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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성서의 이해 제24강/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상

영국신사77 2008. 4. 8. 22:24

 제목 : 성서의 이해 제24강/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상

 

 

                                      1) 예수의 유년기
 예수의 유년기에 대한 기사는 눅 12장에만 나타나고 있다(눅 2:41-52). 이 때 예수의 나이는 12살이었으며, 예수의 부모는 예수와 함께 유대인의 유월절 관습에 따라 예루살렘을 순례하던 때였다. 예수는 어릴 적에 나사렛에서 성장하였다. 나사렛은 팔레스틴에서 몇 안되는 사통팔달(四通八達)의 지역이었다. 이곳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대로가 있는 소위 "바다의 길"에 속해 있는 대상 무역의 주요 도로였다. 나사렛의 높은 산에 올라가서 서쪽을 보면 광활한 지중해를 쉽게 볼 수 있다. 예수는 이곳에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웠을 것이라고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수는 맏아들로서 목수 일을 하면서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동생들을 부양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30세까지 갈릴리의 작은 마을 나사렛에서 살았다.

                                2) 예수의 세례 받음
나사렛 예수는 오랜 침묵을 깨고 드디어 인류를 위한 대장정에 올랐다. 예수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제일 먼저 취한 행동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이다. 세례 요한은 당시 유대인들의 회개를 촉구하였던 선지자였다(눅 3:1-9). 그는 죄사함을 얻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으라고 강권하였다(마 1:4). 그러나 예수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은 죄사함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가 세례를 받음은(막 1:9-11, 요 1:32-34),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의 죄인을 구원하고자 친히 죄인들의 삶의 자리에 왔음을 말하는 것이다(빌 2:7, 8). 예수는 자신의 세례 받음이 합당하다고 말하였다.

"예수께서……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

예수는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자신의 사역의 출발점을 삼고자 하는 면이 엿보인다.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그 시점이 자신의 사역이 시작되는 적당한(합당한) 때로 본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수세는 공생애의 출발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요 1:31에 의해 더욱 지지를 받고 있다.

"…내(요한)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예수)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또한, 예수가 세례를 받은 후, 본격적으로 전도활동에 돌입하는 것(행10:37-38)에서도 잘 엿볼 수 있다. 예수의 세례 받음은 세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의의를 보여주고 있다.

첫째, 성령이 임함.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임했다는 사실은 예수에게서 삼위일체적 권능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성령, 그리고 예수의 세 위격이 함께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는 삼위일체적 권능을 통해 세상의 죄를 몰아내는 사역에 돌입하게 된다. 그리고 본문에서 성령의 역할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성령이 예수에게 임함으로써 하나님과 예수 사이에 교통함이 나타나고 있다. 즉 성령은 역할 중 하나가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교통을 위한 것임을 교훈적으로 알 수 있다. 성령의 이와 같은 역할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반응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반응은 곧 예수가 그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구약 시대에도 나타나고 있다. 특별히 하나님과 다윗 사이에 맺는 계약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되고 있다(삼하 7:14). 또한 시 2:7에 의하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상은, 소위 '養子사상'으로서, 구약 시대뿐만 아니라 고대 팔레스틴 지역과 그 주변국에 넓게 퍼져있던 것이기도 했다. 즉 군왕과 신과의 계약이 군신의 관계에서 父子의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이 때 그 아들은 신의 양자가 되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양자가 됨으로서 '천사와 같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지혜를 갖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삼하 14:17,20).

예수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증언되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친아들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예수는 여타의 계약을 통해 父子관계가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였으며(요 1:1), 이 땅에서 와서 세례를 받을 때,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자"(요 1:14)로 드러났던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에게 성령을 주었고, 성령을 받은 아들의 모습을 보고 기뻐하고 있다.

셋째,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의 말씀은 이사야 42:1에서 인용된 것이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본문은 "고난받는 종"을 말하고 있다. 이 때 종이 겪게되는 고난의 절정은 사 53:4-9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그 종은 하나님께서 붙드는 자이며, 기뻐하는 자이며, 택한 자이다. 그 종은 성령(神)을 받았고, 만방(이방)에 공의를 베풀 자이다. 종은 먼저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후, 공의를 베푸게 되는 특권을 갖게 된다. 여기서 공의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미쉬파트)에는 재판, 판결, 올바름, 판단, 공의 등을 뜻을 지니고 있다. 이 뜻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택한 종 예수께서 만방을 다스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잇다.

