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한국교회사] (8) 한국기독교의 첫 순교자 토머스 | |||||
[국민일보 2001-03-14 10:34] | |||||
한국의 선교에 대한 열정은 그 누구보다도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외국 선교사들이 강했다.이중 중국 상하이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토머스(R.J.Thomas) 선교사는 한국 선교를 위해 평양에서 순교함으로써 한국에 기독교의 첫 씨앗을 뿌렸다.토머스는 1863년 영국 하노버 회중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부인과 함께 1863년 여름 중국 상하이에 도착했다.그 곳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지 얼마 안 된 1864년 부인 캐럴라인이 그만 사망하고 말았다.이에 충격을 받은 토머스는 잠시 런던선교회를 떠나 중국 지푸(현 산둥성 연태)로 올라가 그 곳에서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 윌리엄슨(A.Williamson)을 도우면서 성서 반포에 일익을 담당하였다.이때 한국에서 건너온 김자평 최선일 두 천주교 신자를 만나게 되었다.이들은 예수의 십자가상과 묵주를 손에 들고 있었다.뜻하지 않게 천주교 신자를 만났던 토머스는 그들과 대화하는 중에 이미 한국에 천주교 신자가 있음을 알고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토머스는 윌리엄슨의 도움으로 한문으로 된 성경을 이들에게 전해주었으며,성경을 받았던 일행은 너무 기뻐서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다.이러한 광경을 보았던 토머스는 곧 번역된 한문 성경을 한아름 안고 한국인의 안내를 받으면서 지푸를 떠나 한국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었다.그는 황해도 앞바다에 널려 있는 여러 섬을 다니면서 성경을 배포하였다.성경을 받은 사람은 모두 다 얼굴에 기쁨이 가득 차 있었다.이렇게 2개월 반 동안의 선교여행을 마친 토머스는 서울에 있는 국왕을 만나 선교를 시도하려고 하였지만 폭풍 때문에 이를 단념하고 중국 베이징으로 올라갔다.이곳에 머물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한국선교에 대한 열정을 강하게 느꼈다. 런던선교회 선교사로 복귀한 토머스는 베이징에서 선교사로 재임명을 받고 북경대학 학장 대리로 머물게 되었다.그는 베이징에서 뜻하지 않게 한국에서 외교사절인 부연사행 사절로 왔다는 정부 고급관리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이중 평안도 감사 박규수에게 성경을 전하면서 “귀국도 이 책을 받아 그대로 실행하면 많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그는 다시 부탁하기를 “내가 평양에 가게 되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협조해 주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이렇게 간절한 마음을 갖고 있던 토머스는 한국에 기독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지푸로 돌아와 윌리엄슨과 의논하고,한국 선교에 대한 열정을 기도로 승화시켰다. 이 무렵 지푸에서는 한국에 가려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있었다.좋은 기회라 생각한 토머스는 즉시 윌리엄슨 총무에게 이야기하여 많은 성경을 싣고 1866년 8월9일 선원들과 함께 지푸를 떠나 한국으로 향했다.이때 지푸 부두에서 기도했던 내용을 오문환의 저서인 ‘도마스 목사전’에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평안케만 마옵시고 피를 흘려 죽는데 이를지라도 주의 사업에 유익이 된다면 사양치 않겠나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토머스 선교사는 순교를 각오하고 떠났다.이미 토머스는 한국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핍박받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이러한 기도를 남긴 그는 대동강 하구에 자리잡고 있는 보산에 도착하자 병사들의 사격을 받기도 하였다.