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선교사 · 신앙偉人/언더우드와 그 家門

★★★2-2 한국교회사에서의 '언더우드'

영국신사77 2008. 7. 26. 00:33
                                한국교회사에서의 '언더우드'
           
 

                              한국교회사에서의 '언더우드' 위치

                                                                           한국교회사연구소

 박 용규(총신대 신대원 교수)

 

                                  들어가면서
 최근 한국의 유수한 일간신문들은 오는 11월에 미국으로 귀국하는 언더우드의 증손자 원한광 선교사에 대한 기사를 무게 있게 다루었다. 원한광 선교사의 귀국은 원두우, 원한경, 원일한, 원한광으로 이어지는 4대에 걸친 언더우드 가(家)의 한국선교를 일단락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원한광(Horace Horton Underwood) 선교사는 언더우드가(家)가 4대에 걸쳐 모은 귀중본들을 연세대학교에 기증하고 떠남으로 한국에 대한 언더우드가의 사랑을 마지막 순간까지 잃지 않았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언더우드가 아펜젤러, 한국을 시찰하기 위해 입국한 일본 장로교 선교회의 스쿠더(Scuder) 박사, 테일러(Taylor) 박사와 나란히 제물포에 입항한 후, 그와 그의 후손이 한국선교에 미친 영향은 아무리 예찬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한 인물, 한 가문이 선교의 확장, 성경번역, 연합운동, 근대교육, 그리고 개혁파복음주의 이상의 구현에 이르기까지 한 나라의 교회와 근대사회문화에 이처럼 깊고 광범한 영향을 미친 선교사도 드물 것이다.
 1885년부터 1916년 10월 12일 57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언더우드는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온 생애를 불태웠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교회사에서 언더우드의 위치는 대단했다. 해리 로즈(Harry A. Rhodes)가 표현한 것처럼, 언더우드는 “한국선교의 아버지이자 많은 개별 선교사들을 한국에 오게 한 지도자”였고, 스피어(Speer) 박사의 말대로 매번 미국에 올 때마다 “선교의 횃불”을 드높게 불태웠던 “지칠 줄 모르는, 참을성 있는, 불굴의 사람”이었다.
 
 한국선교 반세기를 정리하는 1934년, 한국선교희년기념식에서 사무엘 마펫 선교사가 언더우드야 말로 “모든 면에서 끈기 있는 지도자”였으며, 성경의 초자연적 사실에 대한 분명한 확신, 불굴의 열정을 지닌 “탁월한 지도자”였다고 평한 것은 결코 과찬이 아니었다. 구태여 라토렛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언더우드만큼 추진력과 친화력과 주님을 향한 놀라운 비전을 가진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언더우드는 실로 한국선교를 위해 하나님이 특별히 예비하신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한국의 근대선교의 아버지였다. 돌이켜 볼 때 인도선교를 지망하던 그를 은둔의 나라 조선에 보내신 것은 이 나라를 복음화하시기 위한 깊고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적 개입이었다.
 한국교회와 사회문화에 미친 언더우드의 영향력은 언더우드의 성장 및 교육배경, 그의 한국에서의 선교사역의 공헌, 그리고 그가 추구했던 개혁파복음주의 정신의 고찰할 때 자연스럽게 발견할 수 있다. 
   
                        I. 언더우드의 역사적, 사상적 배경
 
 언더우드는 영국에서 태어나 12살 때까지 그곳에서 성장했고, 그 후 아버지를 따라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언더우드 역시 성장 및 교육 배경은 젊은 날 그의 신앙과 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직 청교도 열정과 웨슬리 열정이 살아 숨쉬던 19세기 영국과 기회와 모험을 동반한 개척정신으로 가득한 19세기의 미국의 기독교 이상과 정신은 언더우드의 생애에 깊고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의 가정 배경, 화란개혁파 교회와 신학교에서의 신학교육의 영향, 미국에서 일고 있던 해외선교를 지향했던 영미 부흥운동과 해외선교운동은, 초기 언더우드의 신앙과 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신앙의 가문
 한국선교의 아버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의 가문은 전형적인 장로교 전통이었다. 언더우드는 1859년 7월 19일 화학자이자 발명가인 아버지 존 언더우드(John Underwood)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그랜트 마리(Elizabeth Grant Marie) 사이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언더우드의 외증조할아버지는 런던 선교회 심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고 성공회, 장로교, 침례교, 회중교회, 감리교의 연합운동을 주도했던 웰즈가 교회 담임목사 알렉산더 와우(Alexander Waugh) 박사였다. 알렉산더 와우 박사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이면서도 성공회, 장로교, 조합교회, 감리교의 연합운동에 적극적이었다. 훗날 언더우드의 개혁파 복음주의 연합정신은 와우 박사의 복음주 연합정신과 상당히 유사한 데가 많았다.

