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한국선교를 위한 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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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교를 위한 노력 견미사절단이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선교의 전기는 너무도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첫 번째 사건은 조선:은둔의 나라(Corea:The Hermit Nation)로 널리 알려진, 미국의 한국 전문가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와 귀국을 준비하고 있는 견미사절단과의 만남이었다. 1883년 11월 27일 저녁 그리피스는 빅토리아 호텔에서 귀국을 준비하고 있는 민영익과 서광범을 만났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902년, 조선:은둔의 나라 개정판에서 그리피스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1883년] 11월 27일 필자는 [뉴욕]빅토리아 호텔에서 민영익, 서광범, 그리고 변수(Pien Su)와 즐거운 저녁을 지냈다. 나중의 두 신사는 상당한 일본어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비록 많은 질문에 답변을 했고, 상당한 주제들이 논의되었지만 한국의 기독교나 혹은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에 대해 아무것도 배울 수 없었다. 며칠 후 견미사절단은 미 해군 트렌톤(the U.S.S.S. Trenton)호로 서울의 미국 공사관 해군 무관, 포울키(G. C. Foulke)와 버네이돈(Lieutenant Bernadon)을 대동하고 유럽과 수에즈 운하를 경유하여 돌아가기 위해 조국을 향해 떠났다.
그 현장에 배석한 포울키 공관의 도움으로 이 낯선 한국인들과의 첫 만남의 자리에서의 대화는 어색하지 않았다. 당시 그리피스는 한국에 대한 두 번째 작품, 한국, 국내외(Corea, Without and Within)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비록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직접적인 결실을 얻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민영익과 서광범은 그리피스에게 한국에 대한 관심을 더욱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두 번째 계기는 하버드대학 교수이며, 국교수교와 관련된 특별 책임을 맡은 로웰(Percival Lowell)이 홍영식과 함께 한국에 입국하여“왕의 손님”으로 그 해 겨울을 서울에서 보내면서 한국에 관한 탁월한 입문서, 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Chosön, the Land of Morning Calm)를 저술한 것이다.
세 번째는 견미사절단과 감리교 목사 가우처의 만남이다. 시카고에서 하루를 묵은 뒤 이들 일행을 태운 기차가 백악관이 위치한 워싱톤을 향해 달리고 있을 때 그 기차 안에는 한국선교를 애타게 기다리던 미국 감리교 목사 가우처(John Franklin Goucher, 1845-1922)가 타고 있었다. 이미 출판된 하멜표류기, 몇 종의 조선 항해기, 그리고 1882년에 출판된 그리피스의 조선:은둔의 나라(Corea:The Hermit Nation) 등을 통해 조선에 대해 어느 정도 사전 지식을 습득한 것으로 보이는 가우처는 기차 안에서 견미사절단을 만나 3일 동안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국선교를 백방으로 모색하게 되었다. 1년 전 조선이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가우처 목사는 견미사절단의 일행으로부터 조선에 대한 선교 가능성을 확인하고 1883년 11월 6일 감리교 해외 선교부의 파울러 감독(Bishop C. H. Fowler)에게 “만일 은둔국인 한국에 선교사업의 정책을 세울 수 있다면 한국에서의 선교는 영구히 확립될 것이다”라며 한국선교를 위해 2,000불을 동봉한 긴 편지를 보냈고, 후에 3,000불을 더 추가하여 한국선교를 강하게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1885년 그리피스가 한국, 국내외(Corea, Without and Within)에서 지적한 대로“1883년 가을에 뉴욕의 감리교 해외선교위원회는 한국에 선교를 착수하기 위해 5,000달러의 선교비를 전용할 수 있었다.”