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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영국신사77 2007. 6. 5. 19:16

 

                         그리스 데살로니카

 

 

 

 

 

 

 

 

  그리스에서 아테네 다음가는 인구 100만명의 제 2의 도시이고,그리스로 출입국 하는 사람들은 이곳을 지나가게 되며 테르마이코스 만 이라는 양항이 있어 상공업의 중심지로도 번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통의 요지외에 문화의 도시, 교육의 도시 입니다. 네아폴리스에서 남서쪽으로 163Km 떨어진 해안에 있는 그리스 최대 항구도시입니다.

  기원전 315년경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장수였던 카산데르가 대왕의 이복 누이동생이며 자기아내인 데살로니카의 이름을 따서 세운 도시이며, 당시 데살로니카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리스인이었고 상당수의 유대인, 로마인, 그 외 다른 민족들이 있었습니다.

7세기에 동로마 제국이 이집트와 시리아를 빼앗은 후 데살로니카는 동로마제국에서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다음가는 대도시로 번창했고, 1430년 이후 거의 500년 동안이나 터어키 지배하에 있다가 1912년에 와서야 그리스인들이 다시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영화제로도 유명한데 이번 11월 17일부터 26일까지 열린 제47회 그리스 테살로니카 국제영화제에서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이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2차 전도여행 때 이 곳에서 3주간 머물면서 그리스에 두번째 교회를 세우셨다고 합니다.

* 관련 성서 구절 (사도행전 17장 1~9절)

바오로 일행은 암피폴리스와 아폴로니아를 거쳐 테살로니카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유다인들의 회당이 있었다. 바오로는 늘 하던 대로 유다인들을 찾아가 세 안식일에 걸쳐 성경을 가지고 그들과 토론하였다.

그는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신 다음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했음을 설명하고 증명하면서,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고 있는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 감복하여 바오로와 실라스를 따르게 되었다. 또한 하느님을 섬기는 그리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도 그렇게 하였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시기하여 거리의 불량배들을 데려다가 군중을 선동하게 하여 그 도시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러면서 야손의 집으로 몰려가 바오로 일행을 백성 앞으로 끌어내려고 그들을 찾았다.

그러나 그들을 찾아내지 못하자 야손과 몇몇 형제를 시 당국자들에게 끌고 가서 외쳐 댔다. “온 세상에 소란을 일으키던 자들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야손이 그자들을 자기 집에 맞아들였습니다. 그자들은 모두 예수라는 또 다른 임금이 있다고 말하면서 황제의 법령들을 어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군중과 또 이 말을 듣는 시 당국자들을 자극하였다. 그러나 시 당국자들은 야손과 나머지 사람들에게서 보석금을 받고 풀어 주었다

 

 

 

데살로니가의 역사(서진교 객원연구원) #5 | 유럽[獨佛英기타]
2007.05.26 13:52

제        목   데살로니가의 역사(서진교 객원연구원)
파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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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살로니가 항구 전경*

데살로니가의 역사

1. 데살로니가의 위치와 도시적인 특징
  데살로니가는 에게해의 북서쪽에 가까운 테르마이코스 만에 위치한 중요한 국제 항구 도시로서, 배들이 정박하기에 좋은 여건을 갖춘 항구였다. 사도 바울 당시 데살로니아는 로마 령이었던 마케도니아 속주의 수도로서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었다. 이 도시는 매우 중요한 항구 도시였으며, 많은 이교도들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따라서 데살로니가는 아가야와, 아시아의 중심지였던 고린도, 그리고 에베소와 함께 큰 항구로 각광받고 있었다.
  또한 데살로니가는 로마로부터 비잔티움(현재의 이스탄불)을 거쳐 동방으로 가는 에그나티안 도로에 속해 있었다. 이로 인해 데살로니가는 육로와 해로를 통해서 주변의 중요한 도시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도시는 바울 당시에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도시 중에 하나였으며, 행정상으로나 전략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이로 인해 이 도시는 바울 선교 활동을 위한 훌륭한 본거지가 되었다.
  바울과 실라는 제 2차 전도 여행 중에 빌립보에서 추방당한 후에(행 16:11-40) 에그나티안 도로를 따라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경유하여 데살로니가로 갔다. 이 여행은 대략 160km에 달하는 긴 여행이었다. 신약 시대에 이 도시의 인구는 어림잡아 20만 명에 육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민의 대부분은 헬라인들이었으며, 상당수의 로마인과 동방인과 유대인도 살고 있었다(유대인은 약 2만 명이었다). 고대에 상업이 번창한 곳에는 대부분 유대 상인들이 있었다. 데살로니가에 있었던 유대인 회당은 영향력이 있었으며, 바울이 그 곳에 갔을 때에는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인들도 있었다(행 17:4). 데살로니가에는 수많은 헬라의 종교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도덕적으로 매우 문란한 일들을 했다. 이로 인해 환멸을 느낀 헬라인들과 로마인들 중에는 도덕적으로 수준이 높은 유대교에 매료되어 회당으로 몰려오기도 했다.

