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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카 (2)

영국신사77 2007. 6. 5. 19:23
제        목   마케도니아와 알렉산더 대왕(이은주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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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살로니카의 알렉산더 동상*

 

                 마케도니아와 알렉산더 대왕

 

                                                                                                    이은주 연구원

    현재 마케도니아는 북쪽으로 유고슬라비아, 동쪽으로 불가리아, 남쪽으로 그리스, 서쪽으로는 불가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현재의 이러한 패쇄적 지리는 최근 역사의 결과물이다. 이 마케도니아(Republic of Macedonia)는 자신의 국명을 찾기 위해 노력한 국가이기도 하다.


  지금은 사면이 막혀 어느 곳으로 분출 할 곳 없어 휴화산처럼 보이지만, 이들의 조상들 중에는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까지, 그 문화와 역사로 영향력을 끼치는 이가 있다. 바로 알렉산더이다.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를 고향으로 하고 있다. 이곳을 고향을 하는 유명인에는 아리스토텔레스도 속한다. 또한 성서에 기록된 마케도니아도, 바로 현재의 마케도니아를 포함하는 고대의 마케도니아를 말하고 있다.

 

  고대 마케도니아 제국의 유산은, 필립(Philip Ⅱ)2세의 무덤이 있는 베르기나, 알렉산더의 고향인 펠라, 울림프스 산기슭에 있는 필립(Philip Ⅱ)2세의 도시 디온 등을 포함하여, 많은 고대 유적이 있다. 그리고  3세기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의 통치 기간동안, 많은 훌륭한 건축물들이 세워졌다. 데살로니카(현 데살로니키)에 있는 개선문도 그중 하나다.

 

  이러한 마케도니아에 대해서 알렉산더와 성서와 관련하여 살펴보자.



    알렉산더의 고향이었던 고대 마케도니아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하는 그리스폴리스 연방의 북쪽지방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악시오스(AXios)와 할리아크몬(Haliakmon)이라는 계곡을 가지고 있었다. 서늘하고 습한 기후대가 형성되어 식물군이 다양하게 분포되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배경으로 생성된 정치 경제적, 사회 문화적 고대 마케도니아의 특징을, 그리스와 비교해서 살펴보면 좀 더 알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리스는 높은 산들과 좁은 계곡들 때문에, 많은 단위로 구분되었지만, 마케도니아는 큰 강들을 끼고 있는 넓은 비옥한 평야를 자랑했다. 이러한 강들 덕분에, 다소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계곡들에 접근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의 다른 지역에서처럼, 산악지대 때문에 내륙에 접근하지 못하는 일이 없었다.

 

  반면에 고대 마케도니아에는 데살로니카와 올림프스산 연안만 있어, 바다를 바라보는 훌륭한 자연 항구나 도시들이 부족했다. 이러한 이유로, 고대 마케도니아는 경제적으로 자급자족했고, 그리스 도시들의 경제는 외국과의 교역에 의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구조는 마케도니아의 정치적, 사회적 특성에도 반영되었다. 대부분의 농촌 주민들은 도시 국가들처럼 소도시국가 의식을 소유하지 않았고, 또 농촌에는 귀족 정치에서 민주 정치로의 움직임도 없었다. 왕은 국가 전역에서 징집하여 구성한 군대의 사령관이었다. 그리고 물론 귀족 가문들이 왕권과 관련하여 서로 경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마케도니아에서는 그리스 도시들에서처럼, 독재 정치와 귀족정치와 민주 정치사이의 항존하는 싸움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고대 마케도니아의  언어는 헬라어 어족에 속한다. 마케도니아인의 기원은 그리스계(系)거나, 또는 그리스와 트라키아인(Thracians)및 일리아인(Illyrians)과의 혼합 민족이었다고 추정되며, 이것이 었다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다만 고대 마케도니아인들은, 그리스인의 남하 때 북방에 그대로 남아 부족사회의 형태를 유지한 나라여서, 그리스인들은 야만인(Barbaroi)인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지리적 특징으로 말미암아, 고대 마케도니아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나라였다. 그렇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고대 마케도니아는 해안지대에 건설된 그리스 식민시를 통하여 그리스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서서히 발전을 계속하였다.