그러나 가우처 목사는 현재로서는 시기상조라는 말을 듣고 1884년 1월 31일 다시 자신의 지우(知友) 일본주재 미 북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Robert S. Maclay, 1824-1907)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토록 요청했다: 당신은 한국을 여행해 그 나라를 답사하고 선교부를 설치할 만한 시간을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교도 땅에 최초의 개신교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일본이 그 영예스러운 일을 맡아야만 한다는 것은 아주 적절한 것이며 당신이 그 사역을 개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당신이 교회에서 지금껏 해온 봉사에 걸맞는 보탬이 될 것입니다. 부탁을 받은 맥클레이 선교사 부부는 이것을“하나님의 소명”(a Divine call)으로 받아들이고 한국선교를 타진하기 위해 1884년 6월 19일 나가사키(長崎)항을 떠나 그 달 24일 제물포항에 입국했다. 단 한 명의 개신교 선교사도 받아들이지 않은 조선에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한다는 것 자체가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었다. 다행히 이 문제를 주일 미국공사 존 빙험(John A. Bingham)과 주한 미국공사 루시우스 푸트(Lucius H. Foote)와 상의한 결과 “실행 가능한 운동”이라는 답을 얻었고, 또 그와는 별도로 한국 일각에서 복음을 위한 준비 작업이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가 파송한 나가사카(長坂)가 1883년 6월 부산에 입항하고, 이어 1884년 4월 일본 요코하마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 오스틴 탐슨(J. Austine Thomson) 부부가 일본인 미우라(Miura), 스가노(菅野) 부부와 함께 한국을 방문하였고, 두 명의 일본인들은 여러 해 동안 한국에 거주하면서 매서인으로 활동하는 등 한국선교를 위한 노력은 꾸준하게 준비되고 있었다. 그 후 이들 일본인 사역자들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요원 자격으로 얼마동안 부산에 정착한 것으로 보이며, 오스틴 탐슨은 1885년 7월에 다시 서울을 방문하여 한국선교를 위해 계속 노력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스가노(菅野)가 1889년에 부산에서 세상을 떠났고, 미우라(三浦) 역시 사역을 그만두면서 안타깝게도 한국에서의 이들의 선교사역은 중단되고 말았다. 1884년 1월 미국 감리교 주간지, 어드버케이트(The Advocate) 주필을 맡고 있는 제임스 버클리(James M. Buckley)가 한국에 관한 기사를 무려 15회나 기고하여 한국선교의 분위기를 고조시켰으며, 그 결과 오하이오주의 슬로콤(J. Slocam)이 1천 달러를 헌금하고, 캘리포니아에 아홉 살 난 소녀가 9달러를 헌금하여 한국선교에 대한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제물포에 상륙한 맥클레이는 이에 대한 도움을 구하기 위해 제일 먼저 일본 영사 고바야시(小林)를 방문했다. 고바야시가 불러 준 가마를 타고 서울을 향해 떠난 맥클레이 선교사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6월 24일 저녁 6시였다. 미국 공사 푸트와 그의 아내의 영접을 받은 맥클레이 선교사는 푸트가 공사관 옆에 마련해 준 숙소에서 여장을 풀었다. 맥클레이는 여독을 풀 겨를도 없이 한국 방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서울주재 해외 공관들의 협력을 구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영국 영사 애스턴(W. G. Aston)과 일본 대리공사를 방문한 맥클레이는 1881년 이후부터 외위문(the Corea Foreign Office)과 해관 고문으로 있는 실력자 묄렌도르프(Paul G. von Möllendorf, 1848-1901)를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했다. 이들의 영향력은 대단했지만, 막상 고종으로부터 해외선교 윤허를 받아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만큼 위험이 따르는 문제였다. 이 과정에서 다리 역할을 해준 사람은 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김옥균이었다. 