2. 데살로니가의 역사
  스트라보(Strabo)에 의하면, 데살로니가는 B. C. 315년에 알렉산더 대왕 휘하의 장군이었던 카산더에 의해 세워졌다. 카산더는 후에 알렉산더 대왕의 의붓 자매였던 아내(데살로니가)의 이름을 따라 이 곳을 "데살로니가"로 부르게 하였다. 이 신설 도시에 식민된 자들은 카산더에 의해 파괴된 지역 내의 약 26개 성의 거민들이었다. 그 성읍들 중에는 데살로니가로부터 동남방 11.2km 가량 떨어진 곳의 데르마도 들어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데살로니가의 이전 명칭이 데르마였다는  스트라보의 대충적인 진술을 분명히 설명해준다.
  주전 167년 마게도냐가 네개의 구역으로 분할되었을 때 데살로니가는 스트리온강에서 악시우스강까지 이르는 제2구역의 수도가 되었다. 주전 148년에 마게도냐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으며 데살로니가는 주의 수도가 되었고 주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후 주전 42년에 데살로니가는 안토니와 옥타비아누스를 도운 일로 인해 "자유 도시"가 되었다. 로마는 데살로니가를 매우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통치했으며, 로마 총독이 부임해 있기는 했지만 군대를 주둔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는 다른 헬라 도시들처럼 몇 명의 관원들과, 원로원, 그리고 민회 등을 통해서 자치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 곳은 세계 1차 대전 중에 연합군이 주둔했으며, 2차 대전 중에는 나치가 이 곳에 있는 6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 또는 추방하기도 했다. 현재 데살로니가는 약 30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으며, 살로니카(Salonica)또는 데살로니키(Thessaoniki)라고 부르고 있다.

3. 현존 건물
  데살로니가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북쪽과 동쪽 성벽은 현재도 남아있다. 현존하는 성벽은 비잔틴시대의 것이지만 적어도 일부는 보다 고대에 축조된 것이다. 비아 에그티나(Via Egnatia)는 데살로니가를 동남에서 서북쪽으로 관통하고 있었다. 이 길은 나중에 바르다르강(막시우스강)의 명칭을 따서 바르다르가도라고 불렀으나 현재는 다시 고대 명칭을 되찾았다.
  비아 에그나티아에는 두 개의 로마식 아치가 걸려 있었는데 하나는 그 도시의 서쪽 입구에 세워져 있던 것으로 1879년 파괴당할 때까지 바르다르문으로 알려져 있었고, 다른 하나는 주후 297년 페르시아인들을 물리친 갈레리우스 황제의 개선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갈레리우스 개선문이다. 후자의 북쪽에 있는 둥근 로마식 건물은 아마 그와 동시대에 건축된 것 같은데 후에 성 게오르기우스 교회로 바뀌었다. 광장은 아마 비아 에그나티아의 북쪽, 즉 이 도시 한복판에 있었을 것이다. 경기장은 동남쪽 성벽 가까이에 있었다.
  현재 대영 박물관에 있는 바르다르문에서 채취한 비문과 데살로니가에서 발견된 수개의 다른 비문에는 폴리타르크(Politarch: 도시의 최고 행정관)로 불리는 관리들이 언급되고 있다.
바르다문에 새겨진 글의 연대는 아마 주전 30에서 주후 143년 사이일 것이다. 다른 비문중의 하나는 아우구스투스 치세시의 것이다. 멀리 떨어진 촌락에서 데살로니가로 운반된 또 다른 비문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시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비문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행17:6에서는 폴리타르크 라는 칭호가 데살로니가 성의 통치권자들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고 있는데 이 비문 발견 이전에는 그 단어를 달리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4. 최근 고고학적 연구
  데살로니가에서는 고고학적 조사로 로마시대의 공중집회소가 나타났는데, 그 집회소에는 적어도 가로 100m, 세로 64m 이상 되는 넓은 광장이 딸려 있고 바닥은 포장이 되어 있었다. 집회소 동쪽 끝에는 2중으로 된 주랑이 있으며 그 주랑에는 고린도식의 원들이 있고 기하학적으로 도안된 모자이크 바닥은 잘 보존되어 있다. 집회소의 남쪽 경계에도 한 주랑이 있는데, 그 주랑은 많은 방들을 숨기고 있는 지하복도가 떠받치고 있으며 그 방들에는 기독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집회소 건물의 연대는 1세기나 2 세기 초쯤 된다. 그 후 3세기 말경 집회소 동쪽 주랑 가까이에는 로마식 극장이 세워졌다. 여섯 줄이 좌석이 현재도 반월형을 그리며 남아 있고, 그 좌석들 아래에는 궁형 천장의 휴게실들이 있으며 이 휴게실 가까이 가려면 거대한 출입구를 거쳐 극장으로부터 내려가야 한다.
  동편으로 더 가면 주후 298-311년간 로마제국을 분할 통치한 갈레리우스 황제의 궁전터가 말끔히 청소되어 있는데 거기서는 열주랑이 도열한 대형 정원과 그에 인접한 8각 건물이 나타난다. 각 면마다 후진이 달린 이 팔각건물은 얼마 안 가서 교회가 되었고 거기에는 세례용 부속실이 있다.
  또 그 도시 교외에 있는 공동묘지와 중심부에 있는 여러 가지 건물자리에서 다른 여러 가지 물건이 발견되었다. 구약과 히브리 문구를 희랍어로 번역함과 더불어 최근에 연구된 비문은 데살로니가에 사마리아인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전해지고 있다. 

