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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한국교회사] (2) 3·1운동과 기독교 | |
[국민일보 2001-02-22 11:26] | |
3·1운동에 대한 최초의 논의는 1919년 1월20일에 있었다. 최린 오세창 권동진 등 3인은 천도교 교령인 손병희를 만나 의논한 결과 쾌히 승낙을 하자 곧 종교계가 중심이 돼 이 일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독립선언서 작성은 천도교측에 맡기로 하자 최린은 곧 기독교측인 최남선에게 부탁을 했다. 당시 최남선은 상동교회 청년으로서 상동청년학원 한글 교사로 젊은이를 가르치고 있던 기독청년의 엘리트였다. 이때부터 최남선은 민족의 독립이 자신의 펜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감지한 후 상동교회에 나가 수없이 하나님께 매여 달려 기도를 하였다. 따라서 기독교에서도 선우혁을 중심한 독립운동이 서서히 대두됐다. 그는 곧 이승훈 장로와 양전백 목사를 만나 평양 선천 정주지역에 있는 기독교인을 중심해서 독립운동을 조직화 하는 데 힘을 쏟고 있었다. 이 무렵 천도교 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던 이승훈 장로는 곧 상경하여 천도교와 연합으로 이 운동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다시 이승훈 장로는 YMCA 간사 박희도를 만나 세브란스병원 제약과 이갑성과 함께 추진하게 되었다. 때마침 연희전문학교 학생 김원벽 등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과도 만나 상의한 결과 종교계에서 준비한 이 운동에 합세하기로 하였다. 이처럼 3·1만세운동이 급속도로 진행할 수 있었던 일은 종교계 지도자들이 비밀히 접촉하고 일치 단결해 서로 역할 분담을 했기 때문이다. 천도교측은 손병희 교령을 주동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으며 기독교측은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교회 이승훈 장로가 책임을 맡아 대표자들을 선정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 대표 16명, 천도교 대표 15명, 불교 대표 2명 등 모두 33인이 민족대표로서 3?^1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게 됐다. 기독교 대표는 길선주 이필주 김병조 김창준 양전백 유여대 신홍식 신석구 최성모 정춘수 오화영 목사 이승훈 이명룡 장로 박희도 전도사 박동완 이갑성 등이었다. 여기에 서명했던 기독교 대표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실 것을 믿고 기꺼이 이 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그런데 이들이 여기에 참여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는가에 대해서 오화영 목사 추천으로 참여한 신석구 목사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그후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는 데 2월27일 새벽에 이런 음성을 들었다.‘4000년 전해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 보려고 힘쓰지 않으면 더욱 죄가 아니냐’ 이러한 음성을 듣고 그 뜻을 결정하게 됐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오화영 목사에게 전하고 독립선언서에 기꺼이 서명을 했다. 한편 전문학교 학생들은 별도로 준비에 임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 일에 관심을 갖고 있던 김원벽은 2월20일 자신이 출석하고 있던 인사동 승동교회에 모여 첫 간부회의를 개최했다. 이때 김원벽으로 하여금 학생동원에 힘써 줄 것을 부탁했다. 다시 2월25일 밤에는 서울 정동감리교회 오화영 목사집에서 3월1일 오후 2시 시내 중학교 이상 학생들은 파고다공원에 집결하고 독립선언과 함께 시위를 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혹시라도 일본 경찰에게 발견될까 서로 긴장하면서 암암리에 준비에 최선을 다했다. 이들은 이제 그 지긋지긋한 일본 경찰과 헌병의 무단정치를 철퇴시키는 좋은 기회가 되고 더 나아가서 조선독립이 선뜻 다가오는 듯한 느낌을 갖고 밤낮가리지 않고 뛰어 다녔다. 