맥클레이는 오늘날 외무부에 해당하는 외위문 주사 김옥균을 통해 자신의 한국선교에 대한 청원을 올렸는데 즉시 면담이 허락되어 7월 3일, 청원 3일 만에 고종으로부터 병원 선교와 교육을 허용한다는 회답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한국선교의 장은 열리게 된 것이다. 7월 8일 한국 방문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간 맥클레이는 이렇게 기록했다: 기독교 선교사로 서울에 들어오기는 내가 처음인데, 내가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다행히 김옥균이 일본에 있을 때에 우리 내외와 친교를 맺었던 일이 있었는데 그가 한국 정부 외위문 주사였으므로 6월 30일에 내가 한국에서 기독교 사업을 하려는 목적을 분명히 설명한 편지를 주고, 그 일을 대군주 폐하께 상주(上奏)하여 달라고 김옥균에게 간청했다. 7월 3일에 내가 김옥균을 다시 방문한즉 그가 말하기를 “그 편지를 대군주 폐하께서 신중히 살피시고 한국에서 교육과 의료사업을 하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했다. 그날 오후에 김옥균이 찾아와 우리가 한국으로 오는 것을 깊이 환영한다고 말했다. 외무부 외위문 주사 김옥균을 통해 고종으로부터 의료 선교와 교육 선교는 해도 된다는 답을 얻어 낸 맥클레이는 이 소식을 가우처에게 전달했고, 가우처는 다시 감리교 선교부에 알렸다. 이렇게 해서 1884년 북감리교 보고서가 지적한 대로 이교의 나라 한국에서“복음화라는 원대한 목표를 숨기지 않은 채 교육 및 의료사업을”시작할 수 있는 틀이 마련된 것이다. 맥클레이 자신의 고백처럼“이 같은 윤허는 주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강물처럼 왕의 마음이 주의 손”에 달려 있어“주님은 그가 원하시는 곳 어디로든지 왕의 마음을 돌리신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일본으로 돌아간 맥클레이는 이수정에게 감리교교리문답을 한글로 번역하도록 부탁하여 아펜젤러가 일본에 도착할 무렵 1천부를 발행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한국선교를 준비했다. 한국 정부가 해외선교에 문호를 개방했다는 사실은 1884년 9월 4일자 미국 공사 루시우스 푸트가 보낸 서신에서 재확인되었다: 기독교 사업에 대하여 정부 당국에서도 아무 반대가 없을 뿐더러 당신이 떠나간 뒤에 대군주 폐하(고종)께서 확증하는 말씀을 들었는데 서울에서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할 뿐 아니라 은연중에 권장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해서 그리피스가 지적한 것처럼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감리교는 장로교보다 더 먼저 한국 땅에 도착했고, 한국 정부에 의해“국가 발전의 새 길에 반려자(helpers)”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공식적인 고종의 윤허까지 받은 한국선교는 처음부터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미 감리교 선교부는 맥클레이의 편지를 받고 한국선교를 호소하는 글들을 감리교 선교지 가스펠 인 올 랜드(The Gospel in All Lands)에 실었다. 선교지에 실린 한국선교를 호소하는 서신을 보고 한국선교를 위해 선교헌금이 각지에서 답지했다. 상황이 이렇게 급진전되자 감리교 선교부에는 더 이상 한국선교를 지체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감리교 선교부에서는 의료 선교사로 파송하기 위해 오하이오 클리블랜드(Ohio Cleveland) 출신 스크랜톤(William Benton Scranton, 施蘭敦, 1856-1922)과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톤(Mary Fitch Scranton, 1832-1909), 그리고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를 선교후보생으로 내정하고 한국선교를 가속화시키기 시작했다. 이런 한국선교의 움직임은 감리교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미감리교에서 한국선교를 추진하고 있는 동안 북장로교 안팎에서도 한국선교가 놀랍게 준비되고 있었다. 그리피스가 정확히 관찰한 것처럼 미장로교의 한국선교 준비는 세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첫째는 일본에 있는 장로교 선교사들의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 몇몇 한국인들과 상당히 영향력 있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이들 중의 한 명인 이수정이 미국인들에게 자신의 동족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해 달라고 감동적인 호소를 청한 것이었으며, 셋째는 한국선교 개시를 위해 미국에서 거의 1만 불의 선교헌금이 모아졌다는 사실이다. 앞의 둘은 일본에서 진행된 준비였지만 세 번째는 미국 내에서 진행된 선교의 움직임이었다. 이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대표적인 인물이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 총무 엘린우드(F. F. Ellinwood)였다. 