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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남유럽,이탈리아,로마)

영국신사77 2007. 10. 6. 00:51
                 성지순례(남유럽,이탈리아,로마) 
 
 
                                    몰타 성요한 대성당 | 성지순례(남유럽,이탈리아,로마)
 

 성요한 대성당    (블로그명 : Monde De BK-★)

 

 성요한 대성당 내부  (블로그명 :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유럽)

 

도시 중앙부에 있는, 성요한 대성당의 둥근 천장과 중앙 신랑, 건축가 제롤라모 카사르가

1573년에 착공했고, 거대한 둥근 천장 장식은 기사인 마티아 프레티를 그린 것이다

 

 성요한 대성당 내 카라바조의 성화 (1608년 세례요한의 참수)

 

16세기에 여자수도원으로 세워져 섬내에서도 중요한 역사 건축물의 하나로,  기도실에 걸린

이탈리아의 화가 카라바죠의 걸작은 볼 만하다

 

몰타섬의 수도 발레타 전경    (블로그명 : 푸른 마음)

 

말타


말타의 대표적인 섬의 이름이기도 하다. 국가명인 말타에는 큰 두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는 말타섬이고 하나는 고조섬이다. 발레타는 말타섬의 수도이다. 1565년 성요한기사단의 도시, 요새의 도시, 신사에 의한 신사를 위한 도시라고 불리우는 발레타는 그 이름만큼이나 다양하고 풍부한 역사적를 가지고 있다. 성요한의 기사단에 의해서 다시 태어난 발레타는 바로크의 걸작, 유럽의 예술도시, 문화유산의 도시이기도 하다. 말타의 수도로서 모든 행정과 비지니스의 중심부이며 가장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는 말타의 현실을 반영하듯 섬에서 최적의 환경을 가지고 있다. 아방가드예술에서 전통 교회연회까지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진행되는 거리 이벤트가 도시의 주요 건축물 앞에서 펼쳐지며 좁은 도로사이로 다양한 샵들과 책방, 보석가게들이 즐비하여 관광객들을 즐겁게 한다.

 

 

 

산 로렌초교회와 메디치가 예배당(큰 돔)    카페 > 키아로스 / hidy72

 

출처-  블로그 > 21세기 보헤미안..

 

출처- 블로그 > Travels of critichs

 

산 로렌초교회    출처 블로그 > ordinary or extraordinary

 

산 로렌초 교회    블로그 > syk0510님의 블로그

 

산 로렌초교회

 

산 로렌초교회와 메디치가 에배당 (오른쪽 큰 돔)

 

성당 내부    출처 블로그 > B.파스칼과 G.W.라이프니츠


돔 아래의 팔각형 공간이 카펠라 데이 프린치피인데 온갖 색깔의 대리석과 준보석들로 상감세공된 화려한 내부는 가히 압도적이다.  벽감마다 대공들의 무덤이 있고 그 위에는 메디치 문장이 있다. 공 모양 장식이 들어간 것이 메디치 문장의 특징인데 그 수는 일정치 않아서 여섯 개일 때도 있고 여덟개, 혹은 일곱이나 다섯일 때도 있다

 

내부

 

 

산로렌초 성당 왼쪽 복도에 있는 프레스코화.  성로렌초의 순교를 그린 이 벽화는 마니에리스모 화가인 브론치노가 1569년에 그린 것이다.

  

출처 블로그 >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유럽

 

구 제의실   출처 블로그 > himammo님의 블로그

 

