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레이놀즈의 어학선생 정해원에 의해 출발
전주지역 YWCA·YMCA 창립 적극적으로 참여
‘소녀가극회’ 조직해 호남지역 신문화운동 주도
2005-02-17
호남지역 최초의 교회 전주 서문교회(담임 김승연목사).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에 위치하고 있는 서문교회는 112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1893년 6월 서울에 살고있던 레이놀즈선교사의 어학지도를 담당했던 정해원이 전주 완산칠봉 밑 은송리에 초가 한 채를 예배처소를 마련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1885년 미국 북장로교를 대표하는 언더우드선교사가 이 땅에 발을 디딘 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서울을 경계로 북쪽 평양권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서울 이남지역을 각각 맡기로 했다. 이로인해 남장로교 소속의 테이트목사는 누이동생 메리트 테이트와 윌리엄 전킨 부부, 레이놀즈 부부 등 5명과 함께 충청, 전라지역을 선교권역으로 정한 다음 활동을 본격화했다.
1893년 입국해 있던 7명의 미국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은 자체 회의를 통해 먼저 한국인 조사를 파견하기로 했다. 이유는 호남지역의 민심이 동학교도의 움직임으로 외국인 선교사들이 현지에 들어가기에는 부담스럽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선발된 조사가 바로 정해원이었던 것이다.
다음해에는 미 남장로교 선교사 일행이었던 테이트 남매(L.B. Tate와 M.S. Tate)가 서문교회에 파송됐다.
1905년에 지금의 위치인 다가동에 57평의 벽돌집 예배당을 마련하여 전주 서문밖교회라고 명명했다. 지금은 1983년 현대식으로 건축한 교회가 우뚝서 있고, 교회 본당 옆에는 1992년에 지은 100주년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테이트목사 일행은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출발해 15일이나 걸려 전주 서문밖교회에 도착했다. 이들은 전주 나산동, 화산동 일대 서민층들을 주 대상으로 전도를 시작했다. 보수적인 풍토가 강했던 전주지역에서의 선교사역은 결코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목숨을 내건 이들의 전도사역은 결실을 맺기 시작했는데, 1907년 7월 처음으로 7명의 신도들에게 세례를 준 것이다.
세례자 선정과 관련해 당시 54명의 세례지원자들을 교육시킨 후 사흘에 걸쳐 문답고시한 결과 6명만이 합격한 사례도 있을 정도로 세례자를 확정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또 1907년에는 중인교회를 분립해 먼저 분립시킨 남문교회를 포함해 전주에는 3개의 교회로 늘어났다.
1908년 8월에는 김필수씨가 장로 장립을 받으면서 당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서문교회의 자랑은 교회의 종탑이다. 교회 건물과 독립된 것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종탑인 셈이다. 이 종탑은 서문교회 최초의 선교사 중 한 사람이었던 전킨(W.M.Junkin)선교사가 전도에 힘쓰다 몸이 쇠약해져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내가 1908년 지은 것이다.
전킨선교사는 입국한지 16년만인 1908년 1월 43세의 일기로 소천했다. 서울에서 10개월간 언어와 한국문화에 대해 공부한 전킨은 1893년9월 남장로교 담당 선교구역인 전라도 지방을 답사했다. 홍수와 가스중독, 모기와 빈대 등과 싸우면서 전도의 열정을 불태우던 전킨은, 1896년 군산포구에 거쳐를 정하고, 전도로 얻은 교인들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군산 구암교회와 개복교회의 시작이다.
자신의 건강상태를 돌보지 않고 전도에 진력하는 전킨을 보다못한 선교사회는 1904년 그의 임지를 전주로 옮기게하고, 거주지역에서 20리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억제했다.
전킨에 이어 전주교회는 레이놀즈선교사가 맡았고, 1912년에는 김범롱목사가 부임하면서 한국인 목회자 시대를 열었다.
서문밖교회는 1912년부터 본격적인 학교사업에 나섰다. 여자소학교를 설립하고, 1920년에는 여자야학회와 전주유치원, 숭덕성경학교를 개설했다.
교회 분립의 역사도 계속이어져 1926년 완산교회를 비롯해 태평리교회 중앙교회 동부교회 서신교회 남성교회 등 전주지역의 주요 교회들이 서문교회에서 분립, 탄생했다. 전주지역 대표적 명문학교인 전주 기전여고와 신흥고등학교 등은 설립 당시 서문밖교회의 적극적인 협력이 있었다.
서문밖교회는 1920년대 초 기전여학교의 여교사들과 교회 안의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지금의 전주YWCA가된 여자기독청년회(YWCA)를 결성했으며, 전주YMCA를 결성하는 일도 주도했다. 또한 민족 독립을 위해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제휴하여 구성한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 창립에도 담임목사인 배은희목사가 전주지방 대표를 맡는 등 적극적인 자세로 임했다.
1921년 6월12일에는 예배당 안에 남녀의 자리를 인위적으로 구분해 놓은 휘장을 완전히 철거하는 등 전주지역 신문화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감당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음악가인 현재명은 그의 친구 이건직과 함께 주일학교 소녀 12명을 선발하여 서문밖교회 소녀가극회를 조직했다. 소녀가극회는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전주와 이리, 군산의 극장이나 전주지역 인근을 순회하면서 신문화를 확산시켜 나갔다.
서문밖교회가 중심이되어 설립한 학교들은 현재 전주는 물론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기전여학교(1900)와 신흥중고등학교로 발전했다.
호남지역 중심 선교센터로서의 기능을 감당해온 서문교회는 일제말 교회에 대한 온갖 박해와 고난을 겪었다. 특히 해방이후 신학사조의 혼란과 더불어 이어진 장로교단의 교파 분열의 현장에 서서 여러차례 혼란을 맞기도 했다. 그러나 서문교회는 정치적 변혁의 격변기 속에서도 진리를 고집하면서 개혁주의 교회의 올바른 전통을 유지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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