 언더우드의 아버지 존은 한 번 쓰면 변조할 수 없는 안전수표책, 75번이나 쓸 수 있는 먹지, 그리고 타이프라이터 개량품을 착안해 낸 발명가였다. 언더우드의 아버지 존 언더우드는 매우 가정적이고 경건한 사람이었다. 비록 목회자는 아니었지만 매우 가정적이었고, 자녀들을 주안에서 사랑으로 양육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언더우드의 아내 릴리아스의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존 언더우드]의 헌신적인 기독교적 성품은 그의 자녀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는 바쁜 기간 중에도 선교학교(?)를 마친 다음에는 주일 오후의 대부분을 자녀들과 함께 보냈는데, 이 시간은 호러스에게 항상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었다.”

 어린시절부터 언더우드는 아버지 존 언더우드에게서 가정의 소중함을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다. 한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하는 동안, 언더우드의 화목하고 아름다운 가정은 다른 많은 선교사들에게 좋은 귀감이었다. 그의 아버지 존 언더우드는 “놀라운 신앙과 영성(靈性)을 지닌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언더우드는 이 점에서 아버지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아버지의 신앙과 영성, 그리고 재림의 신앙은 언더우드에게 소중하게 계승되었다. 자신의 생애 동안 주의 재림이 이루어질 것을 간절히 소망했던 아버지의 재림신앙은 아들 언더우드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주의 재림은 언더우드에게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되었으며, 1914년 한 보고서에 의하면 언더우드는 재림신앙이 강하게 담겨진 1909년에 미국에서 발간된 스코필드 관주성경을 게일과 함께 번역을 완료했다. 이같은 언더우드의 재림신앙은 한국교회에 그대로 전이되어, 한국교회가 아시아의 어느 교회보다도 재림신앙을 굳게 다지는 교회가 되었던 것이다. 릴리아스는 언더우드의 아버지의 재림신앙이 언더우드에게, 그리고 다시 언더우드로부터 한국교회로 이어졌음을 이렇게 증언 한다:
 
“특히 호러스 [언더우드]는 주의 재림에 대한 아버지의 갈망과 기다림을 완전히 물려받고 있었다. 이것은 이후에도 호러스가 계속 생각하는 주제가 되었으며, 그는 자신의 시대에 영광된 재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것을 멈춘 적이 없었다. 또한 그가 한국인들을 처음 가르칠 때부터 이 소망을 그들에게 전하여 준 결과, 이제는 한국의 모든 교회가 그날을 바라고 기다리는 데 있어서 하나가 되어 있으리라.”
 
 아버지 존 언더우드는 고아원 운동과 기도의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영국 브리스톨(Bristol)의 고아원 설립자 조지 뮬러(Muller)와도 “가장 가깝게”지냈던 친화력의 소유자였고, 아무리 어려워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신앙인이었다.
 
 존 언더우드 가정의 가호는 “불가능을 일소에 부치고 무엇이든 반드시 될 수 있다고 말하라”였으며, 이와 같은 긍정적인 삶의 태도는 선교지 한국에서 언더우드가 어떤 환경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갖도록 만들어주었다.
 
                            화란개혁교회의 영향
 갑작스런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산이 기울자, 1872년 12살 때 언더우드는 가족들과 미국 이민 길에 올라 뉴저지주의 뉴더햄(New Durham)에 정착했다. 언더우드가 화란 개혁교회(Reformed Church in America)인 그로브교회(Grove Church)에 적을 두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1874년 12월 5일 아버지 존 언더우드는 자녀 존 T. 프레드릭 윌스(Frederick Wills), 호러스 그랜트, 헬렌 이블린(Helen Evelyn)과 함께 신앙고백을 확인받고 그로브 교회에 정식으로 등록했다. 화란교회와의 만남은 아버지 존 언더우드는 물론 아들 호러스에게 너무도 소중한 사건이었다.
 
