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이여"
안녕하십니까 ?
오늘은 우리 민족에게 최초로 선교사로 오신 ,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부르심을 통해서 ,
우리 민족이 복음화 되기를 그 토록 원하셨던 ,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신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 1883년 신학교 연맹 모임에서 조선 민족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지금 조선은, 천 3백만 민족이 복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채, 가난과 질병과 학대 속에서 쓰러져 가고 있습니다. 그 나라가 드디어 작년에 문호를 열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 중에 누군가가 조선 민족을 위해 선교사로 갈 것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
알버트 목사님의 호소력있는 메시지는 많은 신학생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언더우드는 그 당시 인도 선교사로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선교에 대한 강한 도전을 받았으나 , 조선으로 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인도 선교사로 가기 위해 인도말을 자유롭게 구사할 정도로 잘 준비하고 있었던것입니다.
알버트 목사님의 조선 선교의 권유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 언더우드는 개인적으로 친구들에게도 권유해 보기도 했지만, 그들은 다 국내에서만 사역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 왜들 이럴까? 헌신을 맹세한 사람들이 왜들 다 미온적이고 부정적일까? 복음의 처녀지, 주님이 기다리시는 그 땅으로 갈 선교사가 이렇게도 없다는 말인가? "
그때 돌연히 강력한 반문의 소리가 그의 마음을 두드렸습니다.
"너는 왜 못가느냐 ?"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나 자신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주님의 부르심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렇다 왜 나는 못가는가?" 그는 단 한번도 복음을 못들어 본 미전도 종족인 조선민족에게 선교의 우선 순위가 있다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 한번의 희생을 치루기로 하였습니다. 그동안 인도를 위해 인도말을 배우고 준비해 온 것들을, 모두 조선 선교를 위해 포기하기로 한것입니다.
어려운 결단을 하고 , 조선을 선교지로 정하고 나서 교회와 선교부에 조선 선교사로 가기로 요청을 하였지만, 두 번씩이나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조선 선교를 포기하지 않고 , 꾸준히 기도하면서 우여 곡절 끝에 장로교 본부회의에서 조선 선교사로 임명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미전도 종족인 , 우리 민족을 가슴에 품고 설레는 마음으로, 장도의 길에 올랐습니다. 한달 여 걸리는 긴 항해 끝에 , 일본을 거쳐 1885년 4월 2일 부산 앞 바다에 잠시 정박하여, 조선땅과 조선민족을 처음으로 바라보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후 부산을 떠나 삼일 후인 , 4월 5일에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날을, 한국교회는 최초로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날로 정하였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20년 한국 기독교사의 멋진 장을 연 최초의 선교사가 되는 영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 교회를 시작으로 교회개척사역을 하였고,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시작으로 하는 교육사업을 통해서 한국의 젊은이들을 깨워나갔습니다. 그가 우리나라를 위해 이룬 업적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언더우드 같은, 귀한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였고, 그 결과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살 수 있는 축복의 삶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가족은 현재 4대까지 우리 나라를 위해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데 그 가족의 드라마틱한 사역은 다음시간에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아멘 !~~ ( 마태복음 24장 14절 말씀 ) by http://wmc.or.kr
선교사열전(8) -언더우드 목사님의 기도문
뵈지 않는 조선의 마음
<언더우드 선교사>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 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언더우드 목사님의 사역
<언더우드 선교사 일화>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 지난 시간에는 언더우드 선교사님을 우리 민족에게로 부르신, 하나님의 마음과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결단을 통해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이 시간에는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조선 사랑을 실천하는 , 사역들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제물포항에 도착하였습니다.
4살 때부터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선교사의 삶을 준비하며 살았던 언더우드 선교사가 우리 민족에게 온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민족을 사랑하셨는가를 보여주신 표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 인도를 위해 준비했던 그의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하셨고 , 조선으로 그의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선교에도 우선 순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민족에게 생명을 얻게 하는 복음은 다 필요한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단 한번도 복음을 못 들어본 민족에게 그 우선 순위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우리민족은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미전도 종족이었기에 , 하나님은 잘 준비된, 언더우드 선교사를 우리 민족에게 보내셨던 것입니다..
