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선교사 · 신앙偉人/언더우드와 그 家門

★ <기획> 탐방4 : 언더우가 기념관

영국신사77 2008. 6. 16. 07:45

                              <기획>탐방4 : 언더우가 기념관
                                                                                                                                                  정희전 기자

 서울 신촌의 연세대 캠퍼스 안에 자리한 언더우드가(家) 기념관에는 4대에 걸쳐 한국을 위해 살았던 언더우드가(家)의 삶과 사역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언더우드가(家)의 3세 원일한 박사가 내어놓은 1930년대 사택 내부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한 이 기념관은 전문가들의 철저한 고증으로 탄생한 귀중한 선교 유적지이다.

                                      신촌 원(元)씨 언더우드가(家)의 믿음의 발자취
 1885년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선교사가 한국에 첫발을 내딛으며 시작된 언더우드가(家)의 사역은 4대에 걸쳐 한국의 교육, 의료, 성경번역, 찬송가 제정 등 다양한 분야에 큰 업적을 남겼다.

 

 언더우드가(家) 기념관은 ‘신촌 원(元)씨’로 불리며, 이 땅에 복음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언더우드가(家)의 귀중한 선교적 모범과 그 업적을 기억하고자 마련한 곳으로, 많은 크리스천들의 신앙에 큰 도전을 주는 곳이 되길 힘쓰고 있다.

 

 2003년 10월 방 한 칸으로 문을 연 이 기념관은 연세 대학교측이 언더우드 가족이 거주했던 사택의 서재를 개조하여 개관한 것을 시작으로, 지난 해 5월 13일 확장·재개관하여 지금은 문헌 자료실을 포함해 1층 전체를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기념관측은 앞으로 2층 건물 전체를 복원하여 연구시설 등을 갖춘 종합 기념관을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곳에는 언더우드가(家) 기념관에는 우리나라에 머물며 복음을 따라 걸었던 언더우드 가문의 발자취가 선명하게 남겨져 있다. 아직도 언더우드가(家)가 살고 있는 듯 따스하게 꾸며진 기념관 내부에는 거룩한 믿음의 가문을 이루어 갔던 그들의 삶의 모습들로 가득하다. 대한제국 말부터 시작된 언더우드 가문의 한국 사랑을 보여주는 각종 편지와 선교사 증명서, 선교사들이 사용하던 서울 지도, 낡은 축음기와 전화기 등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으며, 언더우드 일가의 가족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전시물과 사진들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언더우드 1세의 친필이 선명히 남겨진 한글 교본, 언더우드 2세가 사용했던 찬송가와 책들도 전시되어 있어 언더우드가(家)를 더욱 가깝게 만나볼 수 있고 언더우드 가문이 최초로 제작하였던 다양한 한글 전용 타자기도 변천 과정에 따라 전시되어 있다.

 언더우드가(家)가 남긴 손 때 묻은 물건, 사진과 편지들. 이것들 안에 숨겨진 귀한 가치들이 더 많은 이들을 통해 발견되길 바라며, 4대에 걸쳐 이 땅을 사랑하며 이 땅을 위해 살았던 언더우드가(家)의 모습을 통해,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한국과 한국 교회에 대한 깊은 사랑과 열정을 다시금 채워나가길 기대해 본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생애

                                                                                                             김인수 교수(장로회 신학대학교 역사신학과)

 수 천년동안 어두움에 앉아 있던 이 백성들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복음을 허락하시고 역사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던 배달겨레에게 희망의 내일을 약속해 주셨다. 우리 조상들의 구도(求道)에 의해 시작된 개신교회이지만, 미국을 비롯한 호주, 캐나다 등지의 교회들이 선교사를 파송하여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또 뿌린 씨앗에 물을 주어 길렀다.

 한국의 첫 선교사 언더우드는 한국 선교의 기틀을 잡아 주었고, 한국 장로교회의 기초를 놓았다. 그는 실로 놀라운 열정으로 선교의 모든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고, 그 업적은 한국 교회 역사에 길이 보존될 수 있는 기념비적인 것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한국에 가장 알맞은 재사(才士)를 준비해 두셨다가 선교 초기에 보내 주셨다. 그는 관여하지 않은 선교분야가 없을 정도로 고루 개입하여, 확실한 실적을 남겼다.

 그의 1888년 8월에 쓴 편지에 "한국 같은 곳에서 선교사가 되려면 만물박사(Jack of All Trades)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정말로 한국에서 선교하면서 만물박사로서, 또한 팔방미인(Man of All Seasons)과 같이 일하였다. 그는 일생을 한국 선교에 바친 우리의 친구요, 그 후손들은 4대에 걸쳐 이 땅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한 한국교회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다. 이 글에서는 간략하게 그의 생애를 더듬어 보려 한다.

