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의 아폴로 신전*
1. 고린도의 위치와 역사
고린도는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Peloponnesos) 반도가 만나는 ‘두 바다 사이에’ 위치해 있는 도시로, 동쪽 해협 입구에는 겐그리아, 서북쪽으로는 살로미카만의 레헤움(Lechaeum) 항구가 있다. 이처럼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 때문에 고린도는 고대사에서 잦은 전쟁터로도 유명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광채요, 장식’이라고까지 격찬할 만큼 상업과 행정의 중심도시였다. 지리학자 스트라보(Strabo)는 이 도시 외곽 성벽의 길이가 16km에 달했으며 도자기 공업, 철가공업, 융단제조업이 활발해서 기원전 600년경부터는 독자적으로 화폐를 주조했을 정도로 산업이 발달되었다고 한다. 그리스인들의 로마에 대한 우월감과 적개심은 대단했는데, 기원전 194년경, 그들은 의식적으로 아가야 연맹을 조직하고 로마의 침공에 대비했다. 이 때 고린도는 그 연맹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독자적으로 로마와의 전의를 다진 것은 다른 도시국가들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리스의 로마 저항 최후의 보루였던 고린도는 기원전 146년, 로마 장군 뭄미우스(Mummius)가 이끈 군대와의 혈전에서 지고 만다. 이 때 도시는 모두 파괴되어 초토화되었고 뭄미우스는 노예와 자유인 구별 없이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인들과 아이들은 노예로 팔아 버렸다. 그 도시를 한번 떠난 사람들은 누구도 다시 찾아오지 않아 그 후 오랫동안 고린도는 폐허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이 도시는 약 1세기가 지난 기원전 44년에야 줄리어스 시저에 의해 재건되어 제국 안에서 주로 노예 계층에서 갓 해방된 자유인들을 이주시켰다. 그 후 기원전 27년에는 아가야 전 지역을 다스리는 행정부가 고린도에 설치되고, 기원후 44년에는 원로원 직할구역이 되어 총독이 주둔할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하게 되었다. 로마는 동쪽 겐그리아 항구를 보수하고 위 아래 지방에 두 방파제를 재건하여 동방과의 교역 중심지로 만들었고, 서쪽 바다로 가는 고린도 서북편의 레헤움도 번창한 항구 도시로 발전시켰다. 이로써 고린도는 역사 속에서 명실공히 동서 사이의 무역의 중심지로, 정치적으로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로서, 로마 총독이 상주하는 곳으로 새로이 등장한 것이다. 우리가 지금 가 볼 수 있는 폐허 고린도는 바로 이 재건된 도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린도를 말할 때에는 두 개의 고린도를 전제해야 한다. 하나는 그리스인들로 구성되었던 옛 그리스의 전형적인 도시국가로서 고대에 영화를 누렸으며, 고린도적 생활을 한다는 말이 곧 극에 달한 사치와 방탕한 생활에 대한 악평을 뜻했던, 기원전 146년 전쟁의 패배로 폐허가 된 고린도와, 또 다른 하나는 그 이후 기원전 44년에 시저에 의해 재건된 새로운 로마식 식민지 고린도이다. 이 때 고린도의 공식적인 이름은 ‘라우스 줄리아의 식민지 고린도’(Colonia Laus Corinthiensis)였다.
2. 바울이 방문한 고린도
바울이 예루살렘의 사도회의 이후 마케도니아 지방의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그리고 바로 이웃 아덴을 거쳐 복음을 들고 갔던 고린도는 로마인에 의해 건설된 두 번째 신흥도시였다. 그 때의 고린도는 옛 고린도와는 주민의 민족적 배경에서나 생업에서 매우 달랐다. 새롭게 번창한 항구도시의 주님들은 로마의 관리, 상인, 교역인, 군인, 선원, 그리고 로마 제국의 모든 식민지에서 보다 나은 삶을 찾아 이주해 온 하층 계급 출신의 자유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퇴역장교들은 다른 곳에서보다는 우대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수가 이 곳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었다. 또한 여러 이유로 로마 제국 각처에서 유입되어 온 새로운 이주민들 때문에 고린도의 인구는 급증했다. 고린도에서 발굴된 비명들 중에 라틴계 이름이 더 많은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확증해 준다. 고린도 시민들은 그 당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던 반면, 제국 동쪽 지방에서는 여전히 소요가 끊이지 않고 있어서 이를 피해 고린도로 유입된 많은 사람들 중에는 생활력이 강한 상당수의 유대인들도 있었다. 1세기에 이미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회당을 세울 정도의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고대 고린도 박물관 마당에 보존된 한 기둥의 문설주 위에 ‘히브리인의 시나고그’라고 씌어 있는 글자를 판독할 수 있으나, 이것의 연대는 기원후 2, 3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바울이 그 곳에 갔을 때, 유대인들의 회방이 이미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생활력과 기동력이 강한 그들이 팔레스타인은 물론 소아시아나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로마 제국 내의 다른 지방으로부터 고린도를 찾아옴으로써 팔레스타인읜 유대교는 물론 자신들의 전통과 문화로 고린도의 유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서신들에서 당시에 지배적이었던 헬라적 유대교의 지혜신학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기도 했던 것이다.