메디치 가문을 위해 일한 미켈란젤로의 가장 중요한 작품이 있는 곳은 피렌체의 구 제의실(Sacrestia Vecchia)이다. 이곳은 성 로렌초 교회를 미켈란젤로가 손수 증축한 곳이다. 그래서 이름도 신 제의실에 이어 구 제의실이라 붙였다. 많은 미술품들 가운데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 구 제의실(Old Sacrestia)이라 불리는 곳이다. 제의실은 사제가 미사 전후 옷을 갈아입거나 제의를 보관하는 방이다. 성 로렌초 교회의 구 제의실이 특별한 이유는 그곳이 바로 도나텔로와 브루넬레스키가 공동작업을 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의 장식을 위해 르네상스의 두 거장이 머리를 맞대고 일을 했다니 이 작은 방에서 역사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도나텔로는 채색한 테라코타로 벽면을 장식했다. 테라코타란 흙을 구워서 만드는 기법이다. 이전까지 교회의 장식품은 대부분 돌로 만들어졌는데 도나텔로는 제작기법이 용이하고 제작 기간도 단축할 수 있는 테라코타로 조각을 만들었고 이를 대중화 했다. 중세에는 일반 시민들이 미술품을 소장하거나 장식하는 것이 거의 허락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시민들이 자신들의 주택을 미술작품으로 장식하길 원했는데 이 때 값이 싸고 제작이 용이한 테라코타가 크게 인기가 있었다. 이 교회에는 또한 도나텔로가 만든 청동 설교대가 있다. 작가가 죽기 직전까지 매달렸던 것으로 노 대가의 예술 혼과 청동 부조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피렌체 예술가들의 뒤에는 늘 이렇게 메디치가문이 있었다.

 

줄리아노의 석관과 남성, 여성상, 미켈란젤로

 출처 블로그 > B.파스칼과 G.W.라이프니츠

 

쥴리아노의 석관위에는 밤과 낮이라고 불리우는 한쌍의 남녀좌상이 좌우에 기대어 누워, 그 위 감실속에 쥴리아노의 좌상이 고상한 품위를 지닌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맞은편에 위치한 로렌쵸의 석관위에는 '새벽'을 의미하는 여성상과 '황혼'을 의미하는 남성상이 불편한 자세로 기대어 있고 그위에 로렌초공의 좌상이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앉아있다. 쥴리아노 무덤의 밤과낮, 로렌쪼 무덤의 새벽과 황혼은 하루사시의 상징일뿐만 아니라, 고대 로마의 강 신과도 비슷한 것을 보면 저승의 네 개의 강을 상징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로렌초와 쥴리아노는 지켜보는 사람들과 더불어 죽음과 영원한 생명의 중간에서 영혼의 운명에 대해 생각있는 것이다   

 

줄리아노, 미켈란젤로

 

 

산로렌초 성당의 메디치가 예배당에 있는 우의상 (밤을 상징- 남성상은 낮을 상징) 미켈란젤로가 만든 이 걸작은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돌널을 장식하고 있다

출처 블로그 >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유럽

 

로렌초 일 마니피코 – 소년시절(1449-1492)

 

위대한 로렌초 흉상플로렌스(피렌체) 군주

 

출처 블로그 > himammo님의 블로그


 

