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海外 聖地순례/그리스 歷觀 & 聖地순례

빌립보 [Philippi]

영국신사77 2007. 6. 5. 09:21

                                                     빌립보 [Philippi]

 

 

 

  요약
 그리스 북동부 해안에 있던 고대도시.
  본문

  필립피라고도 한다. BC 4세기에 필리포스가 건설하였으며, 로마와 아시아를 잇는 커다란 도로가 지나고 있어 상업·문화의 요지였다.

 

  신약성서필립보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바울이 이 도시의 그리스도교도에게 보낸 편지로서, 바울 시대에는 이곳이 이 지방 최대의 도시였으며, 그리스도교가 유럽에 전파된 최초의 땅이 되었다.

 

 

                           빌립보 감옥 외 유적지 
원본: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저 높은 곳을 향하여.... 2006/08/28 오후 12:28 




                                  바울과 실라가 갇혔던 빌립보 감옥

  바울은 또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난다. 그리고 기도하여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행한다. 그 여인은 더러운 질병으로부터 해방받는 은총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바울과 실라는 로마인들로부터 고소당한다.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한 풍속을 전한다.(행16:20~21)" 그리고 영장도 없이 체포 구금된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16:25~26)"

 

  바울과 실라의 감옥터는 바실리카 A의 입구 현관(Propylaea)의 계단 오른쪽 옆에 위치하고 있는데, 5세기부터 순례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빌립보의 최고의 명소이다.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께서 지키시사 머리털 하나도 그을지 않도록 하셨으며, 이런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한 바울과 실라는 낯선 마케도니아 선교에 더욱 큰 힘을 얻었을 것이다.

 

 그 이후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선교 사역에 적극 참여했다. 그들은 에바브로디도(Epaphroditus)를 사자로 하여 바울의 쓸 것을 계속해서 도왔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빌2:25)"

 


                                              빌립보 바실리카 교회 터(비잔틴시대)

                                                           빌립보 유적지

                                               빌립보 유적지(아고라 등)



                                                           빌립보 유적지

 

  빌립보는 그리스의 북쪽 네압볼리(Neapolice; 신도시)에서 로마로 가는 고대도로인 에그나티아(Egnatia) 길을 따라, 북서쪽으로 약 16km 떨어진 레카니스(Lekanis) 산에 위치한 옛 마게도냐의 수도이다. 원래 크레니데스( i ; '샘')로 알려진 드라게(Thrace)사람들이 주를 이룬 마을이었으나,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인 마게도냐 왕 빌립 2세가 이 도시에 사람들을 이동시키면서(주전 358-57) 자신의 이름을 따라 '빌립보'라고 명명하였다. 빌립 2세가 암살되고 그 뒤를 이은 알렉산더 대왕은 도시를 증축하고 많은 사람들을 이주 시켰다.

 

  주전 167년 헬라가 로마에게 넘어간 후 빌립보는 로마의 한 도시로 편성되었다가 주전 42년, 빌립보에서 큰 전쟁이 발발한다. 율리우스 시이져를 암살한 부르터스와 카시우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안토니와 옥타비아누스의 군대가 충돌한다. 결국 빌립보 전쟁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황제의 자리에 올라 '가이사 아구스도'가 되었다.

 

  빌립보 시민은 로마시민권을 가졌고 많은 시민들이 로마군을 제대한 사람들이었다. 빌립보 시민들은 변방에 있는 땅을 수여받고서, 그 대가로 전방 지역 성읍에서 군사 임무를 수행한 퇴역 장병들과, 로마전역에 용맹한 군인으로 이름이 나있던 드라게인(Thracian), 주변지역에 살던 헬라인, 그리고 소아시아에서 온 그리스인(예; 두아디라의 루디아)들이었다. 퇴역군인 및 정치적인 영향으로 라틴어가 많이 이용되었지만, 주 언어는 헬라어였다고 추정된다. 역사가 람세이(Ramsay)는 의사 누가가 빌립보 출신이라고 하였다.

