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선교사 · 신앙偉人/韓國기독교 역사와 교회사

★[新한국교회사] (7)-(14)/김수진 목사

영국신사77 2008. 6. 6. 23:20

   

   [新한국교회사] (7) 한국기독교의 첫 전래…화란인 귀츨라프 1832년에 ‘복음 씨앗’
                                                                                                 [국민일보 2001-03-07 10:51]
                                                 ■중국 모리슨 선교사의 역활

한국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기도로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중국 기독교는 언제 누가 처음으로 선교를 시작했을까. 중국 기독교 역사는 런던선교회 소속 모리슨(R Morrion) 선교사가 1807년 9월4일 중국 포루투칼 식민지 마카오 연안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단신으로 중국에 도착했다. 중국은 그가 선교를 위해 죽기로 맹세한 땅이었다. 그러기에 그를 누구 하나 환영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중국땅은 고향같은 느낌이었다. 대륙의 진한 흙냄새가 풍기는 땅을 모리슨은 힘있게 내밟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맡기고 중국에 왔었기에 그렇게 마음이 평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중국에서 죽기로 결심을 했기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중국 마카오 주재 동인도 회사 상사로부터 감시를 받았다. 여기에 중국선교에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천주교 선교사들로부터도 경계의 대상이었다. 마카오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던 모리슨은 곧 광동성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여전히 감시는 심했으며, 마치 창살없는 감옥에 갇힌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중국인이 입고 다니는 옷을 입고 중국인이 먹는 음식을 먹으면서 손짓 발짓해 가면서 중국어를 배웠으나, 선교비는 바닥나 버렸다. 할 수 없이 광동성 수도 광주변두리에 화물창고 지하실 방 한칸을 빌려 그 곳에서 생활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모리슨은 지하실도 천국으로 생각하고 날마다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것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하루 하루를 시작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중국 천주교 신자 2명을 만나 체계적으로 중국어를 배워 중국에 온 지 18개월만에 중국어 성서를 번역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중영사전까지 발행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았던 동인도 회사에서는 모리슨에 접근해 통역원으로 일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우선 신분의 보장과 생활의 안정을 얻을 것 같아서 허락하고 통역원으로 잠시 일했다.

모리슨의 선교열정에 감동받은 런던선교회에서는 1813년 마일네(W Milne) 선교사를 중국에 파송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 당국으로부터 체류 허가를 받지 못하고 말레이시아에 머물면서 중국 상륙을 기다리다 본토를 밟지도 못하고 순교하고 말았다. 이때 모리슨은 친구의 몫까지 선교를 담당해야 한다면서 더 열심히 일했다. 여전히 중국인으로부터 냉대와 멸시를 받았지만 드디어 그는 1814년 7월 깊은 산골에 살고 있는 중국인 채고(蔡高)에게 첫세례를 베풀었다. 이 일은 그가 중국 땅을 밟은 7년만에 일어난 일이다.

선교에 열정을 쏟던 그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영국인 의사의 딸 몰톤(M Morton)을 만나 결혼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게 됐다. 그러나 신혼의 달콤한 생활은 잠시뿐이었다. 부인이 약해 결국 중국에 머물지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가 6년간 치료를 받고 다시 돌아왔다.그러나 부인은 체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1821년 중국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말았다. 중국에서 순교하기로 작정했던 그는 부인의 몫까지 일을 해야 한다면서 더 열심히 사역에 임했다. 이미 중국어로 구약을 번역해 출판한 모리슨은 1823년 신약성서를 발간했다. 그러나 그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한번도 외면하지 않았던 모리슨은 1834년 이국 땅 중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귀출라프의 선교사의 첫 상륙

  모리슨 선교사가 생을 마감하기 전 그가 번역했던 중국 한문성경을 한 아름 안고 조선에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한국 땅을 밟은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인 그의 이름은 네덜란드 선교회 소속의 귀츨라프(K F A Gutzlaff) 였다. 귀츨라프는 모리슨이 일시 영국에 귀국했을 때 그로부터 중국에 관한 선교보고를 듣고 크게 감동받았다. 이것이 동기가 돼 네덜란드 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1826년 자바 스마트라 싱가포르 등에 머물면서 잠시 선교했다.그는 모리슨의 영향으로 네덜란드 선교회를 탈퇴하고 런던선교회의 후원을 받아 중국 선교를 위해 중국인 집단 거주지인 방콕에서 시암어로 성서를 번역했다.

1831년 마카오에 가서 모리슨을 만나 같이 중국 선교사로 지원을 하게 됐다. 이때 모리슨은 젊은 귀츨라프를 만나자 중국 선교는 성공리에 진행될 것을 확신하게 됐다. 여기에 귀츨라프는 의사였기에 더욱 큰 힘이 됐으며, 귀츨라프는 장거리 여행을 굉장히 좋아했다. 이러한 뜻을 알았던 모리슨은 자신이 번역했던 성경이 하루속히 온 땅에 보급돼 중국이 예수의 귀한 진리를 터득하고 구원의 대열에 참여하기를 바랬던 그 뜻이 귀출라프를 통해서 이뤄질 것을 확신하게 됐다.

드디어 1832년 2월27일 하나님의 역사는 한반도로 향하고 있었다. 때마침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선장인 린제이는 선교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이때 귀츨라프는 린제이 선장이 승선한 암허스트호의 통역 겸 의사로서 승선했다. 암허스트호에 승선했던 귀출라프는 모리슨과 함께 눈물로 호소 기도했던 그 일이 이뤄진다면서 몇 번이고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배는 중국 광동항을 떠나 서서히 남풍의 바람을 타고 상해를 거쳐 북쪽으로 항해하면서 모리슨이 전해준 성경을 안고 산동성 위해(威海)항에 정박했다. 다시 위해항을 뒤로 하고 망망한 대해 항해했다. 그런데 이 배는 어느 새 황해 바다 한복판에서 바람을 만나 황해도 앞바다에 널려있는 장산곶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등을 지나 남하해 7월25일 충청도 홍주 고대도 금강입구에 정박했다. 고대도에 정박했던 귀츨라프는 곧 국왕에게 줄 선물을 챙기고 있었다.

귀출라프의 연구가인 리진호 장로는 그의 저서 ‘동양을 섬긴 귀츨라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국왕에게 서한과 선물을 보내려고 한나절 넘게 짐을 꾸렸다. 린제이 선장은 내가 갖고 있는 성서 한질과 전도문서 전부를 함께 쌓아 국왕에게 선물하라고 아주 정중하게 요청했다. 갑판 위에 찾아온 사람들에게 성서를 주어 기뻐하였고 이로서 나는 아주 만족하였는 데 이제는 외로운 나라의 통치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유익을 얻으리라고 갈망하게 된 것이다. 이 나라 통치자에게 많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보다 더 귀한 선물이 있을까?”

귀츨라프 선교사는 참으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왕이 성서를 받고 읽어만 본다면 한국은 축복의 나라로 될 것을 확신하면서 전했지만 불행하게도 20일만에 불가쪽으로 해답이 오고 말았다.귀출라프 일행들은 20일간 기다리면서 의약품과 전도지도 주고 감자 씨앗을 주면서 심는 법까지 가르쳐 줬으니 얼마나 한국인을 사랑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때 한문으로 된 주기도문도 이 지역민의 도움으로 최초로 한글로 번역하기도 했다. 귀출라프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어서 그곳을 떠나 일본 유큐열도(현 일본 오키나와)로 향해 그 곳에서 정착하고 곧 한문으로 된 성경을 국왕에게 선물로 전했으며, 유큐열도어로 성서를 번역 출간했다.