 미국에 정착한 언더우드 가족은 “극심하게 곤궁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가장 훌륭한 사람들과 교우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또한 화란개혁교회와 관계를 맺고 모든 교회 사업에 참여함으로써 그 작은 공동체의 귀중한 일원이 되었다.”
 
 신앙적으로 볼 때 화란개혁교회의 참석은 감수성 민감한 소년 시절 언더우드에게 새로운 전기를 제공했다. 아주 어린 시절 인도에서 온 어떤 사람의 설교를 듣고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언더우드는, 미국 뉴저지의 그로브 교회 메이번 목사의 지도를 받으면서 주의 종으로의 비전을 구체화시킬 수 있었다. 그가 출석하는 교회 담임목사 메이번은 언더우드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언더우드가 목회나 선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해스브루크 소년학교(Hasbrook Seminary for boys)와 뉴욕대학에 진학하고, 다시 뉴브룬스 위크 신학교에 진학하는 데도 메이번(Rev. Mabon) 목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더구나 언더우드가 신학교에 진학할 즈음인 1881년 메이번 목사는 브룬스 위크 신학교 조직신학 학과장을 맡아 언더우드에게 신학적으로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쳤던 것이다. 그로브 교회의 출석과 뉴브룬스위크에서의 신학교육을 통해 메이번의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은 언더우드에게 그대로 전이되었다. 후에 언더우드가 보여준 타 교단에 대한 관용, 신학적인 유연성, 동료들과의 친화, 부흥운동에 대한 열정, 이 모두는 화란개혁교회에서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들이었다.
 이 시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대학생활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가정교육과 화란개혁교회에서 받은 신앙에서 배어난 성실과 근면 때문이었다.
 
 1877년[18세] 뉴욕대학에 입학 한 언더우드는 아침 5시에 일어나 자신의 집 뉴더햄에서 뉴욕까지 11Km를 걸어서 통학했고, 12시까지 공부하였다. 대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대학교 재학 동안] 苦學하였고, 下學後에는 그 父親을 도와 文房具工場에서 일도 했다. 이렇게 苦學하면서도 宗敎事業에 着念하여 酒肆遊廓으로 다니며 傳道하였고 어떤 때는 구세군을 協助하여 傳道에 努力했다. 이처럼 學資에도 困難하고 宗敎活動에도 時間을 많이 썼지마는 學業의 成績이 優秀하여 卒業時에는 卒業班 代表로 告別演說을 했다. 學業이 이렇게 優秀한 同時에 人格이 卓越하여 그 同[年]輩 中에서는 鷄群獨鶴의 風采로 指導에 當하였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는 슬픔 속에서도, 1881년 졸업 시 졸업반을 대표하여 고별연설을 할 정도로 “우수한 성적”으로 뉴욕대학을 졸업한 언더우드는 신학교 진학을 결심, 1881년 자신이 속한 교회의 교단 신학교인 뉴 브룬스윅(New Brunswick)신학교에 입학했던 것이다. 1784년에 설립된 화란개혁교회(RCA)교단 신학교 뉴 브룬스윅 신학교는 비록 외형적으로는 프린스톤 신학교와 견줄 수 없었지만, 윌리엄 엘리어트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를 비롯한 수많은 목회자, 선교사, 신학자를 배출한 훌륭한 신학교였다.
 
                             2.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
 
 신학교 재학 시절 언더우드는 신학교 교수들과 동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훗날 그를 가르친 교수들은 언더우드에게서 “어떤 목적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집념” “헌신적인 표정” “영성과 지적인 힘”을 발견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5시간의 수면과 19시간의 학업을 감당하면서도, 언더우드는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 이로라”고 고백했던 바울의 심장을 가지고,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현장에 나가 복음을 전하였다. 언더우드의 이 같은 열심은 신학교 교수들이 그의 학업에 지장을 초래할까 우려할 정도였다.
 