 

  빌립보 성은 도시의 서쪽에 위치한 해발 1,956m인 팡게오(Pangeo) 산에 있는 금광을 생산한 도시로 유명하였다; 빌립 2세는 이 곳에서 연간 1,000달란트 이상의 금을 채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로마시대 특히 옥타비아누스 시대에는 로마가 바로 정복하였던 북쪽지역을 방어하기위한 군사도시로, 또한 동방, 비쟌티움에서 로마로 가는 길목으로 이용되었다. 빌립보에는 다이아나(헬라의 아데미 신; 사냥의 신)와 관련된 드라게인의 바쿠스(Bacchus; 헬라의 디오니수스 신; 술의 신)와 말탄 영웅이 대표적인 우상이었다.

 

  주후 1세기에는 시에서 서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수입된 값비싼 대리석으로 치장된 이집트 신들을 섬기는 장소가 세워졌다. 또한 에그나티아 길의 남쪽 400m지점에 위치한 목욕탕건물에서 나온 다섯 개의 비문에 의하면, 그 곳이 주후 1세기경에는 바쿠스신과 그와 관계된 리벨( Liber), 리베라(Libera), 헤라클레스(Herculus)를 섬기는 장소였음을 나타낸다.

                                                                    유적지

                                                               빌립보 야외무대

                                                       빌립보 바실리카교회
                           

  이 도시에는 원래 크레미데스 (Kremides 작은 샘들) 라고 불리었는데, 기원전 358-354년 경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 빌립(필립비) 2세가 은과 금광으로 부유해진 이 도시를 건설하고, 자성도의 이름을 따서 빌립보(필립비)라고 명하였다.

 

  기원전 168년 로마인들이 이 도시를 점령하고, 그로부터 20년 후에 로마의 속주 도시로 되었다. 기원전 31년 빌립비 시는 이탈리아의 도시들처럼 자치권, 면세권, 절대사유권 등 로마의 권리를 누리는 자치시로 승격되었다. 주민 구성도는 로마 군인의 파병 등으로 인해 인구의 절반이 로마인이었고, 유대인들도 소수의 구룹을 형성도하여 살았다. 주민 분포상 종교도 여러 가지로 혼합되었으며, 경제적으로 윤택하였다.

 

  사도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시기인 50~52년경 실라와 디모데, 그리고 누가와 동행하여이곳에 교회를 세웠다.(행 16) 빌립보에서 바울은 먼저 유대인의 기도소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는 유대교 개종자요 자주 장사인 루디아의 집에 머물렀다(행 16:14-15)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반대자들의 고소로 투옥되었다가 기적적으로 풀려난 뒤 치안관들의 요청으로 이 도시를 떠난다(행 16:16-40).

 

  빌립보 사람들은 바울에게 있어서 '유럽에서 얻은 맏아들' 이었다. 바울은 이 교회에 각별한 애정을 지니고 제3차 전도여행 때도 두번씩이나 방문하였고, 그곳의 성도들도 사도 바울에게 감사와 애정의 표시로 물질적 도움을 주었다. 바울은 다른 지역의 선교 활동 중에도 빌립보 교회와 계속 긴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어떤 교회보다도 이 교회를 특별히 사랑하였다.(행 16:12-40, 살전 2:2, 고전 7:5-7, 빌 4:15-16). 그런데 바울이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빌립보 성도들은 에바브로디도를 시켜 좋은 위안의 선물을 주었다. 바울을 도우러 왔던 에바브로디도가 병이 들어 죽을 고비까지 이르렀다가 회복하자, 바울은 그를 보내며 빌립보서를 썼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를 떠나 암피볼리스와 아폴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카로 갔다.(행 17:1).

 

  현재 빌립비에는 바실리카 회당, 루디아의 기념교회, 바울이 갇혔던 감옥 등 유적지들이 남아 있다

                  

                                                                                                                출처: 성화사랑

  http://kr.blog.yahoo.com/jeon3032000/955069

 

 

[이원희 목사의 성서 속 도시 이야기] (27) 바울이 감옥에 갇혔던 빌립보
국민일보 | 기사입력 2005-08-31 17:21

  네압볼리에서 역사적인 하룻밤을 보낸 나는, 택시를 빌려 그리스의 북부지역에 있는 빌립보로 향했다. 빌립보(필리피·Philippi)는 에게해에서 내륙으로 16㎞쯤 들어가 산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있는데, 남쪽으로는 심볼론 해변 지역, 북쪽으로는 발칸 고대의 지방, 서쪽으로는 판가이온, 그리고 동쪽으로는 오르벨로스와 접해 있다.

