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알렉산더의 헬라제국시대의 특성
알렉산더 대왕시대 <톰슨성경>
서 론
BC 333년 잇수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알렉산더 대왕은 연이어서 바사 제국을 점령하였다. 이 사건은 헬라문명이 근동지역에 강력한 변화를 가지고 온 계기가 되었다.
그는 자기가 정복한 나라들에 헬라어를 비롯한 헬라문화를 심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인도의 불교 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간다라 미술을 낳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오늘날 불교의 부처상도 결국 알렉산더의 헬라 조각 예술과 불교 예술이 만나서 생겨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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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품]당시에 제국을 하나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알렉산드로스 특유의 역동적인 성품 덕택이었다. 그는 자기자신과 자기사람들을, 극한까지 몰고가는 강철 같은 의지와 능력에다, 부드럽고 유연성 있는 사고력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물러설 때와, 정책을 바꾸어야 할 때를 알고 있었다. 또한 풍부한 상상력을 지녔고, 낭만적인 충동도 없잖아 있었다. 아킬레스와 헤라클레스, 디오니소스 같은 인물들이 종종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아몬의 신탁소에서 그런 경배를 받은 일이 있는 이후, 그의 생각과 야망에 줄곧 뚜렷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BC 324년 가을, 알렉산더의 가장 절친한 친구인 헤파이스티온이 죽자, 그를 영웅으로 기리도록 명령하면서, 자신에게도 신과 같은 영예를 바치도록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그가 신적 지위를 갖는다고 해도, 그가 그리스 도시에서 특별한 권리를 누리는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것은 과대망상증과 정서적 불안정이 점점 심해지는 징후였다.
☞ 성경 다니엘서에, 하나님께서 알렉산더의 단명을 예언해 놓으셨지만, 이러한 알렉산더의 교만이 그의 수명을, 불과 재위 13년에 33세로 더욱 단축시킨 큰 요인이 아니었을까?
참고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재위 43년에 68세의 나이까지 살았다.
[지휘관]지휘관으로서의 알렉산드로스는, 일찍이 세상에 알려진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서로 다른 무기들을 결합해서 사용하는 데 비상한 재능을 보였을 뿐 아니라, 사카 유목민이라든가, 인도의 산악부족, 포로스의 코끼리 부대같이, 새로운 형태의 전투방식을 사용하는 적들의 도전에 맞추어, 전술을 변화있게 구사하는 데도 뛰어났다. 그의 전략은 능숙하고 상상력이 풍부했다. 그는 매번의 전투에서,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계기를 놓치지 않고 활용했으며, 또한 빈틈없는 추격전을 벌여, 승세의 이점을 마지막까지 살렸다. 또한 기병대를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보병을 동원해 결정타를 가해야 될 경우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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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의 헬라문화 보급
알렉산더는 단순히 권력에만 광분한 독재자는 아니었다. 당대의 석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그는, 헬라문화야말로 세계를 통일할 수 있는 유일한 원동력임을 철저하게 확신하고 있었다.
알렉산더와 유대인 사이에는 퍽 우호적 관계가 형성되어, 유대인들은 그들의 율법을 지키도록 허락되었을 뿐 아니라, 안식년에는 조공을 면제 받았다.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가 건설될 때에는 유대인들의 이주를 장려하고, 다른 정복민들과는 구별되는 특권을 부여하기도 하였다.
알렉산더가 중동에 끼친 유산은, 그 통치 방식보다는 헬라문화에 있었다. 그는 자기가 정복한 땅에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지은 도시를 70개나 건설하였다, 또한 그는 자신이 이룩한 제국의 지방마다, 헬라식의 웅장한 공공 건물과 체육관, 야외 극장 같은 건물을 건축하고, 모든 사람에게는 헬라식 이름과 헬라어 및 의복 등을 갖게 함으로써, 그들의 생활방식과 질서를 근본적으로 헬라화 시켜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헬레니즘의 물질적 측면은,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매혹적이었음에 틀림없었다. 교역과 상업이 새로운 계층에게 부를 안겨 주었고, 학자들은 도서관과 학교의 설립을 환영했다. 높은 수준의 주거 방식과 식생활은 사람들에게 생활 수준의 향상을 가져다 줌으로써, 이스라엘인들도 헬라문화의 이 겉모습에 만족하고, 그 문화를 기꺼이 받아 들이게 되었다.