/김수진목사 예장통합/교회사학자

                      

 

 

 

                                      [新 한국교회사] (8) 한국기독교의 첫 순교자 토머스

                                                                                            [국민일보 2001-03-14 10:34]
  한국 기독교도 천주교처럼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이땅에 뿌리를 내렸다.한국에 최초로 기독교 선교사로서 내한했던 사람은 네덜란드 선교회 소속 귀츨라프(K.F.A.Gutzlaff)였다.귀츨라프는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威海)를 떠나 1832년 7월 충청도 홍주만 고대도 앞바다에 정박을 하고,홍주 성읍의 관리를 만나 성경과 전도문서지를 국왕에게 선물로 전해 달라고 요청하였다.회답을 기다리고 있던 귀츨라프 일행은 고대도 섬주민들과 접촉하면서 성경과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으며,감자도 선물로 주면서 심는 법까지 가르쳐 주었다.의약품을 줄 때는 섬주민들로부터 대단한 호기심을 샀다.약 20일간 머물면서 한국인의 도움으로 최초로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기도 하였다.그러나 불행하게도 정부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전갈이 오자 곧 철수하고 그 길로 유큐열도(현 일본 오키나와)로 향하여 그 곳에 정착,곧 한문으로 된 성경을 국왕에게 선물로 전하였다.

한국의 선교에 대한 열정은 그 누구보다도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외국 선교사들이 강했다.이중 중국 상하이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토머스(R.J.Thomas) 선교사는 한국 선교를 위해 평양에서 순교함으로써 한국에 기독교의 첫 씨앗을 뿌렸다.토머스는 1863년 영국 하노버 회중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부인과 함께 1863년 여름 중국 상하이에 도착했다.그 곳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지 얼마 안 된 1864년 부인 캐럴라인이 그만 사망하고 말았다.이에 충격을 받은 토머스는 잠시 런던선교회를 떠나 중국 지푸(현 산둥성 연태)로 올라가 그 곳에서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 윌리엄슨(A.Williamson)을 도우면서 성서 반포에 일익을 담당하였다.이때 한국에서 건너온 김자평 최선일 두 천주교 신자를 만나게 되었다.이들은 예수의 십자가상과 묵주를 손에 들고 있었다.뜻하지 않게 천주교 신자를 만났던 토머스는 그들과 대화하는 중에 이미 한국에 천주교 신자가 있음을 알고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토머스는 윌리엄슨의 도움으로 한문으로 된 성경을 이들에게 전해주었으며,성경을 받았던 일행은 너무 기뻐서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다.이러한 광경을 보았던 토머스는 곧 번역된 한문 성경을 한아름 안고 한국인의 안내를 받으면서 지푸를 떠나 한국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었다.그는 황해도 앞바다에 널려 있는 여러 섬을 다니면서 성경을 배포하였다.성경을 받은 사람은 모두 다 얼굴에 기쁨이 가득 차 있었다.이렇게 2개월 반 동안의 선교여행을 마친 토머스는 서울에 있는 국왕을 만나 선교를 시도하려고 하였지만 폭풍 때문에 이를 단념하고 중국 베이징으로 올라갔다.이곳에 머물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한국선교에 대한 열정을 강하게 느꼈다.

런던선교회 선교사로 복귀한 토머스는 베이징에서 선교사로 재임명을 받고 북경대학 학장 대리로 머물게 되었다.그는 베이징에서 뜻하지 않게 한국에서 외교사절인 부연사행 사절로 왔다는 정부 고급관리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이중 평안도 감사 박규수에게 성경을 전하면서 “귀국도 이 책을 받아 그대로 실행하면 많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그는 다시 부탁하기를 “내가 평양에 가게 되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협조해 주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이렇게 간절한 마음을 갖고 있던 토머스는 한국에 기독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지푸로 돌아와 윌리엄슨과 의논하고,한국 선교에 대한 열정을 기도로 승화시켰다.

이 무렵 지푸에서는 한국에 가려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있었다.좋은 기회라 생각한 토머스는 즉시 윌리엄슨 총무에게 이야기하여 많은 성경을 싣고 1866년 8월9일 선원들과 함께 지푸를 떠나 한국으로 향했다.이때 지푸 부두에서 기도했던 내용을 오문환의 저서인 ‘도마스 목사전’에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평안케만 마옵시고 피를 흘려 죽는데 이를지라도 주의 사업에 유익이 된다면 사양치 않겠나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토머스 선교사는 순교를 각오하고 떠났다.이미 토머스는 한국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핍박받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이러한 기도를 남긴 그는 대동강 하구에 자리잡고 있는 보산에 도착하자 병사들의 사격을 받기도 하였다.이때 사격중지를 요청하고 상업차 오는 배라고 설명을 하자 곧 사격은 멈췄다.곧 배는 그 옆에 있는 포리를 향해 올라갔으며,포리에 배를 정박해 놓고 그곳 주민들에게 500여권의 성경을 배포하였다.이곳 주민들은 자신들이 천주교인임을 손짓으로 알리자 토머스는 곧 그들을 배안으로 영접하고 그들을 극진하게 대접하면서 서로 한자로 대화를 나누었다.그는 석호정을 거쳐 만경대에 상륙하여 성경책을 나누어 주면서 전도를 하였다.다시 대동강 상류에 있는 양각도까지 올라갔으나 모래톱에 좌초되었다.비 때문에 불어 났던 대동강물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검문을 받을 때마다 긴장이 고조되었다.토머스는 몇 번이고 기도하면서 자신은 천주교가 아니고 예수교임을 설명하면서 예수교를 전파하러 왔다고 밝혔다.

그러나 토머스가 타고 왔던 배가 무장된 것을 본 한국 병사들은 놀라고 말았다.이때 평양성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배를 향하여 포문을 열어 활과 총을 쏘았다.공격이 더욱 거세지자 배에 머물고 있던 토머스는 한손에 백기를 들고 다른 한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하선하였다.어느 군졸은 칼을 뽑아 들고 토머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오문환은 그의 저서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그동안 토머스는 두 무릎을 모래사장에 꿇고 머리를 숙여 땅에 댄 후 얼마동안 최후의 기도를 올리고 다시 일어나서 군졸에게 성경 받기를 권하였으나 그 군졸은 그의 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을 것도 사실이려니와 환경이 그것을 허락지 않는 지라 마침내 칼을 그의 가슴에 대어 하나님의 충복(忠僕) 토머스 선교사의 귀여운 생명을 빼앗고 말았다”

1866년 9월4일 토머스 선교사는 27세의 나이로 한국 선교를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이때 토머스는 자신을 향해 칼을 내두르는 군인들에게 성경을 전하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외쳤다 하니,그가 얼마나 한국을 사랑했는지 잘 입증해 주고 있다.

토머스 선교사가 순교하고 미국 상선 제너럴 셔만호가 전소된 사건이 미국에 알려지게 되었으며,미국은 이를 보복하기 위해 한국에 미국 군함을 보내 신미양요를 일으켰다.이 일이 있은 지 10년 후인 1876년 평안도 의주 청년들이 중국을 드나들면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건이 일어났다.참으로 성령의 역사는 토머스 선교사의 순교를 통해서 복음의 불모지였던 한국에 복음을 가져왔다.

