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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영국신사77 2007. 10. 6. 01:23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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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Basilica di San Giovanni in Laterano)은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로마 가톨릭의 대성당으로, 로마의 4대 바실리카(고대 로마 양식의 대성당)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라테라노 대성당이라고도 불린다. 라테라노 궁전과 인접해 있다.

라테라노 대성당은 바티칸 시국의 영토 밖에 있지만, 라테라노 조약에 의해 바티칸의 권리가 특별히 인정되고 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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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역사

[편집] 고대부터 아비뇽 유수기까지

고대 시절 라테라노 대성당은 ‘구세주 대성당’이라고 불리며 로마의 수많은 교회들의 순위매김 중에서 최상위를 점하며 신도들의 경의의 대상이 되었다. 라테라노 대성당은 로마 주교로서의 교황의 주교좌 성당이었기 때문에, 전 가톨릭교회의 주교좌 성당이라고도 불렸었다.

원래 이 장소에는 로마 제국 시절, 라테라누스 가문이라는 일족이 지은 호화스러운 저택이 들어서 있었다. 라테라누스 일족은 몇몇 로마 황제들의 시중을 들었던 명문 집안으로, 섹티우스 라테라누스는 일족 중에서 최초로 집정관 자리에 올랐다. 그 후, 일족 중 한 사람인 프라티우스 라테라누스가 집정관으로 근무하고 있었을 적에 네로에 대한 반란 용의자로 체포되어 저택과 재산이 몰수되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막센티우스의 여동생인 파우스타와 혼인을 맺었을 때에 라테라누스 가문의 저택을 손에 넣었다. 거기에서 파우스타가 살았기 때문에 ‘도무스 파우스타(파우스타의 집)’로 불리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훗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양도하였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건물이 양도한 날이 언제인가는 확실하지 않지만, 역사가들은 교황 멜키아데 시대인 313년경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멜티아데스 시대, 도나티스 논쟁의 종식을 위해서 교회회의가 열렸다. 이후, 라테라누스 가문의 소유였던 저택에 교황이 살게 되어, 라테라노 궁전(교황궁)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부지 내의 바실리카는 성당으로 사용되었지만, 후에 확장되어 로마 주교인 교황의 주교좌 성당이 되었다.

라테라노 대성당의 정식 헌당식은 324년 교황 실베스테르 1세에 의해 행해졌다. 동시에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서 가장 큰 성당이자 세계의 만물의 근원인 성당이라고 칭해져 성당 중의 성당으로서의 영예를 받았다. 그 후 10세기에 들어서면서 세례당이 신축된 것을 기념하여 교황 세르지오 3세가 이 성당을 세례자 요한에게 봉헌하였다. 12세기교황 루치오 2세는 성당과 궁전을 아울러 사도 요한에게 봉헌하였다. 그리하여 라테라노 대성당은 세례자 요한과 사도 요한, 두 요한을 기념하는 성당이 되었다.

멜티아데 이후의 교황들은 라테라노 궁전에서 살았지만, 14세기프랑스 출신의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 왕의 뜻에 따라 성좌를 프랑스 영내인 아비뇽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이전한 동안 라테라노 대성당과 궁전은 황폐해져 갔으며 1307년과 1361년에 두 번의 화재를 겪었다. 아비뇽 교황청은 수리 대금을 로마로 송금했지만, 예전의 모습 그대로의 위용을 발산하지는 못했다.

[편집] 라테라노 대성당의 보수 작업

오랫동안 아비뇽에 있던 교황청은 우여곡절을 거쳐 간신히 로마로 돌아왔지만, 라테라노 대성당과 궁전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기 때문에, 교황은 우선 테베레 강가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을 임시 거처로 삼았다. 나중에 교황의 거주지로서 성 베드로 대성당 근처에 교황궁이 건립되어 그 쪽으로 옮겨갔다. 이후, 역대 교황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바티칸 궁전에서 살고 있다.

16세기교황 식스토 5세는 몹시 황폐화 된 라테라노 대성당과 궁전을 수복하여 예전의 위용을 되살리려고 노력하였다. 재건 후, 원래 한 몸으로서 일체화하고 있던 라테라노 대성당과 라테라노 궁전은 분리되었다. 라테라노 궁전은 오늘날에는 교황청립 박물관으로서 고대 기독교 관련 전시품을 수집하고 있다. 식스토 5세는 총애하던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에게 수복 사업의 총지휘를 위임하였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프란체스코 보로미니로 하여금 성당 내부를 대대적으로 장식하도록 하였다. 18세기교황 클레멘스 12세는 외관 디자인을 공모하여 알레산드로 갈리에리의 안을 채용하였다. 현재 볼 수 있는 나란히 늘어서있는 성상들은 이 안에 따라서 1735년에 완성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외관 설치로 인해 교회 정면에 남아있던 바실리카 시절의 모습이 모두 철거되어 버리게 되었다.

라테라노 대성당 앞의 광장에는 이집트에서 운수해온 오벨리스크가 세워졌다. 이 오벨리스크는 원래 투트모스 3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로마 시대에 대경기장에 세우기 위해 옮겨져, 그 후 경기장이 없어지면서 라테라노 대성당 자리로 옮겨졌다.

[편집] 역사적 의의

라테라노 대성당은 제1차부터 제5차까지의 라테라노 공의회가 개최된 무대로 사용되었다.

1929년 2월 11일에는 교황 비오 11세의 전권 대리 카스팔리 추기경과 이탈리아 공화국의 베니토 무솔리니 수상 사이에 합의가 성립하여,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명칭은 조약이 조인된 라테라노 대성당과 라테라노 궁전의 명칭에서 유래한 라테라노 조약으로 명명되었다.

[편집] 바깥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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