 

  아이가이(지금의 에데사)에서 펠라(Pella :데살로니카에서 서쪽으로 38㎞ 지점에 위치)로 천도하고, 이곳 태생인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Philip Ⅱ) 2세가 등장하면서, 고대마케도니아는 지리상의 동양과 서양을 모두 정복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알렉산더의 아버지 필립(Philip Ⅱ) 2세는, 우선 정치적․군사적 개혁을 통하여, 씨족을 기반으로 한 봉건적인 왕국, 견고한 통일 왕국으로 만들고, 막강한 상비군을 보유하게 되었다. 상비군의 핵심은 자유로운 소농출신의 보병 밀집부대였으며, 대귀족 지주들은 왕의 군우(軍友)로서 중무장의 우수한 기병대를 형성하였다.

 

  필립Ⅱ와 관련된 유물은, 그의 고분과 왕궁터가 있고, 펠라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져 있다.



    이러한 정치군사적 기틀을 마련하였지만,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의 아들 알렉산더가 마케도니아의 제왕으로 추앙되고, 우리가 많이 알고 있듯이 알렉산더의 영토정복에 대한 대장정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 영토정복의 원정 출정식은, 올림포스 산의 동쪽 기슭에 있는 물과 나무가 많은 디온에서 이루어졌다. 예부터 신성시되고 군사 거점이기도 했던 이 도시는, 현재 발굴이 진행되어 제우스와 데메테르의 신전, 극장과 스타디온이 있다.


  알렉산더는 주전 333년, 소아시아에서 시리아로 들어가는 관문인 이수스(Issus)에서,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Darius Ⅲ)를 물리치고 첫 번째 큰 승리를 거두었다.


  시리아의 나머지 지역, 페니키아, 사마리아, 그리고 예루살렘 등지에 대한 점령은 별다른 저항 없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튀루스(두로)를 점령할 때에는, 오랜 포위와 공격이 필요했었다.


  곧 이어 이집트도, 전투 없이 알렉산더에게 항복했다. 시와(Siwa)에 있는 암몬(Ammon)을 섬기는 리비아 신전의 제사장들은, 알렉산더를 제우스-암몬의 아들이라고 칭하면서 맞이했다. 나일강 델타의 서쪽 끝에 자신의 이름으로 명명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 것은, 문화적인 새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상징이 되었다.


  주전 331년, 알렉산더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동쪽으로 진군하여, 티그리스 상류의 동쪽에 위치한 가가멜라(Gaugamela)에서 다리우스(Darius)를 완전히 패배시켰다. 그로 인해 그는 페르시아 왕국의 중심부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마케도니아 군대는 박트리아(Bactria: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를 포함하여 페르시아 동북구의 여러 지역을 점령했으나, 전쟁은 계속 되었다. 기원전 327년에 알렉산더는 인도(오늘날 파키스탄)에 도착했으나, 그의 군대는 그에게 갠지스 강까지 진군하지 말고 후퇴하라고 종용했다.

  주전 323년에, 알렉산더는 33세도 되지 못한 나이에 열병으로 쓰러져, 자신이 새 제국을 수도로 선택했던 바벨론에서 사망했다.

 

  이렇게 동방까지 영토를 확장한 마케도니아 왕국은, 알렉산더 죽음 후, 마케도니아 지역은 안티고누스왕조가, 이집트와 리비아는 라고스왕조 즉 프톨레매오 왕조가, 그리고 시리아 페르샤는 셀류커스왕조가 다스리게 되었다.

 

  그 후  마케도니아는 주전 146년에, 시리아는 주전 64년에, 그리고 이집트는 주전 30년에 로마에게 정복되었다.


   정복지에 대한 알렉산더의 태도는 남달랐다. 우선 정복지에서 신이 임명한 <세계 지배자>로서 섬겨지기 원했다. 그래서 알렉산더는 각 정복지의 고유 신전들과 제의들을 그대로 두었다.

 

  덧 붙여 역사가들은, 이에 대해 알렉산더의 군대가 인도로 원정한 것, 예를 들자면 알렉산더의 함대가 히다스페스 상(Hydaspes)을 영웅으로 숭배할 것을 요구한 사실, 그리고 그리스인 대사들이, 마치 신 앞에서 썻듯이 화관을 쓰고서 알렉산더 앞에 섰다는 사실에 잘 증명되어 있다고 평하고 있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알렉산더와 그의 조국 마케도니아에 관해, 성서에서는 다니엘서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 다니엘서에서 살펴볼 수 있는 알렉산더와 마케도니아는, 후대의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해 박해 받는 유대인들의 평이다.

