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선교사 · 신앙偉人/韓國기독교 역사와 교회사

[新한국교회사] (1)-(6)/김수진 목사

영국신사77 2008. 6. 6. 23:18
                        [新한국교회사] (1) 2.8독립선언서 발표와 도쿄유학생
                                                                                             [국민일보 2001-02-20 12:39]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입니다. 역사의 바른 고찰은 미래를 밝게 해줍니다. 국민일보는 이런 맥락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주역이면서도 올바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한국교회 인물들과 교회사를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습니다. 교회사학자 김수진 목사가 집필하는 이 시리즈는 한국교회사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사실들을 재미있게 풀어내 교회에 대한 이해폭을 한층 넓혀 줄 것입니다. 김성 교수의 ‘신 성서의 향기’와 함께 격일로 연재되는 김수진 목사의 ‘신한국교회사’에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기대합니다.<편집자>

초기 도쿄유학생

모질게 추웠던 긴 겨울밤도 서서히 물러가고 어느 덧 새봄을 준비하고 있던 1919년 2월8일 일본 도쿄에서 전세계에 알리는 유학생들의 함성이 전 일본을 놀라게 했다. “조선청년독립단은 아(我)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한 세계만국의 전에 독립을 기성(期成)하기를 선언하노라”며 ‘2.8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나섰다. 한국 유학생들이 적도(敵都) 도쿄에서 행한 이 장엄한 행동에 일본 제국은 초비상이 걸렸다. 이날의 역사적 거사는 일본 유학생들이 오랜 시일을 두고 항일운동을 한 결과였다. 한국인 최초의 일본 유학은 1881년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한 유길준, 유정수와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한 윤치호 등 3명이었다. 그후 장대용,신복모,이은돌 등 3명과 1882년 김옥균의 주선으로 서재필 이하 44명의 유학생이 육군도야마학교에 입학하여 일본의 근대 전술을 배우고 있었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일시 유학길이 중단되었지만 1895년 갑오경장을 계기로 200여명의 유학생이 게이오의숙에 입학하였다. 1897년에는 64명이 도일하여 도쿄법학원, 도쿄공업학교 등 여러학교에 입학하여 새로운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1904년 11월 한국 황실에서 파견한 유학생 50명은 도쿄부립제일중학교, 순천중학교, 와세다실업학교 등에 입학을 하였다. 이 중 46명은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곧 동맹휴학으로 항거하다가 전원 퇴교를 당하였다. 이후 유학생들 사이에 신지식을 배우는 것보다 항일하는 싹이 서서히 일어나면서 항일운동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이 중 유학생들은 최린을 중심해서 태극학회를 조직하고 순수한 애국단체로서 태극학보도 발행하면서 항일운동에 대한 의식화 운동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1909년에는 790명이었던 유학생이 1910년에는 1850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때 많은 유학생들은 한일합방을 만나면서 호랑이를 잡을려면 호랑이 소굴인 일본제국의 수도 도쿄로 가야한다면서 계속 도쿄로 향하고 있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도쿄에 머물면서 자연히 재일조선 YMCA강당은 유학생들의 본거지가 됐다. 여기에 모여들었던 인물로는 조만식을 비롯해서 송진우 이광수 장덕수 안재홍 백남훈 전영택 주요한 김필례 등이었으며 모두 기독교인이었다.비기독교인인 최린 신익희 이인 윤백남 등도 모였다. 이들은 각 도별로 친목회를 조직케하고 1912년 친목회 연합회를 형성하게 되었다. 초대 간사장에 김병로를 선임하였으며, 이 조직체가 발전하여 조선유학생회란 명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들은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서 <學之光>이란 회지를 발간하면서 항일에 대한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하였다.

이들은 수업이 없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은 언제나 재일조선 YMCA강당에 모여 각종 토론회 등 다양한 프로그렘을 갖고 활동을 하였다. 이 중 어떤 이는 도쿄한인연합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리면서 새로운 기독교문화와 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 경찰들은 이들의 모임을 늘 주시해 오면서 요시찰 인물들로 감시하였는데 이 중 주요인물로는 백남훈 윤창석 최팔용 전영택 주요한 등 대부분이 크리스천들이었다.

2.8도쿄유학생 독립선언

제1차 세계전쟁이 끝나던 해인 1918년 1월7일 메이지대학 동창회 주최로 재일 도쿄 YMCA강당에서 웅변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때 유학생인 서춘은 <평화와 전쟁>이란 제목으로 열변을 토하였다. “평화를 위한 전쟁이냐, 전쟁때문에 평화야. 그 이론이야 어디에 있던지 우리들은 전쟁을 통하여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에 승리하는 자는 생존하고 패배하면 망하는 것이다. 우리 조선민족도 그들 열강과 같이 싸움에 승리할 수 있는 준비에 자진해 나갈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연설을 들었던 150여명의 유학생들은 있는 힘을 다해 박수를 보내면서 큰 함성으로 “옳소”라는 말로 도쿄 한복판을 흔들어 놓았다.