 안수 받은 목사 선교사로 처음 한국에 발을 디딘 사람 언더우드 (Horace G. Underwood)는 1859년 7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언더우드가 12살 되었을 때에 그의 가족들은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언더우드는 뉴욕대학교를 졸업하고 이어 화란 개혁교회 계통의 뉴 브룬스윅(New Brunswick) 신학교에 입학하여 1884년 봄에 졸업하고, 곧이어 뉴욕대학교에서 문학석사 학위도 받았다. 그 해 11월에는 개혁교회 뉴 브룬스윅노회(The Classis of New Brunswick)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사로 와 달라고 청빙하는 교회도 있었지만, 그는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고 25세의 젊은 선교사로 1884년 12월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이듬해인 1885년 1월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여, 그 곳에 있던 북 장로교회 선교사들의 환영을 받았다. 마침 한국으로 가는 배를 만난 언더우드는 이 배를 타고 한국으로 출발하여 부산을 거쳐 4월 5일 부활절 주일,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이 배에는 전에 미국 신학교 대회에서 만났던 아펜젤러 부부가, 미국 북 감리교회의 파송을 받고 한국으로 가기 위해 탑승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은 아직 선교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보다 7개월 먼저 한국에 도착하여 제중원(현재 세브란스병원 전신)이라는 진료소를 개설하고 일하던 호러스 알렌 의사를 도와 그곳에서 일하면서 한국어를 습득하였다. 이듬해인 1886년 한국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노도사(盧道士)라고 불리던 노춘경(盧春京)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또한 한국에서 처음으로 현재의 새문안교회를 1887년 9월에 창설하여 한국교회 어머니교회 창설을 주도하였다.

 언더우드는 처음으로 한국에 고아원을 설립하고 고아들을 모아 돌보며 성경을 가르치고 교육하였다. 이 고아원은 후에 서울 경신중·고등학교로 발전하였는데, 이 고아원 출신으로는 김규식(金奎植)), 안창호(安昌浩)와 같은 명사들이 있다. 언더우드의 교육선교는 오늘에 세계적인 대학으로 발전한 연희대학(현재 연세대학교)를 1915년에 세움으로 완결되었다.

 언더우드가 한국 선교에 괄목할 만한 일을 많이 한 가운데, 성경번역 사역을 빼 놓을 수 없다. 그는 한국에 완전한 한국어 성경 번역을 위해 성경번역위원회를 초교파적으로 구성하고, 자신이 위원장이 되어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직책을 수행하며 한국성경번역의 기초를 놓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언더우드는 또한 한국에서 문서 선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성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 설립하는 일을 서둘렀다. 1888년 조선성교서회(Korean Religious Track Society)를 설립을 위해 여러 교파들이 연합하여 1890년 6월에 헌장을 채택하고 정식 조직을 하였는데, 이 일을 주도한 이가 언더우드였다. 이 일은 한국에 와서 일하고 있는 모든 선교회(제 7일 안식일 교회 제외)가 이 사업에 동참, 협력하였다.

 언더우드의 문서 선교의 공헌 중 가장 먼저 실시한 일은 사전의 편찬이었다. 일찍이 한국 사전은 가톨릭교회의 불란서 선교사들이 만든 한·불사전이 있었다. 언더우드는 한국어를 습득하면서 가장 필요한 것이 한글사전이라고 생각했다. 「한글자전」(A Concise Dictionary of the Korean Language)을 5년간의 각고 끝에 1890년 일본의 요꼬하마에서 간행하였는데, 이것은 두 부분으로, 첫째 부분은 한·영, 둘째 부분은 영·한 사전으로 나누어 구성하였다.

 

 언더우드가 이 작업을 하면서 겪었던 최대 난점은 한글이 통일된 철자법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또한 언더우드는 처음 한국에 오는 선교사들을 위해 한국어 교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한국어 회화 입문」(Intro duction to the Korean Spoken Language)을 1889년 일본 요꼬하마에서 출판하였다. 이 책은 최초로 만들어진 한국어 입문서로서 후배 선교사들에게 값진 선물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때까지 통일되지 않았던 한국 문법이 제정되는 공헌을 하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성경뿐만 아니라 찬송가 제정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회는 찬송가 출판을 결의하고 언더우드와 감리교회의 존스 (George Herber Jones)에게 이 일을 위임하였는데, 존스는 이 임무를 맡은 후 곧 미국으로 떠났으므로, 언더우드 혼자 이 일을 수행하여 1893년에 「찬양가」를 출판함으로써 한국에 첫 찬송가를 내어 놓은 공헌을 하였다. 이 「찬양가」는 4성부(四聲部)의 악보가 포함되어 한국 교인들이 처음으로 4성부 찬송가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신문 발행에도 크게 공헌하였는데, 1897년 4월에 「그리스도 신문」(The Christian News)을 주간으로 발간하여 교회통신, 공업진흥에 관한 논설, 농사법 개량, 세계 소식과 일반교양 등 많은 기사를 실어 한국교인들의 지적 향상에 크게 공한하였다.

 언더우드는 그의 생애 마지막 사역이었던 연희대학 설립에 온갖 힘을 다 쏟다가, 병을 얻어 미국으로 가서 치료하던 중 1916년 10월 아틀란타 씨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 때 그의 나이 56세였다.

 언더우드는 한국선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을 남기며 고귀한 삶을 살았던 우리 교회의 은인이요, 선교사의 사표이다. 그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믿음의 선배임에 틀림없으며, 그가 일하고 간 이 땅을 위해 또한 이 민족과 교회에 남기고 간 그의 남은 사역을 위해 우리 모두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찾아가는길
지하철
2호선 신촌역 2번 또는 3번 출구로 나와 연세 대학교 방면으로 도보 약 10분, 연세 대학교 내 생활 과학관 뒤편 오솔길 끝자락에 위치
버스
초록 (지선) | 6711 6712 6714 7014 7015 7017 7020 7613 7712 7720 7725 7726 7727 7728 7736 서대문03 서대문04 서대문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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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광역) | 9600 9601 9602 9702 9704 9706 9708 9713

 

 

                                                                                                                         출처;선교타임즈 2007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