방과후에 학교 과제물도 잊은 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하루하루를 긴장 속에 살아갔다. 2월 중순에는 비밀리에 종로 YMCA 강당에서 6일간 시국강연회가 개최됐다. 이때마다 시내 남녀중학교 중학생들이 릴레이식으로 참가하였으며, 강연회가 시작되기 전에 이화여학교와 정신여학교 합창단이 교대하면서 찬양하기도 했다. 여기서 중학교, 전문학교 학생동원에 대한 책임자를 선정하는 등 3월1일 오후 2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2월28일 밤에는 학생들에게 배포될 독립선언서 1500장이 전달됐다. 정동감리교회에는 중학교 대표들이 모였으며, 승동교회는 전문학교 학생들이 모여 인원동원과 독립선언서 배포 등을 의논하고 즉시 헤어져 각기 맡은 책임량을 감당하기 위해서 밤이 늦도록 릴레이식으로 지침을 전달했다. 드디어 역사적인 3월1일은 해맑은 아침이었다. 학생들은 굳은 결의를 하고 집을 출발해 평상시와 다름없이 책가방을 챙겨 나갔으며, 책가방 깊숙히 독립선언서를 몇 장씩 챙겨 넣었다. 그리고 밤새 그렸던 태극기도 한아름씩 집어 넣었다. 아침 조회를 마친 학생들은 그 길로 파고다공원을 향해 행진하고 있었다.길거리에 만난 시민들에게 공원에 모여 달라고 외치며 모이자 어느새 공원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참으로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들었다. 여기에 기독교 교인들도 많이 참가했다. 원래 계획은 3월2일에 행하기로 하였지만 이날은 주일이기 때문에 하루 앞당겨 거사가 진행됐다.이때문에 더 많은 교인들이 모이게 됐다. 민족대표 33인이 파고다공원 올 줄 알고 그렇게 기다렸지만 나타나지 않자 김원벽 등 학생대표들이 33인이 머물고 있는 태화관에 방문을 하였다. 그러나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자 학생대표들마저 나타나지 않자,황해도 해주 출신인이며 진실한 기독청년 정재용(해주본정교회·경신고출신)이 공원에 모인 인파를 해치고 팔각정에 뛰어 올라갔다. 조금 전까지만도 어수선한 공원이 찬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했다. 이날 정재용은 식전에 참여하기 위해 2월28일 황해도 해주에서 기차로 서울에 도착하여 독립선언서 100장을 원산으로 밀송하고 그 중 1장를 주머니에 넣었다. 정재용은 주머니에서 독립선언서를 꺼내들고 줄줄이 힘있게 읽어 내려갔다. 최은희(당시 경기고여 학생·전 조선일보 기자)는 ‘조국을 찾기까지의’ 책에서 장재용의 말을 인용,이렇게 말하고 있다. “탑골공원에서 예정시간이 돼도 민족대표가 나타나지 않자 갑자기 주머니속의 한장의 독립선언서가 생각나면서 기독교인 나는 유대민족의 영웅 다윗과 같이 민족의 영웅이 되리라는 충동을 받고 나도 모르게 팔각정에 올라가서 독립선언을 읽었다” /김수진 목사 |
[新한국교회사] (3)기독교와 3·1운동 | |
[국민일보 2001-02-24 23:59] | |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이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이로써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노라.-이하 생략)” 참으로 감격어린 순간이었다. 공약삼장(公約三章)까지 다 끝나자 누가 먼저 만세를 불렀는 지 모르지만 약속이나 한듯이 일제히 손에 든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얼마나 민족앞에 자랑스러운 거사였는가 ! 여기에 모인 군중들은 공약삼장에 명시된 대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질서 정연하게 파고다공원 앞문과 뒷문을 빠져 ‘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가 행진에 돌입하였다. 때마침 지방에서 상경한 20여 만명까지 합세했으니 온통 서울은 힌옷입은 천사들로 가득 메워졌다. 더욱이 서울 시내 일본인 상가를 제외하고는 모든 상점이 철수하고 파고다로 모였으며, 이들이 함께 부른 만세 소리는 천지를 진동시키고도 남았다. 정문으로 나왔던 군중들은 종로,을지로,태평로,의주로 혹은 동대문쪽으로,남대문쪽으로 온통 서울 장안을 활보하고 다녔다. 후문으로 나왔던 군중은 창덕궁,안국동,광화문,새문안교회 앞을 지나,구세군본영,정동에 있는 미대사관을 지나 정동제일교회,이어서 덕수궁 대한문에 모여 일부 학생들은 일본 경비대의 경비망을 뚫고 고종황제 빈궁인 삼국궁(三鞠躬)에 예를 하고 대한문 앞에서 독립연설을 하였다. 서울은 온통 만세꾼으로 가득 메워졌다. 