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에서의 '언더우드' 위치
한국교회사연구소
박 용규(총신대 신대원 교수)
최근 한국의 유수한 일간신문들은 오는 11월에 미국으로 귀국하는 언더우드의 증손자 원한광 선교사에 대한 기사를 무게 있게 다루었다. 원한광 선교사의 귀국은 원두우, 원한경, 원일한, 원한광으로 이어지는 4대에 걸친 언더우드 가(家)의 한국선교를 일단락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원한광(Horace Horton Underwood) 선교사는 언더우드가(家)가 4대에 걸쳐 모은 귀중본들을 연세대학교에 기증하고 떠남으로 한국에 대한 언더우드가의 사랑을 마지막 순간까지 잃지 않았다.
한국선교의 아버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의 가문은 전형적인 장로교 전통이었다. 언더우드는 1859년 7월 19일 화학자이자 발명가인 아버지 존 언더우드(John Underwood)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그랜트 마리(Elizabeth Grant Marie) 사이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언더우드의 아버지 존은 한 번 쓰면 변조할 수 없는 안전수표책, 75번이나 쓸 수 있는 먹지, 그리고 타이프라이터 개량품을 착안해 낸 발명가였다. 언더우드의 아버지 존 언더우드는 매우 가정적이고 경건한 사람이었다. 비록 목회자는 아니었지만 매우 가정적이었고, 자녀들을 주안에서 사랑으로 양육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언더우드의 아내 릴리아스의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존 언더우드]의 헌신적인 기독교적 성품은 그의 자녀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는 바쁜 기간 중에도 선교학교(?)를 마친 다음에는 주일 오후의 대부분을 자녀들과 함께 보냈는데, 이 시간은 호러스에게 항상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었다.”
어린시절부터 언더우드는 아버지 존 언더우드에게서 가정의 소중함을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다. 한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하는 동안, 언더우드의 화목하고 아름다운 가정은 다른 많은 선교사들에게 좋은 귀감이었다. 그의 아버지 존 언더우드는 “놀라운 신앙과 영성(靈性)을 지닌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언더우드는 이 점에서 아버지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아버지의 신앙과 영성, 그리고 재림의 신앙은 언더우드에게 소중하게 계승되었다. 자신의 생애 동안 주의 재림이 이루어질 것을 간절히 소망했던 아버지의 재림신앙은 아들 언더우드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주의 재림은 언더우드에게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되었으며, 1914년 한 보고서에 의하면 언더우드는 재림신앙이 강하게 담겨진 1909년에 미국에서 발간된 스코필드 관주성경을 게일과 함께 번역을 완료했다. 이같은 언더우드의 재림신앙은 한국교회에 그대로 전이되어, 한국교회가 아시아의 어느 교회보다도 재림신앙을 굳게 다지는 교회가 되었던 것이다. 릴리아스는 언더우드의 아버지의 재림신앙이 언더우드에게, 그리고 다시 언더우드로부터 한국교회로 이어졌음을 이렇게 증언 한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산이 기울자, 1872년 12살 때 언더우드는 가족들과 미국 이민 길에 올라 뉴저지주의 뉴더햄(New Durham)에 정착했다. 언더우드가 화란 개혁교회(Reformed Church in America)인 그로브교회(Grove Church)에 적을 두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출처:http://www.kich.org/ (한국교회사연구소)
II. 한국교회에서의 언더우드 공헌
1885년 입국한 후 언더우드의 생애는 마치 바울이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종이 되었던 것처럼 한국선교를 위해 붙잡힌 신실한 종이었다. 주지하듯이, 언더우드가 없는 한국선교는 논할 수 없을 만큼 한국의 복음화에 그가 미친 영향은 너무도 지대하였다. 그중에서도 한국에서의 선교확장, 성경번역 및 문서활동, 연합운동, 그리고 학교사업은 한국교회사에서의 언더우드의 위치를 가름 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공헌들이라고 할 수 있다.
1. 새문안교회 설립과 한국선교 확장
언더우드가 한국교회에 끼친 가장 큰 공헌은 역시 그가 이룩한 한국선교의 확장이다. 한국선교를 위한 언더우드의 광범위한 노력은 새문안교회 설립 및 초기선교과정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그는 북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했지만 북장로교 선교회가 한국선교를 독점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교파를 초월하여 한국의 선교 확장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의 복음화라면 교파와 교단의 벽도 과감하게 뛰어 넘고 복음주의 연대를 구축하였다.
한국교회가 선교희년을 맞는 1934년 마포삼열 선교사는 언더우드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들을 기대하라”는 윌리엄 캐리의 신앙을 가진 인물이었다며 이렇게 평했다:
'한글 성경 번역에 있어서나 일본어 교재의 준비와 인쇄에 있어서나 맥코믹신학교와 버지니아 유니온신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심금을 울리는 메시지와 도전에 있어서나, 미국 선교부와 교회에 대한 호소에 있어서든지, 그는 한국의 복음화를 촉구하는 일이라면 항상 선두에 서 있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들을 기대하라”는 윌리암 캐리의 신앙이 그의 신앙이었다.
그의 음성을 들은 이들은 누구나 심금을 울리는 그의 호소력 있는 도전을 잊지 못할 것이고, 말씀을 전하거나 그가 낙관적인 보고를 할 때나 아니면 발전계획을 옹호할 때 열정적으로 전신으로 호소하는 것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한국과 한국선교에 대한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맥코믹신학교 출신 그레이험 리(Graham Lee), 스왈른(Swallen), 무어(Moore), 그리고 테이트(Tate), 버지니아 유니온신학교 출신 레이놀즈(Reynolds)와 전킨(Junkin), 뉴욕의 유니온신학교 출신 밀러(F. S. Miller), 그리고 캐나다 토론토대학 출신 에비슨(O. R. Avison)을 한국 선교사로 확보한 것이다. 남장로교 선교를 개시하도록 한 것도 언더우드였다. ……언더우드 외에 누가 존 로스 신약성경을 전해 받은 한국인들을 찾기 위해 그렇게 깊숙한 강계까지 실제로 위험한 여행을 하겠는가?"