 그가 복음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는 것은 여러 기록을 통해 일관되게 나타난다. 그 중에 하나가 신학교 재학시절에 뉴브룬스 위크에 영적인 불을 지폈던 이스튼 박사가 시무하는 교회의 출석이었다. 신학교 재학 동안 그는 이스튼 박사(Dr. Easton)가 시무하는 뉴 브룬스위크에서 가장 큰 화란개혁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릴리아스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영혼에 대한 정열로 불타오르던 그 목사[Dr. Easton]는 이전에는 변화가 없고 냉랭했던 낡은 교회에 곧 불을 질렀고, 계속적인 부흥, 놀라운 회심들, 새벽기도와 저녁기도, 예배 후의 모임 등으로 넘쳐나게 된 이교회는 모든 이웃교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이 과정 속에서 호러스는 부목사가 감당할 만한 역할을 감당해냈다. 그를 잘 알던 사람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그 기간 동안에 주일 하루 내내 일곱 여덟 번의 예배에 참석했다고 한다.”
 
 언더우드는 설교 사례비를 거의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약간씩 돈을 벌기 위해 1882년 여름 동안에는 전국을 돌면서 책장사를 해야 했다는 릴리아스의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신학교 시절 그가 섬기던 교회에서 특별히 경제적인 지원을 받은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저 교회가 좋아서 교회를 섬겼고, 목사의 목회와 설교를 통해 재충전을 받고, 그 구령의 열정을 가지고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이스튼 목사는 언더우드가 신학교 재학시절에도 구령의 열정이 시들지 않도록 불을 지펴준 것이다.
 
 언더우드가 복음, 구령의 열정에 불타고 있었다는 사실은 구세군과의 관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언더우드가 신학교 재학시절 구세군은 보수적인 교단으로부터 별반 인정을 받고 있지 못했는데, 그 중에서도 화란개혁는 특별히 더 심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언더우드는 “마음과 정성을 다해 그들과 함께 가두집회나 실내집회에서 설교를 하며” 돌아다녔던 것이다.
 
 이같은 복음의 열정은 1883년 여름 뉴저지주의 폼프톤(Pompton)의 어느 한 교회를 담임하는 일로 이어졌고, 또한 그의 메시지를 통해 실제적인 부흥의 역사로 이어졌다. 언더우드는 이미 신학교 시절 1883년 여름 외딴 시골 한 마을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설교를 사용하셔서 그곳에서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경험했다.
 
“그들의 초청으로 그곳에 갔을 때, 젊은 언더우드를 맞이한 것은 누더기를 입은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들의 무리였다. 남자 여자 어린이들이 급하게 만들어진 임시 가설장소에 모여서 대부분이 난생 처음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고자 기다리고 있었다. 호러스는 아주 막중한 책임감을 절실하게 느꼈다. ...기도의 시간이 지나가고, 성경 본문 시편 103편이 펼쳐졌다. 호러스가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과 같이“라는 구절까지 읽었을 때, 한 여인이 두 팔을 높이 들고 일어서며 외쳤다.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고는 바닥에 쓰러지더니 마구 흐느껴 울었다. 그러자 그녀의 뒤를 따라 하나씩 둘씩 시작해 이윽고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며 정신없이 엎드려 흐느껴 울었다.
 
