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靈論

7. 성령 충만을 받으라

영국신사77 2007. 8. 17. 22:13

성령 충만을 받으라  

 많은 사람이 행복한 삶, 축복 받는 삶을 원한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행복한 인간관계일 것이다. 

  
  아무리 돈이 많고 명예가 있어도 부부 관계가 삭막하면 세상 사는 재미가 없을 것이다. 다른 것이 다 갖추어져 있더라도 자녀가 속을 썩이면 매일 사는 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또 직장에 다니는 분은 상사나 부하직원이 말썽을 부리면 그것도 골치 아플 것이다.

 
 이러한 인간관계를 개선하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령 충만을 받는 길이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18절은 "성령 충만을 받으라"라고 명령한다. 

       엡 5:18~21,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성령 충만을 받으면 우리는 성령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자는 악을 미워하여 회개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세가 되어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누릴 수 있다. 

   "피차 복종하라"(21절)고 했을 때의 "복종하라"는 말은 "종처럼 섬기라," "군대의 하급자가 상급자를 섬기듯 섬기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섬김을 받으려 하기보다는 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들의 신앙은 영적인 것, 보이지 않는 것,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매일 접하는 인간관계는 등한시 하기 쉽다. 사실 지금까지의 교회 생활이 이렇게 되어왔다.

 하나님 나라 일, 교회 일 열심히 하기 위해 부부관계가 희생되고, 자녀 양육이 희생되고, 나아가서 직장이나 사업체에서의 인간관계는 관심권 밖이었다.

 영적인 일 교회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생각이나 행동이 얼마나 성경의 가르침과 거리가 먼 것인가를 절감하고 있다.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전도하고 열심히 예배만 드리면 다 잘되는 줄 알았는데, 제일 잘 안된 것이 바로 우리들이 매일 가까이 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삐걱 거리고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불신자는 물론,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신자들 중에서도 마지 못해 부부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신자들의 자녀가 말썽을 부리는 것이 다반사이다. 장로나 집사 사장이 종업원을 착취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집사나 장로 직원이 회사 공금을 들어 먹는 경우가 허다 하다.

 왜 그런가? 모두가 성령 충만을 받아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험하고 악하다. 세상은 이제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미국은 물론 한국 사회도 선진국형 범죄나 비윤리적인 생활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선진국에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성 해방의 물결이 밀어 닥쳐서 이전 혼전 성 관계는 평범한 사실이 되었고 십대 소녀가 임신한 채로 학교에 등교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내가 70년대 말에 미국에 왔을 때이다. 나는 미국인들이 "보이 프렌드," "걸 프렌드"라고 할 때 한국식으로 생각하여 서로 다방이나 식당에서 만나 데이트하는 정도의 관계로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았더니 그 정도가 아니라 같이 잠 자는 사이였다. 보통의 남녀라면 대충 한 번에 서너 명 정도의 보이 프렌드나 걸 프렌드와 사귄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 한국에도 일어나고 있다. 매스컴이 이런 현상을 부추긴다. 얼마 전에는 유부남과 유부녀의 불륜의 관계를 묘사한 TV극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요즈음 한국에도 애인이 몇 명 없으면 팔불출에 든다고 한다. 문제라도 보통 문제가 아니다.

 남녀간의 성 관계가 문란하면 자연히 술 취하고 방탕한 생활이 뒤 따른다. 그래서 사람들의 삶은 괘락과 방탕으로 접어든다.

 바울이 에베소서를 기록할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선남선녀들은 우상을 숭배하면서 술에 취하고 문란한 성 관계를 가지면서 방탕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술에 취해 방탕한 삶을 사는 것은 지혜 없는 자 즉 그리스도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의 삶이라고 책망한다. 이렇게 악이 성행할 때 지혜 있는 자 즉 그리스도인들은 세월을 아껴서 술 취하여 방탕한 생활을 하지 말고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권면한다.

 우리가 성령충만을 받지 않으면 이 험하고 악한 세상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의 성령 충만과 서신서의 성령 충만의 구분 

  우리가 유의해야 할 일은 비록 한 성령이시지만, 하시는 일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것을 구분해야 한다. 그런 것을 구분할 때 ,우리는 성령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져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먼저, 사도행전이 말하는 성령은 하나님 나라 일을 하기 위한 성령이다. 이런 성령은 불 같이, 소나기 같이 큰 능력으로 임한다. 이런 성령을 받으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좇고, 기사와 이적을 행하면서, 어떠한 환란이나 핍박도 두려워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증거한다.