그해 12월1일 고베에서 발행하는 영자신문인 ‘제펜 에드비타이저’지에 미국에 있는 이승만 민찬호 등이 조선민족대표로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서 모이는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또 15일 아사히신문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들이 독립운동자금을 30만엔을 모금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이러한 기사를 접했던 유학생들은 뜨거운 가슴을 안고 재일 도쿄 YMCA강당에 모여들었다. 이때 유학생들은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이라는 원칙을 알았던 이후여서 이들의 발걸음은 쉴새없이 바빴다. 독립을 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조선독립선언서’를 준비하고 1919년 2월8일 온 세계에 알리기로 하였다.

드디어 도쿄 유학생들은 아침 일찍이 도쿄 한복판에 있는 재일 도쿄 YMCA강당에 모여 들기 시작하였다. 사전에 연락을 받았던 유학생들은 굳은 의지를 갖고 비밀리에 모여 어느새 강당은 초만원을 이뤘다. 준비위원회 회장 백남규의 사회로 개회선언을 하였다. 이어 서춘 이종근 유학생이 차례대로 열변을 토하였다. 이들의 열변에 유학생들은 뜨거운 가슴을 안고 견딜 수가 없어서 함성을 지르면서 “독립을 합시다. 독립을 합시다”라고 연거퍼 소리를 질렀다. 이때 예수의 삶처럼 살아야 한다면서 늘 신앙을 간증했던 윤창석이 단상에 뛰어 올라가 기도하자고 외치자 모두들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에 응하였다. 곧 이어 백관수가 등단하여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하고 나자, 우렁찬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를 도쿄 시내가 떠나가도록 외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뒤늦게 접했던 완전 무장한 일본 경찰들이 강당에 진입하려고 했지만 유학생들의 그 뜨거운 열풍에 진입을 못하고 있다가 열풍이 가라앉자 진입하여 닥치는 대로 유학생들을 체포해 갔다.

2.8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이들과 함께 만세불렀던 유학생들은 모두 체포돼 도쿄의 경찰서에 분산 수감되게 되었다. 여기 서명했던 유학생들은 최팔용을 비롯해서 전영택 서춘 백관수 윤창덕 송계백 이종근 김상덕 김도연 최근우 등이었다. 이 중 전영택은 신병으로 사퇴하고 그 대신 이광수와 김수철을 보선하여 모두 11명이었다. 이 중 9명은 진실한 도쿄한인연합교회 교인들이었다면 이들의 신앙이 얼마나 컸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 역사적인 사실을 본국과 국제도시인 중국 상하이에 알리기 위해서 송계백은 국내로, 이광수는 중국 상하이로 각각 파견하였다. 이 일로 국내에서도 서서히 독립운동에 대한 불을 붙이기 시작해 결국 1919년 3.1독립운동이라는 엄청난 역사를 만들어 가게 되었다.

/김수진 목사 예장통합·교회사학자

 

                                         [新 한국교회사] (2) 3·1운동과 기독교

                                                                                                                        [국민일보 2001-02-22 11:26]
  ‘2·8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은 영어와 일본어로 제작돼 일본정부와 국회 조선통감부 각국 대사관과 영사관 그리고 각 신문사와 잡지사 일본지식인들에게 발송됐다. 송계백은 유학생들의 거사를 조국에 알리기 위해 ‘2·8독립선언서’ 초안을 가슴에 안고 잠입하게 된다. 그는 일본 유학의 선배였던 최린 현상윤 최남선 등을 차례로 만나 상의하고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을 서서히 준비하게 된다. 이때 최남선은 ‘2·8독립선언서’를 접하고 자신도 독립운동에 참여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3·1독립선언서를 초안하게 된다.

3·1운동에 대한 최초의 논의는 1919년 1월20일에 있었다. 최린 오세창 권동진 등 3인은 천도교 교령인 손병희를 만나 의논한 결과 쾌히 승낙을 하자 곧 종교계가 중심이 돼 이 일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독립선언서 작성은 천도교측에 맡기로 하자 최린은 곧 기독교측인 최남선에게 부탁을 했다. 당시 최남선은 상동교회 청년으로서 상동청년학원 한글 교사로 젊은이를 가르치고 있던 기독청년의 엘리트였다. 이때부터 최남선은 민족의 독립이 자신의 펜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감지한 후 상동교회에 나가 수없이 하나님께 매여 달려 기도를 하였다.