 

  네압볼리에서 바로 북서쪽으로 높은 언덕길에 오르자 네압볼리 항구가 한눈에 들어왔고, 다시 내리막길을 지나 평지를 달리자 왼쪽으로는 바울이 걸어갔던 로마때 만들어진 에그나티아 가도가 숲 사이로 보였다. 바로 성경에 나오는 바울이 복음을 들고 유럽 선교를 위해 지나갔던 길이다.

 

  바울은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선교사이며 최고의 복음 전도자였다. 그로 인해 유럽 선교의 장이 열렸다. 지금은 아스팔트 길에 밀려났지만, 바울이 전한 기독교의 복음은 에그나티아 가도를 통해 세계 각처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언덕을 내려와 20여분을 달리자, 로마 제국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빌립보에 도착했다.

 

  성경에서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행 16:12)이라고 소개되는 이곳은 서쪽으로는 스트림몬 강과 동쪽으로는 네스토스 강을 경계로 하는 마게도냐 동쪽에 소재한다.

 

  빌립보의 옛 명칭은 크레니티였으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 마게도냐 왕 필리포스 2세(재위 BC 359∼336)가 이 지역을 크게 확장하고, 자기 이름을 따서 빌립보라고 바꾸었다. 이 빌립보는 기원전 42년 카이사르를 암살한 부루터스가 참패한 후 자결한 곳이며, 이 결전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가 후에 원로원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얻게 된 배경이 된 곳이다.

 

  빌립보는 대규모의 유적지로, 아테네의 에콜 프랑세즈(Ecole Francaise)에 의해 1914∼1937년까지 고고학적 발굴이 행해졌다. 도시의 대광장은 에그나티아 도로 바로 옆에 있으며, 그 면적은 길이 91m, 폭이 46m가 넘는 장방형이다. 그리고 북쪽 중앙에 연사들이 연단으로 사용한 것이 틀림없는 장방형의 주춧돌이 있다. 또한 대광장의 북동쪽과 모서리에는 2개의 대신전이 정면으로 마주보고 서 있다. 그리고 도서관 건물, 줄지어진 기둥들, 건물의 현관, 분수, 목욕탕 등이 발굴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광범위한 지역이 그대로 남아 있다.

 

  입장료를 내고 유적지 입구에 들어서자, 다른 로마 유적처럼 예외없이 야외극장이 오른쪽 산 언덕에 세워져 있다. 극장을 지나 로마 때 건설된 에그나티아 길을 따라 조금 지나면, 바실리카A라고 불리는 지역이 위치해 있다.

 

  바실리카는 회당식 교회를 말하는데, 빌립보에는 바실리카가 두 곳이 있다. 바실리카A에서 바실리카B로 가려면 중간에 현대에 건설한 아스팔트 길을 지나가야 하는데, 길을 건너기 바로 전에 바울의 감옥이 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따르면 이곳은 바울이 귀신이 들려 점하는 여종을 고쳐줌으로써 그 주인에게 고소를 당해 갇힌 감옥이다. 그는 쇠사슬에 발목이 묶인 채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미하자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감옥을 지키던 간수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를 믿는 기적이 일어났다(행 16:16∼34). 이 일로 기독교 역사상 이곳에서는 기독교가 왕성하게 되었다. 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바실리카B의 웅장한 기초석을 보면 당시 교회 규모가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다시 한번 바울의 복음에 대한 열정이 이곳 빌립보에 일어나기를 소원하며, 바울이 루디아를 만났다는 곳으로 향했다. 자동차로 5분 정도를 달리자, 바울이 기도처를 찾다가 루디아를 만난 곳에 세워진 루디아 기념교회에 도착했다.

 

  이 교회는 바울이 세례를 베푼 간지테스 강변에 세워져 있는데, 지금은 강이라기보다는 도랑 같았다. 교회는 루디아의 신앙을 상징하듯 엽서에 담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담하고 정감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당시 루디아는 자주 옷감 장사를 하는 여인이었다. 그는 바울을 만나 복음을 받아들여 빌립보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행 16:11∼15).

