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선교 사역기 (26세~56세)
(1) 한국 개신교 첫 선교사역 (1885~1895, 26세~36세)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펜셀러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가 상륙한 지점에 세운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안의 아펜셀러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 동상-1

아펜셀러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 동상-2

한국에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했으나, 선교헌금이 없어 못 떠나고 있던 언더우드는 어느날, 미국 동부의 교회에 목회자로 초빙을 받게 되었다. 그에게는 한국선교의 길은 열리지 않고 미국에서 목회하는 길만 열린 듯 보였다.
그는 한국선교의 문이 열리기까지 초빙한 교회에 가기 위하여 취임승락편지를 써서 우편함에 막 넣으려던 찰라였다. 아주 조용한 음성으로 그의 심령에 하나님께서 물으셨다. ?한국은 어떻게 하려느나?“하고 말이다. 그 세미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언더우드는 다시 한국에 선교사로 부르셨다는 그 확신을 떠올리면서, 편지를 우편함에 넣는 대신, 곧장 장로교선교회본부로 발을 옮겼다.
선교회본부에 들어갔을 때, 그를 맞이한 사람은 지금 막 새로 부임한 선교회총무 엘링우드였다. 언더우드는 새 총무에게 다시 질문했다. 한국에 선교사를 보낼 기금이 들어온 것이 있느냐고 말이다. 바로 그 때, 엘링우드총무는 기뻐하면서 며칠 전, 한국선교에 써달라고 5,000불이 도착해 있어, 선교회의 이사회를 통해서 언더우드를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하는 이 안이 통과되면 바로 한국선교사로 나가게 될 것이라면서 축하해 주었다. 그의 말 그대로,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그는 한국에 파송될 선교사로 임명받고, 곧바로 떠날 준비를 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한국에 가기 위해 일본으로 가는 배에 승선했을 때, 그 배에는 아펜젤러 (Apenzeller)가 신혼의 신부와 함께 한국에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 승선해 있었다.
1884년 일본에 도착했을 때, 언더우드는 갑신정변 후 일본에 망명하고 나서 그리스도인이 된 이 수정을 만나, 그에게서 일본에 머문 3개월동안 한국말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번역판으로 나온 마가복음서를 입수하게 되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날 제물포항에 드디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부부가 도착하였다. 당시 미국 공사였던 푸트 (Foote)는 한국의 정세가 너무 혼란스럽다는 이유로 임신중이던 아펜젤러부인의 입국을 반대했다. 그래서 아펜젤러부부는 일본으로 돌아가고, 언더우드만 입국하여 서울로 향했다.
당시 한국에는 알렌 (Allen)이 외국인들을 상대로 의료행위를 하고 있을 뿐, 한국사람들을 위한 선교사는 한 명도 아직 없었다. 미국 공사 푸트는 갑신정변 직후 개화파가 쫓겨나고, 수구파가 조정을 장악한 상황에서 더 경직된 한국상황을 감안해서 미국인들이 일절 선교하는 것을 못하도록 시달했다.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김 옥균등 개화파의 칼에 맞아 죽음에 이르렀던 민 영익을 알렌이 치료하여 살려줌으로 그는 왕실의 신뢰를 얻게 되었고, 선교의 문을 여는데 큰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한편 아펜젤러는 감리교 첫 선교사로, 정동교회를 개척하고 배재학당을 세웠다. 또 그를 뒤이어 한국땅을 밟은 스크랜튼(Scranton)은 현재 동대문에 병원 (이화여대 부속병원 전신)을 세우고, 그와 함께 한국에 선교를 위해 왔던 그의 어머니 스크랜튼은 고아 한명을 데려다가 가르침으로 이화학당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현재 이화여중고, 예원, 이화여대의 전신이다.