따라서 기독교에서도 선우혁을 중심한 독립운동이 서서히 대두됐다. 그는 곧 이승훈 장로와 양전백 목사를 만나 평양 선천 정주지역에 있는 기독교인을 중심해서 독립운동을 조직화 하는 데 힘을 쏟고 있었다. 이 무렵 천도교 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던 이승훈 장로는 곧 상경하여 천도교와 연합으로 이 운동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다시 이승훈 장로는 YMCA 간사 박희도를 만나 세브란스병원 제약과 이갑성과 함께 추진하게 되었다. 때마침 연희전문학교 학생 김원벽 등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과도 만나 상의한 결과 종교계에서 준비한 이 운동에 합세하기로 하였다.

이처럼 3·1만세운동이 급속도로 진행할 수 있었던 일은 종교계 지도자들이 비밀히 접촉하고 일치 단결해 서로 역할 분담을 했기 때문이다. 천도교측은 손병희 교령을 주동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으며 기독교측은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교회 이승훈 장로가 책임을 맡아 대표자들을 선정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 대표 16명, 천도교 대표 15명, 불교 대표 2명 등 모두 33인이 민족대표로서 3?^1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게 됐다. 기독교 대표는 길선주 이필주 김병조 김창준 양전백 유여대 신홍식 신석구 최성모 정춘수 오화영 목사 이승훈 이명룡 장로 박희도 전도사 박동완 이갑성 등이었다.

여기에 서명했던 기독교 대표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실 것을 믿고 기꺼이 이 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그런데 이들이 여기에 참여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는가에 대해서 오화영 목사 추천으로 참여한 신석구 목사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그후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는 데 2월27일 새벽에 이런 음성을 들었다.‘4000년 전해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 보려고 힘쓰지 않으면 더욱 죄가 아니냐’ 이러한 음성을 듣고 그 뜻을 결정하게 됐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오화영 목사에게 전하고 독립선언서에 기꺼이 서명을 했다.

한편 전문학교 학생들은 별도로 준비에 임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 일에 관심을 갖고 있던 김원벽은 2월20일 자신이 출석하고 있던 인사동 승동교회에 모여 첫 간부회의를 개최했다. 이때 김원벽으로 하여금 학생동원에 힘써 줄 것을 부탁했다. 다시 2월25일 밤에는 서울 정동감리교회 오화영 목사집에서 3월1일 오후 2시 시내 중학교 이상 학생들은 파고다공원에 집결하고 독립선언과 함께 시위를 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혹시라도 일본 경찰에게 발견될까 서로 긴장하면서 암암리에 준비에 최선을 다했다. 이들은 이제 그 지긋지긋한 일본 경찰과 헌병의 무단정치를 철퇴시키는 좋은 기회가 되고 더 나아가서 조선독립이 선뜻 다가오는 듯한 느낌을 갖고 밤낮가리지 않고 뛰어 다녔다. 방과후에 학교 과제물도 잊은 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하루하루를 긴장 속에 살아갔다. 2월 중순에는 비밀리에 종로 YMCA 강당에서 6일간 시국강연회가 개최됐다. 이때마다 시내 남녀중학교 중학생들이 릴레이식으로 참가하였으며, 강연회가 시작되기 전에 이화여학교와 정신여학교 합창단이 교대하면서 찬양하기도 했다. 여기서 중학교, 전문학교 학생동원에 대한 책임자를 선정하는 등 3월1일 오후 2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2월28일 밤에는 학생들에게 배포될 독립선언서 1500장이 전달됐다. 정동감리교회에는 중학교 대표들이 모였으며, 승동교회는 전문학교 학생들이 모여 인원동원과 독립선언서 배포 등을 의논하고 즉시 헤어져 각기 맡은 책임량을 감당하기 위해서 밤이 늦도록 릴레이식으로 지침을 전달했다. 드디어 역사적인 3월1일은 해맑은 아침이었다. 학생들은 굳은 결의를 하고 집을 출발해 평상시와 다름없이 책가방을 챙겨 나갔으며, 책가방 깊숙히 독립선언서를 몇 장씩 챙겨 넣었다. 그리고 밤새 그렸던 태극기도 한아름씩 집어 넣었다.

아침 조회를 마친 학생들은 그 길로 파고다공원을 향해 행진하고 있었다.길거리에 만난 시민들에게 공원에 모여 달라고 외치며 모이자 어느새 공원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참으로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들었다. 여기에 기독교 교인들도 많이 참가했다. 원래 계획은 3월2일에 행하기로 하였지만 이날은 주일이기 때문에 하루 앞당겨 거사가 진행됐다.이때문에 더 많은 교인들이 모이게 됐다.