이때 사격중지를 요청하고 상업차 오는 배라고 설명을 하자 곧 사격은 멈췄다.곧 배는 그 옆에 있는 포리를 향해 올라갔으며,포리에 배를 정박해 놓고 그곳 주민들에게 500여권의 성경을 배포하였다.이곳 주민들은 자신들이 천주교인임을 손짓으로 알리자 토머스는 곧 그들을 배안으로 영접하고 그들을 극진하게 대접하면서 서로 한자로 대화를 나누었다.그는 석호정을 거쳐 만경대에 상륙하여 성경책을 나누어 주면서 전도를 하였다.다시 대동강 상류에 있는 양각도까지 올라갔으나 모래톱에 좌초되었다.비 때문에 불어 났던 대동강물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검문을 받을 때마다 긴장이 고조되었다.토머스는 몇 번이고 기도하면서 자신은 천주교가 아니고 예수교임을 설명하면서 예수교를 전파하러 왔다고 밝혔다. 그러나 토머스가 타고 왔던 배가 무장된 것을 본 한국 병사들은 놀라고 말았다.이때 평양성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배를 향하여 포문을 열어 활과 총을 쏘았다.공격이 더욱 거세지자 배에 머물고 있던 토머스는 한손에 백기를 들고 다른 한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하선하였다.어느 군졸은 칼을 뽑아 들고 토머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오문환은 그의 저서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그동안 토머스는 두 무릎을 모래사장에 꿇고 머리를 숙여 땅에 댄 후 얼마동안 최후의 기도를 올리고 다시 일어나서 군졸에게 성경 받기를 권하였으나 그 군졸은 그의 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을 것도 사실이려니와 환경이 그것을 허락지 않는 지라 마침내 칼을 그의 가슴에 대어 하나님의 충복(忠僕) 토머스 선교사의 귀여운 생명을 빼앗고 말았다” 1866년 9월4일 토머스 선교사는 27세의 나이로 한국 선교를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이때 토머스는 자신을 향해 칼을 내두르는 군인들에게 성경을 전하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외쳤다 하니,그가 얼마나 한국을 사랑했는지 잘 입증해 주고 있다. 토머스 선교사가 순교하고 미국 상선 제너럴 셔만호가 전소된 사건이 미국에 알려지게 되었으며,미국은 이를 보복하기 위해 한국에 미국 군함을 보내 신미양요를 일으켰다.이 일이 있은 지 10년 후인 1876년 평안도 의주 청년들이 중국을 드나들면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건이 일어났다.참으로 성령의 역사는 토머스 선교사의 순교를 통해서 복음의 불모지였던 한국에 복음을 가져왔다. 토머스 선교사를 최초로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영국 버밍햄 대학 신학부에서 Th.D.학위를 받았던 고무송 목사(기독공보사장)는 “토머스 선교사의 순교 자체가 훌륭한 선교였다”고 말한다.이러한 면에서 토머스 선교사는 높이 평가할 만한 훌륭한 선교사였으며,해외선교는 물질이 아닌 몸으로 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김수진 목사 예장통합·교회사학자 |
[新한국교회사] (9) 로스 선교사와 의주 청년들의 개종 | |
[국민일보 2001-03-21 10:30] | |
로스는 고려문에서 많은 한국인들에게 한문성경을 팔면서 전도를 하였지만 그 누구도 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뜻하지 않게 50대로 보이는 한 한국인 상인이 찾아오게 되었다. 로스는 그에게서 한국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며 잠시였지만 한국어의 어법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 그에게 성경을 전해 주었다. 훗날 그의 아들 백홍준은 로스에게 세례를 받는 기적도 일어났다. 로스는 1876년 4월 2차 선교여행시 다시 고려문을 방문했다. 한국 선교에 열망을 품고 있던 로스는 중국인에게 한국어를 배울 수 있게끔 한국인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한 일이 있었다. 이 무렵 뜻하지 않게 평안도 의주 청년 이응찬을 소개받게 되었다. 