복잡한 정치상황 속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푸트공사의 관찰과 달리, 한국사회가 복음전도에 열렸고, 무르익었고, 또 열정적으로 복음신앙에 반응함을 보고, 한 시라도 놓칠새라 초를 다투면서 노방전도, 일대일전도, 내륙지방 방문전도등 과감한 전도사역을 펼쳐 나갔다.
이렇게 담대하고 용감한 언더우드의 사역은 사사건건 알렌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선배로서 알렌은 아직 한국의 선교는 외국인들 속에서만 해야한다는 그의 말에 언더우드가 따라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알렌과의 갈등이 너무 심해지자 언더우드는 선교본부에 장로교선교사로서 사임의사를 표명하는데까지 이르렀다. 이 갈등은 알렌이 고종의 특명을 받고 미국공사로 발령되어 그가 한국을 떠남으로 일단락이 지어졌다 (김 인수교수편저, 언더우드목사의 선교편지, 1885-1916. 장로회 신학대학 출판부, 2002).
심한 갈등으로 고통하던 언더우드가 한숨을 돌리게 되었을 때, 알렌 후임으로 부임한 헤론(Heron)을 언더우드는 맞이하게 되었다. 헤론은 의료선교사였던 알렌과 같이 선교회의 기획, 예산 모든 것을 단독으로 시종일관 처리해 나가려고 하였다. 이것은 영국과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적 환경에서 자랐고, 또 개척선교사로서의 여러 가지 교육, 교회건축, 성경번역등 수많은 계획을 이행하고 있었던 언더우드에게 매우 받으들이기에 힘든 상황이었다.
언더우드는 헤론의 독단적 의사결정에 반대하여 번번히 맞섰고, 또 본부에 이렇게 갈등이 심하니까 해결책을 제시해달라고 누차 편지로 알렸다. 전혀 해결기미가 보이지 않던 그 문제상황에서, 헤론이 질병으로 사역 중 소천하게 되었다. 막상 헤론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언더우드는 그의 장례 및 장지까지 다 마련하여 동료선교사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는 성의를 보였다. 특히 서울에는 장지를 주지 않으려는 정부에 계속 탄원하여, 마침내 양화진을 선교사묘역으로 확보하게 되었다.
고아원 시작
독신으로 첫 개신교 선교사로 한국에 온 언더우드에게 처음 주어진 과제 한 가지는 어린 고아 김 규식을 돌보는 일이었다. 그 어린 아이는 양반의 자제이나, 정쟁으로 아버지가 강원도로 귀양가자 친척들이 궁핍하여 받아들일 수 없게 되어, 혼자 벽지를 뜰어 먹으며 굶어죽어가던 중 언더우드가 발견하게 되었다. 이 어린아이를 살리고자 그는 고아원을 시작하였고, 이 고아원이 점차 자라서 경신학원으로 발전하였다. 김규식은 언더우드의 사랑받는 수제자로 자라서, 미국 유학 후에 언더우드를 도와서 교회개척, 교육사업에 힘썼고 그는 해방 후 이 승만대통령과 함께 남북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크게 노력한 대표적 학자요, 정치가였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첫 세례를 준 것과 릴리아스 홀튼(Lilias Horton)과의 결혼이었다. 8세연상이었던 호톤은 민비의 시의로 파견되었던 의료선교사였다. 그들은 신혼여행으로 이북지역을 3개월간 다니며 내륙지방 전도를 단행했다. 그 기간의 모험과 도적떼를 만났던 일, 그리고 가는 곳마다 복음에 열려 있어 많은 전도의 수확을 거둔일, 또 압록강을 건너 만주땅에서 세례를 베푼 일등은 그 부인이 쓴 전기에 자세하고 흥미롭게 나온다. 언더우드는 부지런하게 열심히 선교에 임하여, 1885년부터 90년이 되기 전에 이미 새문안교회와 경신학원을 설립했고, 성경번역에 착수하였다.