위에서 언급한 한국선교의 공헌은 언더우드가 이룩한 공헌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 공헌 외에도 동아기독교 펜윅, 카나다 장로교 선교사 매켄지, 호주 장로교 선교사 데이비스를 비롯한 수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선교의 비전을 견고히 할 수 있었던 것도 언더우드 때문이었다.
언더우드가 한국선교의 확장에 미친 영향은 미국북장로교 선교 본부에 보낸 서신이나 보고서 그리고 아더 피어선(Arthur Pierson)이 발행한 미션너리 리뷰(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잘 나타난다.
한국에 도착한 후 언더우드는 미국의 피어선과의 지속적인 서신교환과 보고서 제출을 통해, 한국의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1887년 새문안교회를 창립했을 때나, 1889년 금교령이 내려 한국선교가 위기를 만났을 때도, 상황을 피어슨에게 전달 한국선교가 위기를 극복하고 지속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1887년 9월 27일 소래교회에 이어 두 번째 한국개신교회 새문안교회가 창립되던 날 밤, 언더우드는 이 사실을 미국 근대선교운동의 대변자 피어슨에게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감격에 겨워 보고했다.
“거의 2년 동안 진리를 찾는 구도자들의 수가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으며, 오늘 우리는 12명 이상의 내국인들과 장로교회를 조직했습니다.”
언더우드는 “지금이야말로 조선에서 사역할 바로 적기”이며, “조선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알렸다. 언더우드는 새문안교회가 꾸준히 성장 1888년 12월 23일 7명의 세례교인이 참석한가운데 한국장로교에서는 처음으로 성찬식을 거행하고, 이날 피어슨에게 흥분에 겨워 이 사실을 편지로 알렸다:
'우리는 방금 막, 우리 가운데 임하신 성령의 권능의 현시를 목도(目睹)하였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잘 진행되고 있으며, 우리 방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고, 주일에는 항상 1시간 이상 동안 엄숙하고 진지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후에도 언더우드는 계속해서 피어슨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한국선교를 확장해 나갔다. 언더우드에게 피어슨은 신실한 조언자였고, 후원자였다. 피어슨은 한국선교에 대한 언더우드의 보고를 자신이 발행하는 선교지에 무게 있게 다루며 한국선교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널리 알렸다.
언더우드는 한국의 복음의 확장을 위해서라면 교파와 교단의 벽을 넘어 협력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감리교의 아펜젤러와의 협력은 그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언더우드는 거의 모든 선교 사역에서 비전을 공유했고, 공동의 목적을 위해 협력했다. 성경번역을 함께 했고, 순회전도도 함께 떠났다. 1888년 순회 전도 중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송천에 가서 소래교회 교인들에게 세례도 함께 주었다.
“그 다음?[1888]에 원 목사와 아편셜라 목?가 ? 숑쳔에 ?려와셔 밋기로 작졍? 五人에게 세례를 주니라.”
언더우드의 친화력과 연합정신은 한국복음전파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언더우드 곁에는 그와 협력하기를 원했던 동료 선교사들이 있었다. 한국의 많은 선교사들이 그로부터 배우기를 원했고, 그와 함께 동역하기를 원했으며, 그리고 그와 함께 비전을 나누기를 원했다.
1888년 토론토대학 YMCA의 파송을 받고 막 서울에 도착한 제임스 게일(James S. Gale)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서울에 막 도착한 게일은 언더우드가 인도하는 예배에 참석 한 무리의 조선인들이 모여 진지하게 예배드리는 모습을 목도하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바로 그 날 게일은 피어슨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오늘 두시에 조선인 예배가 드려졌는데, 이것은 내가 이 불신의 도시에서 처음 목격한 것이었습니다. 약 50명이 언더우드 지도 아래 모였습니다. 그것이 내게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으로 오는 길에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서 조선에는 문이 다시 닫혔으며, 거기서는 복음의 소리가 전혀 없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게일은 조선에서의 첫 예배의 소감을 “추수할 것이 많되 일군이 적다”로 마무리했다. 게일은 언더우드가 인도하는 예배를 참석하고, 선교의 문이 닫혔다는 이전에 자신이 들었던 소문과는 달리 중단되지 않고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선선교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다질 수 있었다. 게일은 한국에 도착한 후 계속해서 언더우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아예 북장로교 선교회로 소속을 옮겨 한국선교를 계속했다. 이것은 언더우드의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 새문안 교회 창립예배 그 역사적 현장에 존 로스가 참석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언더우드는 존 로스와도 돈독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 같다.
이처럼 언더우드는 한국선교를 위해 미국의 아더 피어선, 만주 우장의 존 로스, 감리교의 아펜젤러, 그리고 게일을 비롯한 초기의 여타 선교사들과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도입하고 감리교와 선교지 분할협정을 체결하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도 언더우드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경쟁을 피하면서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서울과 경기 지역 복음화를 위해 서울을 중심으로 각 지방을 “남부지구”(South District), “중앙지구”(Central District), “동부지구”(East District), 그리고 “서부지구”(West District)로 대별하고, 선교사들이 각 지역을 책임 맡아 순회선교를 하도록 했다.
언더우드는 그의 한국사역 기간, 특히 1885년부터 1910년까지, 즉 그가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설립문제를 갖고 씨름할 때까지 한국교회의 복음전파 과정에서 매우 놀라운 리더쉽을 발휘했다.
2. 언더우드와 기독교문화 저변확대: 한글성경번역과 문서 활동
언더우드가 한국교회에 크게 기여한 것 중의 또 하나는 한국의 문서선교와 한글성경번역 분야였다.