요즈음 선교사님들도, 종종 이런 말을 하십니다. " 선교보다 언어가 더 어렵다"
그 만큼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그 어려운 조선말을 열심히 배웠습니다. 하나님도 그 마음을 아시고 그에게 언어의 은사를 주셔서 선교사님 중에 가장 조선말을 잘 하는 선교사님이 되었습니다. 그는 후배 선교사들을 위하여 한국어 문법과 한영사전을 편찬하였으며, 성경번역 위원으로 조선어 성경을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근대 한국 교육사업에도 큰공을 세웠습니다. 한국에 온 다음해인 1886년에 , 한국의 첫 고아원을 세웠고 , 이어 고아학교를 창설했습니다. 이 학교가 발전하여 서울의 경신고등학교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대학 창립을 마음에 계획하고 , 후에 연희전문대학을 세웠습니다. 그 학교가 지금의 연세대학 인 것입니다.
1887년 9월 27일 , 집 .. 사랑채에서 14 명이 참석하여 첫 예배를 드리는데, 이 교회가 새문안 교회의 첫 예배였습니다. 서상륜과 백홍준이 그 교회 첫 장로가 되고,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서상륜과도 끊이지 않고 연결하여 그를 통해 복음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며 한국교회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잠깐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선교일화를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총각 선교사로 우리 나라에 오셔서, 28세가 되던 해에 8 살 연상인 릴리아스 홀톤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신혼여행은 상당히 흥미가 있습니다. 신혼여행을 전도여행으로 계획하고 평양을 향하여 출발하는데, 그가 머무는 곳마다 조선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서양사람들을 처음 보는 조선사람들은 모두가 신기하여 머리카락을 만져 보기도 하고 , 눈을 뒤집어 보기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곤욕스러운 것은, 밤마다 신혼방에 구멍을 뚫고 쳐다보는 바람에 혼이 나기도 합니다.
그가 의주에 머물고 있을 때, 밤중에 서상륜씨가 찾아와서 지금 세례를 받을 사람이 백(100) 여명 이나 있는데, 세례를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 조정에서 우리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금하고 있으니 줄 수 없다 " 고 거절하자, 서상륜씨는 " 그것은 걱정 없다 " 고 말하면서, " 압록강 저 편은 중국땅이기 때문에 거기서 세례를 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 고 하면서, 세례 주기를 간청하여 그 때 34명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31년간 사역을 하면서 , 종교, 교육, 문예, 자선 등 다방면에 걸친 봉사를 하다가 발진티푸스병이 악화되어, 1916년 4월 요양차 미국으로 떠나게 되는데 ,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뜨게 됩니다.
세상을 뜨기 전 그는 부인을 향해, “내가 저 먼 나라로 여행할 수 있을 것 같소?”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부인이 “거기가 어디예요.한국 말씀이예요?”하고 물으니, 안색이 밝아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고 합니다.
언더우드는 1916년 10월 12일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참으로 조선을 사랑한 선교사였습니다.
저는 작년 ( 1999년 ) 오월 양화진 선교사님 묘지를 가이드 하다가, 언더우드 목사님을 이장[1999년 5월 20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동안 미국에 묻혀있었는데 작년에 이장을 한 것입니다.
거기에도 사연이 있었습니다. 언더우드 목사님의 손자인 원일한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원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뉴욕근처 작은 교회에 묻혀 있던 시신을 한국으로 옮기자는 친지들의 의견이 많았어요.할아버지의 한국 사랑의 정신을 기리자는 것이었죠.하지만 할머니는 그 이장 비용으로 차라리 한국에 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반대의견을 내셨어요”
결국 언더우드목사의 부인이며 한국 최초의 여성 의료선교사였던 릴리아스의 뜻에 따라, 한국에 유치원이 세워졌던 것이었습니다. 그 후 이장문제는 오랫동안 거론되지 않다가, 연세대학교의 배려로 1999년 5월 이장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 가족은 지금 5대까지 한국에 머물면서 한국사랑을 실천하고 계십니다. 저는 언더우드 선교사님 가족 묘지를 보면서 큰 감동을 받습니다. 묻혀있는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가족들에게도 감동을 받지만 , 그 곳에 묻히기를 원하는 손자, 증손자의 빈 무덤 터가 더 큰 감동을 줍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 가족은 대를 이어 우리 나라 땅에 묻히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희생의 삶이 있는 현장이 우리 나라 땅이었고 우리 민족이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에게는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헌신적인 삶이 있었기에 120 년의 짧은 기독교 역사지만 , 그 속에서 주님은 크신 일들을 이루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생명을 소유하게 된 사실입니다.
지금도 주님의 최대관심은 단 한번도 복음을 못 듣고 죽어가는 8000 여 미전도 종족에게 있습니다. 우리도 단 한번도 복음을 못듣고 죽어가는 미전도종족을 향해 반응하는,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
(마태복음 24장 14절)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