  그러나 에베소서와 같이 서신서가 말하는 성령은 좀 성격이 다르다. 사도행전적인 성령이 불 같은 성령이라면, 서신서의 성령은 비둘기 같은 성령이다. 이것은 다른 성령이 아니라 한 성령의 다른 역사를 말한다.

 이러한 사실은 댐이 물에 비유될 수 있다. 댐에서 물이 방출되면 물이 흘러서 터빈을 돌려 전력을 생산한다. 이것은 순간적이다. 사도행전이 말하는 성령은 이런 성령이다.

 그러나 댐의 물을 방출하여 논에 물을 대어 곡식을 자라게 하는 물은 계속 되어야 한다. 열매는 어느 한 순간에 맺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영글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혼동하지 말아야 할 일은, 성령의 이 두 가지 사역 중 어느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무시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많은 경우 한쪽으로 치우쳐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받들지 못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물론 저것도 필요"하다.

 전투는 잘하지만 내무 규율을 잘 지키지 않는 군인, 내부 규율은 잘 지키지만 전투는 잘 못하는 군인은 유능한 군인이 아니다.

 신자도 마찬가지다다. 유능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기 위해서는 불 같은 성령도 필요하고,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비둘기 같은 성령도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본문에서 사용된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말을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성령 충만은 시제가 현재형이다. 현재형이란 말은 성령 충만을 한 번만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받으라는 말이다. "계속 성령충만을 받은 상태로 있어라"는 말이다.

 성품의 열매, 즉 인간관계의 열매는 어느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이루어 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도행전이 말하는 성령 충만은 시제가 과거형이다. 과거형은 순간적이고 즉흥적인 것을 말한다. 즉 댐에 물이 방출되면 순간적으로 전력이 발전되듯, 사도행전적인 성령충만은 순간적으로 나타나서 기사와 이적을 행하거나, 순간적으로 성령이 강하게 밀려와서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이나 평강을 체험하는 그런 성령 충만이다. 

  또한 사도행전의 성령 충만이나 서신서의 성령 충만을 영어로는 "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한글로는 "성령 충만"이라고 같은 말로 번역했지만, 헬라어 원어는 분명히 다른 단어이다. 사도행전의 성령 충만에 사용된 단어는 '핌플레미'이고, 에베소서에 사용된 단어는 '플레로오'이다.

 이처럼 원어는 단어도 다르고, 시제도 다름에도 불구하고, 영어나 한글 성경에 같은 단어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같은 의미로 이해하여 성경이 말하는 입체적인 측면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본문이 말하는 성령 충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곳은 사도행전 6장의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를"(3절) 뽑아 사도 대신 공궤할 사람들을 말할 때 사용된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이런 성령 충만은 어떤 사역을 하기 위한 성령 충만이 아니라, 어떤 사람의 인품이나 행동의 일부가 된 성령 충만을 말한다. 

  나는 흔히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는다. "성령 충만하다면서 남편에게 대하는 태도가 기껏 이 모양이냐?" "성령 충만하다면서 아내를 대하는 태도가 이 모양이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사를 받고 뜨거운 기쁨 체험을 한 것을 성령 충만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그런 체험을 하기만 하면 만사가 OK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도행전적인 성령 충만만 알고 있는 것이다.

 본문이 말하는 성령 충만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은사나 체험으로서의 성령 충만이 아니라, 어떤 사람의 성품의 일부가 된 성령 충만,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성령 충만을 말한다.

 이런 성령 충만을 받아야 피차 복종하여 원만하고 행복한 인간관계를 누릴 수 있다. 이런 성령 충만을 모르고, 사도행전적인 성령 충만만 아는 사람은 자기 은사나 자랑하고 자기 체험을 내세우다 보니, 피차 복종하기는커녕 오히려 말썽만 부린다.

 이런 사람은 은사 조금 있고 체험 조금 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쉽게 깔본다. 자기의 체험을 과신하여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자기의 체험을 성경보다 우위에 두기도 한다.

 이런 사람은 사도행전적인 성령 충만은 받았는지 모르지만, 본문이 말하는 성령 충만, 그 사람의 신앙인격의 열매를 이루는 성령 충만은 받지 못한 사람이다.