1888년 문서선교의 중요성을 인식한 언더우드는 한국셩교서회를 창립할 것을 제안하고 토론토 전도문서회, 미국 전도문서회, 그리고 런던 전도문서회에 재정 지원을 호소했다. 이들로부터 어느 정도 재정지원을 받는데 성공한 언더우드는 헤론(J. W. Heron)의 제의로 1889년 10월 자신의 집에서 한국셩교서회(Korean Religious Track Society)를 창설하기 위한 준비 모임을 가졌고, 그 후 헤론이 죽기 한 달 전 1890년 6월 25일에 “규칙을 채택하고” 정식으로 한국셩교서회를 결성했다. 여기에는 언더우드와 뜻을 같이하는 올링거(F. Ohlinger)가 회장을 맡았고, 헐버트(H. B. Hulbert)가 부회장에, 서기는 언더우드가, 회록서기는 스크랜톤(W. B. Scranton)이, 그리고 회계에는 말콤 펜윅(Malcolm Fenwick)이 맡았다. 구성원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셩교서회는 처음부터 한국의 복음화와 기독교문화 창달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교파 개념을 넘어섰다.
1895년 알렌 켄뮤어(Allen Kenmure)가 지적한 것처럼, “기독교 문서는 문서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희생을 통해 개인, 사회, 그리고 백성의 삶을 고양하고(elevate), 정화하고(purify), 그리고 영성화(spiritualize)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원칙을 분명히 했다. 이처럼 한국셩교서회는 설립부터 기독교문서의 보급을 통해 기독교의 대 사회적 문화적 책임의 구현을 그 중심에 두었다.
언더우드, 게일, 존스, 아펜젤러 등 장감의 여러 선교사들이 처음부터 이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선교 초부터 문서 선교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언더우드는 1890년 셩교촬리(聖敎撮理), 한영문법(1890), 한영자전(Korean-English), 영한자전(English-Korean,1890), 한국어회화입문(An Introduction to the Korean Spoken Language)을 출판했다. 한국 도착 불과 5년 만에 이 같은 업적을 이룩했다는 것은 언어습득기간을 고려할 때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 중 영한자전은 언더우드가 죽기 전에 개정 작업이 진행되어 그의 아들 원한경(H. H. Underwood)에 의해 1916년에 완성되어 1925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이외에도 언더우드는 그리스도신문(1897)을 창간하는 등 한글성경번역 외에도 기독교문서 활동을 통해 복음의 확장은 물론, 한국에 기독교 문화를 창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글성경번역의 중요성을 인식
아마도 이중에서도 한글성경번역은 언더우드가 한국교회에 가져다 준 가장 큰 공헌일 것이다. 언더우드는 성경번역을 자신에게 주어진 일종의 거룩한 소명으로 여겼다. 언더우드를 비롯한 초기 선교사들은 한글 성경의 간행이야말로 한국교회의 선교를 위해서는 시급한 과제라는데 인식을 같이했다.
1898년 다니엘 기포드(Daniel L. Gifford)가 한국의 일상생활(Every-Day Life in Korea: A Collection of Studies and Stories)에서 지적한 것처럼,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선교사역 중에서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번역이었다.” 1909년 전환기의 한국(Korea in Transition)에서 제임스 게일(J. S. Gale) 역시 우선적으로 “개척 선교사들이 해야 할 일은 성서를 번역하는 일이었다.”고 증언한다.
한국에 도착한지 불과 2년 만인 1887년 한국개신교 선교를 대변하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이수정의 신약마가젼복음셔언?를 대폭 개정해 마가의 젼한 복음셔언?를 출판한 것도 그와 같은 배경에서였다. 아펜젤러가 1887년 9월 9일 미국 성서공회 길먼(W. Gilman)에게 보낸 서신은 언더우드가 아펜젤러와 함께 얼마나 성경 번역에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말해 준다:
'그[언더우드]나 저[아펜젤러]는 이 일을 우리의 사명으로 알고 했습니다. 그가 일본에 머물러 있는 동안 저는 서울에 있는 우리 선교사들에게 성서번역을 관장할 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의했습니다. 그 제의가 받아들여져 언더우드가 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우리가 해오던 마가복음 번역이 이 위원회 사업으로 채택되었던 것입니다.'
1887년 2월 7일 언더우드는 아펜젤러, 알렌, 스크랜톤, 헤론과 더불어 한국 상임 성서번역위원회(the Permanent Executive Bible Committee of Korea)를 결성하였을 때 위원장이 되어 아펜젤러와 더불어 번역책임을 맡았다. 다시 1893년 5월, 기존의 상임성서위원회를 해체하고, 상임성서실행위원회(the Permanent Executive Bible Committee)가 결성되었을 때 언더우드는 게일, 아펜젤러, 스크랜톤, 1895년에 합류한 남장로교 레이놀즈, 그리고 개인 자격으로 참여한 영국 성공회 소속 트롤로프(M. N. Trollope)와 더불어 실행위원회 위원으로 한글성경번역에 참여, 이 일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1893년 성서상임실행위원회가 결성되고 1898년까지 4년 동안 번역자회가 31회나 모였고, 언더우드는 누가복음을 초역했다. 언더우드 외에 아펜젤러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게일이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을 초역 1896년에 이르러 사복음서가 완역되었고, 1900년에는 신약성경 시험역본이 완역되었는데, 언더우드는 게일과 레이놀즈와 더불어 신약성경번역 작업에 헌신했다.
