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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푸스 [Josephus, Flavius]

영국신사77 2007. 6. 11. 00:43
                         요세푸스 [Josephus, Flavius]
 
본명은 Joseph ben Matthias.

37/38 예루살렘~100경 로마.

유대인 제사장·학자·역사가.

 

                               개요

  66~70년에 일어난 유대인 반란과 고대 유대교의 역사에 대해서 중요한 책들을 썼다. 그 가운데 중요한 책은 〈유대 전쟁사 Bellum Judaicum〉(75~79)·〈유대 고대사 Antiquitates Judaicae〉(93)·〈아피온을 반박함 Contra Apionem〉 등이다.

 

                            초기생애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의 귀족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14세에 유대교 율법문제를 놓고 대제사장들에게 자문을 해줄 정도로 조숙했다고 한다. 16세에는 은수자 반누스와 함께 광야로 나가 3년간 지냈는데, 반누스는 그리스도가 태어날 즈음 유대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유대교 금욕주의의 한 분파에 속해 있었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바리사이파에 가입했다. 이것은 그가 훗날 로마인들에게 협력한 일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바리사이파는 〈신약성서〉에서 비판적으로 묘사되었지만, 대부분 대단히 경건한 유대인들이었으며, 엄격하게 토라를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는 정치적인 면에서는 무장한 애국주의 집단인 열심당과 같은 강력한 유대교 민족주의에 공감하지 않았으며, 유대인들이 종교적인 독립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로마의 통치에 순응하려고 했다. 64년 요세푸스는 로마의 수도에 갇혀 있던 수많은 유대인 동료 제사장들을 석방시키는 임무를 띠고 로마에 대사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네로 황제의 2번째 부인 포파이아 사비나에게 소개되었고, 그녀의 호의로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그는 로마를 방문하는 동안 그곳의 세련된 문화와 특히 강력한 군대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군사적인 업적

  그는 로마의 통치에 항거하는 대반란의 전야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66년 열광적인 열심당의 충동을 받은 유대인들은 로마 총독을 쫓아내고, 예루살렘에 혁명정부를 세웠다. 요세푸스는 많은 동료 제사장들과 함께 열심당에게 타협을 권고했으나 자신의 뜻과는 상관 없이 반란에 휩쓸려 들어갔다. 그는 온건한 입장을 취했으나 갈릴리 군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만일 신빙성이 없는 그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그곳에서 타협을 위해 노력했으나 기스칼라의 요한이 이끄는 지역 반란군의 강력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무장 반란이 무모한 일임을 알고 있었지만, 밀려오는 로마 대군을 막기 위해 북방의 성들을 요새화했다. 로마군은 훗날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의 지휘하에 67년 봄 갈릴리에 도착하여 북방 유대인들의 저항을 신속히 무너뜨렸다. 요세푸스는 47일 동안 요타파타 요새를 지키려고 애썼지만, 이 요새가 함락되자 40명의 결사대원과 함께 주변에 있는 동굴에 숨었다. 그곳에서 결사대원들은 투표 끝에 항복하기보다는 자결하기로 결정했다. 크게 당황한 요세푸스는 자살의 부도덕성을 주장하면서, 각 사람이 제비를 뽑아 순서대로 곁에 있는 사람을 죽이자고 제의했다. 그는 모든 궁리를 다하여 마지막 제비를 뽑았으며, 동굴에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남았을 때 상대방을 설득하여 로마군에 항복했다.

쇠사슬에 묶여 베스파시아누스 앞에 끌려간 요세푸스는 예언자 행세를 하면서 베스파시아누스가 곧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예언은 68년 네로가 죽음으로써 신뢰를 얻었다. 그는 이 계략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그뒤 2년간 로마군 막사에서 포로로 지냈다. 69년이 저물어갈 무렵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로 선포되었다. 요세푸스는 자신의 예언이 실현됨으로써 자유를 얻었다. 그때부터 그는 로마 편에 섰다. 이름을 플라비우스(베스파시아누스의 가문 이름)로 바꾸고, 후원자인 베스파시아누스를 따라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그곳에서 3번째 결혼을 했다(그의 첫번째 아내는 요타파타가 함락될 때 죽었고, 2번째 아내는 유대에서 그를 버렸음). 후에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이자 훗날 그를 계승하여 황제가 된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의 일원으로 70년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는 일에 가담했다. 그는 로마군과 반란군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려고 했으나, 그의 배교를 증오한 유대인들과 그를 믿지 못하는 로마군에게 배척을 받아 어떤 일도 이룰 수 없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된 뒤 요세푸스는 로마에 거주하면서 그곳에서 평생 황제의 후원을 받으며 글 쓰는 일에 전념했다.