 

  구체적 기술은 할 수 없어, 묵시적 문학형식을 가지고 왔다. 그 중 다니엘서 <8:3~8>에서 힘센 수염소에 관련된 부분은 마케도니아 왕국이며, 두드러진 외뿔은 알렉산더를 말하고 있다. 이는 수염소 뿔이 부러지는 서술에 더욱더 확증이 되는 부분이다. 더군다나 다니엘서 <11:3~4>에서는 그리스왕이라는 명칭이 나온다. 그 이후 절에서는, 4분된 알렉산더의 영토에 관해서 서술된 부분이 있다.


  다니엘서에서의 알렉산더에 대한 평은 그다지 좋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다니엘서 기자는 알렉산더를 하나의 권력자로 표현하였으며, 그다지 좋은 면을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니엘서 기자의 눈은 알렉산더의 고결한 성격면이나, 마케도니아를 중심으로한 그리스문화의 혜택을 함께 누리는 통일된 이상적인 세계에 촛점을 맞추진 않았다고 여겨진다.

 

  또 다니엘서 기자는 알렉산더와 마케도니아를 중심으로한 그리스문명에 대해, 고상한 문명일 수도 있는 한 지배문명을 대표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보듯이 그들 자신을 바라보도록 노력해야 하며,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문화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가진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노력해야 한다 점을 말하기 위해, 예를 든 것이라 생각된다.  
  
  동방을 중심으로 서방융합을 꿈꾸게 되었던 알렉산더의 영토들은, 다시 로마가 지배하기 전까지 한 언어 코이네(kone)가 통용되었다. 물론 사상과 문화가 통용되었다. 이러한 모든 것을 헬레니즘이라고 후대에 의해 명명되었고, 로마의 오랜 통치와 함께 헬레니즘은 발전을 계속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공회당, 직각 도로, 관청, 국역도요지, 스타디온, 극장으로 구성되며,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 예술 작품으로 장식되어진 도시들의 특징으로, 성서 고고학 뿐만 아니라 중간사. 신약사의 성서배경을 연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앞서 서술한 코이네(kone)로 말미암아 신약성서가 번역되어, 알렉산더로 인해 생활거주 범위가 더욱 확산 된 디아스포라에게 읽혀졌고, 사도 바울과 같은 선교사들의 활동을 좀더 용이하게 하였다. 또한 오늘날 신약을 연구하는데도 도움을 주고 있다.

    
  이러한 알렉산더의 영향은, 통치자 숭배라는 사상이 그리스 문화에 도입된 동양적 개념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비범한 사람에게는 신성이 존재한다는 그리스 사상이 발전한 것이며, 신적인 왕의 개념이 형성되는 데에 이집트 사상이 어느 정도 기여했다는 연구결과를 얻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해주기도 했다.



    알렉산더와 마케도니아에대해서 간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알렉산더의 재위 기간은 13년에 불과했지만, 그동안 그는 그리스 세계의 면모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걸출한 영웅을 어의 없게 보낸 마케도니아는, 마케도니아와 발칸 반도의 인종 갈등을 대화와 신뢰로 풀어간 지도자 트라코브스키 대통령을, 2004년 2월 또 한번 어의없게 보냈다.

  지금 알렉산더 대왕은, 고대 헬레니즘 제국의 심장부이며, 사도바울의 2차전도 여행지 중 마케도니아 지역에서 머물렀다고 기록되는 두번째 도시 데살로니카에,  원대한 포부를 다시 한번 펼치고 싶어하는 동상의 모습으로,  그의 아버지 필립(Philip Ⅱ)2세와 함께 서있다. 마케도니아의 꿈을 간직한채 그렇게 서있다.  

*참고도서*
민석홍, 서양사개론 , 삼영사, 1997.
설버그 레이몬드, 김의원역, 신구약중간사, 기독교문서서회, 1984.
보라이케, 번역실 역, 신약성서시대사, 한국신학연구소, 1986.
오택현 외 5명 공저, 위기와 대응의 관점에서 본 성서시대의 역사와 신학, 크리스찬 헤럴드, 2000.
앤토니 앤드류 Antony andrewes, 김경현 역, 고대그리스사, 이론과 실천, 1991.
월뱅크, 김경현 역, 헬레니즘 세계, 아카넷,
노만 포르퇴우스, 박철우역, 국제성서주석-다니엘, 한국신학연구소, 1989.
헴우트쾨스터, 이억부 번역, 신약성서 배경 연구-헬레니즘 시대의 역사, 문화, 그리고 종교, 은성,1996,
김경진,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사도행전, 대한기독교서회, 1999.
해외 여행 가이드 22 -세계를 간다 ․ 터키․ 그리스 ․ 에게해」, 김영배, 중앙 M&B, 2001
가자 세계로 -그리스/아테네 및 본토편」, 윤미연역, 서울: 서울문화사, 2002.