성경 번역의 세 주역 언더우드,게일,레이놀즈
성경 번역이 완료되기까지 이들 세 사람의 노력과 헌신은 특별했다. 처음부터 성서번역에 전념하고 한국어 사전을 출판할 만큼 한글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언더우드, 입국 얼마 후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 출판할 정도로 한국어 실력이 대단한데다 오랫동안 한국문화와 역사를 연구하여 역사와 문학적인 재능을 인정받던 게일, 그리고 한국에 오기 전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에서 라틴어 교수를 하다 올 정도로 고전어 지식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레이놀즈(이눌서:William D. Reynolds), 이 세 사람은 한글 성경 번역이 완성될 때까지 끝까지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 집중적인 노력의 유익은 다음의 요약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들 세 사람은 1902년 10월부터 1906년 3월까지 모두 555회에 걸친 모임을 가지고 신약 전체의 시험역본을 완성하였고, 1904년판 신약성경 전반부의 반을 개정하고, 남아 있는 오류들을 제거하고 용어와 표현을 통일시키는 개정 작업을 거쳐 서울의 북감리교 출판사(그 출판사는 매니저의 요청에 의해 계약을 해지했다)에서 깔끔하고 완전한 신약성경이 출간되었다. 다시 번역 소위원회에 의해 도쿄의 북감리교 출판사에서 인쇄하기 위해 좀더 매끄럽게 다듬으며 이 수정된 역본을 검토하였고, 그리고 신약성경 ‘공인본’를 만들기 위해 고린도후서부터 교정을 보았다.
1906년 한국 최초의 공인역본 '신약전서’ 출간
이렇게 개역 작업을 여러 차례 거쳐 좀더 다듬어진 새로운 번역본을 냈으며, 다시 이것을 수정하여 1906년에는 한국 최초의 공인역본 ‘신약전서’를 출간했던 것이다. 공인역본이 나오기까지 이들 세 사람의 노력과 헌신은 대단했다. 물론 이들을 돕는 한국인 조사들의 협력이 없었다면 공인역의 완성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언더우드의 조사 김명준(金明濬), 게일의 조사 이창직(李昌稙), 정동명(鄭東鳴), 레이놀즈의 조사 김정삼(金鼎三), 이승두(李承斗)의 헌신은 특별했으며, 이외에도 존스의 조사 문경호(文慶浩), 아펜젤러의 조사 조한규, 그리고 최병헌(崔炳憲), 홍준(洪俊), 송덕조(宋德祚), 송순용(宋淳容)은 성서 번역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의심할 바 없이 성경번역은 언더우드가 한국교회를 위해 이룩한 가장 큰 공헌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언더우드는 휴가 기간을 제외하고는 일생동안 위원장직을 맡아 이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성서번역 사업을 추진하였고, “아펜젤러도 언더우드와 마찬가지로 죽을 때까지 이 일을 했다.”
릴리아스(L. H. Underwood)는 이 일과 관련한 언더우드의 헌신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그[언더우드]는 언제나 성경 번역을 그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로 생각했다. 사람의 수중에 있는 성경이 가장 훌륭한 설교를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그는 전국을 누비며 많은 성경을 배포, 판매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인 권서인들과 전도부인(Bible Woman)들을 지도하는데 많은 관심을 보였고 성심으로 그들을 격려했다.'
한글번역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성서번역위원회 위원들이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하나님의 지혜였다. 언더우드는 이렇게 고백한다:
'[성경번역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우선되는 것은 … 기도하는 일이었다. 각 사람들은 이 일을 맡은 것에 대해 큰 책임감을 절감하고 있었으며, 성령의 도움 없이는 자신이 이 일에 부적격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함께 혹은 개인적으로 필요한 지혜를 간구했다. 이 지혜 없이는 일을 완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글 성경은 한국에 파송된 번역위원회 소속 선교사들의 탁월함, 지치지 않는 끈기와 인내, 그리고 훌륭한 한국 번역위원회의 헌신적인 협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이 모든 번역 작업은 실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번역 작업에 참여해 번역의 전 과정을 추진해온 언더우드는 주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한글성경번역이 완성될 수 없었다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첫 개신교 선교사들이 이 땅에 도착한지 4반세기도 안되어 성경 전체가 한국인들의 수중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은 결코 늦은 일이라 볼 수 없다. 어떤 사람이 그만두게 되었을 때 다른 사람을 택해 보내주시고, 지혜와 은혜를 주시고,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지도하신 위대하신 조력자와 교사이셨던 주님이 없었다면 이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큰 은사를 주신 주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린다.'
민중의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던 언더우드는 보통사람들(common people)이 읽을 수 있는 성경 번역을 만들기 위해 일관된 원칙을 세우고 이 일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고, 주님은 그의 선한 비전을 사용하셔서 그로 하여금 이 거룩한 사역을 완성할 수 있도록 힘을 주셨던 것이다.
돌이켜 볼 때 최초의 두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성경번역에 그들의 생명을 걸었던 것 같다.그것은 릴리아스의 증언대로 이 두 사람이 한글 성서번역에 헌신하다 결국에는 자신들의 생명까지 잃었기 때문이다.
1902년 아펜젤러가 목포에서 모이는 성경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목포로 가다 배가 난파당하는 바람에 생명을 잃었고, 언더우드는 1915년 여름 동안 한글 성경의 개정 작업에 몰두하다 결국 건강을 잃은 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3. 언더우드와 복음주의 연합운동
언더우드가 한국교회에 미친 놀라운 공헌 가운데 또 한 가지는 복음주의 연합운동이다.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한 후 언더우드는 먼저 장로교 안에서 연합운동을 착실하게 진행해 나갔다.