민족대표 33인이 파고다공원 올 줄 알고 그렇게 기다렸지만 나타나지 않자 김원벽 등 학생대표들이 33인이 머물고 있는 태화관에 방문을 하였다. 그러나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자 학생대표들마저 나타나지 않자,황해도 해주 출신인이며 진실한 기독청년 정재용(해주본정교회·경신고출신)이 공원에 모인 인파를 해치고 팔각정에 뛰어 올라갔다. 조금 전까지만도 어수선한 공원이 찬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했다. 이날 정재용은 식전에 참여하기 위해 2월28일 황해도 해주에서 기차로 서울에 도착하여 독립선언서 100장을 원산으로 밀송하고 그 중 1장를 주머니에 넣었다.

정재용은 주머니에서 독립선언서를 꺼내들고 줄줄이 힘있게 읽어 내려갔다. 최은희(당시 경기고여 학생·전 조선일보 기자)는 ‘조국을 찾기까지의’ 책에서 장재용의 말을 인용,이렇게 말하고 있다.

“탑골공원에서 예정시간이 돼도 민족대표가 나타나지 않자 갑자기 주머니속의 한장의 독립선언서가 생각나면서 기독교인 나는 유대민족의 영웅 다윗과 같이 민족의 영웅이 되리라는 충동을 받고 나도 모르게 팔각정에 올라가서 독립선언을 읽었다”

/김수진 목사

 

                                       [新한국교회사] (3)기독교와 3·1운동
                                                                                                                             [국민일보 2001-02-24 23:59]
파고다공원 팔각정에서 행한 시골 청년 정재용의 그 담대함은 신앙의 힘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목이 터져라고 읽어 내려 갔던 ‘독립선언서’에 모두들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이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이로써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노라.-이하 생략)”

참으로 감격어린 순간이었다. 공약삼장(公約三章)까지 다 끝나자 누가 먼저 만세를 불렀는 지 모르지만 약속이나 한듯이 일제히 손에 든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얼마나 민족앞에 자랑스러운 거사였는가 ! 여기에 모인 군중들은 공약삼장에 명시된 대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질서 정연하게 파고다공원 앞문과 뒷문을 빠져 ‘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가 행진에 돌입하였다. 때마침 지방에서 상경한 20여 만명까지 합세했으니 온통 서울은 힌옷입은 천사들로 가득 메워졌다. 더욱이 서울 시내 일본인 상가를 제외하고는 모든 상점이 철수하고 파고다로 모였으며, 이들이 함께 부른 만세 소리는 천지를 진동시키고도 남았다.

정문으로 나왔던 군중들은 종로,을지로,태평로,의주로 혹은 동대문쪽으로,남대문쪽으로 온통 서울 장안을 활보하고 다녔다. 후문으로 나왔던 군중은 창덕궁,안국동,광화문,새문안교회 앞을 지나,구세군본영,정동에 있는 미대사관을 지나 정동제일교회,이어서 덕수궁 대한문에 모여 일부 학생들은 일본 경비대의 경비망을 뚫고 고종황제 빈궁인 삼국궁(三鞠躬)에 예를 하고 대한문 앞에서 독립연설을 하였다. 서울은 온통 만세꾼으로 가득 메워졌다.

다음날 여전히 태양은 동쪽 하늘에서 서서히 �아 오르고 있었다. 이날이 주일이었기에 각교회마다 오전 10시 30분 예배 준비를 알리는 준비종이 여기저기 울려 펴저 나가고 있었다. 30분이 지나자 11시 예배를 알리는 교회 종소리가 또 다시 서울 장안에 울려 펴졌다. 이때 종소리를 듣고 일본 헌병과 경찰은 또 독립군들이 시가 행진을 할까 봐서 초 긴장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회 종소리를 듣고 나온 시민들은 손에는 태극기가 아니라 성경, 찬송가를 들고 각기 소속된 교회로 향하고 있었다. 주일 예배가 시작되자 모든 교회 목회자들은 전날에 일어났던 3.1 독립만세에 대해서 설명 하고 이어서 민족은 민족자결원칙에 의해 독립해야 한다고 당당하게 설교를 하였다.

그러나 시내 몇몇 교회 목사들이 33인에 참여하였기에 모두들 조선통감부에 수감되었기에 이들이 담임하고 있던 교회에서는 그 어느때 보다 독립에 대한 절규의 기도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정동제일교회에서는 오화영 목사가 구속되자 부교역자였던 이병주 전도사가 교회문밖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모아 놓고 독립운동에 대한 연설을 하는 여유도 보여 주었다.