에비슨 (Oliver R. Avison) 의료선교사 내한
그 후 1889년 부인 릴리아서와 막 태어난 아들 원 한경과 함께 언더우드는 안식년으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를 초청하는 교회마다 가서, 그는 한국선교를 위한 일군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던 중, 카나다 토론토를 방문하여, 언더우드가 선교보고를 나누게 되었을 때, 토론토대학 의과대학 교수였던 에비슨 (Oliver R. Avison) 박사가 크게 감명을 받아 한국에 의료선교사로 나갈 의사를 밝혔다.
애비슨박사의 결정에 그 부인은 기쁘게 동의하였고, 곧 세 자녀와 만삭된 아내와 함께 벵쿠버에서 배를 타고 일본을 거쳐 부산에 도착하여, 그 곳에서 넷째 아기를 출산하였다. 에비슨을 파송한 선교단체는 토론토 기독절제학생회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금주서약을 한 독실한 학생들의 모임으로, 이 선교단체는 후에 하디를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했다.
에비슨박사는 서울에 올라오자 말자 진료소를 개설하였는데, 마침 전염병이 창궐하게 되었다. 서울에 도착하자 말자, 그는 밤낮으로 수고하여 수많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한국 조정에서는, "서양사람들에게 가면 살 수 있다"는 벽보를 붙였다. 서울에서 시체가 줄을 이어 나가고, 가족들이나 친척들까지도 아픈 사람에게 가까이 하면 병에 전염될까봐 무서워했고, 심지어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사람도 많이 거리에 갖다 버리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중에 아직 숨을 쉬는 자들을 구하여 내어 병을 고쳐주고, 전도를 하는 가운데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는 바로 고종과 민비와의 교제이다. 부인 릴리아스 호톤이 민비의 시의로 섬기던 중 결혼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고종과 민비는 언더우드를 친구와 같이 여기게 되었다. 고종은 언더우드선교사를 통해서 복음을 듣게 되었고, 민비는 언더우드선교사의 교육에 대한 구상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었다. 그래서 당시 조정의 모든 대신들 자녀들을 교육시킬 육영사업을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시작하도록 권하고 그 기금을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1895년 고종 32년에 을미사변이 일어나서 민비가 일제의 칼에 시해됨으로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고종은 이 사건으로 너무도 큰 두려움에 잡혀, 언더우드선교사와 에비슨선교사가 매일밤 그의 옆에 있어야만 잠을 잘 수 있었다. 언더우드선교사는 고종에 대하여 신실한 친구로 가장 어려울 때 옆에서 그를 지켜 주었다. 동시에 그는 정교분리의 입장을 확고하게 지켜 나갔다.
정교분리의 입장을 확고하게 지킴
고종이 자기와 대신들이 모두 세례를 받겠으니 미국 군대를 불러서 일본을 무찔러 달라고 부탁했을 때, 언더우드선교사는 자기는 하나님 나라를 전하러 온 사람이므로, 국제정치에는 관여할 수 없음을 밝혀 성경에 나온 정교분리정신을 한국의 조정에 보여주었다.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러시아에 힘을 입어 일본을 견제하려고 했을 때도 언더우드선교사는 그 일에 관여치 않았다. 갑신정변 (1884) 직후 그가 한국에 왔고, 그 후 동학란과 갑오경장 (1895), 노일전쟁, 을사보호조약 (1904)등으로 한국의 국내외 정세가 급변하던 한복판에서, 언더우드선교사는 항상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정치와 거리를 두고, 오직 한 가지 일,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는 그 일에만 전념해 나갔다. 이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바로 설 때,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모든 것은 따라올 것을 그는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태 6:33).
이와 같은 언더우드선교사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 4 권에서 잘 보여준 것처럼, 성경의 가르침을 좇아서, 교회는정치를 간섭해서 안되고, 정치는 교회를 간섭해서 안된다는 성경에 입각한 정교분리의 원칙을 바로 인식하고 실천한 것이었다.