그는 아직 조선의 선교는 시기상조라는 해외 선교부 위원들의 의견을 일축하고 조선선교를 지금 시작할 때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선선교를 호소했다.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 엘린우드 당시 일간 신문은 한미조약이 체결된 후 1883년 9월 미국에 도착한 한국 공사를 대통령 아더(Arthur)가 뉴욕과 워싱톤에서 영접하는 기사를 게재해 한국선교의 중요성을 환기시켜 주었다. 얼마 후 이수정이 한국선교를 호소하는 편지를 유력한 미국 선교지에 기고해 한국선교의 긴박성을 미국인들에게 더욱 일깨워 주었다. 거의 같은 시기 일본에서 활동하는 조지 낙스(George W. Knox)와 중국에서 활동하는 길버트 리드(Gilbert Reid)로부터 한국선교를 촉구하는 서신이 선교부에 도착했다. 일본주재 조지 낙스 선교사는 한국선교의 즉각적인 점유를 촉구하는 장문의 서한을 보내 한국선교를 공식적으로 요청하고 나섰다: 한국 수도에는 영국 출생의 중국인 몇을 선생으로 초빙하여 영어학교를 설립하였는데, 벌써 70명의 학생이 수용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목적은 조속한 시일 내에 미국인 선생이나 영국인 선생을 초빙하자는 데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서양학문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동경 시에는 일본어와 영어와 각종 기술을 배우는 한국 학생들이 적어도 30명은 되며, 저번에는 본인이 편지한 바와 같이 그 중 두 학생이 세례를 받았으며,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선교사업을 개척할 뜻을 가진 사람이 없는가요? 미션스쿨을 설립하기만 하면 설립하기가 바쁘게 큰 성과를 거둘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목사 두 사람과 의사 한 사람만 있으면 사업 개척이 충분할 줄 압니다. 의사는 신개지(新開地)와, 그의 도움을 열광적으로 받으려는 민중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될 수 있으면 수도에 학교를 속히 설립하십시오. 수도에 설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거기서 20리만 떨어져 있는 [제물포]항구에 설립하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明春 4월에는 선교사가 그 나라 땅에 상륙하여야 됩니다. 이 선교지를 열기 위하여 우리 교회가 세 사람을 보낼 수 없는지요? 만약 우리 교회가 할 수 없다면 다른 교회에서라도 이 부름에 응답할 수 없는지요? 낙스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핵심 내용이 압축되어 있었다. 조선선교는 지금 시작해야 할 때이며, 조선선교는 직접 선교를 하는 것보다 의료 및 교육을 통한 간접선교로 시작해야 되며, 그리고 선교 거점으로는 한양 아니면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제물포로 정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낙스는 은둔의 나라 조선이 미국과 조약을 체결해 문호를 개방했고 또 이수정을 비롯한 30여 명의 조선의 젊은이들이 일본에 체류하면서 일본어, 영어, 기술을 배우는 가운데 서양의 종교와 문물과의 접촉을 통해 기독교에 대해 마음의 문이 열려 있다는 사실에 적지 않은 자극을 받은 것이다. 비록 실현되지 못했지만 조지 낙스는 1883년 11월에 선교를 타진하기 위해 한국에 입국할 계획을 세울 정도로 한국선교에 관심이 많았다. 그가 1884년 9월에 훠린 미셔너리(The Foreign Missionary)지에“한국의 상황”(The Condition of Corea)이라는 글을 발표해 한국선교를 촉구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거의 같은 시기 조선선교를 촉구하는 편지가 중국에서도 날아들었다. 중국 지푸(Chefoo)에서 활동하고 있던 북장로교 길버트 리드(Gilbert Reid) 선교사는 1884년 4월 14일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조선선교를 강력히 촉구한 것이다: 나는 지금도 역시 한국선교지의 즉시 점유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나의 의견은 일본 측에서, 중국 측에서, 만주 측에서, 그리고 한국 측 자체로부터 얻은 실정 보고에 의하여 된 것입니다. 나의 의견은 귀하가 일찍이 귀하의 편지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선교사로서가 아니라 교사와 의사의 자격으로 선교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사와 의사는 모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와야 할 것입니다. 