이응찬은 배에 물건을 가득 싣고 압록강을 가로지르면서 다니던 상인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풍 랑을 만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배에 실었던 물건을 압록강에 다 버리고 파도에 떠밀려 겨우 몸만 살아 중국에 도착하였다. 이때 중국인의 소개로 로스를 만나게 되었으며 로스는 이응찬을 하나님이 보낸 사람으로 여기고 그에게서 한국어를 배우게 되었다. 로스는 한글성경을 출판하기 위해서 계획을 세워놓고 기도하던 중에 이응찬을 만났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로스는 이응찬으로부터 한글과 한국역사를 배우고 이응찬은 로스로부터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배우게 된다. 그후 이응찬은 자신의 절친한 고향 친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을 로스 선교사에게 소개하였으며 이들도 로스와 매킨타이어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첫 한국인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이들의 선교 사역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들은 함께 나누면서 요령성의 행정중심지인 심양으로 옮겨갔다. 로스는 곧 심양에 자리를 잡고 이응찬의 도움으로 1877년 기초 한국어 교재를 상해에서 발간하게 되었다.그리고 1878년 봄에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서를 번역하였다. 의주 청년 서상륜?^경조 형제는 홍삼 장사차 영구에 왔는데 서상륜이 갑자기 알 수 없는 열병에 걸려 위독하였다. 이때 어느 중국인의 안내로 영구미션병원에 입원하여 헌터 의료선교사를 만나 겨우 생명을 건질 수 있게 되었다. 이곳에서 선교사의 은혜로 병을 낮게 된 서상륜은 매킨타이어를 만나 예수를 믿게 되었으며 그후 로스에게 소개되어 그를 도우면서 누가복음을 번역하였다. 여기에 영원히 남길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과 함께 서상륜과 서경조가 합세하자 그 힘은 어느새 하늘을 나는 새도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한국 선교에 정력을 쏟게 되었다. 신앙고백을 했던 서상륜 형제도 로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로스는 상류층이 볼 수 있는 한자성경이 아니라 절대 다수의 국민이 볼수 있도록 한글 성경번역이 더욱 시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스는 하루빨리 예수를 한국인들에게 전하기 위해 복음서 번역에 최선을 다했다. 드디어 로스와 평안도 의주 청년들의 수고로 1882년 봄 심양에서 한글로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출판됐다. 이 얼마나 장엄한 드라마였는가! 복음서가 출간됐다는 소식을 접한 이성하는 로스에게 찾아가 곧 매서인으로 자원하여 복음서를 한아름 안고 고향으로 달려갔다.그러나 막상 압록강을 건너려고 하였지만 경계가 너무 심하여 도저히 건널 수 없었다. 그러나 며칠이고 강가에 나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건너려고 하였지만 여전히 경비가 삼엄하였다. 여러달을 여관방에서 기도하면서 때를 기다렸지만 여전히 경계가 심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 된 그는 복음서를 짊어지고 압록강가로 가 기도한뒤 한권씩 꺼내 불을 질러 태우고 그 재를 강가에 뿌렸다. 다시 남은 복음서는 압록강에 힘있게 내던졌다. 그리고 심양에 돌아가 로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로스는 이 소식을 접하고 꾸짖지 않고 그 자리에서 “성경 씻은 물을 마시는 사람마다 생명을 얻게 될 것이며 성경 태운 재를 입은 사람마다 크게 성공하리라”고 하였다. 그후 백홍준도 복음서에 담긴 진리의 말씀이 너무 좋아 혼자 읽기는 너무 아까워서 결단을 내렸다. “가자 내 고향에 이 복음서를 전해야 해” 그는 곧 심양 시내 헌종이를 파는 시장에서 종이를 사고 등에 지고 갈 수 있는 짐을 만들었다. 그 짐 밖에는 헌종이로 차곡차곡 채우고 속에는 복음서를 가득 넣었다.그는 한권이라도 더 가져가야 한다면서 멜빵도 복음서를 뜯어서 새끼를 꼬아 만들었다. 백홍준은 많은 기도를 하면서 당당한 걸음으로 의주로 향했다. 