 우리는 신앙인격을 이루고,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이루는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술 취하여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게 된다. 세상 술에 취하면 방탕한 생활을 하지만,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피차에 복종하여 원만한 인간관계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새 술'인 성령 

  성령은 자주 새 술에 비유된다. 술 취한 모습과 성령의 새 술에 취한 모습 즉 성령 충만을 받은 외적인 모습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적인 모습은 비슷하지만, 알맹이는 판이하게 다르다. 어떤 점이 비슷하고 어떤 점이 다른가? 

  -말이 많아진다. 술 취한 사람 술 주정이 얼마나 심한가? 그러나 성령충만한 사람도 말이  많아진다. 자기가 체험한 예수를 증거하면서 밤이 지새는 줄 모른다. 또한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증거하기 바쁘다. 

 -노래가 나온다. 술 취한 사람의 입에서는 세상 노래가 끊임 없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성령충만을 받은 사람의 입술에는 하나님 찬양이 끊임 없이 흘러 나온다.

 오늘 본문에는 성령 충만의 결과 나타나는 현상을 두 가지로 대별하여 기록하는데 그 하나는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찬양과 감사의 노래를 드리는 모습이고, 또 하나는 피차 복종하여 이웃과의 인간 관계가 화목해지는 것이다.

 좌우간 성령 충만을 받으면 찬양이 그렇게 좋은 수가 없다. 이전에는 찬송가 한 두 곡만 불러도 지겨운데 성령 충만을 받으면 30분도 좋고 한 시간도 좋다. 죄를 용서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눈물을 흘리며 찬양하고, 기쁨과 평강을 주신 하나님이 너무나 좋아서 찬양을 드린다.

 나도 혼자 30분씩 어떤 때는 한 시간 이상 찬양을 드린다. 그리고 나면 영이 너무나 맑아지고, 심령에 기쁨이 넘친다.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다 보면 "이스라엘의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시 22:3)께서 우리를 위해 싸워 주시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고 병이 낫고 귀신이 쫓겨나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한다. 이처럼 성령 충만 받은 사람은 찬양을 즐긴다. 

  -담대해 진다. 평소에 말 없이 얌전한 사람도 술 취하면 담대해진다. 말하는 것이 담대하고 행동이 담대해 진다다. 그러나 성령의 새 술에 취한 사람은 예수를 담대하게 증거한다. 평소에는 다른 사람에게 예수 증거하기를 주저하던 사람도 성령 충만을 받으면 담대하게 예수를 증거한다. 

  -지배당한다. 술 취한 사람은 술에 지배당하고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성령에 지배당한다. 성령충만이란 말 자체가 성령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을 말한다. 

  -안주가 필요하다. 술 마시려면 안주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성령에 취하면 말씀을 좋아하고 사모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성령 충만의 결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께 찬양하고 피차에 복종하라고 기록한다. 그러나 병행구절인 골로새서 3장16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해지면 그 결과 하나님을 찬양하고 피차에 복종하라는 권면이 나온다. 이처럼 성령 충만은 곧 말씀 충만이다. 

  -마지막으로, 냄새가 난다. 술 취한 사람 옆에 가면 역겨운 냄새가 나지만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으로부터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난다.

 세상 술, 세상 욕심에 취한 사람에게서는 썩은 냄새가 난다. 자기만 알고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만 채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도 가까이 가기를 꺼린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가까이 하기를 원한다. 

 
                                                   성령 충만을 통한 인간관계의 회복 

 이처럼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서 악에서 떠나, 내가 종노릇하면서 이웃을 섬기려고 하기 때문에 모든 인간관계가 화목해진다.

 어떤 인간관계가 화목해지는가? 에베소서 5장 21절부터 6장9절까지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보면 3 가지 대표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실은 인간관계의 대 전제가 성령 충만을 받아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것이란 사실이다. 일방적인 강요가 아니라 피차 존경하여 복종할 때 바른 인간관계가 형성된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21절). 

  그리스도를 두려워하여 악을 미워하고 죄를 회개하여 서로 섬겨라는 말씀이다. 어떻게 섬기는가? 

    -먼저, 부부관계이다.

   성령 충만을 받은 부부관계는 어떤 관계가 되어야 하는가?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2, 25) 

 
아내는 주께 하듯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왜 복종해야 하는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 같이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되기 때문이다. 만일 교회가 그리스도 위에 군림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고 군림한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아내가 아니다.

  또한,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어떤 사랑인가? 남편의 유익을 위해 아내를 노리개감으로 사랑하는 것인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쳤듯, 남편도 희생적으로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이다. 