서울에서 일어 났던 이 3.1운동은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더욱 가열되었다. 기독교의 세력이 강한 서북지방에서도 서울지방과 동시에 일어 났다. 이중 평양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 할 정도로 기독교가 강한 지역이었다. 이미 평양은 장로회신학교가 자리를 잡고 있는 지역이었기에 그 어느지역보다 목사가 많이 배출되었다. 여기에 미션 스쿨인 숭실전문학교, 숭실학교, 숭의여학교, 광성학교 등이 있었으며, 여기에 안창호가 설립했던 대성학교가 버티고 있어서 3.1운동은 그 어느지역에 못지 않게 차분한 준비를 통해 3월 1일 오후 1시에 5천여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평양의 3.1운동은 오후 1시에 남산교회, 장대현교회, 숭덕학교에서 고종황제의 봉도회(奉悼會)를 갖고 김선두목사(당시 장로교 총회장)의 지휘를 받으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평안북도 의주에서는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인 유여대목사(의주읍교회)를 중심해서 낮 1시 2천여명이 모여 3.1운동을 전개하였다. 의주에서 그리 멀지 않는 안주에서는 김화식목사(안주읍교회)가 주동이 되어 일어 났다. 특별히 서북지방은 105인 사건으로 철저하게 일제의 철통같은 감시를 받았던 지역이었지만 홀연히 하늘을 나를 듯한 기세를 갖고 당당하게 진행하였다.

함경도 원산에서는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인 정춘수목사(원산감리교회)를 중심해서 2천여명이 원산장터에 모여 만세를 불렀으며, 따로 500여명은 악대를 앞세우고 일본인 상가를 누비면서 만세를 불렀다. 이와 같은 운동은 각지역에서 일어 났다.

항해도에서도 3월 1일 서울과 때를 같이 하여 해주읍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약속을 하고 준비를 하였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주동자들이 검속되는 관계로 좌절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황주읍에서 천도교를 중심해서 운동이 전개되었으며,지난 3월 3일 기독교가 중심되어 황해도 각지역에서 일어 났다.

3.1 운동은 북쪽에서만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 참여 했던 많은 서울 유학생들과 기독교인들은 지방으로 내려와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경기도 개성은 3월 1일 미션 스쿨인 한영서원(송도고등학교) 학생과 기독교 목사에 의해 진행되었다. 서울을 인접해 있는 수원을 비롯한 여러지방에서 일어 났다.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청주지방, 공주지방, 영남쪽에서도 활발하게 움직였다. 지난 2월 24일 서울에서 내려왔던 이갑성은 곧 대구 남성정교회 이만집목사에게 서울에서 일어날 3.1운동에 대한 계획을 전달하였다. 그후 이만집목사는 동지규합에 힘을 쏟는 중 김태련장로에게 독선언서를 준비하게 하였다. 3월 8일 대구장터에 모인 군중들 앞에 김태련장로는 선언서를 낭독하고 이어 이만집목사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여기에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학생들과 기독교인들이 모여 일제의 경비를 뚫고 시가행진을 단행하였다. 이어 3월 11일에는 부산에서 일어 나면서 영남지방 여러고을에서 일어 났다.

역시 호남지방에서도 이 운동이 일어 났다. 3월 6일 군산 장날을 기해 군산영명학교 교사 박연세장로가 주동이 되었으며, 여기 재학중인 전세종, 강문호 등이 앞장서 멜본딘여학교 학생과 함께 군산시내를 활보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다시 이운동은 전주지방에서도 일어 났다. 천도교 전주교구에서 독립선언서 1천장을 준비해서 각지역 천도교 교구에 전달을 하였다. 여기에 못지 않게 기독교도 서문교회 김인전목사, 최종삼장로를 중심해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 3월 13일 전주장날을 기해 독립운동이 일어 났다. 전주 역시 기독교와 천도교가 중심이 되었으며, 이때 미션 스쿨인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서문교회 교인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다시 광주에는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목포지방으로 확산되면서 심지어 제주도에서도 만세를 불렀다. 이 3.1운동은 공약삼장에 명시된데로 비폭력, 질서를 존중하고 광명정대하게 행동을 하였다. 그 무서운 총칼로 휘둘었던 일본 경찰이나 헌병에게 물리적인 힘으로 대항하지 않고 끝가지 정정 당당하게 진행하였다.

/김수진목사 (예장통합·교회사학자)

                     [新한국교회사] (4) 해외 3·1운동…북간도 만세소리 연해주로 ‘활활’
                                                                                                   [국민일보 2001-02-27 10:45]
  서울에서 일고 있던 3·1운동은 국경을 넘어 해외까지 번져 나갔다. 한일합방을 전후해 많은 애국운동가들이 가족을 이끌고 또는 단신으로 두만강을 건너 왕청 연길 화룡 훈춘 용정 등에 자리를 잡고 살았으며, 압록강을 건넌 이들은 장백 임강 즙안 관전 흥경 유하 통화 등에 자리를 잡고 그 넓은 북간도, 서간도지방 일대를 누비면서 생활의 터전을 잡았다. 이들은 기독교 신앙으로 힘을 얻어야 한다면서 스스로 교회를 개척하기도 했다. 이러한 관계로 이들은 기독교의 부활신앙을 통해 조국독립을 바라는 열정은 그 누구보다도 강했다.

