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선교사 · 신앙偉人/韓國기독교 역사와 교회사

★★★ 한국기독교 유적지<100주년>

영국신사77 2008. 6. 5. 00:15
                             한국기독교 유적지

                                                                

- 외 국 인  묘 지
소재지 /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145 - 8

 서울 외국인 묘지는 1890년에 시작되었다.

  서양과의 문호를 개방한 이후 처음으로 유명을 달리한 서양 사람인 장로교 선교회 소속

존 헤론(惠論) 박사 (DR. JOHN HERON)를 모시도록 양화진 땅을 고종 황제가 기증했다. 이때부터 350명이 넘는 외국인들이 묻혔는데, 이들은 모두 다양한 인생을 산 분들로, 국적도 호주·벨기에·캐나다·프랑스·독일·이태리·일본·한국·필리핀·러시아·영국 및 미합중국 출신이었다. 이들 가운데는 선교사는 물론, 소련에서 온 피난민들과 외교관 및 군사적인 단체 출신인 분들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 상황은 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복음을 전해야 할 때, 한국은 미개한 상태에 놓여있어 선교사들은 복음과 또한 문명화와 근대화 사역을 함께 수행해야 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을 병행해야 했는데, 알렌은 제중원을 설치하였다. 이곳에서 언더우드, 헤론, 감리교 의료 선교사 겸 목사 스크랜톤이 일하였다. 처음에는 알렌이 와서 일하였으나 밀려오는 환자를 혼자서 치료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언더우드가 약국의 일을 도와주게 되었다. 1885년 5월에 내한한 스크랜톤과 함께 같은 해 6월 헤론이 가담하였다.

  부족한 약품들과 의료 재료들로는 감당하기 역부족이었다. 날씨가 더워지고 전염병은 창궐하였다. 한국인들은 위생관념이 희박하여서 물을 끓여먹지 않아서, 온 가족과 동네가 몰사하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헤론은 내한한지 5년만에 이질에 걸려, 그곳에서 아깝게 순직했다.

 

  이러한 제중원은 후에 미국의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의 실업가 <세브란스>가  희사한  15,000 달러로 지금의 서울역 앞 대지를 구입하여, 이름도 세브란스 병원이라 불리우는 세브란스병원이 생겨났다.

  헤론은 이렇게 한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의료 선교에 뛰어 들었고, 그는 그러한 와중에서 이질에 걸려 질병으로 숨졌다.

< 헤론이 잠들어 있는 묘지의 비석 >

  그는 5년간이라는 짧은 선교의 현장에서 사역을 감당하다가, 이방 땅에서 그렇게 뼈를 묻었다. 그는 조국보다도 자신의 가족보다도 더욱 한국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의 묘지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그는 1885년 한국에 의료선교사로 와서 1890년 7월 여름에 순교했다. 그리고 그 비문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라고 자신의 신앙을 묘비에 적어놓았다.

  헤론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겠다는 선교에 대한 일념으로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 다른 사람의 병을 고쳐주었지만 자신은 그렇게 죽어갔다.

한국의 복음은 이런 사명자들의 결과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같은 곳에 잠들어 있는 많은 선교사들의 묘비에는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자신들의 묘비에 적으면서 순교의 길에 들어갔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 A. R. 아펜젤러 -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 J.D. 언더우드 -

"주님 ! 길고 긴 여행을 끝내고 이제 나는 안식을 얻었습니다." - G.A. 테일러 -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 H.B. 헐버트 -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 A.K. 젠슨 -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 R. 켄드릭 -

  이곳에는 선교사들을 따라 왔다가 부모와 함께 순직한 가족들이 함께 있으며, 채 꽃피우지 못하고 부모와 함께 한국에 묻힌 아이들도 많다.

 

  이곳에 한국 복음의 선교를 위하여 숨진 사람들의 묘는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다. 봉의 높이도 높지 않다. 마치 예수님께 책망받던 바리새인들의 비유와 같이, 평토장한 무덤같아보여 쓸쓸하다. 화려하지 않게 잠들어 있는 이들의 영혼은 아름답기만하다. 그러나 이들의 휴식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이 땅에서의 안식이다.

 

  이 비석을 대신한 돌 십자가들이 모진 세월속에서, 십자가 조차 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파손되어 있다. 주님의 사랑을 우리는 이렇게 받았으며 또한 우리보다 더욱 한국을, 한국영혼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오늘 우리에게 복음이 주어졌다.

 

  우리가 누구이기에 외국의 많은 선교사들이 우리를 위하여 죽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해주며, 복음의 빚진 자임을 느끼게 해 준다.

  지금까지 백년 동안 이 묘지는 나무를 심고 풀을 심어 한적한 공원으로 변했다. 비록 한국 전쟁 당시 비석들이 파괴되었지만 묘지 자체는 그대로 남아있다.

  1985년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간청으로 서울 특별시가 공원 묘지로 보호했고,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가 선교 100 기념사업 계획의 일환으로 오늘날 서울 외국인 교회의 터가 된 묘지 공원 안에 세우게 되었다.

  서울 시내 최초의 외국인 모임인 서울 외국인교회는 1985년 100 주년기념행사를 가졌었다.

 

  이 땅에 성도들의 첫 모임은 1885년 6월 28일 초교파 신교도들의 모임으로서, 선교사이며 외교관이었던 호러스 엘렌 (horace allen)씨의 거주지인 정동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얼마 안 있어 모임을 갖기 위한 보다 넓은 장소가 필요하게 되었고, 나아가서 그후 1세기에 걸친 서울 이주가 시작되어 다음 장소를 포함하게 되었다.

 

        정동감리교회(1905-07),

        정동소재 옛 서울 외국인학교 부지에 위치한 모리스 홀 (MORRIS HALL, 1924-40),

        인사동에 위치한 태화관(1954-79),

        그리고 조선호텔 대연회장(1981-86),

 

  이 기간동안 여러 목사님들이 이 일을 계승했는데, 이들 중에서 선교회에서 온 분들도 있고 다른 나라 교회에서 초대된 분들도 있다.

  서울 외국인 교회가 양화진 외국인 묘지공원 기념 교회인 영구적인 시설로 처음 이사한 것은 1986년이었다.

  이 교회 건물은 오랫동안 예수교장로회 영락교회 담임으로 사역하신 한경직 박사가 이사장으로 계시는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가 헌신적인 기독실업인 독지가들의 협찬을 얻어 "선교 기념관"으로 건립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