산 로렌초 교회와 메디치 가 예배당


산 로렌초 교회는 메디치가의 예배당과 나란히 서 있으며, 15세기의 순수한 르네상스 양식으로 교회에 인접하여 도서관이 있는데, 이 건물은 1444년에 코시모 데 메디치의 저택으로 세운 것이다. 1만권이 넘는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고 귀중한 역사적 자료도 많다. 메디치가의 예배당은 산 로렌초 교회 뒤쪽에 입구가 있는데 역대 메디치가 사람들의 묘가 있으며, 묘역은 구묘와 신묘로 나뉘어 있다. 구묘지역은 대리석과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고, 신묘지역은 미켈란젤로가 만든 것이다. 오른쪽의 묘는 로렌초 2세의 묘인데 로렌초 상, 서광을 상징하는 여성상, 그리고 황혼을 상징하는 남성상 등 3개의 입상이 있다. 또 왼쪽의 묘는 줄리아노의 묘인데 이곳에도 미켈란젤로가 만든 3개의 조각이 있다. 줄리아노의 상은 힘과 지구력을 누워있는 남성상은 '낮'의 행동을, 여성상은 '밤'의 잠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 예배당은 메디치가 대대의 사원이며 시대와 양식이 다른 33개의 묘지 공간, 즉 브루넬레스키의 구 성물실, 미켈란젤로의 신 성물실, 17세기의 군주의 예배당으로 되었다. 구 성물실은 잡다한 장식이 없고 우아하고 맑고 깨끗한 분위기로 가득차 있으며 도나텔로작의 흉상이 있어서 한번 쯤은 볼만하다. 아름다움 정원에서 이어지는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계단을 오르면 2층에도 그가 설계했다는 라우렌치아노 도서관이 있다. 도서관의 열람실의 천장과 의자 등 모두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것이다. 교회 내부는 브루넬레스키가 착공하였다. 이곳에 줄리아노의 동상이 있는데 줄리아노가 메디치나 로렌초는 아니다. 메디치는 가문의 이름, 즉 姓 을 말한다. 쥴리아노가 이름이고 메디치는 성이다. 쥴리앙은 프랑스식 발음이며 실제는 쥴리아노 디 메디치, 로렌쪼 디 메디치이다. 그리고 쥴리아노와 그 앞의 로렌초는 엄연히 다른 인물이다. 쥴리아노는 로렌초의 후손이다. 쥴리아노의 동상은 미켈란젤로가 만들었는데 사진도 초상화도 없다. 쥴리아노는 젊은 나이에 정치적 반대파에 의해 암살당했는데, 그의 무덤은 피렌체의 산 로렌초 교회 안의 메디치가 무덤에 있다. 메디치가의 무덤은 6개인데 구묘에 4기 신묘에 2기가 있다. 신묘에 쥴리아노 와 로렌초가 있다. 서로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는데, 쥴리아노는 인체 구조상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구조로 깎여져 있다. 그 이유는, 신묘의 공간이 좁고, 또한 꽃을 관에 바치기 위해 조문객이 가까이 다가가서 위로 올려다 볼 때 생기는 원근감을 고려해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로렌초는 맞은편에 앉아서 쥴리아노를 응시하고 있고 쥴리아노는 그 시선을 부드럽게 회피하듯 좌측을 바라보고 있는 구조이다. 대리석은 카라라 대리석을 이용하였고 오후의 채광을 고려해 약간 안으로 들어가 있는 구조이며 대리석 관 위에 앉아있으며 두명의 여인이 보필하고 있는 모습이다. 쥴리아노는 너무 젊은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인물 자체에 대한 기록이나 역사적인 업적 같은 건 거의 없는 편이다. 단지, 그의 동상을 미켈란젤로가 너무나 잘 만들어서 알려진 것이다. 쥴리아노 라는 인물보다는, 그 인물을 조각한 미켈란제로의 위대함이 더 크게 보여진다

 

메디치 가와 피렌체

 

메디치 가의 국부 코지모 (1389-1464)


메디치가(家) 없는 피렌체란 생각하기 어렵다. 피렌체가 역사상 빛나는 주역이 되었던 시기는 1400년쯤부터 1600년쯤까지 약 2세기 동안이다. 이 시기는 또한 메디치 가문의 영광의 시기와도 일치한다.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초였으며 은행업을 했던 이 가문이 교황청의 재정후원을 담당하게 되면서 일약 유럽의 갑부로 도약하게 되었다. 메디치가 은행은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는 물론이려니와 멀리 네델란드에까지 지점이 있었다고 한다. 메디치 가문 사람들 중에서 역사적 조명을 받은 첫 인물은 코시모 일 베키오이다. 그는 ‘피렌체의 국부(國父)’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당시 피렌체 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코시모는 무엇보다도 건축물 건립에 신경을 썼다. 성 로렌초 교회, 성 마르코 수도원, 메디치 궁(Palazzo Medici)이 대표작이다. 세 건물 모두 초기 르네상스 건축 양식을 대표하며 오늘날에는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중에서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성 로렌초 교회는 최초의 르네상스 식 교회다. 이 교회는 특히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데 이유는 교회의 광장을 중심으로 피렌체에서 가장 큰 시장이 서기 때문이다. 피렌체의 특산품이라 할 수 있는 각종 가죽제품과 실크 제품을 여기서는 비교적 싼 값으로 살 수 있으며, 수다스러운 이탈리아 상인들과 흥정을 하는 재미를 맛볼 수도 있다. 성 로렌초 교회는 메디치가의 가족 교회이다. 한 가문의 교회라 하기엔 그 규모가 대단히 크지만 무엇보다도 소장 예술품의 질을 보면 메디치가 왜 예술 후원자의 대명사처럼 불리는지 그 이유를 말해준다 (출처 블로그 > himammo님의 블로그)