이때 경비는 참으로 삼엄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절친한 마을 친구가 경비원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친구는 검문하는 체하면서 그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했으니 그가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검문소를 무사히 빠져나와 의주까지 오게 되었으며 이때 멜빵도 다시 헐어 책으로 꾸며 읽었다는 기이한 사건도 있었다. 또 서상륜의 사건도 기적중의 기적이었다. 서상륜은 복음서와 전도지를 의주로 반입하기 위해서 심양 동관교회의 한족 신도들이 주최한 파송식 예배에 참석해 예배를 드리고 전송을 받으면서 심양을 떠났다. 그런데 고려문에 도달했을 때 중국 관헌의 불심검문을 받고 기독교 서적을 갖고 있는 것이 발각됐다. 한국에 기독교 서적을 반입할 수 없었던 터라 이들은 곧 한국측 검문소에 인계되어 감옥에 갇혔다. 다행히 감옥의 한 간수가 먼 친척이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야간탈출에 성공했다.이미 많은 복음서는 거의 압수당하고 친척의 도움으로 겨우 10여권만 소지하고 의주에 오게 되었다. 이렇게 당시 조선은 철저하게 복음서 반입을 권력의 힘으로 저지 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권력의 힘만은 이겨낼 수 없었다. 결국 굳게 닫힌 빗장도 서서히 열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었다. 1882년 식자공이었던 김청송도 매서인으로 자원하고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는 고구려의 고도인 집안을 중심해서 쪽복음을 나누어주면서 전도를 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많은 사람들이 호감을 갖고 심양에 있는 로스에게까지 찾아가 기독교에 대한 진리를 질문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1884년 11월 집안은 하나님의 축복이 내리듯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이때 로스는 영하 40도의 추위를 무릅쓰고 김청송의 안내를 받으면서 최초로 75명 남자에게 세례식을 거행함으로 새로운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김수진 목사 (예장통합·교회사학자) |
[新한국교회사] (10) 일본에서의 이수정의 활동 | |
[국민일보 2001-03-28 10:48] | |
중국에 있던 영국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은 한국교회 출발에 크게 기여했다. 이에 못지 않게 일본에서도 한국선교를 위해서 활동했던 전라도 옥과 출신 이수정(李樹廷)의 역할도 만만치 않았다.
이수정은 1882년 임오군란시 황후 민비를 궁녀차림으로 변장시켜 업고 궁궐을 탈출하여 충주까지 도망하여 구출했다 하여, 황후는 그에게 선략장군이란 칭호를 주었다.
“민비는 축연(祝宴) 제사 기도에 백만냥의 거액을 아낌없이 소비하고 이경하의 서자로 당시 명창인 이범진의 노래 한곡에 3천냥을 주는 어리석은 소행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재정이 소비되는 것은 더할나위 없었다”
민비가 군인의 월급을 13개월가량 지불하지 못하자 군인들이 난을 일으켰다. 이것이 임오군란이다.
이때 이수정은 민비의 생명을 살려준 은인이 되었다. 민비는 이수정에게 비록 비수행원이지만 2차 신사유람단 일원으로 일본에 갈 수 있는 기회를 허락했다.
1882년 10월 이수정 일행은 인천을 떠나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도쿄에 도착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쓰다는 철저한 유학자였던 이수정이 거절 한번 하지 않고 신약전서를 받는 이수정의 용기에 감복했다. 이 일은 분명히 성령의 역사가 그 순간 쓰다의 응접실에 내리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응접실에서 두 사람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한자로 필담을 나누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수정, 한국인 첫 세례교인이 되다
이수정의 신앙고백을 살펴보면 이렇다.