3. 고린도의 지정학적 특징
고린도의 지정학적 위치는 이 도시가 고대 문헌들 속에서 ‘죄악의 도시’로 불리게 된 자연스러운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고대 문헌들 속에서 ‘고린도인처럼 산다’는 말은 ‘방탕한 생활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심지어 ‘고린도 소녀’는 매춘부와 동의어로 이해될 정도였다. 그러나 새로 건설된 고리도에도 이러한 경향은 크게 개선된 것 같지 않다. 고린도가 이처럼 성적 타락과 같은 부도덕한 생활에 오염된 것은, 항구도시라는 지정학적인 이유 외에도 주민들 상당수가 노예 계층 출신으로 자유방임주의적인 성향을 강하게 띤 자유인들이었다는 사실과 제국 안에서 새로 이주해온 사람들로 구성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리스나 로마의 혼합주의적 종교 상황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상업 조건과 교통이나 지연관계 또는 인적 관계로 새로 이주해 온 여러 민족들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인구 10만 가운데 노예가 3분의 1을 차지했고, 다양한 민족적 배경을 가진 주민이 혼합해 살았다는 것과 관련하여 고린도인들의 다양한 종교의식들을 간과할 수 없다. 주민들은 그리스의 전통적 수호신인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 Pandemons), 이집트의 남신과 여신인 이시스세라피스 신, 그리고 신들의 어머니인 아시안을 섬겼다. 신들 중 여신들의 신전에는 수천 명의 직업적인 창기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사랑과 정욕의 여신들을 섬기는 일종의 여성 사제들이었다. 참배자들이 때때로 신전에서 숙박하면서 이런 여사제들과 갖는 성행위는 종교적인 의미까지 부여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결국 고린도인들에게 성적 타락과 같은 부도덕성을 야기 시켰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고린도는 그리스 철학의 중심지는 아니었으나, 디오게네스의 무덤이 있다는 것과 함께 견유학파의 활약지였음을 고려한다면, 헬라 철학이 크게 유행했던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4. 주요 유적
1) 아롤론 신전과 로마시대의 화장실 구 고린도의 유적에는 그리스에 남아 있는 신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로 들 수 있는 기원전 6세기경의 아폴론 신전이 있다. 이것은 목조 신전에서 석조로 바뀐 초기의 것이다.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도리스식의 기둥이 남아 있는데 이 때까지 기술이 미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유적에는 로마 시대의 화장실도 있다. 입구 바로 왼쪽, 에우리클레스 목욕탕에 부설되어 있던 것이라고 한다. 대리석 판에 구멍만 뚫려 있지만 거기에 앉으면 눈앞에 물을 흘려보내는 홈이 있다. 이 무렵부터 이미 물을 사용했던 것이다. 돌이 깔린 레케온 거리가 끝나는 곳에 계단이 있다. 이 곳이 전문이 있던 곳이다. 그 곳을 빠져나오면 옆에 넓은 광장이 나온다. 정면에는 남쪽 스토아가 있는데 기원전 4세기에 상점 거리가 있었던 곳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로마 시대의 것이다. 전문의 동쪽으로는 피레네의 샘이라고 불리는 로마 시대의 건물이 있다. 현재도 자연적으로 물이 나오고 있다. 고대에도 이곳은 저수장으로 이용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샘’이라기보다는 단지 ‘흐르는 물’에 지나지 않는다. 광장을 둘러싸이듯이 아고라가 있었다. 지금은 그것을 전해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예전에는 광장 중앙에 연단이 있었고 사람들의 교류와 정보 교환의 장이 되었다고 한다. 산도 바울도 이 연단에서 기독교 설교를 했다고 한다. 또한 광장은 경기장으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남쪽 끝에는 출발선이 남아 있다. 박물관이 있는 방향은 아고라의 서쪽으로 거기에도 상점이 들어가 있었던 스토아와 로마 시대의 작은 신전이 몇 곳 있었다고 한다. 광장에서 박물관 오른쪽으로 ‘글라우케의 샘’이 있다. 이 샘에도 피레네의 샘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2) 유적 박물관 박물관에는 신석기 시대부터 로마 시대까지 이곳에서 발굴, 발견된 것과 이 지방 일대에서 출토한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각 시대의 작품 중에서도 유명한 고린도 항아리가 많이 있어서 흥미롭다. 항아리와 동시에 검은 색조의 그림이나 붉은 색조의 그림이 그려진 토기도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박물관의 북쪽에 주차장과 유적으로 가는 출입구가 있다. 주차장 옆에는 기원전 5세기의 극장터와 로마 시대의 음악당 터를 볼 수 있다. 유적의 남서쪽에는 해발 575m의 아크로코린도 산이 정상에 요새를 갖추고 우뚝 서 있다. 이 요새터는 고대의 것이 아니라 중세에 만들어진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그 산 정상에도 샘이 있었다고 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