예수에게서 고난받는 종의 모습이 나타남과 동시에 만왕의 왕으로서 영광을 함께 지니게 된다는 이중적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고난의 의미가 곧 영광의 의미로 이해되는 파라독스를 발견하게 된다. 이 말은 한시적인 고난을 거친 후 영원한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像은 고난을 받는 자이며 영광을 함께 받는 자의 모습이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된다는 사실이 함축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곧 고난의 길로 접어드는 아이러니를 발견하게 된다. 이 때 고난은 하나님의 뜻에 부응하고자 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죄인들이 고난받는 예수를 보고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요 6:40). 예수는 자신의 고난을 감수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뜻에 부응한 자였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세례 받음은 그의 구원 사역을 알리는 서곡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예수의 공생애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예수는 광야에서 사단으로부터 시험을 받게 된다(막 1:13). 예수의 공생애의 첫 시작이 사단으로부터 시험을 받았다는 것은 그의 삶의 여정이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세례 요한이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에게 잡힌 시기에 예수는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이었다(막 1:14). 이 때는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은혜의 때이며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의 때인 것이다.

이제 예수는 그의 사역을 위하여 제자들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제일 먼저 예수의 제자가 된 인물은 시몬과 베드로였다(막 1:16). 이들은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나를 따라 오너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를 쫓기 시작하였다. 갈리리 해변은 예수의 고향 나사렛과 지리적으로 그리 멀지 않는 곳이다. 이러한 지리적 근접성은 예수와 두 사람 사이에 만난 적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사전에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어쩌면 예수는 두 사람에 대하여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갈릴리에서 그냥 두 사람을 따라 오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 마음에 이미 제자로 삼을 것을 작정했을 수도 있다. 두 사람 역시 예수의 인품에 대하여 익히 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따라 오너라는 말씀에 주저하지 않고 순종하였던 것이다. 이후 예수는 12명을 제자로 삼았다(마 10:1-4; 막 3:13-19; 눅 6:12-16).

마가복음서는 예수가 12명을 제자로 삼은 것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전도하게 하며" 그리고 "귀신을 내쫓는 권세가 있게 하려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막 3:14-15). 그는 율법학자들의 잘못된 율법이해를 문제삼기도 했으며(막 2:3-3:6),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막 2:16-17). 예수는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함과 동시에 많은 병자를 치료해 주고 귀신들린 자를 구원해 주기도 하였다. 예수는 여러 기적을 일으켰으나 그 중에서도 "오병이어의 기적"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경배의 대상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어리를 축사한 후 5천명이 넘는 군중들에게 나누어주는 기적이었던 것이다(막 6:35-43).

갈릴리에서 2년 가까이 전도를 하였던 예수는 두로 지방을 여행하면서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다(막 7:24). 두로에서 선교여행을 하던 중 수로보니게 족속의 한 여인 딸을 치유하기도 하였다(막 7:26-30). 두로에서 가이사랴 빌립보로 돌아온 예수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며,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묻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고(막 8:29)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명령하였다(막 8:30). 베드로의 고백은 놀라운 것이었다. 예수가 바로 구약성서에서 오랫동안 예언하고 기리던 메시야인 것이다. 베드로의 고백 후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이후 예수는 유대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을 향하기 시작하였다. 예루살렘 입성은 곧 죽음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구속사업을 이루는 대업이었다. 예수는 나귀를 타고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마치 개선장군처럼 예루살렘을 향하였다(마 21:9; 막 11:7-10; 눅 19:38). 이것은 예수의 전도의 클라이막스이며 인류를 위한 구원의 서곡인 셈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당당한 위풍에 기대감을 한껏 부풀었던 것 같다. 누가는 이러한 분위기에 대하여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고 말하고 있다(눅 19:11).