북간도지방에서 선교활동하던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용정에서도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론이 알려지게 됐다. 여기에 힘을 얻었던 기독교인들은 1918년 9월부터 11월까지 4회에 걸쳐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에 대한 논의했다. 드디어 3월13일 북간도의 중심지인 용정에서 정오가 되자 용정중앙교회의 종소리가 신호를 하듯이 시내 모든 교회들이 일제히 종을 치기 시작했다. 이 종소리와 함께 용정에 사는 주민들은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걸고 다시 손에 태극기를 들고 시위대에 합세했다. 때마침 명동학교 학생들로 구성됐던 악대가 선두에 서서 시가 행진에 힘을 더해 줬는데 이때 미션 스쿨을 비롯해서 12개 학교 학생들이 여기에 참가했다. 때마침 식장에 도착한 군중은 부대회장 배형식 목사의 개회선언이 있자 일제히 경건한 마음으로 사회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어 대회장 김영학은 간도거류 조선민독일동의 명의로 된 독립선언포고문을 힘차게 낭독해 갔다. ‘아(我) 조선민족은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노라 민족의 자유를 선언하노라. 민족의 정의를 선언하노라. 민족의 인도를 선언하노라. -이하 생략-’ 이어서 배형식 목사의 강연 등이 행해졌다. 큰 감동을 받았던 3만여명(일본측은 6000명으로 발표)의 군중은 어느 새 ‘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라고 큰 소리로 외쳐됐다. 비암산에 울려퍼진 메아리는 해란강을 따라 전 간도지방으로 더 멀리 전달돼 갔다.

그런데 시가행진 중에 뜻하지 않게 무장한 중국 육군부대 한 병사가 쏜 총탄에 몇 사람이 쓰러지고 말았다. 이 일로 13명이 현장에서 사망했으며, 부상자도 자그마치 30여명이 발생했다. 만세사건으로 일제 헌병대가 간도에 침입할 우려가 있을까 엉뚱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용정 3·1운동에 참여했던 일부 군중은 두만강에 인접해있는 훈춘지방에서도 거사를 준비하고 3월20일 단행했다. 이 때도 훈춘에 살고 있던 군중은 어느 새 3000여명이 모였으며, 몇일 전부터 준비했던 태극기를 손에 들고 나와 만세를 불렀다. 훈춘에서는 조선인촌은 물론이지만 한인촌까지 전부 철시해 중국인들은 조선독립에 대해 관심있게 보아 주기도 했다. 독립축하회로 모인 이날 황병길 노종환 최동문 김정규 등이 차례로 등단해 축하 연설을 했다. 여기 어느 일본인이 참석해 후에 조선군사령부에 보고한 내용을 살펴 보면 이렇다. “군중 중의 한인으로서 감격이 극하여 낙루(落淚)하는 자, 혹은 타인에게 악수를 청하여 감상을 말하는 자, 동감이라 대답한 자, 어려움이 많겠다고 사례하는 자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깊은 감동을 받은 것 같이 관찰된다. 듣는 바에 의하면 이날 가정에 남은 사람들도 남녀노약을 가릴 것 없이 이는 천명(天命)이라고 칭하고 함께 만세를 불렀다 한다. 또한 이날 경계 근무를 하던 중국 순경들도 그들의 행동을 연민히 여겨 낙루하는 자 있었다” 이같은 감격적인 강연을 듣던 군중은 다시 질서정연하게 ‘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가행진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중국 육군의 횡포는 없었다.

이와 같은 운동은 서간도 지방에서도 일어났다. 서간도 지방은 한일합방이 이뤄지던 1910년부터 조직적인 민족운동이 태동되면서 많은 군중이 이곳 유하현과 통화현에 머물고 있었다. 이 중 유하현에 있는 삼원포 지방은 3월12일 삼원포교회 한경희 목사, 방기전 장로를 중심으로 교인 200여명이 모여 독립선언의 경축대회를 열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날 모임을 주도했던 한경희 목사, 방기전 장로는 곧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지도자들을 만나 3월17일 궐기하기로 하고 준비했다. 유하현에는 뜻하지 않게 1000여명이 모여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가행진에 돌입했다. 이때 일부 시위대원들은 압록강을 건너 본국에서 만세를 불러야 한다고 외치고 있을 때 민족지도자 이시영의 만류로 그 일은 좌절됐다. 또 통화현의 최봉석 목사, 흥경현의 오대규 목사 등은 급진파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일본인들이 모여사는 집단체를 습격하려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옛 고구려 수도였던 즙안현에서는 기독교인들과 천도교인들이 연합해 의용단, 청년회를 조직하고 허선노 장로를 총장으로 추대하고 만세를 불렀다.