  성경 말씀은 이렇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결혼생활을 좀 하다 보면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기는커녕 군림하려고 한다. 요즈음은 나이 들어서 아내에게 복종하지 못하는 남편은 쫓겨난다고 한다. 정말 악한 세상이다.

마찬가지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기는커녕 구박하는 세상이다. 특히 지성인들 중에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들이 많다고 한다. 크리스천 가정에도 폭력이 덜 하지는 않다.

남편이 아내로부터 제일 듣고 싶어하는 말은 “당신 존경한다”는 말이고 아내가 제일 듣고 싶어하는 말은 “당신 예쁘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라고 한다. 그런데 삐거득 거리는 부부는 다른 말은 다해도 이 말만은 서로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아이쿠, 저 미련한 것을 존경해?”

 “아이쿠, 저 못난 것이 예뻐?”

  그러나 행해 보라.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반찬이 달라지고 용돈이 달라질 것이다. 사람이 변화될 것이다. 기적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이런 말은 하지 못하는 것은 서로를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 십자가에서 죽일 만큼 사랑하신 사랑의 대상이란 정체성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가정을 파괴하는 주무기는 이처럼 둘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여 사랑으로 순복하고, 순종하는 사랑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해결책을 다른 데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저 원수를 사랑할 기분이 생기지 않는다," "저 원수에게 순종할 기분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러분 '내 기분' 너무 의지하지 마시기 바란다. 내 기분에 속지 말라는 말이다. 말이나 행동을 하면 기분이 바뀌어 지는 경우가 많다. 

  -둘째 부모와 자녀 관계이다.

  자녀들은 먼저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친다(엡 6:1). 10계명 중 제5계명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다. 어떤 약속인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에게는 매사에 형통하고 장수하는 복을 주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못한 분은 즉시 회개하시기 바란다.

 그 다음에는 부모가 어떻게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어떻게 하는 것이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인가?

  첫째, 지나치게 자녀들을 윽박지르거나 자녀들에게 부모들의 주장을 강요하면 자녀가 노여워 한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교육 열이 지나쳐서 공부로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경우가 많다. 자녀들이 이구동성으로 부모들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공부해!"라는 말이라고 한다.

 다행히 잘 견디는 자녀들은 괜찮지만  부담을 견디지 못해 탈선하는 자녀들도 많다. 지나친 부담으로 자녀들을 노엽게 만든 것이다.

 둘째, 그 반대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지나치게 무관심할 때 자녀들을 노엽게 만든다. 어떤 사역자 부부에게 일어난 이야기이다. 이분들은 선교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어린 자녀들을 친척에게 맡기고 오지의 선교사로 떠났다. 부모의 애정에 굶주린 자녀 중 한 애가 고등학생이 되자 자기를 버리고 돌보지 않은 부모에 대한 증오심을 견디다 못해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말았다고 한다.

 지나친 관심도 자녀를 노엽게 하지만 지나친 무관심이나 방치도 자녀를 노엽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처럼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4절). 주의 훈계로 양육하는 것은 주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 부모처럼 자녀들의 교육에 열심인 부모들은 이 세상에서 드물 것이다. 그러나 열심인 만큼 효과적이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몇 해전 모 신문은, 미국내 교포 1.5세/2세들 중 약 70% 이상이 미 주류사회로의 진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연구 조사를 발표했다. 일반 대학생들의 취업률도 미국 학생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 보면 많은 한인 자녀들이 명문 대학을 졸업한 것을 본다. 그런데 이들이 부모들의 기대 만큼 미국의 주류 사회에 진출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설사 처음에 잘 진출했다 하더라도 몇 년을 못 넘기고 실업자가 되거나 자신의 전공을 못 살리고 부모의 소규모 자영업을 도와주고 있다고 한다.
그와 반면 소수의 유대인은 미국의 핵심분야-언론 금융, 소매업 등-를 잡고 미국을 좌지우지하고 있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유대인이 백인과 비슷하여 차별을 덜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백인은 아시아계보다 유대인을 더 차별한다고 한다. 

  그러면 무슨 차이가 있는가? 교육에 대한 유대인과 한국인의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 교육에는 3가지 영역이 있다. 가정교육과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이 있다. 그런데 한국 부모들은 가정교육이나 사회교육에는 무관심하고 학문적인 지식을 얻은 학교 교육에만 열심을 낸다, 과외를 시켜 점수를 올려서 좋은 대학에 입학은 시키는데 가치관 정립에 필요한 가정교육과 인간관계에 필요한 사회교육은 거의 제로라는 것이다.

