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海外 聖地순례/Rome 이태리 歷觀 & 聖地순례

라테라노 대성당

영국신사77 2007. 10. 5. 19:41

      

                    라테라노  대성당 [San Giovanni in Laterano]

 

 

     요약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대성당.
  본문

  로마의 라테라노 궁전에 인접한 최초의 바실리카식 대성당이며 성조반니대성당이라고도 한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세웠다. 세례당()은 432∼440년에 건립한 것으로, 모자이크와 상감세공()으로 되어 있다. 내부는 1646∼1650년에 F.보로미니가 전면적으로 개장()하였다.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2003. 11. 9

                                             고린 3,9-17; 요한 2,13-22


 오늘 전 세계 교회는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경축합니다. 일반적으로 연중 주일들에서는 대축일이나 주님에 관한 축일 이외에는 연중 주일을 지내야 하는데,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오늘 주일에 지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로마에는 크기로 보아 4대 성당이 있는데, 베드로 대성당, 바오로 대성당, 라테라노 대성당, 성모 대성당 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11월 18일에 베드로 대성당과 바오로 대성당 봉헌일을 일반 기념일로 지내고, 8월 5일에는 성모 대성당 봉헌일도 일반 기념일로 지내는 반면, 라테라노 대성당 봉헌일은 축일로 지내고, 게다가 오늘의 경우처럼 주일에도 지냅니다. 그렇다면 라테라노 대성당이 베드로 대성당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이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설명이 필요합니다.


로마제국의 300년 박해를 끝낸 콘스탄틴 대제는 320년 로마 성벽 안쪽에 위치한 라테라노 언덕 위에 성당을 지어 로마의 주교에게 바쳤고 이 성당을 구세주께 봉헌하였습니다. 박해 동안 지하교회로 숨어 지내던 로마교회는 처음으로 공식적인 성당을 갖게 되었고, 이 성당을 로마주교좌 성당으로 삼았습니다. 베드로 성당과 성모성당과 바오로 성당들은 이보다 후대에 지어졌습니다. 이러한 전통에 따라 라테라노 대성당은 지금도 로마교회의 주교좌성당이고, 로마교구청이 라테라노 대성당 옆에 있습니다. 교황의 거처와 집무실이 베드로 대성당 옆에 있기는 하지만, 지금도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면,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착좌식을 거행함으로써 로마교회 주교의 역할을 공식적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주교는 수석 사도였던 베드로의 후계자이고, 지상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대리한다는 점에서 로마교구는 한 지역교회의 차원을 넘어 보편세계 교회와 관련이 있습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에 우리는 복음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구약의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야훼 하느님이 계시고, 그래서 성전에서만 제사를 지낼 수 있었습니다. 지방에서는 시나고가라고 하는 회당이 있었고, 그곳에서는 '말씀의 전례'만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해방절이나 오순절 등 명절에 예루살렘에 순례하여 성전에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예물을 바쳐 제사를 지내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사실 시편에는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이들의 기쁨을 노래하는 시편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시편 121편은, "주님의 집에 가자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 예루살렘아, 네 성문에 우리 발은 이미 서 있노라. 너 예루살렘은, 그 짜임새 멋지게 이룩된 도성, 지파들이, 주님의 지파들이 저기 올라가도다..." 하고 노래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신앙과 신학은 오늘 제1독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천사에게 이끌러 가서 본 성전에 관한 환시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성전 정문은 동쪽으로 나 있었고, 그 성전 동쪽 문턱에서 물이 나오는데, 그 물은 제단 남쪽으로 해서 성전 오른쪽 벽으로 뻗은 선을 타고 흘러내려갑니다. 그 물은 메마른 벌판을 적시고, 소금 바다인 사해로 들어가면서 그 짠 물이 단물로 변하고, 죽음의 곳에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에 따라 유대인들은 축제 때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성전을 즐겨 순례하였고, 외국에 사는 유대인들은 막대한 여행경비와 수고를 마다하고 성전을 순례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두고 들어야 합니다. 성전 앞마당에는 제사에 쓰일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 그리고 외국에서 온 순례자들에게 돈을 바꾸어주는 환전상들의 호객행위와 흥정으로 늘 떠들썩하였습니다. 돈과 장사가 이루어지는 곳에는 이해관계 때문에 거짓말과 바가지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피서철이나 단풍철에 벌어지는 무질서와 바가지를 생각하면 쉽게 연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모습에 분노하신 것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하고 외치시면서 상들을 뒤엎어버립니다.


