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그룬트비히(N. Grundtvig)

영국신사77 2007. 6. 16. 12:53
                                   그룬트비히 (N. Grundtvig)

 

                                                                                                                               hijecker79 (2003-11-09 16:50)

 
 
 
 덴마크의 시인·종교가·역사가.

국적 : 덴마크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덴마크 우드비
주요작품 : 《북구 신화》(1808)


 우드비 출생. 루터교회 목사의 아들로, 덴마크의 부흥에 기여한 농민 교육자이다. 코펜하겐대학교를 졸업한 후 가정교사로 있으면서 《북구 신화(北歐神話) Nordens mythologi》(1808)를 써서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영국으로 여행하여 영국 국민의 자유와 실제 생활에 깊은 감명을 느끼게 되면서 라틴적·인문주의적 학교교육을 청소년들의 생명을 위축시키는 '죽음의 교육'이라고 공격하고, 일하는 국민을 위한 '생활학교'를 주장하여, 이를 즉각 설립하라고 나라에 호소하였다.

 조국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옛부터 전하는 민족정신과 그리스도교를 바탕으로 하여 국민부흥을 위하여 평생을 바쳤다. 특히 1864년의 패전 후 그의 제창으로 전국에 설립된 국민고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농촌 청년은, 패전에 잇따른 농업 위기를 극복하여 세계적 농업국, 평화적인 문화국가 건설의 기초를 이룩하였다.

 국부(國父)로서 존경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전집 10권이 있다.

 

 

                    

                                   그룬트비히(N. Grundtvig)

 

 

                                                                                                                             viadolorosa (2003-11-11 00:31)

 

 덴마크의 교육가입니다.

 국민고등학교라는 새로운 교육 이념을 만들고 체계화시킨 것은 시인이자 신학자, 교육가였던 니콜라이 그룬트비히(Nikolai Grundtvig)였다. 덴마크 국민들은 달가스와 함께 그룬트비히를 덴마크를 부활시킨 국부로 추앙하고 있다. 1938년에는 덴마크 국민들이 기증한 벽돌을 모아 기념교회까지 세울 정도로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지만 생전에는 기존 제도, 특히 교회와 많은 충돌을 일으키며 삐딱한 '재야인사' 취급을 받았다.

 1803년 코펜하겐대학에서 신학 학위를 받은 그룬트비히는 북유럽의 신화들을 연구하며 덴마크의 역사를 천착하기 시작한다. 그의 연구는 1808년 <북구신화> 1812년 <세계사> 등의 집필로 이어졌다. 그의 책들의 근저에는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자'는 사상이 깔려 있었다.

 신과 인간의 직접적인 만남을 주장했던 루터의 종교개혁 이념을 회복하자는 그의 주장은, 덴마크 교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이성주의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가 철학이 되면서 일반 국민들이 또다시 종교에서 소외당하고 있다며 당시의 현실을 비판했던 그는, 어쨌든 비주류였고 이 때문에 그룬트비히는 목회자이면서도 자신의 교회를 가질 수 없었다.

 그의 다음 비판은, 귀족과 부유층 자제들을 상대로 행해지던 이른바 엘리트 교육을 향했다. 당시의 특권층 교육에서는 학술어로서도 기능을 상실하고 과시적 기능만 남은 라틴어 고전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중세를 한참 넘긴 19세기에 벌어지고 있는 이같은 시대착오에 대해, 그룬트비히가 덴마크어와 덴마크의 역사에 대한 교육을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룬트비히의 교육이념은 "삶을 위한 학교"라는 말로 요약된다. 물론 국민고등학교에서 가르쳤던 내용들도 그렇지만, 이런 교육이념이 가장 잘 반영된 것은 바로 교육방식이었다. 이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들은 같이 살면서 같이 놀고, 같이 일했다. 수업 역시 교사의 강의보다는, 세미나나 그룹을 지어 역사와 사회에 관해 자유로운 토론과 논쟁을 벌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미래의 덴마크를 이끌어갈 젊은이들은 민주적인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방법들을 몸으로 익힐 수 있었다.

 입학에 필요한 전제조건은 하나도 없었다. 특정 계층만을 상대로 했던 엘리트 교육과는 달리, 전계층에 국민고등학교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입학이 자유로운 만큼 졸업 시험 같은 제도도 없었다. 수업 참여 역시 전적으로 학생들의 자율에 맡겼다. 모든 것이 학생들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는 환경에서, 젊은이들은 책임감과 자립을 배워나갔던 것이다.

 패전으로 국가 전체가 실의에 빠져들고 있을 때, 이처럼 건강한 젊은이들을 길러내는 국민고등학교는 나라에 희망과 활력을 불어넣는 요소였다. 그러나 1864년의 패전 뒤, 약 10년이 지난 1870년대 중반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세계적으로 곡물 가격이 급락하면서 덴마크 경제는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패전에 이어 산업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던 농업 부분이 입게 될 타격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형국이었다.