교회 설립에 3자법칙 엄격적용
한편 언더우드는 한국에 첫교회인 현재 새문안교회를 1887년 만주선교사 죤 로스목사님을 모시고 첫 예배를 드리며 세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두 명의 장로를 세움으로 시작하였다. 3자법칙에 의거하여 미국에서 한국의 교회건축비를 대주는 일을 언더우드는 금하였다. 한국교회 교인들은 스스로 교회건축을 위해 헌금하고 저축하며, 각자 힘닫는대로 건축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교회건축에 드는 돈이 당시 교인들이 감당하기에 너무 벅차 심히 어려워하였다. 바로 이 때, 전념병 퇴치에 기여한 공로로 새문안교회 교인들에게 당시 고종왕이 상금을 하사하게 되었다. 이 상금으로 교회건축은 그 결과 신속하게 완성되었고, 서울에 최초의 교회가 세워져 입당하게 되었다. 이 일을 통해서 한국 교인들은 오직 믿음으로 나가면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자력전도와 교회의 자치에도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2) 언더우드선교사의 사역 확장기 (1896-1906,37세~47세)
두 번째 선교사역기는 선교확장기라고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활발한 선교활동으로 언더우드는 성경번역을 계속하면서, 교회개척, 사경회, 주일학교대회, 선교사훈련, 선교지 분할, 찬송가출판, 신문발행, 미션학교 증가, 선교법칙으로 3자 법칙 실시, 유럽과 미국 방문, 선교보고를 통해 한국선교에 모든 교파와 각 나라 교회가 동참하여 큰 선교단이 한국에 일하게 하면서, 선교회 대표로 연합사업에 힘씀.
언더우드선교사는 이 시기에 성경번역에 더욱 힘썼다. 이는 만주에서 죤 로스선교사님이 번역하여 1881년부터 1888년까지 (?) 출판했던 신약성경이 당시 조선 북부지방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나, 서북사투리가 너무 심하여 서울에서 표준성경으로 쓰이는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한국에 입국하기 전, 일본에 머물동안 (1885년 1-4월 월?) 그는 갑신정변의 불발로 일본에 피신해 있던 이 수정으로부터 한국만을 배우게 되었다. 이 수정은 당시 최고의 지성인으로 일본에서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자 곧 성경번역에 힘써, 마가복음 번역을 완수하고 출판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부분적인 번역본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전도와 교회개척에 귀하게 쓰였다. 그럼에도 신구약성경 전체의 번역은 언더우드선교사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아펜셀러와 언더우드는 서로 연합사업에 힘썼는데, 특히 성경번역에 함께 힘을 합했다. 성경번역을 위해 배로 목포를 향하여 오던 중, 아펜셀라가 타고 있던 배가 뒤집히게 되었다. 어린 소녀가 물에 빠져 죽어가는 것을 보고 그 소녀를 살려낸 후 아펜셀러선교사는 급류에 휘말려 익사하였다. 진정,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말씀을 살아서도 죽을 때에도 실천함으로써, 그는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선교사의 영원한 귀감이 되었다. 성경번역사업은 아펜셀러 사후에 레이놀즈등 선교사의 협력으로 계속되어다.
이 시기에 또 하나 기억될 일은 옥중의 이승만을 전도한 아펜젤러를 도와 이 승만구명운동에 언더우드가 매우 힘썼다는 사실이다. 언더우드는 이 승만을 출옥하도록 돕기 위하여 고종과 기타 조정의 인물들에게 끈질기게 노력하였다. 그 결과 이 승만은 5년 6개월의 옥중생활을 마치고 1904년 출옥하였다.