1889년 데이비스가 입국한 후 북장로교회와 호주 장로교회는 “미국 북장로(北長老敎) 미� 급(及) 빅토리아 미� 연합공의회(倂合公議會)”를 조직했고, 이어 1892년 남장로교회가 입국해 한국선교를 시작하자 1893년 1월 28일에 세 선교회는 "서울에 있는 빈톤 선교사 집에서“ 모여 연합으로 “장로교 정치(政治)를 쓰? 미� 공의회(公議會, 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를 결성하여, 한국에 개혁주의 신앙과 장로교 정치를 채용한 단일 장로교회를 설립할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조선지(朝鮮地)에 갱정교(更政敎) 신경(信經)과 장로회(長老會) 정치(政治)를 사용?? 연합교회(聯合敎會)를 설립(設立)”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각 교단의 벽을 넘어 하나의 장로교교회를 향한 발걸음을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긴 것이다. 물론 여기에 동참하려는 선교사들의 실천적인 협력정신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복음주의 연대를 실천해온 언더우드가 없었다면 이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언더우드는 교파의 벽을 넘어 연합운동을 전개했다. 언더우드는 한국에 파송되기 전부터 화란개혁교회에 출석하면서도 구세군의 복음전파에 참여하는 등 교파를 초월한 전도운동에 열심이었다. 이 같은 교파를 초월한 복음전파 노력은 한국에 파송된 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언더우드는 아펜젤러와 깊은 협력관계를 지속했고, 북장로교 소속이면서도 1891년 내쉬빌에서 열린 선교대회(Inter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s)에 참석해 한국선교를 호소하여 남장로교 선교사들을 한국에 유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카나다 장로교 선교사 매켄지를 끝까지 후원하고 협력했으며, 호주 장로교 선교사 데이비스가 한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언더우드의 아내 릴리아스는 남편의 생애를 정리하면서 그가 일생동안 추구했던 연합정신을 이렇게 압축하였다:
'그는 결코 종파적이거나 계급적이거나 인종적인 편견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가 모든 인종·민족·계급·연령·종파에 속한 사람들과 전정한 형제애를 나누는 것을 누구보다 잘 볼 수 있었던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의 존재의 모든 흐름은 연합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모든 살아 있는 영혼에게 도움과 사랑을 베푸는 친밀한 교제를 이루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동정과 관심과 사랑 앞에서는 신분의 높고 낮음이나, 도량의 넓고 좁음이나, 피부색의 희고 검은 것 등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바울이 다음과 같이 기록한 형제애를 가진 사람이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러한 그의 성격의 특징은 동양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즉 사회 모든 계급과 여러 종파들 그리고 직함을 가진 외교관에서부터 변변치 못한 부랑아에 이르기까지, 또 고귀한 성공회선교사로부터 무신론자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유럽인과 미국인이 모여 있는 외국인 공동체에서나 중국·일본·한국이라는 비 기독교적인 동양의 인종들이 모인 가운데서 그의 성향은 더욱 빛을 발하였던 것이다. 그는 왕으로부터 품팔이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친구이자 형제였다.'
언더우드의 협력정신은 1887년 성서번역위원회, 1890년 죠선성교서회, 1893년 장로교공의회, 1905년 장감연합공회, 1915년 연희전문학교 설립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역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나타났다. 세계 어느 선교지보다도 한국에서 연합운동이 활발하게 추진된 것은 언더우드의 노력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언더우드는 장감연합공회, YMCA, 한국주일학교연합회를 비롯한 기독교 단체를 조직하는 데도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4. 언더우드와 기독교 근대교육
언더우드가 한국선교에 미친 중요한 공헌 가운데 또 하나는 서양근대교육이다. 그가 설립한 경신학교와 연희전문학교는 그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886년 봄 정동의 언더우드의 사랑방에서 고아원 형식으로 시작한 언더우드 학당은 1891년에 예수교학당으로, 1893년에는 민로아학당으로, 다시 1905년에는 경신학교로 명칭이 바뀌면서 학교로서의 틀을 다지며 이화학당, 배재학당과 더불어 서양근대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1888년 앨러스 양에 의해 설립된 예수교 여학당은 언더우드 학당과 병설로 운영되다 1895년 가을에 연지동으로 학교를 옮겨 확장하고 교명도 정신여학교로 고쳐 이화학당과 더불어 현대 서양 여성교육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1915년 설립한 연희전문학교는 언더우드가 얼마나 한국의 근대교육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가를 잘 반영해 준다. 수많은 난관에 직면하면서도 언더우드는 연희전문학교 설립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기까지 너무도 힘든 선한 싸움을 싸워야 했다. 서울에 대학을 설립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한국의 북장로교선교회가 서울의 대학설립을 반대했는데, 그것은 1906년 평양에 숭실대학이 시작되고, 북감리교 선교회가 숭실중학교와 숭실대학 교육에 동참, 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상황에서 서울에 또 하나의 대학을 설립한다는 것이 무리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북장로교선교회가 볼 때 한국선교를 개시한 지 20년 후반까지 한국개신교의 3분의 2가 평안남북도와 황해도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처음 대학이 평양에서 시작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대학만 아니라 평양장로회신학교도 평양에 거점을 두고 있어, 선교사역의 중심지 평양이 대학교육의 적격지라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언더우드는 오래전부터 균형 잡힌 대학교육의 구현과 인재양성을 위해 서울에도 대학이 설립되어야 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 문화변혁과 기독교 인재의 양성이 시급하게 요청되는 시대적 상황에서 서울에서의 대학 교육은 언더우드에게 일종의 시대적 소명처럼 느껴졌다. 언더우드는 강한 저항을 받으면서도 1910년부터 서울에 대학을 설립하는 일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연희전문학교 설립을 둘러싼 평양선교부와 서울선교부 간의 갈등과 대립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연희전문학교 설립을 둘러싸고 발생한 일련의 문제는 “칼리지 문제“(college question)로 널리 알려졌으며, 이것은 북장로교 안에 오랫동안 진행되어 온 평양선교부와 서울선교부의 대립을 표면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개중에는 칼리지 문제를 둘러싼 대립 이면에는 좀더 보수적인 평양선교부와 좀더 개방적인 서울선교부와의 견해차가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보고, 그 발단을 평양의 마포삼열과 서울의 언더우드 둘 사이의 대립으로 풀어가려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대학을 평양과 서울 어느 곳에 위치시키느냐는 문제를 두고 북장로교선교회 안에는 서울선교부와 평양선교부가 견해를 달리했다. 평양선교부는 기왕의 숭실대학이 정착 운영되고 있는 마당에 당연히 대학을 평양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것은 평양선교부 선교사들만의 생각이 아니라 상당수의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갖고 있던 견해였다.
그러나 서울선교부는 1909년 서울에 대학이 위치해야 한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고, 서울의 대학 설립과 건물 확보를 위해 1만 불을 서울선교부에 지원해줄 것을 한국 북장로교 선교회에 요청했다.