                                 4) 예수의 죽음
예루살렘 입성을 시점으로 예수는 더 이상 유대 종교지도자에게 방치되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었다. 이미 예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요주의 인물이었고 그들은 예수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던 자였다(막 11:27-12:27). 예수는 잡하시기 전 날 밤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예수는 제자들을 향하여 떡과 잔을 가리켜 "자신의 몸과 피"라고 말하면서 "이것을 행하여 자신을 기념할 것"을 명령하였다(눅 22:19). 드디어 예수는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끌려갔다. 가야바 앞에선 예수는 자신이 그리스도이며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올 자임을 말하였다(막 14:62). 이것은 유대종교에서 보면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다음 날 새벽 유대인들의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총회가 열렸다. 이것은 전날에 있었던 재판의 결과를 재가하기 위한 형식이었다. 산헤드린에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다. 그래서 예수를 처형하기 위해서는 로마총독 빌라도의 재가를 받아야만 하였다. 이에 대제사장과 그의 수하들은 예수를 결박하여 빌라도 총독에게 압송하였다.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이 로마 치하에서 로마황제에 대한 반역이라고 누명을 씌워 예수를 빌라도 총독에게 고발하였다. 유대인들의 잘못된 종교관과 종교행태를 지적한 예수가 정치적인 이유로 고소되었던 것이다. 눅 23:2에 의하면, 빌라도 앞에서 선 예수의 죄는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선동자이며(참조. 신 13:1-5), 로마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고 했고 자칭 왕이라고 한 것이다.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여 그를 방면하려고 했으나 유대교 추종자들의 거센 기세에 밀려 궁리 끝에 한 가지 방안을 고안하였다. 그것은 예수가 나사렛 출신이고 나사렛은 갈릴리의 한 마을이므로 갈릴리를 다스리던 헤롯 안디바에게 심문을 받도록 조치한 것이다. 당시 헤롯 안디바는 명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와 있었기 때문에 빌라도의 생각은 쉽게 진행될 수 있었다(눅 23:6-12). 그러나 헤롯은 예수의 죄를 찾지 못하여 재판권을 거부하였고 다시 빌라도에게 예수를 돌려보냈다. 빌라도는 예수가 죄 없음을 알고도 유다의 기득권층인 대제사장과 율법자들의 말을 들어 예수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십자가형은 로마의 사형방식 중 가장 극악한 방법이었다. 예수는 아무런 죄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서서히 피를 흘리면서 고통 중에 죽은 것이다.

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한 말을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이 말은 일곱 문장이며, 전통적인 순서로 배열하면 다음과 같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요 19:26-27).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막 15:34; 시 22:1-31).
"내가 목마르다"(요 19:28).
"다 이루었다"(요 19:30).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그는 극심한 고통 중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를 하면서 운명을 하였다. 예수가 이 땅의 왕인 줄로 믿고 따랐던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을 보고 낙심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예수를 따르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시체를 매장하는 일에 자청하고 나섰다(마 27:57-61; 막 15:43; 눅 23:50-56; 요 19:38-42). 빌라도의 허락을 받은 요셉은 니고데모와 함께 예수의 시신을 세마포를 싸고 무덤에 안치하고 돌을 굴려 무덤 문을 막았다.

마태복음서에 의하면,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가 생전에 죽으면 사흘 후에 부활하리라는 말에 겁을 내고 며칠간 파수꾼을 세워 예수의 무덤을 지켰다고 한다(마 27:62-66). 제자들은 스승 예수의 죽음을 보고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는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의 맥없는 말에서 잘 알 수 있다(눅 24:21). 한편 막달라 마리아와 몇몇의 여성만이 예수의 유해에 영결의 뜻을 표하고자 예수가 안치된 무덤 동굴로 갔으나, 동굴 무덤을 막았던 돌이 비겨나있고 동굴에는 예수의 시신이 없었다. 예수께서 부활한 것이다(막 16:1-8).

                            5) 예수의 부활과 승천
예수는 부활한 후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났다(눅 24:42; 눅 24:13-35; 요 20:19-20; 21:1-14). 예수의 부활은 예수가 인류 역사상 유일무일하게 죽음을 극복한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예수의 부활사건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곧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을 극복하게 하는 믿음을 준 것이며, 내세에 소망을 가져다 주는 사건이었다. 사도 베드로는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는" 그 분에 대하여, 곧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그 분에 대하여 증언하였다(행 2:24). 사도 바울은 예수의 부활사건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헛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교의 핵심이 부활사건에 기초하고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고전 15:12-22).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면서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였다(28:19-20). 예수의 명령의 핵심은 모든 족속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아 구원에 이르는 것이었다(막16:16). 제자들에게 전도의 명령을 내린 후, 예수는 하늘로 올라갔다.