 

산타 크로세 (성 십자가) 성당

 

성당 전면

 

성십자가성당 옆에 있는 단테의 동상   출처 블로그 > 내일이면 늦으리...


피렌체는 단테를 버렸고 그의 위대함을 알고난뒤 그를 다시 모시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단테를 버렸던것을 참회하며 간이 안된 빵을 구워먹는다고 한다

 

 돔의 내부   출처 블로그 > B.파스칼과 G.W.라이프니츠

 

천장화 없이 부채살 모양으로 뻗은 기하학적 형태가 단순하면서도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돔과 아치가 만나 이루는 삼각형 펜던티브를 장식하고 있는 테라코타 장식은 루카 델라 로비아Luca della Robbia의 작품이다

 

 단테의 묘    출처 블로그 > 2lili


추방을 당한 단테는 살아 생전 자신의 고향인 피렌체에 돌아오기를 간구했으나 유배지인

라벤나에서 그는 생을 마감한다. 피렌체 성십자가 성당에 있는 단테의 묘는 빈묘이며 그의 무덤은 라벤나에 있다

 

성당 내부의 도나텔로가 그린 수태고지

 

성당 내부의 지오토가 그린 프레스코화 <성 프란체스코의 일생과 죽음>

 

산타 크로체는 특히 부속된 여러 예배당들로 유명한데 지오토Giotto의 프레스코들이 있는 카펠라 바르디Capella Bardi와 카펠라 페루치Capella Peruzzi, 그리고 브루넬레스키의 설계로 유명한 카펠라 데이 파치Capella dei Pazzi 등이 있다. 흰색 회벽과 짙은 회색의 피에트라 세레나Pietra Serena로 만들어진 벽기둥, 돌림띠들이 대조를 이루는 파치 예배당은 르네상스식 비례의 원칙을 따라 장식되었다

 

 

산 크로세 박물관의 치마부에의 십자가 처형상

 

산타 크로세 교회 (Santa Croce), 성 십자가 성당 (Chiesa di S,Croce)


피렌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광장에 있는 큰 교회이다. 옆에 부속 건물로 승원 안뜰과 브루넬레스키의 파치가 예배당은 피렌체 르네상스의 정수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프란체스코(Francesco)회의 성당으로 1294년 아르놀포 디 깜비오(Arnolfo di Cambio)의 설계로 지어진 성 십자가 성당 (Chiesa di S,Croce)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딕양식의 성당이다. 성당은 내부의 길이가 115.43m, 폭이 28.23m, 높이가 73.74m로 작지 않다. 베네데또 다 마이아노(Benedetto da Maiano)가 만든 설교단이 아름답다. 성당 안에 도나텔로(Donatello)의 정교한 수태고지, 지오또(Giotto)의 “성 프란체스코의 생애와 죽음”을 주제로 한 프레스코화가 있다. 이곳에는 나폴레옹의 형인 죠세프 보나파르트의 부인 쥴리 클라리의 무덤이 제단 뒤쪽의 부속 예배당에 자리하고 있다.  성당의 좌측으로는 단테의 동상이 서 있다. 예배당은 276개의 묘석들로 포장되어 있으며 벽을 따라서 호화로운 무덤들이 즐비해 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마키아벨리(Machiavelli), 로씨니(Rossini), 갈릴레이(Galilei), 기베르티(Ghiberti), 알피에리(Alfieri), 포스콜로(Foscolo)등이 이곳에 묻혀있다. 단테(Dante)의 무덤은 기념 무덤으로 그의 본 무덤은 라벤나(Ravenna)에 있다. 이 성당에 딸려있는 부속 수도원에는 브루넬레스키(Brunelleschi)의 작품 빠찌가의 예배당이 있다. 산타 크로체 박물관은 치마부에의 십자가 처형상이 소장되어 있으며, 대형 회랑은 브루넬레스키의 설계로 만들어졌으며, 그의 사후인 1453년에 완공되었다.