선교회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1910년, 1911년, 1912년 계속해서 이 문제를 상정했으나 투표에 의해 이 안은 매번 거부되었고, 북장로교 선교회는 평양에 한 대학의 원칙을 재확인했다. 평양 북장로교 선교부는 평양에 한 대학을 고수하는 대신, “모든 복음주의 선교회가 평양에서의 숭실대학(Union College) 사역에 우리와 연합할 것”을 청원했다.
호주 장로교와 남장로교는 평양에 하나의 대학을 유지한다는 북장로교의 견해에 동조하는 입장이었으나,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는 중립적(non-commital)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장로교 선교회는 평양에 대학을 두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감리교와 본국의 해외선교부의 입장은 달랐다. 1912년 3월, 감리교 선교회가 연례 모임에서 서울에 대학을 위치시켜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감리교 선교회는 대학을 서울에 두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도 평양보다는 서울 쪽이었다. 따라서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는 서울에 대학 설립의 필요성을 호소한 언더우드와 북장로교 서울선교부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평양과 서울을 두고 선교회 안에 서로 견해차가 생기자 재한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은 1913년 3월 31일 투표를 실시 전체 128명 중 109명이 투표에 참여해 평양 대 서울이 71대 38로 나왔다. 평양에 대학을 두는 쪽이 서울보다 절대 우세했다.
하지만 내심 서울에 대학을 설립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던 미국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는 재한 선교사들이 이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투표를 통해 자신들의 의사를 집약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요청에 따라 1913년 8월 13일, 재투표가 실시되어 121명 중 21명이 기권하고 100명이 투표에 참여해 63명이 평양을 지지했고 37명이 서울을 지지했다. 1차 투표 때보다 서울의 경우는 거의 변화가 없었으나 평양은 8표나 감소했다. 이를 좀 더 분석하면 감리교의 경우 서울 대 평양이 29대 3으로 서울 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했고, 남북장로교와 호주 장로교의 경우 7대 57로 평양이 압도적으로 우위였으며,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의 경우는 서울과 평양이 비슷하게 나타났다.
재한 선교사들의 투표 결과에도 불구하고,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 아더 브라운은 1913년 10월 21일, 대학을 서울에 위치시키기로 결정하고, 한국 북장로교 선교회에 이 사실을 알려 왔다. 얼마 후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는 평양 숭실대학을 폐쇄하고 서울에 대학을 설립하여 장감이 함께 운영하도록 결정하고, 2월 24일 강경한 톤으로 이를 통보했다. 북장로교 선교회는 이에 강력히 맞섰다. 연희전문학교 설립을 두고 북장로교 선교회와 미국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발생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언더우드가 중심이 되어 초교파적으로 서울에 연희전문학교가 설립되었고, 북장로교 해외선교부는 1916년 2월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밀러(E. H. Miller)를 새로 설립된 대학의 장로교 측 교수 대표로 선정했다.
이제 한국에서 두 대학의 공존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좋던 싫던 한국장로교는 평양의 숭실대학과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두 대학의 운영에 참여하게 되었다. 두 대학이 평양과 서울에 나란히 공존한다는 것은 평양선교부와 서울선교부가 이 나라의 민족복음화를 위해 서로 긴밀히 협력하여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평양과 서울 서로의 갈등과 대립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지만 좀더 개방적인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보수적인 평양의 숭실대학은 서로의 위치에서 한국교회와 민족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중심 기관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1934년 한국북장로교선교사에서 밝힌 대로 두 학교의 공존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한국의 장래를 위해서는 결코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두 학교를 유지하는 어려움에 대해서 논한다면 여러 가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안목을 고려할 때 두 학교가 한 학교보다 더 좋다. 이미 두 대학은 서로 '상당히 보완적(complementary)'이었다. 한 대학은 문학과 농학과를, 다른 대학은 문학, 상업, 그리고 과학과를 두고 있다. 정부와 종교적인 특권이라는 관점에서는 두 대학 모두 동등하다. 두 대학은 교계 지도자들을 양성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큰 기독교 교세와 아마도 장래의 성장과 발전을 고려할 때 남자들을 위한 두 대학은 너무 많은 것은 아닐 것이다.”
거의 1세기가 지난 오늘날, 서울에 대학을 설립해야 한다는 언더우드의 주장은 참으로 선견지명의 안(案)이었다. 돌이켜 볼 때 언더우드의 대학 설립의지를 결코 단순한 고집이나 개인의 욕심으로만 치부할 수 없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고 연희전문학교를 설립 인재 양성을 통해 이 땅에 기독교 이상을 구현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돌이켜 볼 때 두 대학이 한국에 필요한 교회 지도자들을 더 많이 배출하고, 그 결과 한국교회가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는 점에서는 연희전문학교의 설립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열린 대학의 학풍을 천명한 연희전문학교는 미국과 유럽의 여느 대학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 미션스쿨이 가졌던 기독교 이상이 퇴색되고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과 전통에서 차츰 멀어져 갔다. 이것은 설립 초부터 어느 정도는 예상되었던 사항이다.
