은 문밖 강가, 즉 오늘도 흐르고 있는 지각티스(Zigaktis) 강가에서 자주 옷감장사 루디아를 만난 것이다. 그녀는 두아디라(오늘의 터키 지역으로써 터키의 명으로는 아키사르(Akhisar)로 카페트의 산지로 유명하다.) 성에서 자주색 옷감을 가져와 팔았다. 루디아 여인이 히브리 사람들이나 기도하기 위해서 모였던 문밖 강가에 있었던 것도 필시 루디아 여인은 두아디라성에 장사를 하러 자주 왕래하는 연고로 당시 그 지역에 있었던 히브리 사람들과 또 그들이 믿는 유대교를 이미 알고 있던 여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두아디라(Thyatira)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초대교회 가운데 하나이다. 두아디라는 중국의 비단이 유럽으로 건너가는 무역로인 비단길(Silk Road)이 거쳐가는 길목으로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되어 그리스의 도시가 되었다가 주전 190년경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소아시아의 염색공업의 중심지이다. 자주장사는 바로 중국산 비단을 자주색으로 염색하여 유럽에 판매했던 것이다. 자주색은 열대 뿔고동이나 조개 혹은 특수한 식물의 뿌리에서 채집되는 당시 가장 값 비싼 염료로써 주로 로마 귀족들이나 무사들만이 입을 수 있는 최고의 옷감이다. 바울 사도는 루디아 여인을 만나 그녀의 집에서 머물면서 선교의 일을 감당했던 것이다. "저와 그 집이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행16:15)" 바울과 빌립보 전도
사도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시기인 50-52년경 실라와 디모데, 그리고 누가와 동행하여이곳에 교회를 세웠다.(행 16) 빌립보에서 바울은 먼저 유대인의 기도소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는 유대교 개종자요 자주 장사인 루디아의 집에 머물렀다(행 16:14-15)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반대자들의 고소로 투옥되었다가 기적적으로 풀려난 뒤 치안관들의 요청으로 이 도시를 떠난다(행 16:16-40)빌립보 사람들은 바울에게 있어서 '유럽에서 얻은 맏아들' 이었다. 바울은 이 교회에 각별한 애정을 지니고 제3차 전도여행 때도 두번씩이나 방문하였고, 그곳의 성도들도 사도 바울에게 감사와 애정의 표시로 물질적 도움을 주었다. 바울은 다른 지역의 선교 활동 중에도 빌립보 교회와 계속 긴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어떤 교회보다도 이 교회를 특별히 사랑하였다.(행 16:12-40, 살전 2:2, 고전 7:5-7, 빌 4:15-16). 그런데 바울이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빌립비 성도들은 에바브로디도를 시켜 좋은 위안의 선물을 주었다. 바울을 도우러 왔던 에바브로디도가 병이 들어 죽을 고비까지 이르렀다가 회복하자 바울은 그를 보내며 빌립보서를 썼다. 사도 바울은 빌립비를 떠나 암피볼리스와 아폴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카로 갔다.(행 17:1)현재 빌립비에는 바실리카 회당, 루디아 기념교회, 바울이 갇혔던 감옥등 유적지들이 남아 있다
빌립보의 원형극장
빌립보 바실리카식 예배당의 모습
옛 바실리카 교회가 있었던 터.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웅장한 교회가 이렇게 폐허가 되었다. 건물은 영원하지 아니하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을 말씀하신 것이 생각이 난다
귀신들린 여종의 귀신을 좇아낸 일로 인하여 재판을 받은 곳 옥에 갇히게 된 베마(행16:20)
바울사도가 갇혀 있을 곳으로 여겨지는 감옥의 내부는 다른 감옥과 구멍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 다른 방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 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16:25~26)" 바울과 실라의 감옥터는 바실리카 A의 입구 현관(Propylaea)의 계단 오른쪽 옆에 위치하고 있는데 5세기부터 순례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빌립보의 최고의 명소이다.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께서 지키시사 머리털 하나도 그을지 않도록 하셨으며 이런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한 바울과 실라는 낯선 마케도니아 선교에 더욱 큰 힘을 얻었을 것이다. 그 이후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선교 사역에 적극 참여했다. 그들은 에바브로디도(Epaphroditus)를 사자로 하여 바울의 쓸 것을 계속해서 도왔다.(빌2:25) 그러나 빌립보 교회는 박해 속에서 주님을 믿었다. 백해를 받는 교회를 향하여 바울사도는 " 박해 속에서 주님을 섬기는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바울사도는 은혜를 주신 것은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1:29) 하셨다. 이 감옥은 박해를 받는 교회에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빌립보 감옥에서 바라본 대 광장의 모습과 멀리 비쟌틴 시대의 빌립보 교회의 모습이 보인다; .
빌립보의 옛 유적지
Ιησoυs(예수스,예수)
Χχριστοs(크리스토스,그리스도)
Θεοs(데오스,하나님)
Υιοs(휘오스,아들)
Σωτηριαs(소테리아스,구세주)
ΙΧΘΥΣ(익투스.물고기)
빌립보의 아고라; 아마도 자주 장사 루디아는 이곳에서 장사를 하였을 것이다. 그가 바울을 만나고 마게도냐에서 바울의 사역에 선교비를 지원한 교회가 된 것은 루디아의 헌신이 컷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루디아가 그렇게 하였다고 말하지 않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공공집회용 건물로 설계된 양식에 눈을 돌리게 되었는데 이는 바로 고대 로마의 바실리카로 이중에서도 바실리카 울피아가 좋은 예이다. 즉, 그리스도교 건축의 근원은 종교적 이교도의 건축이 아닌 속세적 이교도 건축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초기 그리스도교의 바실리카식 교회인 직사각형의 건물형태에 관해서만은 특히 그러하다. Basilica는 기독교도들의 교리와 친목장소로 쓰였다. Basilica는 모든 교회 건축 양식 중에서 최초의 양식으로 원래 로마시대의 법정, 상거래소 또는 집회소 등이 있는 건물양식을 지칭하는 것인데 여기서 기독교인들의 모임이 자주 이루어지면서 일반적으로 교회라는 의미가 되었다. 신도들은 로마의 바실리카 건축 양식을 모방하여 새로운 교회를 건축하기 시작했다.
빌립보 바실리카 교회
빌립보 바실리카 교회 바닥 모자이크, 3세기경 빌립보 감독 포르폴리우스의 싸인이다
빌립보 대 광장
루디아 기념교회
바울이 루디아 여인을 만난 것과 세례준 것을 기념해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1972년에 그녀를 성인으로 추인했으며 같은 해 루디아 기념교회를 세우기로 계획하고 1974년에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 완공한 것이다. 정교회에서는 매년 5월 20일 루디아의 축일로 지켜오고 있다.
바울이 세례주던 곳(루디아의 기도처)
빌립보의 광장의 서쪽면에 있는바울이 기도하고자 모인 여인을 만난 전통적인 장소로 여겨지는 Krenides강과 현재 만들어 놓은 세례처이다. 사도행전에서는 회당이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빌립보(로마의 식민지)에서의 유대인 사회는 매우 작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그룹으로부터 Thyatira(아시아/터어키)에서 자주장사였던 루디아는 개종을 하였다(행 16:14-15). 전승에 의하면 이 장소가 루디아가 세례를 받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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