 

 

 

산 차카리아교회      카페 > 키아로스 / hidy72


베네치아 르네상스기의 걸작 회화가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교회로 창건은 9세기지만 현재의 건물은 15-16세기에 재건된 것으로 로마네스크 양식, 르네상스 양식, 고딕 양식의 특징이 모두 나타나있다. 내부에는 틴토레토와 조반니 벨리니 등의 대표작이 남아 있다

 

벨리니의  성모와 성자      출처 블로그 > tkv4의 블로그

 

베네치아 화가들은 색채를 그림 위에 덧붙이는 부가적인 장식으로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베네치아에 있는 산 차카리아의 작은 교회에 가서 위대한 베네치아 화가 조반니 벨리니가 그의 말년기인 1505년에 제단에 그린 그림 앞에 서보면 색채에 대한 그의 접근법이 매우 달랐다는 것을 당장 알아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도 전에 부드럽고 다채로운 색채들이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다. 여기에 실린 도판으로도 성모 마리아가 앉아 있는 왕좌가 놓인 황금색의 빛나는 벽감에서 넘쳐흐르는 따뜻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성모의 팔에는 제단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축복하기 위해 손을 들고 있는 아기 예수가 안겨 있다. 천사 한 사람이 제단 밑에서 조용히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고 성인들은 옥좌의 양편에 조용히 서 있다. 성 베드로는 열쇠와 책을 들고 있으며 성 카타리나는 순교의 상징인 종려나무 잎과 부러진 형틀을 들고 있고, 성 아폴로니아와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학자여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한 성 히에로니무스가 보인다. 성인들과 함께 있는 성모상은 그 이전이나 그 뒤로도 이탈리아 및 기타 다른 여러 곳에서 많이 그려졌지만 이러한 품위와 차분함으로 표현된 그림은 거의 없다.

 

 

 

산탐브로조 교회    카페 > 키아로스 / hidy72

 

밀라노의 수호성인 성 암브로조가 잠들어 있다. 4세기 말에 창건된 밀라노 최고의 교회이다. 현재의 건물은 9-11세기에 재건된 것으로서 롬바르디아 주의 로마네스크 건축으로는 손꼽을 만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내부의 뒤쪽에 있는 황금제단이 볼거리이다

 

성 비탈레 성당

 

 성 비탈레 성당

 

성 비탈레 성당

 

성 비탈레 성당

 

 성 비탈레 성당 , 중앙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빵이 담긴 바구니)

 

성 비탈레 성당, 중앙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부인(포도주 잔)

 

 