다음날 여전히 태양은 동쪽 하늘에서 서서히 �아 오르고 있었다. 이날이 주일이었기에 각교회마다 오전 10시 30분 예배 준비를 알리는 준비종이 여기저기 울려 펴저 나가고 있었다. 30분이 지나자 11시 예배를 알리는 교회 종소리가 또 다시 서울 장안에 울려 펴졌다. 이때 종소리를 듣고 일본 헌병과 경찰은 또 독립군들이 시가 행진을 할까 봐서 초 긴장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회 종소리를 듣고 나온 시민들은 손에는 태극기가 아니라 성경, 찬송가를 들고 각기 소속된 교회로 향하고 있었다. 주일 예배가 시작되자 모든 교회 목회자들은 전날에 일어났던 3.1 독립만세에 대해서 설명 하고 이어서 민족은 민족자결원칙에 의해 독립해야 한다고 당당하게 설교를 하였다. 그러나 시내 몇몇 교회 목사들이 33인에 참여하였기에 모두들 조선통감부에 수감되었기에 이들이 담임하고 있던 교회에서는 그 어느때 보다 독립에 대한 절규의 기도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정동제일교회에서는 오화영 목사가 구속되자 부교역자였던 이병주 전도사가 교회문밖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모아 놓고 독립운동에 대한 연설을 하는 여유도 보여 주었다. 서울에서 일어 났던 이 3.1운동은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더욱 가열되었다. 기독교의 세력이 강한 서북지방에서도 서울지방과 동시에 일어 났다. 이중 평양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 할 정도로 기독교가 강한 지역이었다. 이미 평양은 장로회신학교가 자리를 잡고 있는 지역이었기에 그 어느지역보다 목사가 많이 배출되었다. 여기에 미션 스쿨인 숭실전문학교, 숭실학교, 숭의여학교, 광성학교 등이 있었으며, 여기에 안창호가 설립했던 대성학교가 버티고 있어서 3.1운동은 그 어느지역에 못지 않게 차분한 준비를 통해 3월 1일 오후 1시에 5천여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평양의 3.1운동은 오후 1시에 남산교회, 장대현교회, 숭덕학교에서 고종황제의 봉도회(奉悼會)를 갖고 김선두목사(당시 장로교 총회장)의 지휘를 받으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평안북도 의주에서는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인 유여대목사(의주읍교회)를 중심해서 낮 1시 2천여명이 모여 3.1운동을 전개하였다. 의주에서 그리 멀지 않는 안주에서는 김화식목사(안주읍교회)가 주동이 되어 일어 났다. 특별히 서북지방은 105인 사건으로 철저하게 일제의 철통같은 감시를 받았던 지역이었지만 홀연히 하늘을 나를 듯한 기세를 갖고 당당하게 진행하였다. 함경도 원산에서는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인 정춘수목사(원산감리교회)를 중심해서 2천여명이 원산장터에 모여 만세를 불렀으며, 따로 500여명은 악대를 앞세우고 일본인 상가를 누비면서 만세를 불렀다. 이와 같은 운동은 각지역에서 일어 났다. 항해도에서도 3월 1일 서울과 때를 같이 하여 해주읍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약속을 하고 준비를 하였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주동자들이 검속되는 관계로 좌절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황주읍에서 천도교를 중심해서 운동이 전개되었으며,지난 3월 3일 기독교가 중심되어 황해도 각지역에서 일어 났다. 3.1 운동은 북쪽에서만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 참여 했던 많은 서울 유학생들과 기독교인들은 지방으로 내려와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경기도 개성은 3월 1일 미션 스쿨인 한영서원(송도고등학교) 학생과 기독교 목사에 의해 진행되었다. 서울을 인접해 있는 수원을 비롯한 여러지방에서 일어 났다.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청주지방, 공주지방, 영남쪽에서도 활발하게 움직였다. 지난 2월 24일 서울에서 내려왔던 이갑성은 곧 대구 남성정교회 이만집목사에게 서울에서 일어날 3.1운동에 대한 계획을 전달하였다. 그후 이만집목사는 동지규합에 힘을 쏟는 중 김태련장로에게 독선언서를 준비하게 하였다. 3월 8일 대구장터에 모인 군중들 앞에 김태련장로는 선언서를 낭독하고 이어 이만집목사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여기에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학생들과 기독교인들이 모여 일제의 경비를 뚫고 시가행진을 단행하였다. 