청년 이승만
여기서 잠시 유 영익박사가 쓴 젊은 날의 이승만 (연세대학교 출판부) 필독을 권한다. 청년 이승만은 이씨조선 왕가 후예로 어릴적부터 천재성이 뛰어나 모든 한학을 10세 이전에 이미 통달하고, ?세에 영어를 배울 목적으로 아펜젤러가 세운 감리교 선교회의 배재학당에 들어가 뛰어난 재능이 인정되어 재학 중 영어 조교로 활동하였다. 이승만은 자신이 왕가후손이었음에도 고종의 무능함을 한탄하며, 강화도령 철종을 왕으로 모시고 박영효를 중심으로 하는 개혁왕조를 세우기로 당시 개혁세력들과 합의했다.
그러나 사전에 탄로가 나서 이승만은 1898년 투옥되었고, 무기수로 투옥되었다. 옥중에 있을 동안, 이승만은 아펜젤러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게 되자 ?서양의 신이라고 배척했던 예수가 자기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깨닫게 되자, 어둡던 감옥에 밝은 빛이 비취었고, 감옥은 복당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 후 감옥에서 이상재등 당시 양반층 젊은이들을 중심한 동료 죄수들 40명을 전도했다. 이승만은 옥중에서 선교사님들이 차입해 준 미국 대학과 대학원의 많은 분량의 책을 읽었다.
그가 옥중에서 쓴 글 중에는,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국가 설립의 중요성에 대한 논고, 신문출판을 통한 국민계몽의 중요성에 대한 글, 미국의 민주적 교육행정이 나라 발전에 끼치는 지대한 공헌에 대한 연구등이 있다. 특히 마지막 교육에 대한 글은 방대한 자료를 모은 것으로, 하바드대학의 시작과 발전에 대하여 정확하고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쓰고 있다.
이승만은 출옥 후, 고종의 밀사로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호소하는 밀서를 가지고 테오도르 루스벨트대통령에게 전하고자 떠났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워싱턴 죠지 타운 대학 학사 (1907), 하바드대학원 석사 (1908),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박사과정 (1910)을 단시간에 마치는 천재성을 보였다.
1910년 가을 그가 귀국할 때는 한국은 국가 정체성을 잃어 버린 뒤였다. 그는 YMCA 총무로 청년들을 규합하여 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썼으나, 1902년 일본총독부가 조작한 ?105인사건“에 연루자로 지목되자, 이 승만은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국제적 역할을 위해 1902년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그 후, 그는 한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외교노력을 경주했고, 하와이와 미국본토,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를 오가며 한국사람들을 규합하는 노력을 1945년까지 계속하였다.
해방 후 1948년 대한민국에 자유민주주의국가가 수립되고 현재까지 발전하는데는 이 승만이 놓은 청사진이 매우 중요하다. 장기집권과 하야라는 정권말기의 오점으로, 이 승만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너무 과장된 면이 적지 않다.
선교사의 헌신적 전도와 후원 아래 이승만은 그리스도를 믿고, 한국땅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려는 일념으로 평생을 살았다. 인간을 존중하는 민주적 국가의 선명한 청사진을 가지고 평생 이승만이 달려가도록 만든데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같은 헌신적 선교사들을 통한 하나님의 큰 섭리가 있었음을 후대들은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3) 언더우드선교사의 선교 완숙기 (1907-1916, 47세~56세)
언더우드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1911년에 있었던 신구약성경 번역완수 및 출판이다. 성경번역과 그 뒤를 이은 성경출판과 반포는 한국 역사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나라를 잃은 이 땅에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보내사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는 새 역사를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 새 나라에 대한 밝은 비젼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어떤 환란이나 어려움이 닥쳐와도 흔들리지 않고 더욱 견고하게 설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정책으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핍박을 당했다. 그러나 이 기풍, 주 기철, 손 양원등 많은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충성을 바치면서 오히려 믿음이 더욱 견고해져 갔다. 하나님께서 선교 50년된 한국교회에 이렇게 불 같은 연단을 허락하심은 교회를 정결케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마침내 이 땅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다스리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젼으로 견고하게 서가게 되었다. 한글 성경을 가지고 교회마다 열렸던 사경해는 이 땅에 교회가 부흥하는데 큰 밑걸음이 되었다.