 언더우드는 몇 시간 동안이나 그들과 합심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고, 며칠간을 그들과 함께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이윽고 그들 모두의 성품과 생활 태도와 의복과 외모 등 모든 면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이런 변화가 그 근방 사람들을 매우 놀라게 했음은 물론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마치 화란 경건주의 운동의 후예 뉴저지 주의 프링린휘슨(Frelinghuysen)이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을 촉발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언더우드에게 복음의 열정이 남달랐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영적 각성을 중시하는 뉴저지의 화란개혁교회의 전통이 언더우드에게서 살아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 능력 있는 메시지, 한 영혼을 사랑하는 구령의 열정이 화란개혁교회 안에 알려지면서, 언더우드는 제법 규모 있는 뉴욕의 한 화란개혁교회로부터 연봉 1500달러, 주일예배와 수요예배만 인도하고 의학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의와 함께 담임목사 청빙요청을 받았다.
 영적각성을 중시하는 뉴저지의 화란개혁교회의 신앙과 뉴욕대학교에서의 4년, 그리고 뉴 브룬스윅신학교에서의 3년간 그가 경험한 배고픔과 어려움, 고학과 면학, 근면과 성실은 후에 목회자로서, 선교사로서의 성공을 위한 토대를 다지는 중요한 훈련과정이었다.
 그의 한국선교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이미 이처럼 오래전부터 준비되었던 것이다. 언더우드가 한국에 관해 처음 접한 것은 신학교 2학년 때인 1882-83년 겨울, 그의 급우 가운데 한 사람 앨버트 앨트먼(Albert Altman)이 뉴 브룬스윅신학교 선교지원자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한국과 미국 사이에 한미조약이 체결되었지만 1,200만 내지 1,300만의 사람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살고 있어, 이곳에 복음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였다. 자신은 인도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한 터였기 때문에, 그는 대신 한국에 갈 선교사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해외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가슴에 간직하고 준비하고 있던 1883년 언더우드는 코네티컷주 하트포드(Hartford)에서 열린 신학교 연맹대회(Inter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s)에 참석해 해외 선교에 대한 많은 감명과 도전을 받고 선교사로서의 꿈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언더우드는 훗날 한국선교를 위해 뜻을 같이한 신실한 동료요, 평생의 친구며 동반자였던 한국 감리교 선교의 아버지 아펜젤러를 만났던 것이다.
 해외 선교를 불태우며 신학교에서 마지막 3학년을 보내던 1883년과 1884년 사이 뉴 브룬스윅신학교 학생들 앞에서 행한 근대해외선교운동의 거장이었던 복음주의운동의 대변자 피어슨(A. T. Pierson)의 강연은 아시아 선교를 꿈꾸던 언더우드에게 해외 선교열을 한층 더 고취시켜 주었다. 뉴 브룬스윅에서 재학하는 동안 언더우드는 한국으로 갈 선교사를 물색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여의치 않자 하나님께서 인도선교를 준비하던 언더우드의 마음과 환경을 움직이셔서 선교지를 한국으로 극적으로 돌리셨다.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려는 교회는 한군데도 없었으며 외국 선교사업의 지도자들도 한국에 들어가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글을 쓰고 있었다. 왜 너 자신은 가지 않으려느냐? 이런 메시지가 제 가슴에 울려온 것은 바로 이 때의 일이었다.”
 
 이처럼 한국에 갈 선교사를 물색하던 중 언더우드가 한국선교에 대한 소명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선교지를 한국으로 바꾸고도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너무도 많은 난관과 어려움들을 통과해야 했다.
 
 언더우드는 개혁교회에 한국선교를 두 차례나 신청했는데도 거절당한 것이다. 당시 그가 속한 개혁교회(RCA)는 일본에 베르벡(Verbeck), 브라운(Brown), 발래(Ballagh), 윅코프(Wyckoff), 스튜트(Stout), 부츠(Booth), 피키(Peeke), 키터양(Miss Kidder)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파송했고, 이미 인도와 중국과 일본의 선교회를 지원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한국에까지 선교를 확장할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그가 북장로교로 적을 옮겨 한국행을 타진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3. 한국 선교사로의 준비
 
 언더우드는 자신이 속한 RCA교단과 미국북장로교(PCUSA) 해외선교부에 한국선교를 타진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언더우드는 인도선교나 미국 내에서의 목회로 방향을 돌릴 생각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주님으로부터 한국선교에 대한 강력한 소명을 확인한 언더우드는 뉴욕에 있는 개혁교회의 담임 목사 청빙을 수락하는 서류를 발송하는 것을 일단 보류하고, 다시 한번 뉴욕의 센터 스트리트 23번지에 위치한 북장로교 선교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때 븍장로교 해외선교부 엘린우드 박사는 언더우드에게 한국 선교사 후보생이 한국행을 포기하는 편지를 보내왔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언더우드의 한국행을 적극지원하기로 약속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북장로해외선교부는 다음 회의에서 그를 한국 선교사로 임명할 것이라는 내용을 언더우드에게 통보했다. 이렇게 해서 언더우드의 한국선교의 오랜 염원은 그의 인내와 노력을 통해 현실로 이루질 수 있었다.
 
 결국 1884년 봄, 뉴브룬스위크신학교와 뉴욕대학을 졸업한 언더우드는 7월 28일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았고, 이어 11월 뉴브룬스위크 노회로부터 목사안수를 받고 1884년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발했다.
 한국 파송을 앞두고 언더우드는 런던 선교회 총무직을 맡고 있는 삼촌 에드워드 존스(Edward Jones) 목사를 만나기 위해 사무실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 한국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런던선교회 한 직원이 우리도 한국에 거의 20년 전에 한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그 후로 소식을 듣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런던선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는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였다. 일본에서 이수정에게 한글을 배우고 그가 번역한 신약마가젼복음셔언?를 가지고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제물포에 도착했다.

 

    출처:http://www.kich.org/ (한국교회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