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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선교역사] Rev. H. G. Underwood 의 입국

영국신사77 2008. 6. 10. 15:22

[장로교  선교역사]

                      Rev. H. G. Underwood 의 입국

Rev. H. G. Underwood

  언더우드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날 제물포에 도착했다. 동일한 증기선인 Tsuruga Maru에, M.E. Mission 소속 아펜젤러와 Drs.Scudder 그리고 한국을 보러왔던 일본 장로교 선교 소속인 테일러가 동승했다. 그들은 Daibutsu Hotel에 머물렀다. 서울에 가려는 한 여자와 많은 대립이 있었고, 그래서 아펜젤러는 두 달 동안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C.H. Cooper가 언더우드에게 서울로의 육로 여행을 주선했다.


   
 

  어떻게 언더우드가 한국에 왔는가 하는 이야기는 선교 이야기 중 가장 흥미로운 것 중의 하나이다. 그는 일본의 Dr. Oltsman이 New Burnswick Theological Seminary의 학생들에게 한 연설을 들으면서 한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비록 그는 인도에 자원했지만, 한국에 갈 사람을 찾기로 결심하였다.

  한국에 갈 사람을 찾지 못하면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왜 너는 아닌가?” 후에 그 해에 그는 Reformed Board에 두 번 그리고 Presbyterian Board에 두 번 지원을 했다. 그러나 모든 문이 닫힌 듯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뉴욕 개혁 장로교의 목사직 요청에 수용 편지를 썼고, “한국을 위해 한 사람도 없는가? 그럼 한국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음성을 들으면서 편지를 보내려 하고 있었다.

  그는 편지를 취소하고 다시 한번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New York Centre St 23번지에 있는 장로교 위원회 사무실에 갔을 그 때, 그는 한국 선교 시작에 호의적이던 Dr. Ellinwood 뿐만 아니라 그러한 목적을 위해 이미 받아놓았던 Mr. McWilliam의 선물도 만나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1884년 7월 28일에 그의 약속을 받았고,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일본에 도착하여, Dr. J.C. Hepburn의 집에 환대를 받았다.

  영국 여행을 한 1884년 여름 동안, 영국에서 태어나고 그의 아저씨라 부르는 런던 선교회의 Rev. Edward Jones는 말했다. “한국! 한국! 내가 알기로는 우리가 20년전에 한 사람을 보냈고, 그 후로 아무 소식을 듣지 못한 나라, 그 나라를 보게 해다오”(R.J.Thomas 목사를 말한다.)

 

  언더우드가 뉴욕에서 한국을 향해 떠날 때, 그의 형 Mr. John T. 언더우드가 시카고까지 동행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선교사역에 동역관계를 시작했다.

  거의 반세기동안, 그의 형 John T.Underwood는 한국 사역을 위해 돈과 기도 그리고 힘을 계속하여 지원을 했다. 언더우드는 한국에 오기 전 일본에 있는 두 달 넘도록 그 곳에서 선교사들을 알게 되었다. 마가복음 번역을 한국에 들여온 Rijutei(이 수정)이라는 사람을 포함하여, 몇몇 한국인들을 만났고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일년동안 의학을 공부하고 서울에 도착한 후, 때때로 그는 수술 도중에 졸도를 해서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간호를 받았지만, 알렌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병원일과 언어 공부 외에, 첫 해에 다른 일을 시작했다. 그는 현재 M.E. Mission의 Gray House 터에 주거지를 구입할 수 있었다. 삼 백년 된 한국 집들이 외국식으로 개조되었다.

  1886년 4월 10일, 그는 병원과 연계하여, 의료 수업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Harpers Magazine의 대리인인 한 젊은 미국인을 간호했다. 그는 천연두로 죽었다.

 

  1886년 여름동안 서울에 콜레라가 만연했고 그 때 언더우드의 요리사가 오후에 부엌에서 죽었다. 집에 있던 손님들은 저녁이 정확하게 준비된 것에 놀랐다. 또한 그 해에, 알렌 부인의 도움으로 고아원 아이들로 이루어진 교육 사업이 시작되었다.

  또한 1886년 7월 11일, 첫 번째 한국 성인 세례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그 지원자는 No Tohsa였고 알렌의 언어 교사였다. 나중에 M. E. Mission의 Dr. Scranton의 선생이 되었다.

 

  언더우드는 그의 “회고록”에서 말했다. “우리 사역과 기도의 첫 번째 열매인 이 사람을 보면서, 우리의 믿음은 강해졌고, 우리의 열정은 활기를 띠었고, 우리는 그 뒤에 이어질 다른 사람들에 대한 비전을 볼 수 있었다.”

1934, Harry A. Rhodes,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번역감수: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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