토머스 선교사를 최초로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영국 버밍햄 대학 신학부에서 Th.D.학위를 받았던 고무송 목사(기독공보사장)는 “토머스 선교사의 순교 자체가 훌륭한 선교였다”고 말한다.이러한 면에서 토머스 선교사는 높이 평가할 만한 훌륭한 선교사였으며,해외선교는 물질이 아닌 몸으로 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김수진 목사 예장통합·교회사학자

 

                    [新한국교회사] (9) 로스 선교사와 의주 청년들의 개종

                                                                                           [국민일보 2001-03-21 10:30]
  중국 지푸에 상주하고 있던 윌리엄슨은 한국에 대한 선교열정이 남다르게 강하였다. 토머스의 순교가 헛되지 않도록 스코틀랜드교회에서는 로스(J Ross)와 매킨타이어(J MacIntyre)를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두 선교사가 1872년 8월 중국 요녕성 영구(營口)에 정착하였다. 윌리엄슨으로부터 토머스선교사에 대한 순교 이야기를 들었던 이들은 마음속 깊이 간직하면서 고려문을 드나들었다. 고려문을 드나들 때마다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고려문은 압록강 강변에 있는 단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봉황성 아래에 있는 작은 마을로 중국과 한국간 자유롭게 물물교역이 이루어지던 국제시장이어서 로스는 1874년 10월 이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로스는 고려문에서 많은 한국인들에게 한문성경을 팔면서 전도를 하였지만 그 누구도 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뜻하지 않게 50대로 보이는 한 한국인 상인이 찾아오게 되었다. 로스는 그에게서 한국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며 잠시였지만 한국어의 어법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 그에게 성경을 전해 주었다. 훗날 그의 아들 백홍준은 로스에게 세례를 받는 기적도 일어났다.

로스는 1876년 4월 2차 선교여행시 다시 고려문을 방문했다. 한국 선교에 열망을 품고 있던 로스는 중국인에게 한국어를 배울 수 있게끔 한국인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한 일이 있었다. 이 무렵 뜻하지 않게 평안도 의주 청년 이응찬을 소개받게 되었다. 이응찬은 배에 물건을 가득 싣고 압록강을 가로지르면서 다니던 상인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풍

랑을 만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배에 실었던 물건을 압록강에 다 버리고 파도에 떠밀려 겨우 몸만 살아 중국에 도착하였다. 이때 중국인의 소개로 로스를 만나게 되었으며 로스는 이응찬을 하나님이 보낸 사람으로 여기고 그에게서 한국어를 배우게 되었다. 로스는 한글성경을 출판하기 위해서 계획을 세워놓고 기도하던 중에 이응찬을 만났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로스는 이응찬으로부터 한글과 한국역사를 배우고 이응찬은 로스로부터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배우게 된다. 그후 이응찬은 자신의 절친한 고향 친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을 로스 선교사에게 소개하였으며 이들도 로스와 매킨타이어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첫 한국인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이들의 선교 사역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들은 함께 나누면서 요령성의 행정중심지인 심양으로 옮겨갔다. 로스는 곧 심양에 자리를 잡고 이응찬의 도움으로 1877년 기초 한국어 교재를 상해에서 발간하게 되었다.그리고 1878년 봄에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서를 번역하였다.

의주 청년 서상륜?^경조 형제는 홍삼 장사차 영구에 왔는데 서상륜이 갑자기 알 수 없는 열병에 걸려 위독하였다. 이때 어느 중국인의 안내로 영구미션병원에 입원하여 헌터 의료선교사를 만나 겨우 생명을 건질 수 있게 되었다. 이곳에서 선교사의 은혜로 병을 낮게 된 서상륜은 매킨타이어를 만나 예수를 믿게 되었으며 그후 로스에게 소개되어 그를 도우면서 누가복음을 번역하였다. 여기에 영원히 남길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과 함께 서상륜과 서경조가 합세하자 그 힘은 어느새 하늘을 나는 새도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한국 선교에 정력을 쏟게 되었다. 신앙고백을 했던 서상륜 형제도 로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로스는 상류층이 볼 수 있는 한자성경이 아니라 절대 다수의 국민이 볼수 있도록 한글 성경번역이 더욱 시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스는 하루빨리 예수를 한국인들에게 전하기 위해 복음서 번역에 최선을 다했다.

드디어 로스와 평안도 의주 청년들의 수고로 1882년 봄 심양에서 한글로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출판됐다. 이 얼마나 장엄한 드라마였는가! 복음서가 출간됐다는 소식을 접한 이성하는 로스에게 찾아가 곧 매서인으로 자원하여 복음서를 한아름 안고 고향으로 달려갔다.그러나 막상 압록강을 건너려고 하였지만 경계가 너무 심하여 도저히 건널 수 없었다. 그러나 며칠이고 강가에 나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건너려고 하였지만 여전히 경비가 삼엄하였다. 여러달을 여관방에서 기도하면서 때를 기다렸지만 여전히 경계가 심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 된 그는 복음서를 짊어지고 압록강가로 가 기도한뒤 한권씩 꺼내 불을 질러 태우고 그 재를 강가에 뿌렸다. 다시 남은 복음서는 압록강에 힘있게 내던졌다. 그리고 심양에 돌아가 로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로스는 이 소식을 접하고 꾸짖지 않고 그 자리에서 “성경 씻은 물을 마시는 사람마다 생명을 얻게 될 것이며 성경 태운 재를 입은 사람마다 크게 성공하리라”고 하였다.

그후 백홍준도 복음서에 담긴 진리의 말씀이 너무 좋아 혼자 읽기는 너무 아까워서 결단을 내렸다. “가자 내 고향에 이 복음서를 전해야 해” 그는 곧 심양 시내 헌종이를 파는 시장에서 종이를 사고 등에 지고 갈 수 있는 짐을 만들었다. 그 짐 밖에는 헌종이로 차곡차곡 채우고 속에는 복음서를 가득 넣었다.그는 한권이라도 더 가져가야 한다면서 멜빵도 복음서를 뜯어서 새끼를 꼬아 만들었다.

백홍준은 많은 기도를 하면서 당당한 걸음으로 의주로 향했다. 이때 경비는 참으로 삼엄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절친한 마을 친구가 경비원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친구는 검문하는 체하면서 그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했으니 그가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검문소를 무사히 빠져나와 의주까지 오게 되었으며 이때 멜빵도 다시 헐어 책으로 꾸며 읽었다는 기이한 사건도 있었다.

또 서상륜의 사건도 기적중의 기적이었다. 서상륜은 복음서와 전도지를 의주로 반입하기 위해서 심양 동관교회의 한족 신도들이 주최한 파송식 예배에 참석해 예배를 드리고 전송을 받으면서 심양을 떠났다. 그런데 고려문에 도달했을 때 중국 관헌의 불심검문을 받고 기독교 서적을 갖고 있는 것이 발각됐다. 한국에 기독교 서적을 반입할 수 없었던 터라 이들은 곧 한국측 검문소에 인계되어 감옥에 갇혔다. 다행히 감옥의 한 간수가 먼 친척이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야간탈출에 성공했다.이미 많은 복음서는 거의 압수당하고 친척의 도움으로 겨우 10여권만 소지하고 의주에 오게 되었다. 이렇게 당시 조선은 철저하게 복음서 반입을 권력의 힘으로 저지 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권력의 힘만은 이겨낼 수 없었다. 결국 굳게 닫힌 빗장도 서서히 열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었다.