이기풍목사를 첫 해외선교사로 제주도에 파송
1907년에 언더우드와 사무엘 마펫은 장로교신학교가 배출한 첫 7명의 목사 중 한 명이었던 이기풍목사를 첫 해외선교사로 제주도에 파송하였다. 한국교회는 시작부터 선교를 중요한 사역으로 설정하였는데, 이는 언더우드가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는 자들을 말씀과 교회개척으로 잘 훈련한 결과였다.
대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끈길지게 요청하여 설립
언더우드는 제물포에 도착한 그때부터 이미, 한국에 대학교를 세워 청년들을 일군으로 만들어 세계로 내어보내야 한다는 비젼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서울에서 선교하면서 그 중요성을 확신하였다.
한편 서울에 대학교 설립을 제안한 언더우드에 대하여, 평양주재 선교사들과 대다수의 당시 주한 선교사들은 반대했다. 이유인즉 한국과 같은 작은 나라에 대학교가 하나 이상 필요없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언더우드는 대부분의 선교사들 주장을, 본부에 보내는 편지에서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평양주재 선교사들과 뉴욕 선교본부는 그의 말에 수긍할 기미를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언더우드는 그의 확신을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수년간 지속적으로 편지나 회의를 통해서, 그리고 여러 가지 자료를 준비하여 서울에 대학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동료선교사들과 미국 뉴욕 장로회 선교회 본부에 인식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수년간 끈질기게 설득하여 마침내 선교부가 서울에도 대학을 허락하겠다고 1914년 승락하여 총독부에 대학 허가 신청서를 내고, 공식적으로 인준받아서 1915년 처음으로 종로 2가 당시 YMCA 건물 이층에서 연희전문학교가 시작되었다.
대학교 설립 과정의 과로로 소천
그의 부인은 전기에서, 또 그 아들 원한경박사는 언더우드의 장례식 후 장로교 본부에 보낸 그의 편지에서, 언더우드가 질병으로 심하게 앓게 된 데는 대학설립허가를 둘러싸고 그가 장기간 논쟁과 설득작업을 하면서, 심적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언더우드가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인허가 받는 과정에서 선교사들과 선교본부로부터 적지 않은 오해와 비방을 감수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언더우드가 자기가 옳다고 확신하는 일을 뚫고 나가는데 어떤 방해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과 용기, 그리고 불굴의 의지가 있었음을 또한 잘 보여준다. 만약 그 때 언더우드가 연희전문을 포기하였다면, 한국이 오늘 도달한 세계적 수준의 기독교 선교 및 기독교 교육, 의료, 문화, 정치, 사회복지 등등 모든 분야의 발전이 가능했을까 묻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 부르신 소명에 죽도록 충성
언더우드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그 뜻을 보이셨을 때, 믿고 순종하며 실천하면서 어떤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목숨도 아깝게 여기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지나친 과로로 언더우드는 1916년 4월 미국으로 귀국한 후, 6개월 뒤인 10월에 소천하였다. 그가 그렇게도 돌아오기를 원했던 한국에 그가 다시 온 것은 1999년 5월 20일로, 그가 양화진에 묻힌 그의 아내와 아들 내외 옆에 다시 이장하게 된 때로, 그가 소천한지 84여년 후의 일이 되었다.
언더우드의 가문은 지난 121년동안 연세대학교를 헌신적으로 섬겨서, 학교의 주요한 역사적 건물을 보면 언더우드가문에서 보내온 헌금을 기초한 것이 많이 있다. 이는 언더우드의 형, 죤 언더우드가 언더우드 타이프라이터를 발명 제작 판매하여, 당시 가장 성공한 실업가로 갑부가 된 데도 이유가 있다. 그 형은 동생의 사역을 돕기 위하여 물심양면 노력하였고, 연세대학교 첫 부지 30만평을 사도록 기꺼이 헌금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