 

 후에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에게서 받은 신앙의 유산을 잘 간직하여, 바울이 마게도냐를 떠날 때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 여러 번 도왔고(빌 4:15∼16), 바울이 로마 옥중에 있을 때에도 에바브로 디도를 통해 위문품을 보냈다(빌 4:18). 이에 바울은 빌립보서를 써서 그들을 위로했다. 이런 기독교의 역사를 가진 빌립보를 찾았다는 감격은, 이후 오랫동안 가슴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photobible.co.kr

 

                         빌립보의 바울

 

                                                                           -서진교 객원연구원-

파일   #1
   3사도바울의_빌립보_감옥_전경.jpg (745.7 KB)

                                              *빌립보에서 사도바울이 갖힌 감옥*

바울과 빌립보교회

선교여행 기간 중에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마게도냐 지방에서 일하도록 특별히 부르셨다는 확신을 갖고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행 16:9-11). 그 선교사들은 유럽 땅에서 일을 시작할 때 자신들이 로마세계라는 새로운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1. 빌립보 교회의 설립과 구성원

  빌립보 교회는 행 16:12-40의 목격자 진술(우리 단원)에서 기록되고 있는 바대로 이른바 바울의 2차 선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구분이 오늘날처럼 그렇게 분명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 얻은 개종자의 숫자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누가의 기술은 몇 명의 대표적인 개종자들-즉 장사하는 여인 루디아와 귀신들린 여종(그녀의 개종이 실제적으로 주장되고 있지는 않다) 및 로마 간수-에만 집중되고 있다. 루디아와 간수의 경우 그들의 가족까지 개종자들의 수에 포함된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뿐 아니라 글레멘드도 이때 개종한 사람들인지는 분명치 않다(빌 4:2,3). 개종자들은 그 신분이 아주 다양하였던 것이 분명하며 대부분 이방인들이었다. 빌립보에는 회당을 형성할 만큼 충분한 유대인들이 없었다. 처음에는 빌립보교회에 여자들이 두드러졌던 것은 마게도냐 지방에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 있던 상황과 일치되는 현상이다.
  누가는 이 새로 시작한 교회를 돕기 위해 빌립보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은 빌립보 선교에 대한 그의 기술이 종결됨과 동시에 「우리 」단원이 중단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암시되고 있다. 바울과 그의 개종자들 사이에 강력한 유대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서신의 내용들로부터 뿐 아니라 바울이 데살로니가와 고린도에서 일하는 동안 그들이 바울에게 급전적인 도움을 보내었다는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4:15 이하; 고후 11:9)