1882년 식자공이었던 김청송도 매서인으로 자원하고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는 고구려의 고도인 집안을 중심해서 쪽복음을 나누어주면서 전도를 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많은 사람들이 호감을 갖고 심양에 있는 로스에게까지 찾아가 기독교에 대한 진리를 질문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1884년 11월 집안은 하나님의 축복이 내리듯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이때 로스는 영하 40도의 추위를 무릅쓰고 김청송의 안내를 받으면서 최초로 75명 남자에게 세례식을 거행함으로 새로운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김수진 목사 (예장통합·교회사학자)


 

 

                         [新한국교회사] (10) 일본에서의 이수정의 활동
                                                                                                                                        [국민일보 2001-03-28 10:48]

  중국에 있던 영국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은 한국교회 출발에 크게 기여했다. 이에 못지 않게 일본에서도 한국선교를 위해서 활동했던 전라도 옥과 출신 이수정(李樹廷)의 역할도 만만치 않았다.

 

  이수정은 1882년 임오군란시 황후 민비를 궁녀차림으로 변장시켜 업고 궁궐을 탈출하여 충주까지 도망하여 구출했다 하여, 황후는 그에게 선략장군이란 칭호를 주었다. 

                                                            이수정의 개종

  오윤태 목사는 그의 저서 ‘선구자 이수정’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민비는 축연(祝宴) 제사 기도에 백만냥의 거액을 아낌없이 소비하고 이경하의 서자로 당시 명창인 이범진의 노래 한곡에 3천냥을 주는 어리석은 소행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재정이 소비되는 것은 더할나위 없었다”

 

  민비가 군인의 월급을 13개월가량 지불하지 못하자 군인들이 난을 일으켰다. 이것이 임오군란이다.

 

  이때 이수정은 민비의 생명을 살려준 은인이 되었다. 민비는 이수정에게 비록 비수행원이지만 2차 신사유람단 일원으로 일본에 갈 수 있는 기회를 허락했다.

 

  1882년 10월 이수정 일행은 인천을 떠나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도쿄에 도착했다.

  이수정은 비수행원이었기에 자유롭게 개인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수정은 도쿄에 있는 일본인 교계 지도자 쓰다(津田仙)를 만나 작은 선물을 내놓았다. 그러나 쓰다는 선물 받기를 거절했다. 그러면서 “4세기께 당신의 나라 백제 왕인박사께서 우리에게 한자와 한국문화를 전달해 주었는데, 이 백성이 그 은혜를 알지 못하여 선물을 못했으니 어떻게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 책을 선물할테니 받아 주십시오”라고 했다. 이때 받았던 선물이 한자로 된 신약전서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1년전 쓰다가 박종수라는 한국인에게 성경을 선물로 전달하였지만, 그는 얼굴이 변색되어 거절을 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아직 한국은 기독교 서적을 자유롭게 받을 수 있는 그러한 처지가 아니었다. 누구든지 기독교를 접하게 되면 처형을 당한 때였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쓰다는 철저한 유학자였던 이수정이 거절 한번 하지 않고 신약전서를 받는 이수정의 용기에 감복했다. 이 일은 분명히 성령의 역사가 그 순간 쓰다의 응접실에 내리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응접실에서 두 사람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한자로 필담을 나누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수정은 밤 늦도록 대화를 나눈 후 숙소로 돌아갔으며 선물로 받은 신약전서를 펴들고 읽기 시작했다. 새로운 경전을 접하게 된 이수정은 엄청난 진리를 발견하고 기독교로 개종하기로 결심하게 됐다. 이때 쓰다는 그의 결심에 놀라 일본인 나카다(長田時行) 목사를 소개하고 그의 지도를 받게 했다. 그의 지도를 받았던 이수정은 그해[1882년] 12월25일 도쿄제일교회에 출석하여 성탄절 예배를 드렸다.


 

                                           이수정, 한국인 첫 세례교인이 되다
  기독교라는 새로운 문화를 접하게 된 이수정은 세례를 받을 결심을 하고, 1883년 4월29일 주일 아침에 도쿄 노월정교회(현 芝敎會=시바교회)에서 일본인 야스가와(安川亨) 목사와 미국 북장로교 녹스(G W Knox)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가 세례를 받기까지는 많은 노력이 요청되었으며, 세례를 받기 위해서 문답이 2시간이나 소요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이수정은 일본에 온 지 7개월만에 한국인으로서는 첫 신자가 되는 기쁨도 누리게 됐다.

  이수정이 세례받은 1883년 5월11일 제3회 일본기독교전국대회가 도쿄에서 열렸으며 이수정도 쓰다의 안내를 받고 참석했다. 그는 일본어를 모르기 때문에 한국어로 대표 기도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날 대회에 출석했던 일본인들은 다같이 ‘아멘’으로 끝을 맺었다. 이수정은 그 다음날 요한복음 15장을 읽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등 적극적인 자세로 임했다.

 

  이수정의 신앙고백을 살펴보면 이렇다.

 

  “삼가 아룁니다. 소생은 본래 작은 나라에 태어나 배우고 읽은 것이 적어서 문명의 개화를 알지 못하였는데, 근래 귀국에 와서 성령의 인도와 여러분들의 두터운 사랑을 힘입어 세례를 받고 겨우 대도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이하 생략”

 

  확실하게 이수정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신앙고백을 하고 선교사 유치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 일본 요코하마에서 활동하고 있던 미국 성서공회 총무 루미스(H Loomis)는 이수정으로부터 한국어 성경 번역을 요청받고, 그는 한문성경에 토를 다는 방법으로 소위 현토성서(懸吐聖書)를 발간하게 됐다. 그런데 이 성경은 지식층에게만 사용할 수 있게 되어, 다시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성경이 요청되자 1885년 2월 순한글로 마가복음서를 번역하고 요코하마에서 출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후 일본 주재 감리교 매클레이(R S MacLay) 선교사의 요청으로 감리교 교리문답서를 번역 출간하였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이수정이 번역했던 마가복음서가 요코하마에서 발간하는 일들이 기도중에 이루져가고 있었다.

 

  이수정은 도쿄와 요코하마를 왕래하면서 일본인 목사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선교사 유치운동에 힘을 쏟고 있었다.

                                                     서신 美선교잡지에 실려

  이수정은 자신이 믿고 있는 기독교가 너무 좋아서, 혼자 간직할 수 있는 그러한 진리가 아니라 자신이 받았던 은혜를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면서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에게 복음을 전도하고 나섰다.

 

  한국에서는 30여명의 유학생이 도쿄에 와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수정의 전도에 감동이 되어 30여명의 유학생이 모두 개종하고 그의 지도를 받으면서 성경공부를 하게 됐다.

 

  이수정은 미국교회에 선교사를 보내 달라는 ‘선교사 유치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수정은 일본교회 목사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1883년 7월과 11월, 2회에 걸쳐 미국교회에 서신을 보내게 되었다. 서신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나 이수정은 미국에 있는 교회의 형제 자매들에게 문안 드립니다. 진리와 신앙의 힘에 의하여 내 주의 큰 축복을 받아 내 기쁨은 측량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배려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신앙을 지킬 수 있었으며, 사단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우리는 주께 영광과 찬송을 돌릴 수 있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1천만 동포는 아직까지 참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이교도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복음전파의 시대에 우리나라는 불행히도 기독교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지구의 어두운 구석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복음을 전파하는 수단을 만들기 위하여 한국어로 성서를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사업의 성공을 위하여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거의 완성되고 있습니다. 이하 생략’

  이 서신은 곧 미국교회의 선교잡지에 소개되었으며, 이 잡지를 읽은 미국교회의 젊은 실업 청년 맥 윌리엄스는 곧 5천달러를 헌금하게 됐다.