 

 

제        목   데살로니카 화이트 타워(현종필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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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살로니카 화이트 타워*

수도 아테네 다음 가는 그리스 제2의 도시는 북부 마케도니아 지역의 중심지인 데살로니카이다. 데살로니카는 철도를 이용하여 그리스로 출입국하는 사람은 지나는 교통의 요지이며  북부 그리스를 여행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카발라나 터키 국경을 연결시켜주는 통로이기도 하다.
현재의 인구는 교외까지 포함하면 약 70만 명이며 쎄르마이코스 만이라는 좋은 항구가 있어 상공업의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는 도시이다.

그러나 그 분위기는 정말 여유롭다. 상공업 도시에 있을 법한 삭막한 분위기는 조금도 없다. 거리에서 나무와 꽃을 자주 볼 수 있고, 현대적인 건물에 섞여 고대 비잔틴 시대의 건물이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데살로니카는 1921년, 그리스에 통합될 때까지 수없이 많은 역사의 파란을 겪었었는데 그 때문에 다양한 문화가 뒤섞여 이곳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아름다운 도시이지만 역사적 아픔을 품고 말없이 증언하고 있는 것이 화이트타워라할 수 있다. 화이트타워는 데살로니케의 상징이 될 만큼 규모로나 역사적 의미로나 중요한 건물이다.

  니끼스 거리를 오른쪽으로 보면서 나아가면 높이 30미터 정도의 화이트 타워에 도착한다. 15세기에 베네치아인이 세운 방벽의 일부로, 눈에 띄기 때문에 금방 찾을 수 있다. 18-19세기의 터키 시대에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당시 이곳에서는 대량 학살이 자행되어서 ‘피로 물든 탑’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후에 탑의 표면은 하얗게 칠해지고, 주위가 공원으로 정비되어 과거를 묻어 둔 채 시민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주변 공원에는 거대한 기마상이 있는데 알렉산더 대왕을 모델로 한 것이다. 탑에서 비스듬히 건너편에 있는 에쓰니끼스 아미니스 거리 Ethnikis

 

 

제        목   데살로니카 디미트리우스 교회(현종필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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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살로니가 디미트리우스 교회*


                             *데살로니가 디미트리우스 교회의 지하층 부분.

                           서기 410년대에 건축된 원형이 많이 보존되어 있다.*


데살로니카와 베레아에서 바울과 관련되는 동시대의 유적은 거의 없다. 그러나 데살로니카에서 찾아볼 만한 곳 중에 하나가 이 지역 교회 중 가장 규모가 큰 디미트리우스 교회일 것이다. 성 디미트리우스는 303년 디오클레시아누스 치세 때 아니면 306년 막시미아누스 치세 때 헝가리 시르미움에서 순교한 분인데, 어쩌다 데살로니카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 5세기에 지은 성당은 7세기에 재건되었으나 이것도 1917년 화재로 타버리고 1948년 지금의 성당이 재건되었다.