“삼가 아룁니다. 소생은 본래 작은 나라에 태어나 배우고 읽은 것이 적어서 문명의 개화를 알지 못하였는데, 근래 귀국에 와서 성령의 인도와 여러분들의 두터운 사랑을 힘입어 세례를 받고 겨우 대도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이하 생략”
확실하게 이수정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신앙고백을 하고 선교사 유치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수정은 도쿄와 요코하마를 왕래하면서 일본인 목사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선교사 유치운동에 힘을 쏟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30여명의 유학생이 도쿄에 와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수정의 전도에 감동이 되어 30여명의 유학생이 모두 개종하고 그의 지도를 받으면서 성경공부를 하게 됐다.
이수정은 미국교회에 선교사를 보내 달라는 ‘선교사 유치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수정은 일본교회 목사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1883년 7월과 11월, 2회에 걸쳐 미국교회에 서신을 보내게 되었다. 서신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나 이수정은 미국에 있는 교회의 형제 자매들에게 문안 드립니다. 진리와 신앙의 힘에 의하여 내 주의 큰 축복을 받아 내 기쁨은 측량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배려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신앙을 지킬 수 있었으며, 사단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우리는 주께 영광과 찬송을 돌릴 수 있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1천만 동포는 아직까지 참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이교도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복음전파의 시대에 우리나라는 불행히도 기독교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지구의 어두운 구석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복음을 전파하는 수단을 만들기 위하여 한국어로 성서를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사업의 성공을 위하여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거의 완성되고 있습니다. 이하 생략’
굳게 닫혔던 한국의 문이 1882년 5월 한·미수호통상조약으로 인하여, 한국 정부에서는 1883년 7월에 미국에 특명 전권공사 민영익을 비롯해서 7명을 파견하게 되었다. 이들 일행은 인천 제물포를 출발해서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그해 9월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이때 한국 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미국 감리교 지도자 카우처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일행을 통해 한국 사정을 잘 알게 된 카우처 박사는 선교비의 일부인 2천달러를 헌금하게 되었고, 이후 한국 선교를 위해서 많은 기도를 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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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한국교회사] (13) 의료선교사들의 활동…알렌, 민영익 치료 ‘복음의 문’ 활짝 | |||||||||||||
[국민일보 2001-04-18 11:01] | |||||||||||||
한국기독교 최초의 의료선교사인 알렌은 1858년 4월에 태어나, 미국 오하이오주 웨슬레안대학 신학부를 거쳐 마이애미의과대학에서 의학을 연구하고 박사학위까지 받을 정도로 명석한 의사였다.
1883년 박사학위를 받자 곧 메신저와 결혼, 그해 10월 미 북장로교의 파송을 받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향했다. 이미 상하이에서는 영국 런던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알렌 선교사는 1년여 동안 상하이와 난징(南京)에서 선교에 임하였지만 이렇다 할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때마침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려고 기도하고 있던 중, 뜻하지 않게 미 북장로교 선교부로부터 한국 의료선교사로 가라는 명을 받고 중국 상하이를 출발, 1884년 9월20일 제물포항에 도착함으로써 한국 선교사의 선두 주자가 됐다.
이러한 사실을 알았던 알렌은 남달리 더 많이 기도하면서 민영익을 수술했다. 정성껏 치료한 결과 3개월이 지나자 신기하게도 그 깊은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그의 정성어린 기도와 의술로 민영익은 점차 회복, 그 다음해인 1885년 3월 드디어 완전히 건강을 찾게 되었다. 알렌은 정부로부터 1000량의 사례금까지 받았다.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의 역사인가! 하나님께서는 알렌을 통해 민영익의 병을 완전히 고쳐 주고 선교의 문을 열어 준 것이다.