 

  굳게 닫혔던 한국의 문이 1882년 5월 한·미수호통상조약으로 인하여, 한국 정부에서는 1883년 7월에 미국에 특명 전권공사 민영익을 비롯해서 7명을 파견하게 되었다. 이들 일행은 인천 제물포를 출발해서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그해 9월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이때 한국 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미국 감리교 지도자 카우처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일행을 통해 한국 사정을 잘 알게 된 카우처 박사는 선교비의 일부인 2천달러를 헌금하게 되었고, 이후 한국 선교를 위해서 많은 기도를 하게 되었다.

/김수진 목사 예장 통합·교회사학자

 

                    [新한국교회사] (11) 일본주재 선교사들의 역할
                                                                                              [국민일보 2001-04-04 10:37]

                                                      일본의 첫 기독교 출발

  한국 선교에 공이 컸던 일본 기독교는 한국보다 몇 해 앞선다.

 

  1854년 미일 화친조약이 이루어 진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미국 선교사들은 요코하마를 통해 일본에 상륙했다.조약이 체결되면서 미국인들이 일본에 주재하게 되었으며,이 일로 미국인의 신앙을 돌보기 위해 교역자가 요청됐다.

 

  1859년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 헵번(Dr.J C Hepburn)을 비롯해 미국 성공회 윌리엄스(C Williams), 미국 개혁교회 브라운(S Brown) 등이 차례로 입국했다.그러나 이들은 일본법으로 선교가 금지되었기에, 일본인을 상대로 선교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헵번은 장차 일본도 선교의 문이 열릴 것을 믿고 요코하마 근방 성불사 절간에 숙소를 정하고 그곳에서 일본의 선교 문이 열리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으며, 성서 변역에 힘을 쏟기도 했다.얼마 후 바라(J Ballagh)선교사 부부가 요코하마에 도착하자 성불사에 기거하면서 이 일에 협력하게 되었다.

  헵번은 성불사 옆에 있는 종흥사 절간에 진료소를 개설하고, 많은 일본인에게 큰 혜택을 배풀었다.여기에 바라 선교사는 요코하마에 바라숙(塾)을 개설하고 일본 청소년들을 상대로 근대화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무렵 일본에 왔던 선교사들은 매년 정초가 되면 기도회를 개최하게 되었는데 이때 바라숙에 모여 기도회를 갖게 됐다.선교사들은 일본의 선교 자유가 이뤄지기를 기도함과 동시에, 일본인을 위해 뜨겁게 기도하고 있었다.이러한 광경을 지켜 보아왔던 바라숙 학생들이 자신들도 함께 기도회에 참석하겠다고 요청했으며, 바라 선교사는 자신의 제자였기에 기꺼이 참여토록 하였다.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자, 9명의 학생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일생 동안 예수와 함께 살겠다고 다짐하면서 세례를 요청하였다.바라 선교사는 이들의 신앙을 검증한 뒤 세례를 베풀었다.천박한 일본땅에 첫 교회가 출현되었다.

  아직 일본인은 기독교를 믿을 수 없는 시대였다.도쿠가와  300년의 기독교 금지령이 아직 살아 있을 때였기에, 이들의 신앙심은 순교를 각오하고 있었다.이렇게 해서 이들을 중심으로 한 일본 최초의 교회가 1872년 2월 요코하마에 세워졌다. 이름은 가이칸교회(해안교회)였다.

 

  이 교회가 탄생하고 1년이 지난 1873년, 일본 천황으로부터 기독교 금지 철폐가 단행되면서 일본도 기독교 선교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이때 바라숙에서 출발한 일본 최초의 기독교인 가이칸교회 신도들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면서 전도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러한 신앙의 자유가 곧 미국에 알려지자, 미국 남북 장로교회를 비롯해 미국 남북감리교회, 미국 성공회, 미국 조합교회 등의 많은 선교사가 앞을 다투면서 일본 선교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 선교사들은 요코하마와 도쿄를 오가면서 부지런히 미션학교를 설립함과 동시에, 개척교회를 설립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이처럼 선교가 시작되기 전, 이미 헵번은 1863년 요코하마에 헵번숙(후에 메이지학원대학), 1871년 역시 요코하마에 바라숙(후에 브라운숙과 통합하여 일치신학교), 1874년 미국 성공회에서는 도쿄에 닛교대학, 1875년 미국 조합교회 니지마가 교토에 동지사대학, 1883년 미국 메도디스트에서 매클레이 선교사가 도쿄에 아오야마학원대학을 각각 설립, 일본의 새로운 기독교 문화를 전파하면서 새로운 학문의 장을 넓혀가고 있었다.

  이와 함께 교회도 도쿄로 전파되면서 1872년 9월 도쿄교회, 1874년 고베교회, 오사카교회가 차례로 설립되었다.그리고 한국인 이수정이 세례받았던 노월정교회는 1874년 카라솔스 선교사 부부가 설립하였다.그후 1883년 야스가와가 목회할 때 이수정은 이곳에서 세례를 받았다. 역시 이수정에게 한글 성서를 번역할 수 있도록 지원했던 루미스 선교사도 요코하마 시로교회를 설립하였다.

  여기에 그 유명한 클라크 박사 1876년 홋카이도 삿포로 농학교(1872년 설립 후에 홋카이도대학 농학부)에 와서 학생을 가르칠 때, 모든 학생이 클라크 박사와 예수를 믿겠다고 서약하면서 삿포로 독립교회를 탄생시키면서 무교회주의를 창설하기도 하였다.이때 클라크 박사는 홋카이도를 떠나면서 “소년이여 꿈을 가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클라크 박사의 영향을 받았던 우치무라도 그중 유명한 일본 크리스천이기도 하다.

                                                      매클레이 선교사의 역할

  미국 감리교 매클레이 선교사는 곧 이수정, 김옥균 등과 접촉하면서 한국 선교에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바로 1884년 6월27일 매클레이는, 한국에서 학교와 병원사업을 할 수 있도록 고종황제에게 허락받아줄 것을 요청하게 됐다.매클레이는 김옥균을 통해 고종황제로부터 허가를 받자, 곧 일본으로 돌아가 미국에 연락, 한국 선교의 기틀이 마련됐다면서 학교와 의료사업을 위해 수고할 선교사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게 되었다.

  원래 매클레이는 1848년 24세의 젊은 나이로 중국 남단 푸젠성에서 영화대학을 설립하면서 선교활동을 하였다.10년째 되던 해인 1858년 진신당과 천안당 교회를 각각 설립하였다.자신은 중국에서 선교사역에 실패함을 깨달았던 그는, 일본에 선교의 문이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 곧 미국 선교본부로 연락하고 일본으로 선교지를 옮기겠다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때마침 허락을 받고 1873년 중국 선교를 마감하고 일본으로 선교의 장을 옮기게 되었다.이렇게 해서 그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서 일본 최초의 선교사 되었으며, 그는 비록 중국에서 선교사로서 실패하였지만 일본에서는 대학을 설립하는 등 많은 교회를 설립하는 데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이수정은 미국 성서공회 총무 루미스의 도움으로 마가복음서를 번역하는 등 일본인 목사와 미국인 선교사들의 많은 지원을 받았다.일본에서 선교사 유치에 힘을 기울였던 결과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중국에서 활동하던 의료선교사 앨런(H N Allen)이 1884년 9월20일 인천 제물포에 도착했다.

  다시 미국 본토에서 젊은 신학생들이 한국 선교를 위해 기도하던 중 미국 북장로교에서는 교육선교사로 언더우드(H G Underwood), 미국 감리교에서는 아펜젤러(H G Appenzeller)부부, 의료선교사로 스크랜튼(M F Scranton)부인, 그의 아들 스크랜튼(W B Scranton)을 각각 선발하였다.이들의 신분은 의사 또는 교사였지만 언더우드, 아펜젤러는 모두 목사 안수를 받은 복음을 전파할 사역자들이었다.