서울에 대학 설립을 남북 및 호주장로교 선교회가 적극 반대한 가운데 서울에서의 대학설립이 강행되다 보니 언더우드는 카나다 장로교 선교회 및 감리교 선교회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며 학교를 운영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전성천이 지적한 대로, 언더우드의 의도와는 달리 연희전문학교 교수진이 처음부터 보수적인 남북장로교와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이 거의 배제되고,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캐나다 선교회, 감리교 선교회 출신 선교사들로 구성되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이제 사학의 명문으로 자리 잡은 연세대학교는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라도 기독교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일에 좀더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III. 개혁파 복음주의 정신(Reformed Evangelical spirit)의 구현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언더우드는 복음전파, 성경번역과 문서활동, 연합운동, 그리고 기독교 근대대학교육 분야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확실히 이것들은 언더우드가 한국교회에 미친 가장 큰 공헌들이다. 이 같은 공헌과 영향력은 그가 일생동안 견지했던 화란의 개혁주의와 부흥운동과 해외선교로 특징되는 19세기 영미 복음주의가 어우러진 개혁파 복음주의 정신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언더우드의 생애와 사역을 좀더 면밀히 고찰하면 그가 개혁파복음주의 이상을 구현하기를 원했던 전형적인 개혁주의 선교사였음을 발견한다. 그의 개혁파복음주의 정신은 모든 영역에서 복음의 대 사회적, 문화적 책임을 강조하고 이를 구현하려던 청교도 정신을 그대로 함축하고 있다. 개혁주의 신앙을 가졌으면서도 장로교 영역을 넘어 복음주의 연대를 구축 한국의 복음화를 앞당기고 성경번역과 문서 선교, 복음주의 연합운동, 연희전문학교 설립을 통해 기독교문화 창달의 역할까지 감당했다는 측면에서 언더우드는 교리, 경건, 문화를 통시적으로 이해했던 청교도들과 너무도 유사했다.
개중에는 언더우드를 근본주의로 범주화시키려는 학자가 있는데 언더우드 생애와 사상 전체를 고찰할 때 그것은 무리한 해석이다. 언더우드의 신앙은 개혁주의, 좀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개혁파복음주의라고 평가하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개혁파복음주의 신앙은 그의 생애 동안 일관되게 흐르고 있던 사상의 맥이었다. 이것은 그의 성장 및 신앙배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장로교 목회자로서 복음주의 연합운동에 앞장섰던 외증조부, 뉴저지에 정착한 후 출석한 화란개혁교회(RCA), 그 교단 신학교인 뉴 브룬스윅신학교 모두 언더우드의 신앙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언더우드의 신앙생활과 신학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메이번 목사, 그가 신학교 재학시절 다니던 뉴브룬스 위크 화란개혁교회 담임 이스턴 목사, 그리고 미국의 화란 개혁주의 산실 뉴브룬스위크 신학교의 학풍은 언더우드의 개혁파복음주의 신앙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개혁주의 신앙과 영성을 접목시킨 뉴브룬스위크 신학교의 학풍은 언더우드가 견지했던 복음주의 부흥운동과 구령의 열정을 태동시킨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특히 무게 있는 저술을 통해 해외 선교분야에서 뛰어난 리더쉽을 발휘하기 시작한 언더우드의 뉴 브룬스위크신학교 10년 선배 그리피스와 신학교 재학시절 학교에 와서 재학생들에게 해외 선교열을 고취시켰던 미국의 근대해외선교의 거장 아더 피어슨은 언더우드에게 적지 않은 도전을 준 것으로 보인다. 한국: 은둔의 나라(Corea: The Hermit Nation), 한국 안과 밖(Corea: Without and Within)을 저술 한국선교를 후방에서 지원하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윌리엄 엘리어드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는 개혁주의 전통을 소중하게 간직하면서도 타 전통을 존중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헌신했던 전형적인 개혁파 복음주의 정신(Reformed evangelical spirit)의 소유자였다.
언더우드는 신학적으로는 보수적인 성향을 가졌지만 부흥운동과 연합운동에 누구보다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언더우드의 이와 같은 이상, 전통적인 칼빈주의를 계승하면서도 조나단 에드워드 같은 복음의 열정과 교파를 초월한 복음주의 연합정신은 초기 한국교회 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언더우드가, 장로교인이면서 교파를 초월 복음주의 연합전선을 형성하며 영미 복음주의운동을 주도한 아더 피어선, 윌버 채프먼(Wilbur Chapman), 찰스 알렉산더(Charles Alexander)등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이와 같은 언더우드의 개혁파 복음주의 정신은 맥코믹과 프린스톤신학교 출신 북장로교 선교사들과 리치몬드의 유니온신학교 출신 남장로교 선교사들, 그리고 당시 영국령이었던 캐나다 장로교와 호주 장로교 출신 선교사들과도 통하는 것이었다.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은 “철저한 보수주의에다 청교도적 엄격성”을 견지하면서도 청교도 개혁파 경건성을 겸비한 “개혁파 복음주의” 전통에 확고하게 서 있었다.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이 신학적으로는 구칼빈주의 전통, 구학파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부흥운동과 복음주의 연합운동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언더우드의 개혁파복음주의 정신은 특히 시카고 맥코믹신학교 출신 선교사들과 잘 조화를 이루었다. 한국선교가 가장 중요한 선교적 토대를 구축한 1888년부터 1902년까지 맥코믹신학교 출신 선교사들 14명은 무디부흥운동과 미국에서 일고 있던 복음주의 학생자원운동(the Evangelical 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영향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무디의 영향 하에 형성된 학생자원운동은 19세기 말부터 세계 선교를 주도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특히 무디의 영향력이 짙게 드리워진 시카고에 위치한 맥코믹신학교는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을 어느 학교보다도 더 강하게 받고 있었다. 남장로교, 호주장로교, 그리고 카나다 장로교 선교사들 역시 당시 영미에서 일고 있던 학생자원운동, 나아아가라 컨퍼런스를 비롯한 19세기 부흥운동과 해외선교운동에 영향을 받고 한국에 파송되었다. 장로교 출신 선교사들은 당시 영국과 북미를 휩쓸고 있던 전천년운동, 학생자원운동, 복음주의 연합운동, 부흥운동과 사회개혁운동으로 특징되는 19세기 근대복음주의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것이다. 개혁주의 신앙을 분명히 천명하면서 부흥운동과 구령의 열정에 불타올랐던 언더우드의 개혁파복음주의 정신이 한국장로교 신앙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스코틀랜드 후예인데다 화란개혁주의 배경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언더우드는 어느 누구보다도 개혁파복음주의 정신에 철저했다. 그가 일생동안 추구했던 개혁파복음주의 정신은 한편으로 청교도 정신의 계승이며, 진정한 칼빈 신앙의 복고였고, 역사적 장로교 정신의 회복이었다.