성 비탈레 성당


동로마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527~565년)는 잃었던 로마제국의 땅을 회복하는 정책을 썼는데 라벤나는 되찾아야 할 땅 제 1호였다. 그는 라벤나를 제국의 영토로 만든 후 그곳에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를 짓도록 명했다. 바로 성 비탈레 성당이다. 현재 이스탄불의 상징처럼 되어있는 성 소피아 사원 역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절에 건축된 것인데 그는 성 소피아 사원보다 규모는 작지만 거의 같은 구조로 성 비탈레 성당을 짓게 했다. 두 성당 모두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되었으나 소피아 사원은 16세기부터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면서 형상을 거부했던 이슬람교의 정책에 의해 그림이 대부분 파손된 반면, 라벤나의 교회에는 모자이크가 고스란히 남아있어서 6세기 동로마제국의 미술품을 감상할 수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교회의 제대 위쪽에 자신과 황후 테오도라가 각각 참모들을 동행하여 그리스도께 예물을 바치는 모습을 모자이크(사진)로 제작하게 했다. 자신은 빵이 담긴 바구니를 든 모습으로, 그리고 부인은 포도주잔을 들고 있는 모습인데 신이나 성인에게만 표시하는 후광까지 그려 넣게 했다. 이들 부부는 한번도 라벤나에 와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교회에서 가장 잘 보이는 부분에 자신의 모습을 보이게 함으로써 미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보게 했다. 백성들에게 통치자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어렸을 때 교실에서 대통령의 사진을 보면서 받았던 것과 비슷한 효과가 아니었을까. 다만 그는 비록 정치적 선전이긴 했지만 너무도 아름다운 예술품을 통해 목적을 달성했다. 그래서 1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곳의 모자이크는 진귀한 비잔틴 양식의 대표적인 예술품으로서 전세계의 관광객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고종희 교수, 이탈리아예술기행, 라벤나, 문화일보 2005/10/10 

 

 성 아폴리나레 누오보 교회

 

성 아폴리나레 누오보 교회

 

성 아폴리나레 인 클라세 교회

 

성 아폴리나레 인 클라세 교회

 

성 아폴리나레 인 클라세 교회

 

성 아폴리나레 누오보 교회, 성 아폴리나레 인 클라세 교회


이탈리아의 동쪽에 위치한 바다를 아드리아해라 부른다. 아드리아 해안에 위치한 대표적인 도시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베네치아가 있지만 그보다 앞서 형성된 도시가 있으니 라벤나가 그곳이다. 라벤나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로마제국의 마지막 수도가 되었고, 이어서 중세를 여는 운명에 놓였다. 로마제국은 이탈리아인들이 그토록 우습게 여기며 야만인이라 비하했던 이민족에 의해 멸망당했다.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이민족의 왕은 고트족의 테오도리코였는데 이들과 함께 고대(古代)는 막을 내리고 중세(中世)가 열렸다. 그들은 비록 이민족이긴 했으나 앞선 로마제국으로부터 위대한 건축법을 이어받았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를 계승했다. 과거 청산이 아니라 과거 계승인 셈이다. 서구의 고대 세계를 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세력이 통치했다면 그에 버금가는 통치권을 이어받은 곳이 바로 중세의 교회였다. 로마제국의 계급에 의한 피라미드식 통치 방식은 고스란히 교회로 옮아갔다. 실제로 가톨릭 교회는 오늘날까지 로마 교황청 아래 각 나라별로 교구, 본당 등이 세포 조직처럼 뻗어 있어서 작은 지역에까지 교황청의 개입이 가능하게 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로마제국의 통치제도와 유사하다. 중세 최초의 왕이라 할 수 있는 고트족의 왕 테오도리크가 세운 성 아폴리나레 누오보 교회가 있다. 라벤나에는 성 아폴리나레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가 두 곳이 있다. 하나는 성 아폴리나레 인 클라세이고 다른 하나는 성 아폴리나레 누오보 교회다. 두 곳 모두 6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중세의 교회다. 이 두 교회는 구조와 분위기가 마치 쌍둥이 건물을 보는 듯 흡사하며, 6세기에 제작된 모자이크가 온전히 남아있어서 중세가 첫 발을 내딛던 시절의 예술 수준을 짐작케 한다. 두 곳 모두 소박하고 간결한 가운데 1500년 전 건축물이 주는 기품을 느낄 수 있고, 무엇보다도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모자이크 작품의 원조를 볼 수 있다. 아폴리나레 누오보 성당에 들어가면 기둥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데 기둥 위의 벽면이 온통 모자이크로 덮인 화려한 색채와 조우하게 된다. 한 쪽 벽에는 성인들의 모습이 일렬로 줄을 서 있고, 마주 보는 쪽에는 순결한 처녀들의 모습이 보이는데 마치 복제 인간처럼 비슷한 모습의 사람들이 열을 지어 서 있어서 인물 개개인이 주는 아름다움 보다는 전체가 주는 조화와 율동미를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끝에는 아기 예수에게 예물을 바치는 동방박사의 모습도 보이는데 이들이 입은 의상은 당시의 패션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이들 모자이크 위쪽에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수난을 담은 모자이크 그림들이 있다. 가장 오래된 중세미술의 보석이자 후대의 그리스도교 미술의 뿌리이기에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이들 작품은 문맹자가 대부분이었던 당시 민중에게 그리스도교를 설교하는 훌륭한 시각매체이자 그림으로 읽는 성서나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고단한 삶을 위안받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들도 저세상에서 구원받기를 열망했다. 서구의 중세 사회가 시작된 것이다