북간도 지방에서 일어났던 이 운동은 다시 러시아 연해주로 불길이 솟았다.이곳에서도 대한국민의회를 발족하고 3월17일 국민의회 의장 문창범 등이 러시아어,한글 선언서를 러시아 장부와 일본 영사관에 각각 전달됐다.이때 신한촌 각 가장마다 태극기를 게양했고,연해주에 살고 있던 한국인 2만여명이 거리로 나왔으며,문창범 의장의 지휘를 받으면서 독립만세를 불렀다.일본 영사관은 이 광경을 지키보고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러시아 당국에 시위를 중지해 달라는 강력한 요구를 받자 연해주에 주둔한 러시아 군인에 제재로 시위 군중은 해산됐으며,각 가정마다 게양됐던 태극기도 모두 끌어 내리게 됐다.이러한 제재를 받았던 한국인은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3월18일 한국인 노동자들은 문창범 의장의 지휘를 받으면서 총파업을 단행하고 신한촌에 집결했다.또 한번 거리를 누비면서 만세를 불렀다.

이처럼 국내외에서 일어났던 이 운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임시정부는 비록 이국땅 상하이에서 발족했지만 공화제라는 데 큰 의미를 갖고 있다. 3·1운동을 전후해서 여러 독립단체가 생겨나면서 모든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과 대항하려고 하면 효과적인 항일투쟁이 요청되자 임시정부를 구심점으로 해야한다는 운동이 전개됐다. 여기에 기독교인들이 임시정부수립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우선 임시정부의 모체가 됐던 독립임시사무소였다. 이 사무소는 신한청년단이 중심이 돼 운영해왔다. 이 단체는 1918년 여름에 결성됐지만 여기에 참여했던 멤버들은 모두 기독교 교인들이었다. 가령 장덕수를 비롯해서 김구 서병호 김병조 여운형 김규식 등었다. 이 단체에서는 독립청원서를 미국 윌슨대통령에게 보내는 한편 김규식 박사를 파리에서 모이는 파리강화회의 보내기도 했다. 이처럼 기독교인들은 주님이 지신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시켰다면 이 민족의 십자가는 기독교인들이 짊어지고 갈 때 이민족에게 독립이 올 것을 알고 고난의 역사의 현장에 뛰어 들게 됐다.

/김수진 목사 예장통합·교회사학자

 

 

                                    [新한국교회사] (5)제암교회사건과 3·1운동
                                                                                                   [국민일보 2001-03-01 10:56]
  수원 교외에 자리잡고 있는 화성군 향안면 제암리 제암교회는 매일 수도 없이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이 방문하고 있으며, 일본 방문객도 지난해 4000여명이 됐으며, 한국인은 4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여기에 매년 3월1일 오후 2시가 되면 한국인 일본인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러 제암교회를 찾는다. 올해도 어김없이 제암교회에 모여 1919년 4월15일 오후 2시 제암교회 교인들과 천도교인들, 지역 주민들이 민족독립을 위해 순국했던 그 자랑스러움을 온 천하에 알리고자 3·1운동 기념대회를 개최한다.

민족의 고난에 동참했던 제암교회는 감리교 선교구역으로 구한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1905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에 창립됐다. 당시 제암교회는 화성군에 있는 향남면, 우정면, 장안면, 양감면, 팔단면에 살고 있는 농민들의 정신적 지주가 됐다. 더욱이 한일병탄이 이루지자 이곳에 살고 있는 농민들은 신앙의 힘만이 민족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버팀목이라는 확신을 갖고 제암교회에 모여 들었다. 여기에 일제 차별 교육정책으로 많은 농촌 청소년들은 배울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을 당한 상태였다.이러한 처지를 알았던 제암교회에서는 야학당을 개설하고 한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한글을 깨우친 부녀자들과 청소년들은 스스로 찬송가와 성경을 읽을 수 있어 자신도 모르게 이스라엘 민족사를 터득하게 되면서 이 민족도 독립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갖게 됐다.