이 바실리카풍의 교회는 크게 로마식 집회장소용 홀과 세례 욕조가 있는 유적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특히 세례터는 성 디미트리우스가 갇혀 있다가 순교했던 장소 위에 만들었다. 전통적으로 그의 제자 네스토가 이교도 리아에우스와 싸웠다가 패전했던 AD 303년에 이 곳에 묻혔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성전은 밀란의 종교적 관용에 관한 포고가 있었던 313년후에 작은 기도처소로 처음에는 설립되었었다. 백년이 지난후에 레온티우스, 일라리쿰의 주교 때에 큰 세 개의 측랑으로 이루어진 성전으로 같은 장소에 더 크게 지어지게 된다. 이 당시 성전 제단 밑으로 성 디미트리우스가 순교했던 장소와 동일한 세례욕조가 있었다.

<건축양식>

교회는 나르텍스와 십자형교회의 뒷자석이 높은 바실리카풍으로 다섯 개의 측랑이 있다. 우리는 교회가 한 개의 안뜰만 갖고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나르텍스가는 입구는 안마당 안있는 두 개의 문으로 통과하게 되어있다. 두 개문을 통과하여 나르텍스로 들어가면 교회의 서쪽벽을 따라 북과 남으로 가는 통로가 나온다. 나르텍스는 교회보다 좁고 짧은 폭으로 되어있다. 왜냐하면 북쪽구역이 계단으로 할애되었기 때문이다.
네줄로 된 열주들은 하나의 중심을 두고 회중석사이로 양쪽에 두 개씩 나있는 다섯 개의 통로를 나누어주고 있다. 그 원주기둥들은 바실리카고유양식을 기초하여 다양한 변화를 주어 장식되었다. 교회측면 넘어의 교차랑 설계는 두 개의 날개처럼 되어있는 모양이다. 중앙의 지성소로 측면은 날개로 구성되어 있다.
지성소는 크고 밝은 다섯 개 창문을 통해 밝게 비추어주고. 묘지와는 높은 칸막이로 나뉘어져 있다. 이것의 중앙에는 성찬대가 있고 십자가 모양으로 움푹팬 바로 아래, 엔카니온, 석관 형태의 대리석 궤로 이루어진다. 건조된 혈액의 작은 유리병이 이 대리석 궤 안에서 발견되었다.

이 교회는 독창적으로 지붕을 가로질러 교차하는 빔이 대들보로 지붕을 지탱하고 있다.
회중석 위를 덮고 있는 지붕은 다른 지붕보다 더 높으며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다. 그 중심부 구역 또한 십자형의 날개로 일정한 간격을 지붕과 유지하고 있다. 대리석 장식이 디미트리우스 교회 전체를 형성하며 방사형창이 있다. 그리고 원주들과 제단, 감실등의 사이를 석판들과 대리석판으로 덮어놓았다.
독특한 점은 회중석과 나르텍스부분에 대리석장식을 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5세기의 바실리카 성전의 형태에 속하는 모습으로 동쪽 벽에는 스카이로스 석판장식이 북쪽에는 트라이빌론 장식이 되어있으며 각각 그들의 틈에 한 줄로 기도손모양 장식이 되어있다.
이 교회의 주요한 특징은 초기로마건축양식과 5세기 바실리카풍 양식을 한쌍으로 잘 어울리도록 배열하였다는 것이다.

<누가 스판티누스의 무덤>
교회 본당 회중석의 북서쪽 모퉁이, 문설주와 열주의 첫 번째 기둥사이, 이탈리아에서 고안 되어진 듯한 기념묘가 존재한다.
이것은 1481년 교회에 사적으로 안치하도록 허가를 받은 부요한 데살로니가 귀족 누가 스판티누스의 것이다.

<회화장식>
이 교회에 유명한 모자이크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나 작은 북쪽 열주에 서쪽면을 장식했던 모든 모자이크들이 1917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교회에 남아 있는 무덤에서는 단지11개의 모자이크가 나왔고 5세기-9세기의 연대에 속한다.
그들은 노아와 두 개의 지성소 문설주, 홀과 나뉜 동쪽 파샤드의 벽에서 붙여진 것이다. 남쪽  통로 내부의 서쪽 벽의 상단에 성 데메트리우스가 기도하는 형태를 낮은 받침대 위에 초상화를 새겨져 있다.
그의 손바닥은 금 모자이크 세공으로 덮여있고 화가가 오래된 독실한 성인의 아이콘을 모방하는 것임을 표시하고 있다. 오른쪽 여자는 아이를 그에게 건네고 있으며 두 번째 아이의 발이 왼쪽에 보이는 동안에 무대는 문 한쌍과 성 데메트리우스에게 아이들의 헌신을 표현한다. 이것은 5세기의 것이다. 북쪽 통로에 유사하게 위치해 있는 다른 모자이크는 성 데메트리우스를 향하여 트럼펫을 구부리고 있는 천사의 초상화로 이 초상화는 원래대로 남아 있지 않다. 누가 스파누트스의 무덤 곁에 본당 회중석의 서쪽 벽의 다른 모자이크는 7세기의 것으로 도시벽 흉벽 앞 두 목사 사이에 서있는 성 데메트리우스를 보여준다.