고종희 교수, 이탈리아예술기행, 라벤나, 문화일보 2005/9/26

 

 라벤나 갈라 플라치디아 무덤

 

라벤나 갈라 플라치디아 무덤

 

라벤나 갈라 플라치디아 무덤


라벤나는 가히 운명의 도시라 부를 만 하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 도시가 로마 제국의 마지막 수도라는 운명을 타고 났기 때문이다.  라벤나는 한때 지구의 절반을 지배했던 로마 제국의 수도였으니, 비록 추락의 일로에 놓이기는 했으나 제국이 남긴 문명의 흔적은 찬란했다. 서양사에서는 보통 서로마 제국의 멸망(서기 476년)과 함께 고대가 막을 내리고 중세가 시작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라벤나는 로마제국이 남긴 고대문명의 마지막 흔적과 중세의 시작을 알리는 유적을 볼 수 있는 곳이기에 역사의 경계 도시라 할 수 있다. 라벤나라는 작은 마을이 시골티를 벗고 로마제국 수도로서의 위용을 뽐낼 수 있게 된 것은 갈라 플라치디아라는 여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여인은 오노리우스 황제의 누이였는데 423년 오노리우스가 사망하자 대를 이은 그녀의 어린 아들 발렌티니아누스를 대신하여 섭정을 했으며 통치 기간에 문학과 예술을 전폭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이탈리아의 보물 목록을 풍요롭게 하는데 일조했다. 그녀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갈라 플라치디아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은 내부가 온통 모자이크로 장식되었으며 라벤나가 자랑하는 모자이크 건축물 제1호이다. 모자이크란 엄지 손톱만한 크기의 다양한 색상의 유리나 돌을 벽에 일일이 붙여서 장식하는 회화 기법을 가리키며, 기원전 3세기 정도 로마제국시대에 사용되기 시작했으나 그것을 최고의 예술 경지로 끌어올린 곳은 바로 이곳 라벤나에서였다. 현재 라벤나에는 아름답고, 보존상태가 완벽하며, 가장 역사적 가치가 높은 모자이크 작품들이 남아 있다. 그 중의 백미가 갈라 플라치디아 무덤이다. 나는 이 무덤을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라 부르고 싶다. 그것은 가로 세로의 길이가 같은 십자가 모양으로서 외부는 붉은 벽돌로 아담하게 지어졌으나 내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탄성이 절로 나온다. 고흐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별들 가득한 청색으로 빚어진 모자이크는 천상의 세계를 보여주려는 듯 무덤의 천장을 덮고 있는데, 제작 된 지 1500년이 넘도록 손상 없이 완벽하게 보존이 되어 있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로마제국은 그리스도 탄생 이후 300년 넘게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했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것은 380년 이었으며 이 때부터 서구의 정치, 사회, 문화를 비롯한 모든 영역은 그리스도교 없이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어진 갈라 플라치디아의 무덤은 로마제국의 통치자의 무덤이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십자가 모양으로 설계되었으며, 그 내부가 그리스도교를 표현한 그림들로 장식되었다는 점에서 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 수용상황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다. 갈라 플라치디아의 무덤은 멸망의 기로에서도 예술적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로마인들의 모습을 증언해준다


고종희 교수, 이탈리아예술기행, 라벤나, 문화일보 2005/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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