 

                역사가로서의 요세푸스

  그는 첫번째 저서 〈유대 전쟁사〉를 75~79년 베스파시아누스의 치세 말기에 7권으로 나누어 썼다. 아람어로 쓴 원본은 없어졌지만, 그가 직접 지도하여 만든 그리스어 사본이 현존한다. 이 책에서 그는 BC 2세기 중반 이후의 유대인 역사를 간략히 설명한 다음 66~70년의 대반란을 상세히 기록한다. 그는 로마 군대의 막강한 힘을 강조했으며, 그가 이 책을 쓴 목적 가운데 하나는 반란을 계획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로마 군대에 저항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임을 주지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책은 화려한 이야기체로 되어 있으며,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상황을 묘사하는 부분은 특히 그러하다. 이 책에 쓰인 유창한 그리스어는 요세푸스의 나중 작품에 쓰인 서툰 용법과 대조되며, 그의 그리스어를 도와준 사람들의 영향을 잘 보여준다. 〈유대 전쟁사〉에서 요세푸스는 유대의 애국주의자들에게 극단적인 반감을 보이며, 그들의 운명에 매우 냉정한 태도를 취한다. 이 책은 유대인 반란에 관한 주요자료일 뿐 아니라 로마의 군사 전략과 병법을 상술한 것으로도 대단한 가치를 지닌다.

로마에서 요세푸스는 시민권과 연금을 받았다. 베스파시아누스·티투스·도미티아누스의 궁정에서 총애를 받는 신하였으며, 유대에 있는 면세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을 차지했다. 그는 3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크레타 출신의 귀족 상속녀와 결혼하여 자녀들에게 로마식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는 로마인의 관점에서 반란사를 썼기에 유대인들로부터 변절자이자 반역자로 미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유대교를 버리지 않았다. 그의 가장 위대한 작품 〈유대 고대사〉는 93년에 모두 20권으로 완성된 것으로서, 유대인 역사를 창조 때부터 66~70년의 반란 직전까지 기술하고 있다. 그는 헬레니즘 세계에 유대교를 호의적인 견지에서 소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이 책을 썼다. 그는 〈구약성서〉의 예언서들을 사실상 무시하고, 성서 이야기들을 각색하고, 유대교의 율법과 제도의 합리성을 강조함으로써 유대교에서 광신적 요소를 벗겨내어, 교양있고 합리적인 사람이 유대교에 관심을 갖도록 했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역사는 들쑥날쑥해서 당시 50대 중반이던 저자가 피로한 상태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가 아니었으면 상실되고 말았을 자료들이 책 전체에 보존되어 있으며, 특히 이 책은 제2공화정시대에 해당하는 유대인 역사에 대해서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유대 고대사〉 제18권은 그리스도에 관한 유명한 언급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본문의 내용을 요세푸스가 썼을 가능성은 없고, 후대 그리스도교 필사자가 원래의 내용에 첨가(만일 창안이 아니라면)한 것임이 틀림없다. 〈유대 고대사〉의 부록인 〈생애 Vita〉는 자서전이라기보다는 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가 갈릴리에서 취한 행위를 변명하는 내용이다. 그는 자신이 그 반란에 책임이 있다는 티베리아스의 유스투스의 고소에 맞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그 글을 썼다. 그는 자신을 변호하면서 이 글보다 훨씬 신빙성 있는 〈유대 전쟁사〉에서 진술한 내용과 모순되게 자신이 일관된 로마 지지자였으며, 반란이 일어난 처음 순간부터 유대인들의 반역자였다고 진술했다. 요세푸스가 누구인가는 일반적으로 〈아피온을 반박함〉(원래의 제목은 〈유대인들의 고대사에 관해서〉, 또는 〈그리스인들을 반박하며〉였음)으로 알려진 책에서 훨씬 더 명백하게 드러난다. 2권으로 된 이 책 가운데 첫번째 책은 헬레니즘 저자들이 셈족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유대인들에게 가한 비난을 반박하며, 2번째 책은 유대교가 헬레니즘에 비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주장을 제시하면서 요세푸스 자신이 유대 종교와 문화에 기여한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아피온을 반박함〉에는 아그리파 2세의 죽음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 점으로 보아 요세푸스는 2세기까지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아그리파가 죽은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며, 요세푸스는 그보다 이른 시기인 93년 이후의 도미티아누스 치하에서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평가

  요세푸스는 역사가로서 대부분의 고대 저자들이 범한 오류들을 그대로 범하고 있다. 그의 분석들은 피상적이며 연대기에는 오류가 있고 사실들은 과장되어 있으며, 그의 연설에는 꾸민 흔적이 있다. 특히 자신의 명예가 걸려 있는 대목에서는 편향적인 태도를 취한다. 만일 그의 책에 씌어진 그리스어가 실제로 그가 쓴 것이라면, 종종 그의 이름에 붙는 '그리스의 리비우스'(the Greek Livy)라는 별명은 그에게 적절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유대교 전통과 헬레니즘 전통을 종합하고, 로마라는 세속 세계와 성서라는 종교적 유산을 연관지었으며, 로마 속주민들의 심정을 여러 모로 꿰뚫어 보았다. 인격적인 면에서 요세푸스는 허황되고 냉정하며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강자에게 빌붙는 태도 때문에 동족들의 경멸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바리사이파 신앙에 충실한 사람이었으며, 비록 민족을 위해 순교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한 인물이었다.

 

                                                                           Ga. Poole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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