제암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이었던 안종후는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됐다. 안종후는 제암리 이장으로 활동하고 있었기에 암암리에 이장의 신분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매일 밤 청년들을 제암교회에 모이게 하고 3·1운동에 대해 자세하게 일러 주고 제암리에서도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제의했다. 이때 청년들은 안종후 이장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됐다. 다시 안종후 이장은 여신도들에게 발안장에 나가 광목을 사오게 하고 태극기를 만들게 했다. 모두들 10여년 전에 보았던 태극기를 그리는 순간 ‘우리나라도 독립이 올 것을 믿고’ 더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드디어 준비했던 4월5일 발안 장날을 기해서 화성군에 흩어져 있는 농민들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했다. 제암교회 청년들은 아침 일찍 발안장에 나가 상점의 모든 문을 열지 말도록 알려 주고 태극기를 나눠주면서 발안장으로 나오도록 알려줬다. 많은 사람들이 장터로 모여들자 제암교회 청년들은 일장의 강연을 하고 곧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가행진을 단행했다. 만세소리에 놀란 일본 헌병과 경찰들은 곧 발안주재소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일본 헌병대는 총에 착검을 하고 시위 군중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이때 선두에서 진두지휘를 하고 있던 제암교회 청년 김순하에게 어느 헌병이 착검한 총으로 그의 배를 갈라놓고 말았다. 배에서 창자가 흘러나온 김순하는 쓰러지면서까지 ‘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를 연거푸 부르짖다 결국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더 이상 발안장에 머물러 만세를 부르다가는 사상자가 많이 발생할 것을 염려해 모두들 마을로 귀가하고 말았다. 밤이 점점 다가오자 발안장에서 일본 헌병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집에서 떨고 있을 여러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청년들은 제암리 뒷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렸다.

일본 헌병대과 경찰들은 밤마다 올라오는 봉화에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은 단단한 결심을 하고 그해 4월15일 오후 2시 제암리에 살고 있는 교인 및 마을 주민들을 제암교회당에 모이게 했다. 발안주재소 소장 일경 사사키와 수원에 주둔하고 있는 78연대 소속 헌병 1개소대를 이끌고 온 아리타 중위가 작전을 개시했다. 이들은 이리떼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지난 발안장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 사과하고자 하오니 주민 여러분들은 제암교회에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들의 말을 진실로 믿었던 제암리 사람들은 제암교회에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사키 소장은 제암교회에 모여든 제암리 사람들의 호명하면서 빠진 사람들은 부하를 동원하여 데리고 오도록 했다.

일일이 명단을 확인했던 사사키 소장은 몇 번이고 말문을 열 듯 하다가 곧바로 문을 박차고 나갔고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일경과 헌병들이 교회당 정문을 비롯,모든 창문에 못질을 했다. 다시 이들은 아리타 중위의 지시에 의해 미리 준비해 놓았던 석유통을 들고 교회당에 뿌리고 성냥으로 불을 질렀다. 교회당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제암교회가 불길에 휩싸이자 강태성의 부인은 공포와 불안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교회로 달려왔다. 이때 아리타 중위는 “왜 울고 옵니까” “제 남편이 교회당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 부인을 무릎꿇게 하고 그 자리에서 머리채를 움켜잡고 일본도를 꺼내 들고 목을 내리쳤다. “내 남편을 내놓아라”고 소리지르면서 그 목은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았던 헌병도 혼비백산해 도망치고 말았다. 이 여인은 결혼한 지 2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참으로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조금 후에 홍원식 부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제암교회로 달려오고 있었다. 역시 헌병은 그 여인을 보자 마자 성난 짐승처럼 달려 들어 총뿌리를 겨누고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헌병들은 살해한 두 여인을 볏짚으로 덮어놓고 불을 질렀다.

이것도 모자랐던지 병력을 이끌고 마을로 달려가 교회당옆에 있는 초가집에 불을 질러 33채의 집이 곧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교회당 안에서 21명, 교회당 밖 2명,모두 23명이 순교했으며, 33채의 집은 완전 소실됐다. 이 피맺힌 비극의 소리가 남풍을 타고 캐나다 선교부에 있는 스토필드 박사에게 알려졌다. 비보를 접했던 스코필드 박사는 하던 일을 멈추고 카메라를 메고 제암리로 달려갔다. 인근 마을에서 인부를 구해 잿더미를 헤치고 시체를 찾아 나설 때 스코필드 박사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21명은 예배당 한복판에서 가슴과 가슴을 맞대서 동그랗게 엉켜 죽어 있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민족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서로 가슴을 맞대고 끝까지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순교를 맞았던 것이다. 스코필드 박사는 이러한 사실을 즉각 외신을 통해 전 세계에 알리고 이들의 시신을 모아 매장해 줬다.

이같은 처참한 일들이 어디 제암교회뿐이겠는가, 처참한 탄압을 받았던 국내외 교회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경말씀을 믿고 살았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한국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해 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으며, 많은 세월이 흘러간 지금은 모두 다 역사적인 유물로 남아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큰 희망과 비전이 되고 있다. 이러한 힘을 줬던 한국 기독교의 뿌리는 어디서부터 출발했는가. 다음을 기다려보자.

/김수진목사 (예장통합·교회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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