바벨론 유수 이전 시기에 있어서는 우상 숭배가 이스라엘에게 장애물이 되었었다면, 헬레니즘이야말로 바벨론 유수 이후에 이스라엘이 당한 가장 큰 유혹이었다.
바사와 헬라제국과 같은 이방 민족과의 접촉은, 전통적인 유대종교 의식에도 여러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헬라식 이름을 가졌고, 헬라철학을 받아들였으며, 자기 조상의 신앙과 헬라식 지혜를 혼합하려고 하였다. 반면 또 다른 이들은 헬레니즘에 저항하여, 율법을 더욱 폭넓고 깊게 연구하기도 하였다.
후계 장군들에 의한 헬라문화 전파
알렉산더는 BC 323년에 갑자기 33세에 병사하였지만, 그의 장군들이 제국을 계승하여, 헬레니즘의 물결은 더욱 고조되었다. 특히 이집트의 톨레미 왕조와 시리아의 셀루커스 왕조는 영토와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서로 싸웠지만, 그들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사명에 대해서만은 완전히 일치하였다. 특히 셀루커스 왕조에 의해서 헬라화는 더욱 철저히 진행되었다.
이스라엘은 이때부터 톨레미 왕조와, 연이어서 셀룩커스 왕조에게 약 250년간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BC 2세기 후반에 유대인 마카비가 혁명을 일으켜, 셀루커스 왕조로부터 독립하여 하몬스 왕조를 세워 약 100년간 존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헬라의 두 왕조가 분쟁중에 약해진 틈을 타서 로마가 이들을 점령하였으며, BC 63년에 이스라엘도 마침내 로마의 지배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로마가 이스라엘을 점령한 지 63년 뒤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으며, 33년 동안의 생애 내내 로마의 통치시대 속에서 활동하셨다. 그리고 신약 성경 곳곳에 나오는 로마 군인과 정치인들, 그리고 로마의 화폐와 도량형이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사가 타른(W>W> Tarn)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알렉산더가 세상을 너무 변화 시켰으므로, 그의 후대에 가서는 아무 것도 그 이전처럼 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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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문화사적 업적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여,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킨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한 데 있다. 이는 참으로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이 가져온 가장 두드러진 영향의 하나라고 할 만하다(→ 알렉산드리아, 헬레니즘).
반면에 그의 민족 동화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란인 사트라프는 유력한 역할을 하지 못해던 것으로 보이며, 18명 중에 10명이 제거되거나 처형당했다. 그 사법적 판단근거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마케도니아인 지도자와 일반인 모두 그 구상을 거부했고, 이후의 셀레우코스 제국에 이르러서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출신들이 뚜렷하게 지배세력을 형성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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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드로스의 짧은 재위기간은, 유럽과 아시아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으로 작용했다. 그의 원정과 과학탐구에 대한 개인적 관심 덕분에, 지리학과 박물학 분야에서 큰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의 활약으로, 문명의 커다란 중심이 동방으로 옮겨졌으며, 그리스 지방 왕국들의 새 시대가 열렸다.
광범위한 식민지개척의 물결을 타고, 헬레니즘이 근동 전역에 전파되었고, 정치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경제적·문화적으로는 지브롤터에서 펀자브에 이르기는 넓은 단일 세계가 창조되었다. 이 세계는 광범위한 무역과 사회적 교류의 길이 열려 있었고, 상당한 정도의 공통적 문명을 지녔으며, 그리스의 코이네(koin)어를 공용어로 썼다.
로마 제국의 건설과 그리스도교가 세계종교로 보급된 것 및 비잔티움이 오랜 기간 존속한 것들은, 모두가 어느 정도는 알렉산드로스가 이룩한 업적의 결실이라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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