성전은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고 기도하는 곳인데, 강도의 소굴처럼 만들고 있으니 말입니다. 항의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아주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예수님 당시에 있던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인 출신 헤로데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46년에 걸쳐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은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 사흘 안에 세우겠다고 하니 유대인들은 정신 나간 허풍이라고 코웃음 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제자들도 당시에는 예수님의 이 선언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 끝머리에서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뒤에야 이 말씀을 생각하고 비로소 성서의 말씀과 예수의 말씀을 믿게 되었다."라고 설명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외치신 이 선언의 궁극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의 중요성은 그곳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인데,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이시고, 에제키엘 서에 나오듯이, 그분을 통해 죽음이 생명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은 돌로 멋지게 지어진 건물 안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신학을 발전 시켜 오늘 제2독서에서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설파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하느님을 모시게 되었고, 성체를 영할 때 주님을 모시게 되니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라는 말을 할 때, 흔히 건물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본래의 뜻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모여 기도하고 전례를 거행하는 공동체를 뜻합니다.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한 성당 건물이 있다 하더라도 그곳에 기도와 전례를 거행하는 공동체가 없다면 교회의 의미는 상실됩니다. 이와는 달리 우리의 박해시대처럼, 초라한 초가집에서 비록 숨어서 소수의 신자들이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기도하던 곳은 훌륭한 교회가 됩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이 강론 후에 우리는 왜관수도원의 봉헌회 제1기 회원들의 종신봉헌식을 거행하게 됩니다. 첫 종신봉헌식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 수도원이 5년 전에 봉헌회를 시작하면서, "기도하고 일하라."라는 베네딕도회적 삶의 모토가 신자들에게 과연 얼마나 호소력이 있겠는가? 우리도 프란치스꼬회나 갈멜회의 제3회를 흉내 내고 따라가는 정도가 되지 않을까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 400여명의 회원들로 성장하였고, 다음 주일에는 제6기 회원들이 입회식을 갖게 됩니다. 우리의 놀라운 발전에 전 세계 베네딕도회 수도원들이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

사랑하는 제1기 봉헌회 여러분, 여러분의 종신봉헌과 오늘 축일과의 연관성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여러분 각자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은 하느님의 성전이며, 교회입니다. 그 성전이 아름답게 꾸며지려면 먼저 여러분 자신이 기도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 그리고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고 그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이런 노력을 게을리 할 때,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의 선행으로 여러분 자신이 아름답게 단장하면, 하느님께서 기꺼이 여러분이 안에 거처하실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 2,3-8에는 이와 연관된 신학을 다른 관점에서 개진합니다. "살아 있는 돌,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나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신 주님께로 나아가십시오. 여러분 자신도 살아 있는 돌로서 거룩한 제관이 되기 위해 영적인 집으로 세워져서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영적 희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바치도록 하십시오."라고 사도 베드로는 설파합니다.


돌로 지은 건축물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다. 건물에 가장 중요한 것은 건물을 지탱하는 주춧돌인데 주님이 바로 그 성전의 주춧돌이시고, 우리는 짓는데 사용될 살아 있는 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우리 모두는 하나의 성전이 되고, 우리 자신은 제관이 되고 동시에 제물이 된다는 신학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수도공동체와 봉헌회 여러분이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 그리스도를 주춧돌로 삼아 멋진 하느님의 거처, 성전이 되도록 합시다. 이처럼 봉헌회원 여러분과 수도 공동체는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사는 모습은 수도공동체에 힘이 되고, 여러분이 공동체를 위해 바치는 기도로써 수도공동체는 더욱 굳세어질 것입니다. 또한 우리 수도공동체도 여러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께서는 규칙서 머리말 끝에 이렇게 용기를 주십니다. "수도생활 또는 봉헌회 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니, 주님의 가르침에서 결코 떠나지 말고, 죽을 때까지 그분의 교훈을 항구히 지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수난에 인내로써 한몫 끼어 그분 나라의 동거인이 되도록 하자."


이어서 시작될 여러분의 종신 봉헌식은 이러한 여러분의 결심과 다짐을 드러내는 것이고, 하느님은 그런 여러분에게 축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아멘.

 

 

                                                                                                                                  출처: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