<남동쪽 문설주의 모자이크>
북면 문설주의 성 데메트리우스는 도시 벽의 정면인 감독과 주교 사이에 서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지고 있다. 그림아래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여기 당신은 미래한 사람들의 흐름과 남겨진 도시의 난잡한 섞임을 막은 그 유명한 집의 창시자 데메트리우스를 보고 있다.
이것은 7세기 초반에 노예의 입장이던 데살로니가의 세 번째 포위기간을 언급한 것이다.
동쪽 면 문지방의 모자이크 성 테메트리우스와 성인이 그의 오른팔로 끌어안은 두드러진 얼굴의 특징을 지닌 데메트리우스를 보여준다. 그 그림 밑에 한 구절이 쓰여 있다. (그리스도의 순교자. 도시의 친구. 시민과 객을 돌보는 자는 복이 있다.)
이 모자이크에서 초상화를 그렸던 성직자는 629-34년에 붕괴된 이후 교회의 재건축의 의무를 맡은 집사이다. 서편 문설주의 성 세르기우스는 담 정면에 기도하는 형상으로 표현되어진다.
<북서쪽 문설주의 모자이크>
이 문설주의 서면은 두 명의 아이와 함께 있는 성인의 모자이크로 그들의 손은 헌금하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남면에는 소원을 담은 모자이크를 동정녀 마리아가 전사성인과 함께 있다. 이 모자이크 아래에 이런 글이 있다.
<인간으로써 나는 실망했다. 그러나 당신은 내 삶에 가장 큰 힘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감사함으로 이것을 드립니다.>
이 그림의 상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흉상으로 축복하시는 그림이다. 이 모자이크는 9세기에 속한다.

<벽화>
성 데메트리우스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벽화는 교회의 남쪽 벽에 있다. 이것의 대부분은 현재 큰 아치형의 개막으로 인해 파괴되어져 있다. 초상의 왼손부분에서 한 임금이 그의 군대의 호위아래 말 등에서 따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뒷 배경으로 서 있는 큰 건물은 도시 경기장 일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왼손부분은 크게 손상되어 있다. 이것은 교회의 실내현관 부분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불꽃과 연기가 보이는 지붕위이다. 땅에서 창을 가진 형상이 홀로 걷는다. 반대로 외부로 퍼져 나가는 날개를 가진 천사가 내려와 복종하고 있다. 현관 위에서 두려워하는 여성은 그들뒤에 군인과 함께 묘사되어 진다. 비문에는 아래와 같이 쓰여진다. (경기장에 의한 거룩한 교회)
도시 경기장 가운데 서 있어온 성 데메트리우스 교회를 표시하고 있다. 이 벽화는 8세기 초반에 속한다.
본당 회중석의 남쪽 통로에 있는 서면의 최서단 문설주는 성 요셉의 벽화이다. 그는 짧은 머리에 수염이 없는 젊은 남자로 묘사되어져 있고 그의 오른 손에는 더블 십자가를 잡고 그의 왼손은 미세화에서 한 조상을 보호하고 있다. 미세화에서 성경과 향로를 들고 있는 이 벽화는 수도사가 되어 요셉의 이름을 가졌던 황제 존 4세 칸타쿠네를 다룬 것이다. 같은 열주에서 남면의 두 번째 최서단 문설주에는 수도사 복장과 모가달린  옷의 성 누가 스테리어트스의 초상이 있다. 이것은 11세기에 속한다. 트빌로의 남쪽 붙임기둥은 알레고리컬한 장면으로 한 남자가 유니콘에게 쫓기고 북쪽 기둥은 유월절로 1474-93년의 것이다.

<성당지하실>
이것은 교차랑 아래 지하동굴이며 남향날개쪽으로 들어간다.
계단의 왼쪽에서 아래로 작은 예배실로 가게되는데 두방 은 순교자의 몸을 즉시 넣어두었던 칸막이로 된 성도의 전형적인 납골당이다. 아칸서스와 월계수 나뭇잎과 야자나무무늬의 대리석으로 아치를 장식했다. 성합의 기본 앞면에는 대리석으로 된 원형 세면대가 있었다.
지하실의 중앙은 나무로 둘러싸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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