2. 바울과 빌립보 교회와의 관계

  바울 자신이 빌립보 교회의 헌신과 열심에 대해서 직접 밝히고 있다. 바울이 빌립보를 떠나 잠시 데살로니가에 가 있던 동안(행 17:1-9) 빌립보 교회는 그의 쓸 것을 위해 선물을 적어도 두 번 보내었다(빌4:16).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궁핍 중에 있을 때에도 그러한 선한 일을 계속 하였다. 곧 바울이 자기 손으로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그의 쓸 것을 처음으로 공급했던 것은 고린도 교회가 아니라 빌립보 교회였다(고후 11:9; 빌 4:15). 결코 모든 교회가 그랬던 것이 아니라 몇몇 교회가 그 후 빌립보 교회의 그러한 본보기를 추종하였다. 바울은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요를 받은 것이 탈취한 것이라”(고후 11:8)고 반어적으로 말한다.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빌 4:15).
  그러나 바울에 의한 교회들 중 어느 교회도 행위 면에서 빌립보 교회만큼 전적으로 헌신적이지 않았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유대교화한 자들과 (비선교적이거나 완고한 요소의)바리새적인 사람들의 협소한 편견을 초월해 있는 것을 자체의 영광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비록 안디옥 교회가 빌립보 교회의 그러한 일에 호의를 보였다는 것 외에 무엇을 기여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이방인들 가운데서의 선교 활동을 환영하였다. 안디옥 교회는 헬라 교회였으며 이러한 세계적인 캠페인에 개방적이었다. 그러나 빌립보에 있는 교회는 그리스도를 위해 로마 제국에 대해 승리를 거두려는 바울의 전도 운동의 실제적인 지지를 위해 열의를 갖고 끊임없이 합심하였다. 빌립보 교인들은 모든 시간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 하려는데 힘썼다. 더욱 아름다운 것은 그러한 행위가 자발적이며 지속적이었다는데 있다. 안디옥의 헬라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의 호소에 응하여 자신들의 개종의 진정성에 대한 증거로써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에게 기부금을 보내기는 하였으나(행11:29) 처음에는 바울의 위대한 선교 사업에 있어 실제로 협력하려 하지 않았다. 바울의 위대한 선교 사업에 있어 처음부터 그와 협력했던 영광은 바울의 “기쁨의 면류관”(빌  4:1)이 된 빌립보 교회에 속한다. 빌립보 교회는 복음 사업에 있어 바울과 참으로 ‘협력’하였다. 빌립보 교회만이 처음부터 바울과 ‘교제’하였다. 왜냐하면 교제란 말이 본문 단어의 참된 의미이기 때문이다(빌 1:5; 4:14). 빌립보 교인들만이 세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은혜에 있어 처음부터 바울과 “은혜에 참예한자”(빌1:7)이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 대해, 아마 그가 그의 서신들에게 말한 것보다 훨씬 이상의 것을 하였을 것이다.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직접 접할 “기회가 없던”(빌 4:10) 동안 그들과 바울 간의 마지막 “친교”의 실례는, 그들의 사자와 사절이었던 에바브로 디도를 바울의 쓸 것을 위해(빌 2:25) 보냈던 그때, 즉 바울이 로마에 있었던 때였다. 그 당시 그들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바울에게 극진했었으며 그들의 선물은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 ”(빌 4:18) 이었다. 그들은 에바브로 디도 편으로 바울에게 편지를 보내었을 것이며 이에 대해 바울은 그들에게 또 다른 감사의 편지를 써 보내었을 것이다(빌 3:1).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갈라디아, 아시아, 마게도냐와 아가야 교회들로부터 많은 헌금을 모음에 있어 빌립보 교회에 크게 의지하였다. 아가야에 있는 교회들은 현대의 어떤 교회들처럼 약속하는 데는 민첩하였지만 그 약속을 지키는 데는 더디었다. 그들은 디도의  격려 하에 만 일년 전에 약속을 하였으며(고후 8:10)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들을 분발시켜 행동하도록 하기 위해 아가야 교인들의 즉각적인 서약을 상기시켰다(고후 9:2). 그러나 바울이 이번에는 마게도냐 교회들의 후함과 즉각적인 헌납에서 볼 수 있는 실제적인 약속 이행을 위해 아가야 교회들을 분발시켜야만 했다(고후 8:1-15; 9:1-5). 바울은 만일 자기가 아가야 교회들의 후한 약속들을 자랑했던 마게도냐 형제들 중 몇몇 사람과 함께 아가야 교회로 간다 하더라도 그들(마게도냐 교회들)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지 않기를 원했다. 이것은 바울이 직면했던 실제적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는 습관을 오랫동안 발휘했던 것은, 곧 마게도냐 교회들과 아가야 교회들에 대해 보조를 설정한 것은 분명, 가난하면서도 후했던 빌립보 교회였다.
  오늘날 빌립보 교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의 초기 명성은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존속해 있다.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는 2세기 초에 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죄되어 맹수들에게 내던져졌던 로마로 가는 도중 빌립보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빌립보 그리스도인들은 이그나티우스를 친절히 대하였으며 안디옥에 있는 그의 고향 교회에게와 서머나의 감독 폴리갑에게 동조의 편지를 써 보내어, 바울 서신의 유포에 관한 간접적인 정보를 내포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이그나티우스의 어떤 편지의 사본들을 자신들에게 보내도록 그(폴리갑)에게 요청하였다. 폴리갑은 그들의 요구에 응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위로와 격려의 말로 가득한 편지를 빌립보 교회에 써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이처럼 빌립보 교회는 바울과 깊은 교제를 가졌으며 그 이후 초대교회의 교부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진정으로 헌신했던 교회를 말하라면 당연히 빌립보 교회를 꼽을 수 있겠다.
 

 

                        바울과 그리스 유적지 (2)...빌립보 
 
 
 

                                                            *고대 빌립보 유적지*

 


                                                               *루디아 기념교회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