이어 3월 11일에는 부산에서 일어 나면서 영남지방 여러고을에서 일어 났다. 역시 호남지방에서도 이 운동이 일어 났다. 3월 6일 군산 장날을 기해 군산영명학교 교사 박연세장로가 주동이 되었으며, 여기 재학중인 전세종, 강문호 등이 앞장서 멜본딘여학교 학생과 함께 군산시내를 활보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다시 이운동은 전주지방에서도 일어 났다. 천도교 전주교구에서 독립선언서 1천장을 준비해서 각지역 천도교 교구에 전달을 하였다. 여기에 못지 않게 기독교도 서문교회 김인전목사, 최종삼장로를 중심해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 3월 13일 전주장날을 기해 독립운동이 일어 났다. 전주 역시 기독교와 천도교가 중심이 되었으며, 이때 미션 스쿨인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서문교회 교인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다시 광주에는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목포지방으로 확산되면서 심지어 제주도에서도 만세를 불렀다. 이 3.1운동은 공약삼장에 명시된데로 비폭력, 질서를 존중하고 광명정대하게 행동을 하였다. 그 무서운 총칼로 휘둘었던 일본 경찰이나 헌병에게 물리적인 힘으로 대항하지 않고 끝가지 정정 당당하게 진행하였다. /김수진목사 (예장통합·교회사학자) |
[新한국교회사] (4) 해외 3·1운동…북간도 만세소리 연해주로 ‘활활’ | |
[국민일보 2001-02-27 10:45] | |
북간도지방에서 선교활동하던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용정에서도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론이 알려지게 됐다. 여기에 힘을 얻었던 기독교인들은 1918년 9월부터 11월까지 4회에 걸쳐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에 대한 논의했다. 드디어 3월13일 북간도의 중심지인 용정에서 정오가 되자 용정중앙교회의 종소리가 신호를 하듯이 시내 모든 교회들이 일제히 종을 치기 시작했다. 이 종소리와 함께 용정에 사는 주민들은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걸고 다시 손에 태극기를 들고 시위대에 합세했다. 때마침 명동학교 학생들로 구성됐던 악대가 선두에 서서 시가 행진에 힘을 더해 줬는데 이때 미션 스쿨을 비롯해서 12개 학교 학생들이 여기에 참가했다. 때마침 식장에 도착한 군중은 부대회장 배형식 목사의 개회선언이 있자 일제히 경건한 마음으로 사회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어 대회장 김영학은 간도거류 조선민독일동의 명의로 된 독립선언포고문을 힘차게 낭독해 갔다. ‘아(我) 조선민족은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노라 민족의 자유를 선언하노라. 민족의 정의를 선언하노라. 민족의 인도를 선언하노라. -이하 생략-’ 이어서 배형식 목사의 강연 등이 행해졌다. 큰 감동을 받았던 3만여명(일본측은 6000명으로 발표)의 군중은 어느 새 ‘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라고 큰 소리로 외쳐됐다. 비암산에 울려퍼진 메아리는 해란강을 따라 전 간도지방으로 더 멀리 전달돼 갔다. 그런데 시가행진 중에 뜻하지 않게 무장한 중국 육군부대 한 병사가 쏜 총탄에 몇 사람이 쓰러지고 말았다. 이 일로 13명이 현장에서 사망했으며, 부상자도 자그마치 30여명이 발생했다. 만세사건으로 일제 헌병대가 간도에 침입할 우려가 있을까 엉뚱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용정 3·1운동에 참여했던 일부 군중은 두만강에 인접해있는 훈춘지방에서도 거사를 준비하고 3월20일 단행했다. 이 때도 훈춘에 살고 있던 군중은 어느 새 3000여명이 모였으며, 몇일 전부터 준비했던 태극기를 손에 들고 나와 만세를 불렀다. 훈춘에서는 조선인촌은 물론이지만 한인촌까지 전부 철시해 중국인들은 조선독립에 대해 관심있게 보아 주기도 했다. 독립축하회로 모인 이날 황병길 노종환 최동문 김정규 등이 차례로 등단해 축하 연설을 했다. 