  이들은 약 1개월간 태평양을 항해하면서, 미지의 한국에 하루 속히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려 축복의 땅으로 변해주기를 기도로 수없이 호소하였다.

 

  드디어 1885년 2월 모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여 낙스, 매클레이, 루미스, 이수정의 환영을 받았다.이들을 환영했던 이수정은 얼마나 기뻤을까.

                                                                                       /김수진 목사 예장 통합/교회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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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헵번하면 떠올리는 이름이 '오드리헵번' 인데, 실제로 헵번(Dr.J C Hepburn) 선교사님이 오드리 헵번의 증조부 -ㅂ- (가문의 복ㅋ)

 

 1885년 2월에 발간했던 이수정 번역의 마가복음은 헵번과 미국 성서공회 총무 루미스의 협력으로 이루어졌다. (요코하마)

 

 그리고 한국에서 처음으로 성서번역위원회가 조직되었을 때, 성서번역위원회의 조직 상황을 알기

위해서 언더우드, 헵번과 루미스 선교사의 자문을 많이 받기도 하였다.

 

 또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 많은 선교사님들이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오기 전 때를 기다렸던 곳이 헵번 선교사님의 집과 요코하마.

 

 릿교대학은 이케부쿠로에 있고, 아오야마학원대학은 시부야에 있어 가 볼 수 있는데,

메이지학원대학은 요코하마에서 버스 타고 들어가는 곳이라.. (쪼끔 시골) 마음으로만 품어야겠다.

 

                                                                                                          출처:http://blog.naver.com/sianya/8005155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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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한국교회사] (13) 의료선교사들의 활동…알렌, 민영익 치료 ‘복음의 문’ 활짝
                                                                                             [국민일보 2001-04-18 11:01]

  한국기독교 최초의 의료선교사인 알렌은 1858년 4월에 태어나, 미국 오하이오주 웨슬레안대학 신학부를 거쳐 마이애미의과대학에서 의학을 연구하고 박사학위까지 받을 정도로 명석한 의사였다.

 

  1883년 박사학위를 받자 곧 메신저와 결혼, 그해 10월 미 북장로교의 파송을 받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향했다. 이미 상하이에서는 영국 런던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알렌 선교사는 1년여 동안 상하이와 난징(南京)에서 선교에 임하였지만 이렇다 할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때마침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려고 기도하고 있던 중, 뜻하지 않게 미 북장로교 선교부로부터 한국 의료선교사로 가라는 명을 받고 중국 상하이를 출발, 1884년 9월20일 제물포항에 도착함으로써 한국 선교사의 선두 주자가 됐다.

  알렌은 한국 선교사로 파송받을 때는 주한 미국 공사관 공의(公醫)자격으로 입국했다. 이미 한국은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수난을 당한 역사가 있었기에, 알렌도 자신이 선교사란 말을 못하고 다만 공의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멀지않아 이 벽이 무너질 것을 믿고, 하루속히 선교의 문이 활짝 열리도록 많은 기도를 했다.

  그런데 그가 부임한 지 얼마 안된 12월4일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우정국(郵政局) 개원식에 개화파와 수구파간의 알력으로 일어난 정변에서, 당시 수구파의 실력자인 민영익이 심한 상처를 입고 생명이 위독한 상태였다. 이때 생명의 위협이 있는 민영익을 누가 치료할 것인가? 소문은 어느새 전국으로 퍼져 용하다고 하는 한의사들이 서로 치료하겠다고 여러 경로를 통해 로비하고 나섰다.

  심한 상처를 입은 민영익은 고종황제의 고문인 독일인 몰렌도르프의 도움으로, 모든 한의사를 제쳐놓고 알렌에게 치료를 하게 한다. 이때 알렌은 보통 걱정이 아니었다. 만일 여기서 실패하는 날에는 한국의 선교가 영원히 끝장날 판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았던 알렌은 남달리 더 많이 기도하면서 민영익을 수술했다. 정성껏 치료한 결과  3개월이 지나자 신기하게도 그 깊은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그의 정성어린 기도와 의술로 민영익은 점차 회복, 그 다음해인 1885년 3월 드디어 완전히 건강을 찾게 되었다. 알렌은 정부로부터 1000량의 사례금까지 받았다.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의 역사인가! 하나님께서는 알렌을 통해 민영익의 병을 완전히 고쳐 주고 선교의 문을 열어 준 것이다.

  알렌의 명성은 곧 정부 고관들의 입으로 전해지면서, 고종황제와 황후 민비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알렌은 이러한 기회를 놓칠세라, 미 대리공사인 폴크를 통해서 서양의술을 펼칠 수 있는 병원을 건립할 것을 제의하게 되었다.

  그후 알렌은 궁중의 주치의가 되면서 궁궐을 자유롭게 드나들게 됐다. 이러한 기회를 활용, 한국에서 선교사로 꼭 성공하겠다는 남다른 의지를 갖고 준비에 임하였다.

 

  그런데 고종황제로부터 뜻하지 않게 광혜원이라는 병원을 하사받게 된다. 그동안 돈 많은 고관들만 치료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던 알렌은, 하나님의 은혜에 다시한번 감사를 드렸다. 수많은 가난한 한국인들이 병을 앓아도, 약 한번 사용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늘 안타깝게 여기던 차에, 정부에서 병원을 하사하다니 이 이상 기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갑신정변 때 개화파 인물로 타살당한 홍영식의 집을 수리하고, 1885년 4월10일 드디어 광혜원의 문을 열었다. 한국선교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당시 알렌의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년에 약 300달러 상당의 약품이 소요되었으며, 경상비는 정부에서 담당할 것이며, 돈을 낼 수 없는 이들에게는 약과 치료를 무료로 해주었다. 약 40개의 침대를 놓고, 공간이 있으면 간이침대도 놓았다

                        -중략-

 

  그러나 고종황제는 내가 선교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고종황제와 황후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나를 불러 자신들을 치료해 줄 것을 부탁하며, 원하는 것이 있으면 서슴지 말고 말하라고 몇 번이고 다짐시켰다”

  이처럼 정부로부터 인정 받은 알렌은 마음껏 진료하며 선교에 임하게 된다.

 

  그가 병원을 개원한지 얼마 안되어 미 감리교의 스크랜튼, 장로교의 헤론의 도움을 받으면서 1만여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환자들 대부분이 장티푸스, 천연두, 이질, 폐결핵, 매독,한센병 등 악질성 병을 앓고 있었다. 여기에 궁중의 관리를 비롯해 가난한 사람, 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병든 자를 치료하였다.

  언더우드는 그를 도와 한국 의료인 양성을 위한 과학을 담당했다.

 

  알렌은 1886년 3월, 12명의 학생을 선발하여 5년과정의 의학 훈련을 시켰다. 광혜원으로 기초를 다졌던 알렌은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동안 원장으로 일했던 알렌은 선교사의 일을 접어 두고, 주미 한국공사관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1887년 9월 헤론이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무렵 간호사였던 엘러스(A.J.Ellers)가 여기에 참여하였다. 1886년 제중원의 건물을 구리게(현 명동 입구)로 옮겼다.

  헤론이 한국 선교는 자신의 몫으로 알고 본국에 보낸 서신중 이런 내용이 있다.

  “단순히 나 자신의 의학 기술을 시행하는 데에 있지 않음을 잊을 수 없습니다. 나는 그들을 위해 돌아가신 구세주를 이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열망합니다”

  이처럼 헤론은 위대한 의사는 바로 예수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 무렵 엘러스의 후임으로 홀튼(L.S.Horton)이 부임하여 부녀과를 진료하였다. 이때 정동에 모화관 진료소를 개설하고 진료에 힘을 기울였다. 그후 홀튼은 언더우드와 결혼하였다.

