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에 나타난 데살로니가 교회의 특징 바울은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 주요도시 중심의 선교방침을 채택하였다. 드로아에서 꿈속에 본 마케도냐인의 환상을 보고 아시아 대신 마케도냐 선교에 착수한 바울에게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냐의 수도로서 매우 주요한 선교 거점이었다. 사도행전을 근거로 볼 때,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도착하여 처음에는 유대인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였으나, 유대인들이 시기하자 야손의 집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야손의 집으로 침입하여 바울은 밤에 베뢰아로 도피하였다(행 17장). 이런 내용을 근거로 볼 때 데살로니가교회는 주로 초신자들이 많은 교회이었으며, 바울이 고린도로 떠나 다음 ‘지연된 파루시아’로 인한 신앙적 갈등과 혼란을 겪을 뿐만 아니라, 거짓사도들로 말미암아 종말을 빙자하여 현실생활에 성실하지 못한 기독교인들의 방종이 문제가 되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의 이런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충직한 동역자이며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군인 디모데”(살전 3:2)를 데살로니가 교회에 파송하여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앙상태를 점검하게 하여 문제점들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였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신앙적 문제가 발생하였지만,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의 장점을 지적하고 그들에 대한 자신의 기대를 밝혔다. 바울은 자신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떠난 뒤에 교회가 ‘궁핍과 환난’(살전 3:7)의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과 사랑’(살전 3:6)을 잘 지켰음을 크게 칭찬하였다. 교회가 영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한 사실에 대해 바울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살전1:2)하며, 데살로니가 교회 형제들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임을 일깨워주며, 교회 공동체의 ‘소망의 인내’(살전 1:3)가 ‘마케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고 교회 공동체를 사랑 안에서 충분히 인정하고 위로하고 있다.
2. 데살로니가 교회가 서게 된 배경 빌립보를 떠난 바울 일행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도착하였다. 문자적으로는 간략한 기록이지만, 현실적으로 데살로니가는 네압볼리로에서 163Km 떨어진 그리스 최대의 항구도시이다. 옛날 사람들의 도로사정 및 여행수단을 감안한 여행 속도로 계산해 볼 때, 163Km의 거리는 밤낮으로 걸어도 6~7일 이상이 걸린다. 더구나 바울은 이미 빌립보에서 당한 고난과 능욕의 상처(살전 2:2)로 피곤과 고통으로부터 회복할 시간적 환경적 여유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 장거리 이동을 감행해야 했다. 아마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도착하였을 때는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인간적 의지만으로는 실로 복음사역을 감당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데살로니가가 마케도냐의 수도이므로 선교의 중점기지가 된다는 사실과, 바울일행이 현실적 고난과 어려움을 극복하며 세운 데살로니가교회가 종말적 신앙의 문제로 흔들릴 때 데살로니가교회를 확고히 세우기 위해 바울이 얼마나 간곡하게 권면했을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3. 데살로니가의 역사적 지리적 배경 데살로니가라는 도시명은 필립2세의 사위 카산더 장군이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에 왕위에 올라 기원전 315년에 이 도시를 세우고 자기 부인의 이름을 따서 데살로니가로 명명하였다. 데살로니가는 B.C 167년 마케도냐를 정복한 로마에 의해 마케도냐 제 2구역의 수도가 되었으며, B.C 142년 마케도냐가 재조직되자 주의 수도가 되었으며, B.C 42년 빌립보 부근에서 벌어진 로마의 2차 내란시 옥타비아누스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자유도시의 특권을 부여받았다. 특히 이곳은 내륙의 풍요로운 농경지를 동쪽의 육로와 해로에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키케로에 의해 그리스 영토의 심장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 마케도냐는 인구 약 20만의 큰 도시인데다가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데살로리가의 이런 장점을 살려 발칸 반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임을 인식하였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들은 빌립보에서 심한 고초를 당하고도 무려 160Km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데살로니가로 결사적으로 들어갔고, 결과적으로 유럽에서 빌립보에 이어 두 번째로 교회가 세워진 지역이 되었다.
4. 데살로니가의 유적 데살로니가교회가 야손의 집에서 이루어진 가정교회이었던 만큼 데살로니가교회란 찾아볼 수 없으며, 아쉽게도 바울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유적도 남아 있지 않다.
1) 드미트리우스 교회 데살로니가에는 주로 비잔틴 시대의 교회들이 보존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교회는 성 데메트리우스교회이다. 현재 정교회 예배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입구에는 분향하는 초들이 꽂혀 있고, 교회 내부에는 양쪽으로 기둥들이 줄을 지어 있으며, 벽면에는 성인들의 그림이 장식되어 있고, 교회정면 지성소도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이 교회는 갈레리우스 황제로 인해 순교한 드미트리우스를 기념하는 교회로서 그를 수호성인으로 추앙하며, 그의 성골함이 지하에 안치되어 있고, 옛 교회의 형태도 지하에 보존되어 있다.
2) 필립2세의 동상과 알렉산더 동상공원 길거리에 갑옷을 입은 필립2세의 청동으로 된 입상이 있다. 필립 2세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이다. 그는 아들이 세계를 정복하도록 재원을 준비해 주었고, 그 대표적 도시는 바로 빌립보이다. 아버지의 동상이 홀로 길거리에 세워져 있는데 비해, 알렉산더 대왕이 말을 탄 모습의 동상은 한편으로 바닷가를 인접해 위치한 공원에 자리잡고 있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동상은 화려했다. 동상을 떠받치고 있는 단의 사면에는 알렉산더 정복전쟁의 과정을 조각해 놓았다. 알렉산더가 세계정복 및 하나의 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던 마케도냐의 왕이므로 마케도냐의 수도인 데살로니가에 그의 동상이 세워질 법도 하다.
3) 화이트타워 높이 32미터의 원통형 기둥처럼 생긴 회백색 건물로서 18-19세기에 터키인들이 이 타워를 감옥으로 사용했다. 1826년 마흐메드 2세의 명령으로 엄청난 학살이 이루어져 ‘피의 탑’으로 불려지므로, 화이트타워 대신 피를 연상시키는 레드타워라고 불리기도 한다. 건물의 꼭대기에 그리스 깃발이 휘날리는 이 건물은 현재 일부가 박물관 및 조망대로 개방된다.
4) 데살로니가 고대성벽, 열두사도 기념교회, 갈릴리우스 개선문 위의 유적지들 이외에 데살로니가에는 고대성벽, 열두사도 기념교회, 갈릴리우스 개선문 등이 있지만, 성지순례 일정상 우리 팀은 이런 곳들을 방문하지 못했다. 데살로니가에 바울의 선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유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성지순례 일정상 같은 날 데살로니가와 빌립보를 방문해야 하느데, 성서적 유적지가 더 많이 보존되어 있는 빌립보 방문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기 때문이다.
5. 데살로니가의 의의 데살로니가교회 자체는 초신자들로 이루어진 교회이었고 그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가정교회로 추정되지만, 궁핍과 환난의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으로 인내하고, 사랑의 헌신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마케도냐 지역에 모본이 되었던 교회이었다. 바울이 마케도냐 지역의 선교를 위해 초석으로 삼은 데살로니가교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매우 크지만, 데살로니가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막강한 도시였던 모습을 경험함으로써 바울이 육체적 고난과 환경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에 대한 선교적 비중과 열정을 품고 교회를 세웠던 이유를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