여기 어느 일본인이 참석해 후에 조선군사령부에 보고한 내용을 살펴 보면 이렇다. “군중 중의 한인으로서 감격이 극하여 낙루(落淚)하는 자, 혹은 타인에게 악수를 청하여 감상을 말하는 자, 동감이라 대답한 자, 어려움이 많겠다고 사례하는 자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깊은 감동을 받은 것 같이 관찰된다. 듣는 바에 의하면 이날 가정에 남은 사람들도 남녀노약을 가릴 것 없이 이는 천명(天命)이라고 칭하고 함께 만세를 불렀다 한다. 또한 이날 경계 근무를 하던 중국 순경들도 그들의 행동을 연민히 여겨 낙루하는 자 있었다” 이같은 감격적인 강연을 듣던 군중은 다시 질서정연하게 ‘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가행진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중국 육군의 횡포는 없었다. 이와 같은 운동은 서간도 지방에서도 일어났다. 서간도 지방은 한일합방이 이뤄지던 1910년부터 조직적인 민족운동이 태동되면서 많은 군중이 이곳 유하현과 통화현에 머물고 있었다. 이 중 유하현에 있는 삼원포 지방은 3월12일 삼원포교회 한경희 목사, 방기전 장로를 중심으로 교인 200여명이 모여 독립선언의 경축대회를 열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날 모임을 주도했던 한경희 목사, 방기전 장로는 곧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지도자들을 만나 3월17일 궐기하기로 하고 준비했다. 유하현에는 뜻하지 않게 1000여명이 모여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가행진에 돌입했다. 이때 일부 시위대원들은 압록강을 건너 본국에서 만세를 불러야 한다고 외치고 있을 때 민족지도자 이시영의 만류로 그 일은 좌절됐다. 또 통화현의 최봉석 목사, 흥경현의 오대규 목사 등은 급진파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일본인들이 모여사는 집단체를 습격하려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옛 고구려 수도였던 즙안현에서는 기독교인들과 천도교인들이 연합해 의용단, 청년회를 조직하고 허선노 장로를 총장으로 추대하고 만세를 불렀다. 북간도 지방에서 일어났던 이 운동은 다시 러시아 연해주로 불길이 솟았다.이곳에서도 대한국민의회를 발족하고 3월17일 국민의회 의장 문창범 등이 러시아어,한글 선언서를 러시아 장부와 일본 영사관에 각각 전달됐다.이때 신한촌 각 가장마다 태극기를 게양했고,연해주에 살고 있던 한국인 2만여명이 거리로 나왔으며,문창범 의장의 지휘를 받으면서 독립만세를 불렀다.일본 영사관은 이 광경을 지키보고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러시아 당국에 시위를 중지해 달라는 강력한 요구를 받자 연해주에 주둔한 러시아 군인에 제재로 시위 군중은 해산됐으며,각 가정마다 게양됐던 태극기도 모두 끌어 내리게 됐다.이러한 제재를 받았던 한국인은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3월18일 한국인 노동자들은 문창범 의장의 지휘를 받으면서 총파업을 단행하고 신한촌에 집결했다.또 한번 거리를 누비면서 만세를 불렀다. 이처럼 국내외에서 일어났던 이 운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임시정부는 비록 이국땅 상하이에서 발족했지만 공화제라는 데 큰 의미를 갖고 있다. 3·1운동을 전후해서 여러 독립단체가 생겨나면서 모든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과 대항하려고 하면 효과적인 항일투쟁이 요청되자 임시정부를 구심점으로 해야한다는 운동이 전개됐다. 여기에 기독교인들이 임시정부수립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우선 임시정부의 모체가 됐던 독립임시사무소였다. 이 사무소는 신한청년단이 중심이 돼 운영해왔다. 이 단체는 1918년 여름에 결성됐지만 여기에 참여했던 멤버들은 모두 기독교 교인들이었다. 가령 장덕수를 비롯해서 김구 서병호 김병조 여운형 김규식 등었다. 이 단체에서는 독립청원서를 미국 윌슨대통령에게 보내는 한편 김규식 박사를 파리에서 모이는 파리강화회의 보내기도 했다. 이처럼 기독교인들은 주님이 지신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시켰다면 이 민족의 십자가는 기독교인들이 짊어지고 갈 때 이민족에게 독립이 올 것을 알고 고난의 역사의 현장에 뛰어 들게 됐다. /김수진 목사 예장통합·교회사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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