 

  한때 알렌을 협조하면서 진료에 임했던 스크랜튼 박사는 정동에 병원을 개원하고, 가난한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하는 등 가난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병원’이란 뜻에서 시병원(施病院)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훌륭한 진료 업적을 남겼다.

  당시 남자 의사가 여자 환자를 치료한다는 일은 유교문화인 한국에 용납되지 않았다. 그래서 스크랜튼 박사 어머니의 제안으로 본국 선교부에 여의사를 요청했다.

 

  1887년 10월 여의사 하워드(M.Howard)가 도착, 시병원 한 칸을 빌려 사용하게 된다. 환자들이 몰려들어 더 이상 수용할 수 없게 되자 단독 건물을 얻어 병원문을 열었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부인진료소인 보구여관이다.

  스크랜튼이 진료하고 있던 병원은 많은 사람들이 몰려 오자 맥길(W.McGill) 선교사가 그를 도왔다. 그후 그는 가난한 남대문 시장통에 사는 빈민들을 위해 상동병원을 개설하였다. 이후 정동 시병원을 상동으로 이전하고, 후에 이 병원을 중심해서 상동교회가 설립되었다.

                                                                                                /김수진 목사 (예장통합·교회사학자)

 

 

                 [新한국교회사] (14) 제중원 확장과 의료선교 활동
                                                                                                                                  [국민일보 2001-04-25 11:35]
                                                  헤     론

 

 

  헤론은 제중원 원장으로 취임한 뒤 점점 바빠지기 시작했다. 알렌은 다소 관료적인 권위를 갖고 진료를 하였다면, 헤론은 그렇지 않았다. 바로 한국의 가난한 환자를 진료하는 일이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란 신념을 갖고 임했던 그의 사역은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다. 이러한 일로 제중원은 점점 확장되고 있었다.

  이처럼 헌신적으로 진료에 임했던 헤론은, 1856년 6월 영국에서 회중교회의 아들로 출생했다. 14세때 미국 이민의 대열에 끼여 미국에 도착한 뒤, 장로교 미션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메리빌대학을 거쳐 테네시대학 의학부를 졸업했다. 당시 대학당국에서는 헤론에게 의학부에 머물러 더 연구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헤론은 병들어 죽어가는 가난한 나라에 가서 생명을 살리는 운동을 해야 한다며, 미 북장로교 선교부를 방문해 한국의료선교사로 지원했다.

  지원서를 접했던 미 북장로교회는 깜짝 놀랐다. 촉망 받는 유능한 의사가 낙후된, 그것도 위생시설이 열악한 곳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겠다는 말에 모두들 놀랐다. 그리고 그를 한국으로 파송하기로 했다.

 

  그는 예정대로 일본에 도착한 뒤, 이수정과 헵번의 안내를 받으며 헵번의 집에 얼마동안 머물며, 한국어도 배우고 선교사로서 필요한 자질을 배웠다.

  그는 비록 한국 선교사의 선두주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한국 의료선교에 큰 공을 쌓았다. 처음에는 제중원에서 의사로서 진료만 했지만, 알렌이 사임한 후로는 그 많은 업무를 자신이 떠맡게 되었다. 이럴 때마다 그는 이것도 하나님의 큰 축복이라며 열심히 일했다.

 

  그는 기도만이 신앙의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고 믿고, 이미 법률로 예배행위가 금지됐는데도 서울에 도착한지 일주일후만인 1885년 6월28일 밤 알렌부부, 스크렌튼의사 어머니 등과 함께 예배를 시작했다. 비록 외국인 중심의 예배였지만 한국에서의 첫 예배는 제중원에서 시작되었다. 예배가 공식 금지되었던 한국땅에서 첫 예배를 드렸던 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참으로 장한 일을 했던 헤론은 그 누구보다도 책임감이 강한 의사였다. 헤론은 제중원 원장이라는 직책으로만 그의 사명을 한정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인들이 영과 육이 함께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늘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주일이 되면 제중원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자신은 의사였기에 예배 인도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렌튼 등이 했다. 스크렌튼은 목사이면서 의사였기에 이들과 함께 돌아가며 설교하고 주일 예배를 인도했다. 이 예배는 제중원이 구리게(명동)로 이동한 뒤에도 계속 진행됐다.

  일본에서 이수정이 발간했던 마가복음만으로는 말씀과 전도에 부족함을 느꼈던 이들인지라, 1887년 언더우드, 아펜젤러, 헤론, 스크렌튼, 알렌 등은 모여 성서를 번역하기로 했다. 이들의 노고는 우리나라 성서번역작업의 기초를 닦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후 1889년 10월 호주 장로교회에서 파송받은 데이비스 선교사가 서울에 도착하자, 선교사 공의회 조직됐고 초대 회장에 헤론, 서기에는 데이비스가 선임됐다.

  이들은 1890년 6월 새로 한국에 도착했던 선교사들을 대거 참여시켜 대한성교성회(현 대한기독교서회)를 창설했다. 헤론선교사는 가방에 항상 성경책 · 진료기· 비상약품 등을 챙겨 다녔다. 서울에서는 그래도 의료 선교사들이 있어 전염병 퇴치운동에 큰 보탬이 되었지만 시골은 그렇지 못했다.

  이런 사정을 알고 안타까워했던 헤론은 제중원 입원 환자들을 간호사에게 맡기고, 따갑게 내리쬐는 태양볕을 받으며 진료가방을 챙겨들고 100리이상 떨어진 시골지역을 다니며 전염병을 치료했다. 그러나 결국 그도 이 때문에 전염병을 얻어, 한국에 온 지 5년만에 자신의 병원인 제중원에서 부인과 두 딸을 남겨 놓은 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소천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그 무더운 7월, 입원해 있던 한국인 환자도 울고, 동료 선교사들도 울었으며, 그를 알고 있는 정부 고관들도 울고 말었다. 그는 모든 고통을 자신을 구원한 예수님께 맡기고, 조용히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천사의 안내로 하늘로 향했다.

 

  헤론은 죽기전 자신을 향해 눈물흘리고 있는 부인과 두 딸, 그리고 한국인 환자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위해 그의 생명을 바치었습니다.

     주님을 믿으십시오!”

 

  이 얼마나 훌륭한 유언인가!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지만, 그의 시신을 안장하는 것이 문제였다. 원래 외국인들이 사망하게 되면 인천 외국인 묘지로 가야 하지만, 따갑게 햇볕이 내리쬐는 7월인지라 인천까지 운구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선교부 대표들은 4대문안에 안장하려 했지만, 쉽사리 되지않아 할 수 없이 정동에 있는 선교부 구내에 임시로 매장토록 했다.

 

  그런데 사람이 살고 있는 서울 장안에 시신을 매장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정부고관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당국의 압력으로 할 수 없이 그가 사망한 지 3년만에, 4대문밖 버려진 땅이었던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양화진 양지바른 땅에 헤론의 시신을 안장하게 되었다.

  헤론은 부인과 두 딸을 이역만리 한국에 남겼으나, 그들을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 캐나다 선교사로 1889년 부산에 상륙해 선교활동하던 게일(JS Gale) 선교사가 독신이어서, 1892년 헤론선교사 미망인과 결혼을 하고 어린 두 딸도 가족이 됐다. 게일은 가족과 함께 원산에 부임해 활동했으나, 1908년 3월 부인이 결핵을 앓다 먼저간 헤론 선교사의 곁으로 훨훨 날아가 버렸다. 선교부에서는 그녀를 첫 남편 헤론이 묻혀있는 양화진에 안장했다.