즉 교사는 영어를 가르치기에 충분한 서적을 가지고 와야 할 것이며, 의사는 각종 약품과 의료기를 장만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오면 부임 즉시로 민중들의 존경을 받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서 섣불리 일하다가는 의심을 받지 않으면 멸시를 받을 것입니다. 올해 가을에는 그와 같이 잘 준비된 사람 두 명을 꼭 파송해 주십시오. 외국인들이 벌써 서울과 기타 항구에 모여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외국인들은 그 좋지 못한 행실로 해서 서양문명의 명성에 지대한 손해를 줄 것이므로 즉시 기독교의 청신하고 자선적이고 현명한 활동으로써 제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상업이 먼저 가고 전도는 뒤떨어져서야 되겠습니까? 만약 전도를 계획한다면 지금부터 곧 시작해야 합니다. 물론 확고한 방침을 가지고 또 하나님의 섭리대로 해야 될 것입니다. 한국이 독일과 영국과 더불어 체결한 조약에 외국인은 개항지(開港地)에서 예배할 수 있게 인정되었으니, 병원사업과 영어교수는 각국(各國)인들의 환영은 물론이고 많은 본토민들의 기대에 응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에 우리 미국 공사가 한 분 가 있고, 영(英)영사는 금방 떠났습니다. 만약 사람을 곧 파송하여 몇 달 동안 일본에 있으면서 거기 있는 선교사들과 한국인들과 의논하고 연구한다면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될 것입니다. 현재에 있어서는 선교사의 근거지로서가 아니라 병원과 학교사업의 근거지로 점유해야 할 것인데, 자리 잡을 위치에 대해서는 물론 서울이 아니면 서울에 가장 가까운 데 있는 항구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의사의 봉급은 거기 있는 거류민의 여료비(旅療費)로 대부분 충당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들의 편지는 앞서 언급한 1884년 3월 세계적인 선교지 미셔너리 리뷰(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실린 이수정의 편지와 더불어 미국 각 교단의 해외 선교부와 선교를 지망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한국 선교열을 촉구하는 귀한 서신이었다. 한국선교를 요청하는 세계적인 선교지에 실린 이들의 글들은 백낙준(白樂濬) 박사의 말을 빌리면“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조지 매큔(George S. McCune)이 지적한 것처럼, 한편으로 장로교 선교부로 하여금 한국선교를 준비하도록 촉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한국선교를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들의 편지와 한국선교 호소는 감리교의 가우처 목사와 장로교의 엘린우드(F. F. Ellinwood)의 노력으로 진행된 기왕의 한국 선교열을 더욱 저변 확대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 고무되어 뉴욕 라파이에트(Lafayette) 장로교회 교인이며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 부원이었던 맥윌리엄스(David W. McWilliams)는 해외 선교부 총무 엘린우드에게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게 하였다. 엘린우드로부터 조선선교의 긴박성과 필요성을 확인한 맥윌리엄스는 1884년 5월 1일 두 사람의 선교사가 2년 동안 선교 활동을 할 수 있는 선교비 5천 달러를 북장로교 선교부에 보냈다. 이런 일련의 노력들이 한데 어우러져 한국선교는 미국의 대표적인 개신교 교단인 장로교에서 범교단적인 차원에서 추진될 수 있었다.
선교비의 지원을 받은 엘린우드는 구체적으로 한국선교 후보생을 물색하기 시작해 1884년 4월“목사의 아들로 영국에서 태어나 테네시 메리빌대학(Maryville)을 마치고 테네시대학 의대를 졸업한” 훌륭하고 헌신적인 의사 존 헤론(John W. Heron)을 북장로교 파송 조선선교후보생으로 임명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헤론이 1885년에 6월에 입국했지만, 1884년 9월에 입국한 알렌이나 그 이듬해 입국한 언더우드보다도 먼저 한국 선교사로 내정된 조선의 첫 선교후보생이었다. 헤론은 일본에 주재하면서 한국어를 배우는 한편 조선의 입국을 준비하도록 조치되었기 때문에 갑자기 조선행을 결정한 알렌이나 언더우드보다 늦게 조선에 발을 내딛은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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