 

                                                                  출처:  

 


 

제        목   데살로니가의 사도바울(이은주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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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드미트리우스 교회안의 성화 *

  네압폴리, 빌립보, 데살로니카등 마케도니아의 중심 대도시에서 먼저 유대인 회당을 찾은 사도바울의 독특한 전도방법은 오늘날 선교학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 이에 따라서 도시들의 특징들도 많이 연구 되어지고 있다. 이런 점을 유념해서 데살로니가와 사도바울에 관해 살펴 좀더 성서의 배경의 지평을 넓혀보자.

사도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사도바울과 실라가 한때 투옥되었던 빌립보를 바로 전에 떠나  데살로니가를 방문하였다. 데살로니가 도시는 마게도냐의 수도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비아 에그나티이(Via Egnatia-동방으로 향하는 로마제국의 대로)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도시였다. 이 도시에는 행정관이라고 불리운 집정관들로 구성된 자체 통치기구가 있었으며 그곳에 회당이 있었던 사실로 보아(행17:1)유대인의 식민구역이 있었다고 한다.
사도 바울은 비아 에그나티아에 있는 많은 도시들 중에서 중심대도시에서 유대인들을 먼저 찾아 복음을 전했다. 사도 바울과 그의 팀이 이끈 전도사역은 즉각적으로 성공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었다.이렇게 한 교회를 이루게 된 이들은 어느 정도의 유대인(행17:4)과 아주 많은 수의 경건한 헬라인, 또는 하나님의 경외자 그리고 적지 않은 수의 귀부인들로 구성되었다.  데살로니가전서 1:9에 따르면 대다수가 이교의 우상숭배자들이였다고 한다. 교회의 안정적인 핵심요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었으며, 특히 이들은 개방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교회의 구성원들 중 이교도가 많았을까? 과거 이교도이었다 교회구성원이 된 이들은 이교의 도덕성에 실제적인 불만을 가졌으며 그들의 관심을 유대인의 보다 더 윤리적인 교훈에 두게 되었을 것이다. 더우기 그들은 우상숭배의 단순성과 대조를 이루는 유대인의 유일신론이 지닌 고상한 개념에 끌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유대교의 편협한 국가주의와 의식상의 요구들에 식상한 자신들을 발견하였으며, 기독교의 도래는 유대교가 제공한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타당한 하나님의 개념, 예수의 현저하게 나타나는 인격적인 모범에 중심한 보다 더 고상한 윤리, 유대교의 배타주의가 주는 엄격함을 능가하는 자유로운 분위기로 다가온 우주적인 개요들에 대한 그들의 요구를 만족시켰을 것이다. 따라서 데살로니가에서 이와 같이 신중한 마음을 지닌 개종자들이 그 메시지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지명하다 생각되어진다.  
사도바울과 그의 팀과 데살로니가교회(개종한 이들)은 데살로니가에서 유대교의 비주류로 몰렸다. 또한 회당사람들이 아주 신속하게 유대교에서 기독교하는 새로운 신앙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이유는 유대인의 질시와 반대를 격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기존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한순간에 없어지게 할 사도바울과 그의 팀원과 데살로니가교회를 소요죄라는 죄목을 이용하여 소탕할 계획을 세웠다. 뒷골목의 폭력단을 선동하였고 바울과 그의 일행이 유숙하고 있는 야손의 집을 습격하였다. 유숙객들이 도피하여서 폭도들은 발견하지 못하고 대신 야손과 동료 기독교인 몇 명을 끌어내어 평화의 파괴자로 행정관들 앞에 데려갔다. 야손은 가이사가 아닌 다른 왕을 추종한다는 죄목으로 구속되었다가 후에 석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행정관들의 결정은 아마도 그들이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도록 상부로부터 지시를 받았으나 사도바울을 그 도시에서 추방하기 위한 어떤 행동을 취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결국 사도바울은 베뢰아로 갔고 그곳에서 그는 다시금 데살로니가에서 온 유대인들로부터 방해를 받았고 이어서 다른 곳으로 떠나야만 했다. 그는 아덴으로 갔다가 이어서 고린도로 갔다. 아덴에 체류하면서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내 교회의 형편을 확인하게 하였으며, 고린도에 있는 바울에게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내 교회에 형편을 확인하게 하였으며, 고린도에 있는 바울에게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내 교회의 형편을 확인하게 하였으며, 고린도에 있는 바울에게 디모데가 돌아와서 그 사실을 보고하자 제1서신을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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