6) 예수의 가르침
사랑에 대하여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은 사랑이다. 예수는 한 서기관의 모든 계명에 첫째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너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29-30; 신 6:5)고 말씀하였다. 또한 예수는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막 12:31; 레 19:18)고 명령하였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인 셈이다(마 22:40).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예수의 윤리적 명령이며, 예수 스스로 이를 지키고자 이 땅에 온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타락한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분이다. 예수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했을 뿐만 아니라 이웃을 끝없이 용서하라고도 말씀하였다(마 18:15).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것을 말하기도 하였다.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하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을 권세 있는 그를(하나님) 두려워하라"(눅 12:4-5). 이 말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무한한 사랑으로 다가오나,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심판자로서 임할 것임을 경고하는 말이다.

예수는 이웃 사랑의 표본으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다(마 7:12). 예수는 다양한 이웃 사랑의 예를 제시하고 있다. 가령,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마 5:39),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마 5:41),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42) 그리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30-37) 등이다. 이것은 예수가 어떤 규례나 법칙을 정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웃 사랑의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하나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야만 하기 때문이다(눅 6:36).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는 하나님에 대하여 간단명료하게 설명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언급을 철학적인 사변이나 추상적인 신관(神觀)으로 설명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조차 무관심하지 않으신 분(마 10:29), 품꾼에게 일한 이상의 품삯을 지불하시는 인자하신 분(마 20:1-15) 등으로 언급되고 있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은 간혹 아버지로서 묘사되고 있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부성(父性)에 대하여 유독 강조하였다(마태복음서에 44회, 요한복음서에 120회). 막 14:36에서 예수가 하나님을 가리켜 "아바"라고 아람어로 말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아바"는 팔레스틴에서 육신의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되는 일상적인 용어이다. 이 단어에는 아버지(father)라는 의미도 있지만 아빠(daddy)라는 뜻도 있다. 예수는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무리들에게 "너희 아버지는 한 분이다"임을 말하고 있다(마 23:9).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한 아버지 안에서 일치된 한 공동체임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구약성서와 외경에는 의미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은 있으나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인격과 사역 속에 이미 현존해 있음을 말하기도 하며(마 19:14; 막 10:14; 눅 18:16), 또 어떤 곳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듯한 내용이 들어있다(마 8:11; 20:21; 막 9:1). 전자에 경우는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된 것으로 후자의 것은 실현되지 않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모순된 듯 하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나라"는 "왕적인 지배"나 "통치"의 개념이지 "영토"나 "영역"을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적 개념은 하나님의 통치, 즉 주권적인 하나님과 각 개인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이냐 미래적이냐 하는 물음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따르는 자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실재를 경험하는 자이며, 그 하나님의 통치가 세속적인 방해를 받지 않는 새 시대에 완전성이 보장되는 그 때가 미래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며(막 1:15; 눅 11:52), 하나님의 선물이며(눅 12:32), 상속받을 수 있는 영역이다(마 25:34).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자격 조건이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마 7:21 이하). 하나님의 뜻은 회개해야만 하며(마 4:17; 막 1:15), 세상적인 것과 완전히 결별해야만 하며(마 22:1-4; 참조. 마 13:44 이하), 어린 아이와 같이 그 나라를 영접해야만 한다(마 11:14; 막 10:15; 눅 18:16).

여성에 대하여
예수님 당시에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하여 신분상 불이익을 많이 당하였다. 예수는 여성에게 매우 정중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하여 여러 번 재혼한 경험이 있었던 사마리아 여인(요 4:18)과 창기(눅 7:36-50) 등에게 항상 정중하게 대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여성을 경시하는 당시의 풍토에 대한 일종의 경고이며 동시에 여성지위 향상을 고려한 조치로 이해될 수 있다. 간음한 여인에 대해서도 예수는 비난과 저주 대신에 사랑의 손길을 펼친 것을 알 수 있다(요 8:6). 예수에게 있어서 모든 인종은 귀한 존재이며 남성과 여성 모두 하나님의 자녀였던 것이다.

 

 

 

                                                작성자 : bible114

 

 

작성일 : 2004/10/11 AM(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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