  헤론이 원장으로 취임한 뒤 많은 업적을 남겼던 제중원은 헤론 사망뒤 빈톤(CC Vinton)이 잠시 원장의 책임을 맡았다. 뒤를 이어 1893년 원장을 맡았던 에비슨(OR Avison)은 제중원 시설의 미비함을 발견하고, 1899년 안식년을 얻어 일시 귀국한 뒤 미국의 유지 세브란스(LH Severnce)로부터 1만달러를 희사받아 한국으로 향했다. 에비슨은 남대문밖에 대지를 마련한 뒤 세브란스로부터 희사금으로 현대식 시설을 갖춘 병원을 신축하고 세브란스병원으로 명칭을 바꿔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세브란스병원은 지금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이라 불리고 의과대학까지 운영하면서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헤론이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한국에서 보여준 희생적인 삶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그는 죽은 후에도 한국에 묻혔고, 그의 부인까지 그의 곁에 묻혀있다.

 

  하지만 그들 부부를 비롯해 400여명의 선교사가 묻혀있는 양화진 묘소가 왜 그렇게 초라한지...

 

   그 곳을 성지라고 부르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김수진목사 예장통합·교회사학자


 

 

                    [新한국교회사] “선교는 순교”…한국인 사랑 ‘애틋’
                                                                                                                                    [국민일보 2001-05-02 11:07]
  일본 상선 비쓰비시호는 한국의 관리를 비롯해서 일본 승객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서로 경쟁이나 하듯, 누가 먼저 제물포 땅을 받고 당당하게 한국 선교에 헌신 할 것인지에 관심이 쏠렸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경쟁했을 듯도 한데 언더우드가 양보했다. 여성이 먼저 한국의 대지를 밟는 것이 좋겠다는 언더우드의 배려에서 아펜젤러 부인이 먼저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아펜젤러 전기를 썼던 그리피스는 “1620년 미국에 처음 이민한 사람들 중에 메리 칠튼이 플리머스 바위 위에 첫 발을 내디딘 것처럼, 한국땅에 첫 발을 내디딘 사람은 아펜젤러의 부인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두 선교사들이 동시에 한국땅을 밟는 것은 장차 한국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예고였다. 여자로 하여금 먼저 제물포땅 조선의 대지를 힘차게 내디디게 했던 언더우드의 생각이 얼마나 멋진가!

  그러나 한국 대지에 힘있게 발을 내디딘 아펜젤러 부부의 기쁨도 잠시뿐이었다. 때마침 아펜젤러 부인이 임신중이어서 힘든 이국의 생활이 매우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마중나온 미국공사는 이들 부부를 곧장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물포의 다이부쓰호텔로 안내했다. 한편 언더우드와 다른 일행은 알렌의 안내를 받으면서 곧 서울로 향하였다.

  이때 호텔에 머물고 있던 아펜젤러 부부는 한시바삐 서울에 정착하여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려고 노력하였지만, 만삭의 몸 때문에 서울에 들어가보지도 못한채 4월13일 다시 일본행 배에 승선하고 말았다. 제물포항을 떠나는 아펜젤러 부부의 마음은 얼마나 허전하였을까! 그렇게 큰 꿈과 이상을 갖고 여성 해방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다 하겠다고 두 남자 선교사를 제치고 제물포항에 상륙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1885년 4월18일 청나라의 이홍장과 일본의 이노우에가 한성(漢城)조약을 체결한 후, 다시 천진(天津)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은 정치적으로 일시나마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일본 나가사키에 머무르고 있던 아펜젤러 부부는 과거 300년간 도쿠가와막부 시대에 예수를 믿다 순교했던 니시사카사 형장을 둘러보고, 순교할 각오를 다짐하면서 그곳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다행히 국내 사정이 안정돼 아펜젤러 부부는 그해 5월3일 제물포항에 다시 도착하였다.

                                                              문을 연 배재학당

  늦게 서울에 도착한 아펜젤러 부부는 미리 와서 자리잡고 있던 스크랜턴 선교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정동에 짐을 풀게 되었다. 이들은 그날 밤을 온통 기도로 지새웠다. 조선이 예수를 영접해 영원한 기독교 국가로 세계 만방에 이름을 떨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였다.

  부부는 이 일을 하기 위해서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헌 집 한 채를 매입하고 작은 교실을 만들어 2∼3명의 학생을 모아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아펜젤러의 일기를 살펴보면 “나는 지난 8월3일 월요일에 이겸라와 고영필이라고 하는 두 한국인에게 교육을 시작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이로써 배재학당은 1885년 8월3일 문을 열고 다음해 6월부터 정식 학교로 개교하였는데, 조선 정부에서는 아펜젤러의 교육열에 감동해 고종황제가 친히 ‘재목을 키운다’는 뜻의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교명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아펜젤러는 모여드는 학생들에게 영어도 가르치고 예수도 함께 소개했다. 여기에 뜻하지 않게 2명의 학생에게 세례까지 집례하는 일도 일어났다. 참으로 성령의 역사는 신기하였다.

  1887년 12월25일에는 배재학당 교실에 모여 아기 예수 오심을 축하하는 성탄절 축하 예배가 있었다.당시 한국인을 상대해서 전도하는 일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아펜젤러는 이러한 일을 해냈다.

  학생이 모여들고 예수를 믿겠다는 신앙 고백자가 생겨나자 이들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던 아펜젤러는 곧 예배실과 교실을 확장하고 도서실 공업실습실 기숙사까지 마련하여 민족의 기독교 요람으로 키워갔다. 그래서 1896년 서재필 박사의 지도하에 협성회가 조직되는 등 한국 청년운동과 민족운동의 터전을 마련했다.

                                     목포 유학생을 구하다가 순교한 아펜젤러

  배재학당 졸업생들은 민족의식을 갖고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신문까지 발행하면서 한국에 민주주의 기초를 다져놓기도 하였다. 바로 정동은 한국 근대화의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으며, 교실에서 예배를 드렸던 그 역사가 정동감리교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배재학당을 나왔던 학생들은 교회의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1902년 6월11일 아펜젤러는 전남 목포에서 모이는 성서번역출판위원회에 참석차 인천에서 구마가와호를 타고 목포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짙은 안개로 아펜젤러가 탄 배와 다른 배가 충돌하여 배들이 침몰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때 아펜젤러는 함께 승선했던 정신여학교 학생을 구하려다가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접한 서울의 선교사들과 감리교 교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감리교는 6월29일 정동교회에서 추도예배를 드렸으며, 추모사를 읽는 순간 장내는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그가 생전에 외치던 ‘선교는 순교’라는 말이 현실이 된 것이다.

  한편 뜻있는 감리교 지도자들이 아펜젤러가 순교했던 목포지역에 그의 순교정신을 영원히 기리고자 1973년 감리교 총회에서 결의, 기념교회 건립을 위해 2년간 모금했다. 그리하여 1975년 11월 아펜젤러순교자기념교회로 봉헌함과 동시에, 목포제일감리교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현재 이 교회는 김덕부 목사가 150여 명의 교인들과 함께 아펜젤러의 뜻을 잇고 있다.

  아펜젤러는 갔어도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일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라는 그의 말은 오늘도 남풍을 타고 서서히 북상하니, 모두 아펜젤러와 같은 마음을 갖고 이웃을 섬길 것을 권한다.

                                                                                            /김수진목사(예장통합·교회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