언더우드는 31년간의 한국사역을 통해 한국선교, 특히 한국장로교회의 초석을 놓았다. 그는 개혁주의적이고 복음주의 신앙에 견고하게 서 있으면서도 친화력이 있었고, 탁월한 리더쉽을 소유했으며, 릭 워렌이 말한바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았던 선교사였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복음의 열정에 불타올랐으면서도 대 문화적, 사회적 책임을 깊이 인식했다. 경신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비롯한 그가 설립한 미션스쿨, 그가 번역 편집한 한글성경과 찬송가, 그리고 그가 기술한 수많은 기독교 서적들이 그의 개혁파 복음주의 이상을 그대로 반영한다.
돌이켜 볼 때 사무엘 마펫을 중심한 평양 선교부가 신학교육과 복음전파 지향적인 선교사역에 충실했다면, 언더우드를 중심한 서울 선교부는 복음전파와 더불어 사회-문화적 관심을 선교 현장에 적극적으로 구현하기를 원했다. 언더우드가 에비슨을 측면에서 지원 의료사업이 한국에서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지원해준 것도 그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언더우드는 일생동안 한국장로교가 복음전파와 기독교의 대 사회-문화적 관심이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했고, 그의 노력에 힘입어 한국장로교는 풍요로운 개혁주의 유산을 이 땅에 뿌리 내릴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언더우드는 장로교 선교의 아버지이자 한국 선교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맺는말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 의심할 바 없이 언더우드는 복음주의연대를 구축 한국의 복음전파에 어느 누구보다도 지대한 공헌을 이룩하였다는 사실이다. 북장로교 선교사이면서도 남장로교, 호주장로교, 카나다장로교 선교회가 한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고, 남북감리교나 기타 개신교 선교회와의 협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의 상당한 몫은 언더우드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둘째, 언더우드는 성경번역과 문서 활동을 통해 한국에 기독교 문화의 정착과 저변확대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이다. 일생동안 사전편찬과 한글문법책을 출간하고 성경번역에 헌신 사장된 언문(諺文), 한글을 역사의 장으로 끌어올려 민중의 언어로 만들었고, 한국의 전통과 역사를 학적으로 정리 보급하여 기독교 이상을 교회를 넘어 사회-문화 전반에 널리 저변확대 시켰다. 언더우드는 게일, 헐버트, 존스와 더불어 언어, 문화, 종교, 역사 전반을 학적으로 집대성하여 한글역사, 문학, 문화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데 대단히 공헌했다.
셋째, 언더우드는 한국교회에 교파를 초월한 연합운동을 통해 개혁파 복음주의 연합운동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장로교 안에서 연합운동을 전개 4개의 선교회가 하나의 장로교회를 한국에 설립할 수 있도록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천주교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입장을 취하면서도, 교단과 교파의 벽을 넘어 헐버트, 아펜젤러, 펜윅, 데이비스, 매켄지 등 개신교 선교사들과 연합운동을 전개했다.
언더우드는 분명 장로교 선교사라는 자의식을 잃지 않으면서도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는 교단과 교파의 벽도 넘어섰으며 인종과 계급도 넘어섰다. 언더우드의 영향력이 교단과 교파를 초월 한국교회 전역에 깊이 인각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넷째, 연희대학 설립은 언더우드가 한국교회에 준 가장 큰 유산 가운데 하나였다. 서울의 연희대학이 설립됨으로써 평양의 숭실대학과 더불어 한국교회와 민족을 책임지는 의식 있는 젊은이들을 양성해 일제의 침략 속에서도 한국교회를 한 단계 도약시킬 수 있었다. 화란의 미국 이민자들이 칼빈대학과 칼빈신학교, 그리고 뉴브룬스위크 신학교를 설립하여 개혁주의 이상을 널리 확산시켜 나갔던 것처럼, 화란 개혁주의 영향을 깊게 받은 언더우드는 연희전문학교 설립으로 한국에 기독교 이상을 구현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언더우드는 일생동안 개혁주의 영성과 개혁주의 문화변혁 모두에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면에서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의 참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적으로는 개혁주의 입장을 취하면서도, 당시 미국에서 일고 있던 교파를 초월한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아 개혁파복음주의 정신을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회에 이식 풍요로운 개혁주의 유산을 한국장로교회에 남겨주었다. 철저한 칼빈주의자이면서도 부흥운동의 지도자로 널리 쓰임 받았던,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의 주역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언더우드도 예리한 지성과 뜨거운 가슴을 소유한 전형적인 청교도 개혁주의 지도자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언더우드 사후, 한국장로교회 안에는 서울선교부의 리더쉽이 약화되고 평양선교부의 리더쉽이 더욱 증대되면서, 복음의 대 사회적문화적 책임이 약화되고 복음전파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방향으로 흐른 듯하다. 그 결과 복음전파와 기독교의 대 문화적-사회적 책임 둘의 균형이 깨지고 말았다.
이제 한국장로교와 한국교회는 언더우드가 보여준 복음전파와 대 사회-문화적 책임 두 가지의 균형을 온전히 감당하여, 혼란 가운데 있는 우리 민족과 사회를 이끄는 구심점의 역할을 온전히 회복해야 할 것이다.(*)
한 걸음 내딛고.... | 풀
http://blog.naver.com/fullch/38387011
'선교 ·선교사 · 신앙偉人 > 언더우드와 그 家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국선교사 언더우드 -윤진희(MIR) (0) | 2008.07.26 |
---|---|
★[선교사열전] 언더우드 선교사님 이야기/이장 (0) | 2008.07.26 |
★★★2-1. 하나님의 종 언더우드 선교사 일대기 (0) | 2008.07.26 |
언더우드의 고백, 한국선교의 기적은 하나님의 섭리 (0) | 2008.07.25 |
★ <기획> 탐방4 : 언더우가 기념관 (0) | 2008.06.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