 그 결과 가치관의 결핍이나 상실, 인격이 편협하고 옹졸하여 타민족과 원만하게 어울려야 하는 미국 주류 사회로의 진입에 한계를 느낀다는 것이다.

 소수의 유대인들이 그렇게 두각을 이 영재교육의 비결이라고 한다. 이들은 오전에는 종교교육에 치중하고 오후에만 일반과목을 공부하는데도 각 분야에서 탁월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들은 자녀들에게 모세 오경을 바탕으로 만든 탈무드로 철저한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 종교교육을 시켜 가치관을 형성시켜 준다. 탈무드를 통한 종교교육을 부모님들은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사항이다.

 유대인들이 탈무드로 가정교육을 시켜도 이 정도인데 탈무도 보다 훨씬 나은 성경을 가진 우리들이 주의 말씀으로 자녀들을 교육할 때 그 결과는 더욱 훌륭한 것이 될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자들에게 복을 내리겠다고 약속하셨는가? 일국의 왕이건 지도자건 어떤 사람이건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겠다고 약속하셨다.

자녀들이 좋은 학교에 다니고, 좋은 직장을 얻고, 좋은 배우자를 얻어 형통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가? 학교 교육 못 지 않게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자녀들을 양육"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로 자녀들도 잘되고, 잃어버린 부모의 권위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전과 종의 관계이다. 오늘날에는 직장의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피고용인은 고용주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눈가림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하듯 하지 말고 주께 하듯 하라고 기록한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고 사람들에게 하듯하지 말라 이는 각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엡 6:5-8) 

  여러분 과연 그렇게 하는가? 상전이 까다롭다고? 베드로전서 2장18절에는 까다로운 상전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명령한다. 주안에서 상사에게 순종하라.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임할 것이다.

 또한 고용주는 피고용인을 주를 섬기듯 하고 공갈하지 말라고 한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자기는 사업이 잘 되어서 벤츠 굴리고 대궐 같은 집에 살고 모든 일은 직원들에게 다 맡기고 골프나 치고 돌아다니면서, 직원들에게는 겨우 기본급만 지불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서 수시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잔업은 시키면서 잔업수당은 주지 않았다. 그러니 직원들이 목 구명이 포도청이라 울며 겨자먹기로 일을 하지만 속이 부글부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이야기를 들었더니 그 사람이 폭싹 망했다고 한다. 물론 이렇게 망하는 예는 드물겠지만 아무튼 고용주는 내 집에서 일하는 사람과 수고의 열매를 나누어 가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어떤 사업체를 보면 종업원들이 오래 못 불어 있고 계속 들락날락한다. 그런 경우 대부분은 주인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임금은 짜게 주고 일을 혹사를 지키니 붙어 있지 않는 것이다. 상전들도 주께 하듯 피고용인을 섬길 때 하나님의 칭찬이 임할 것이다. 

 
                                                      성령 충만은 영적 전투 승리의 길 

  에베소서는 교회에 관한 서신서이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교회의 구성원인 신자들이 모두 성령 충만을 받아서 피차 복종하고 섬기는 자세로 부부관계, 부모 자녀 관게 및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를 이룰 때, 교회를 파괴하려고 대적하는 마귀의 세력을 능히 대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에베소서 6장10절 이하에서 기록하고 있다.

 신자들이 치루는 싸움은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마귀의 세력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마귀는 그리스도의 몸 되신 교회를 깨기 위해 부부 관계를 갈라 놓는다. 서로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게 하여 가정을 파괴한다. 부부관계가 나빠지면 부모자녀 관계가 좋아질 리가 없다.

또한 고용주는 고용인을 착취하고 고용인은 고용주를 이용하게 하여 인간관계에 흠이 가게 한다. 마귀는 이렇게 인간관계를 파괴하여 긍극적으로는 주님의 몸 되신 교회를 파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성령 충만을 받아서 피차 복종해야 한다. 성령 충만 받아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써 서로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죄를 회개해야 한다.

 이럴 때 부부, 부모와 자녀 및 고용주와 피고용인가 서로 화평한 관계를 가지게 되어 주님의 몸되신 교회가 든든히 서 갈 것이다. *



                                                                                                                                                                출처:글로리아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