▣ "20세기 덴마크 지도자는 모두 국민고등학교 출신"

 이 때 덴마크의 농민들이 선택한 생존 전략은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탁월한 것이었다. 그들은 값이 떨어진 곡물들을 수출하는 대신, 사료로 전환해 버터와 계란, 베이컨 등 부가가치가 붙는 농업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데 사용했다. 이와 함께 각종 농업협동조합들을 속속 결성하기 시작했다. 1882년 우유조합이라고도 하는 낙농협동조합을 필두로,1887년 도축협동조합이 생겨났고, 사료와 비료, 영농자재를 공동 구입하는 구매협동조합, 계란생산자협동조합 등도 조직됐다. 마침 180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영국이 안정적인 농산물 수출시장으로 등장하면서 덴마크 농민들의 실험은 큰 성공을 거두게 됐다.

 같이 자고 먹으면서, 토론과 논쟁으로 공동의 합의를 끌어내는 훈련을 받은 젊은 농민들이, 협동조합운동이 성공하는 데 인적 기반이 된 것은 물론이다. 젊은 농민들에게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고 가르친 국민고등학교의 교육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처음 설립된 지 불과 20여 년 만에 국민고등학교가 이루어낸 것은, 민족의 부흥과 농업의 부활, 그리고 수많은 인재들의 배출이었다. 20세기 덴마크를 이끈 지도자들은 모두 국민고등학교를 거쳤다는 말이 생겼을 정도로 이 학교의 졸업생들은 사회 곳곳에서 자기 몫을 충실히 해냈다.
 
 소설 <정복자 펠레>의 작가인 넥쇠 역시 국민고등학교가 낳은 인물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석공의 아들로 태어난 넥쇠는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고향인 본홀름섬에서 목동, 양화점 직공 등으로 일하면서, 일이 없는 여름과 겨울철을 이용해 국민고등학교에 다닌 것이 그가 받은 교육의 전부였다. 국민고등학교 출신의 다른 문인이나 학자들처럼, 그 역시 국민고등학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은혜에 보답했다.

 초기의 학생들은 주로 농민 출신의 젊은이들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이름 그대로 전계층이 참가하는 명실상부한 '국민'고등학교가 됐다. 또 주변국에도 소개돼, 스웨덴·노르웨이 등에서도 국민고등학교가 설립됐다. 직접 덴마크의 국민고등학교를 찾는 외국인들도 상당수여서 현재 전체 학생의 약 1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국민고등학교 운동의 열기는 1950년대를 지나면서 다소 수그러들었지만 아직도 덴마크 전역에 약 70개 정도가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연간 수강생은 약 8,500여 명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헬베시우스는 "교육이 오늘의 우리를 만들었다"는 말을 남겼다. 덴마크 사람들은 이 말을 이렇게 바꿔 사용하고 있다. "국민고등학교가 오늘의 덴마크를 만들었다."
 
 

                                                                                                  출처 : http://kmarin.cafe24.com/best1_view.html?uid=258

 

                                                                                                                                                     출처:네이버 지식 인

 

 

 

 

                                  그룬트비히를 돌아보며

 

                                                                                               마종삼목사(전주조림교회)

 
 
  그룬트비히는 덴마크의 뛰어난 19세기 인물이다. 전 국토를 개간하고 산림화하여 덴마크의 국부로 칭송되는 달가스의 스승이기도 하다. 그는 영향력이 적은 제도권 밖의 목사였다.

 그는 교회당조차 얻지 못했었다. 신학적으로는 특권종교귀족에게 저항하던 루터를 좋아했다. 또한 그는 엘리트 교육에 대한 개혁자였다. 소수특권층을 위한 엘리트교육은 서민들에게 접근 불가했었다.

 비현실적이면서도 과시적인 교육과정을 개편하여 고전과 라틴어를 탈피했다. 누구에게나 접근할 수 있도록 입학과 졸업의 까다로운 조건들을 제거했다.

 심지어는 수업참여에 있어서도 학생들의 자율에 맡겨졌다. 교육의 주체가 학생이면서도, 학생 스스로 책임감자립을 배울 수 있게 해주었다.

 따라서 강의보다는 자유토론논쟁세미나를 통해, 민주적 의사결정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게 했다. 이러한 작업은 국가경제위기에서, 많은 협동조합의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이상적인 교육보다는 사회개혁과 사회부흥의 현실적인 영향력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삶을 위한 학교”를 이루었던 것이다.

 

      마태복음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러나 정작 학교다운 학교 건물은 20년 후에 얻게 되었고, 교회당은 20세기 초에 와서야 국민들이 그를 기념하여 세우게 되었다.

 

 

                                                                                                                                                      출처:네이버 지식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