그런데 고종황제로부터 뜻하지 않게 광혜원이라는 병원을 하사받게 된다. 그동안 돈 많은 고관들만 치료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던 알렌은, 하나님의 은혜에 다시한번 감사를 드렸다. 수많은 가난한 한국인들이 병을 앓아도, 약 한번 사용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늘 안타깝게 여기던 차에, 정부에서 병원을 하사하다니 이 이상 기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중략-
그러나 고종황제는 내가 선교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고종황제와 황후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나를 불러 자신들을 치료해 줄 것을 부탁하며, 원하는 것이 있으면 서슴지 말고 말하라고 몇 번이고 다짐시켰다”
그가 병원을 개원한지 얼마 안되어 미 감리교의 스크랜튼, 장로교의 헤론의 도움을 받으면서 1만여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환자들 대부분이 장티푸스, 천연두, 이질, 폐결핵, 매독,한센병 등 악질성 병을 앓고 있었다. 여기에 궁중의 관리를 비롯해 가난한 사람, 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병든 자를 치료하였다.
알렌은 1886년 3월, 12명의 학생을 선발하여 5년과정의 의학 훈련을 시켰다. 광혜원으로 기초를 다졌던 알렌은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동안 원장으로 일했던 알렌은 선교사의 일을 접어 두고, 주미 한국공사관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1887년 9월 헤론이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무렵 간호사였던 엘러스(A.J.Ellers)가 여기에 참여하였다. 1886년 제중원의 건물을 구리게(현 명동 입구)로 옮겼다.
이 무렵 엘러스의 후임으로 홀튼(L.S.Horton)이 부임하여 부녀과를 진료하였다. 이때 정동에 모화관 진료소를 개설하고 진료에 힘을 기울였다. 그후 홀튼은 언더우드와 결혼하였다.
한때 알렌을 협조하면서 진료에 임했던 스크랜튼 박사는 정동에 병원을 개원하고, 가난한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하는 등 가난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병원’이란 뜻에서 시병원(施病院)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훌륭한 진료 업적을 남겼다.
1887년 10월 여의사 하워드(M.Howard)가 도착, 시병원 한 칸을 빌려 사용하게 된다. 환자들이 몰려들어 더 이상 수용할 수 없게 되자 단독 건물을 얻어 병원문을 열었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부인진료소인 보구여관이다.
헤론은 제중원 원장으로 취임한 뒤 점점 바빠지기 시작했다. 알렌은 다소 관료적인 권위를 갖고 진료를 하였다면, 헤론은 그렇지 않았다. 바로 한국의 가난한 환자를 진료하는 일이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란 신념을 갖고 임했던 그의 사역은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다. 이러한 일로 제중원은 점점 확장되고 있었다. 그는 예정대로 일본에 도착한 뒤, 이수정과 헵번의 안내를 받으며 헵번의 집에 얼마동안 머물며, 한국어도 배우고 선교사로서 필요한 자질을 배웠다. 그는 기도만이 신앙의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고 믿고, 이미 법률로 예배행위가 금지됐는데도 서울에 도착한지 일주일후만인 1885년 6월28일 밤 알렌부부, 스크렌튼의사 어머니 등과 함께 예배를 시작했다. 비록 외국인 중심의 예배였지만 한국에서의 첫 예배는 제중원에서 시작되었다. 예배가 공식 금지되었던 한국땅에서 첫 예배를 드렸던 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그후 1889년 10월 호주 장로교회에서 파송받은 데이비스 선교사가 서울에 도착하자, 선교사 공의회가 조직됐고 초대 회장에 헤론, 서기에는 데이비스가 선임됐다. 헤론은 죽기전 자신을 향해 눈물흘리고 있는 부인과 두 딸, 그리고 한국인 환자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위해 그의 생명을 바치었습니다. 주님을 믿으십시오!” 이 얼마나 훌륭한 유언인가! 그런데 사람이 살고 있는 서울 장안에 시신을 매장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정부고관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당국의 압력으로 할 수 없이 그가 사망한 지 3년만에, 4대문밖 버려진 땅이었던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양화진 양지바른 땅에 헤론의 시신을 안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 부부를 비롯해 400여명의 선교사가 묻혀있는 양화진 묘소가 왜 그렇게 초라한지... 그 곳을 성지라고 부르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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