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사도바울이 재판을 받았던 비마*
고린도 교회에서의 바울
1. 고린도 교회
사도행전 18장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도착해서 복음을 전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은 글라우디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에 의해 로마를 떠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안식일마다 유대인 회당에서 성경을 가르쳤다(행 18:1-3).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와서 바울 일행과 합세했을 때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밝히 증거하자 유대인들이 대적하고 훼방하므로 디도 유스도라 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God-fearer, 이방인으로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 집에서 복음을 전했다. 유스도집은 회당 옆인데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식구들과 함께 예수를 믿었고 많은 고린도인들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 바울은 밤에 주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1년 6개월 동안 고린도에서 말씀을 전했다(18:5-11).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에 유대인들이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고소했으나 갈리오 총독은 유대인들 내부 문제(언어, 명칭, 법)에는 개입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그들을 법정에서 추방햇다. 그 때에 유대인들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렸으나 갈리오 총독은 상관하지 않았다.(18:12-17). 바울은 여러 날 더 체류하다가 고린도를 떠났다(18:18). 이것이 고린도 교회 설립 당시의 상황이다.
여기서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한 때가 글라우디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 얼마 후(당시로 보면 최근)였다는 것과 고린도에 유대인 회당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의 복음사역 결과로 많은 고린도인들이 예수님을 믿었고 이방인으로 유대교에 개종한 유스도도 믿었으며 회당장과 그 가족도 믿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고린도 교회의 설립 당시 구성원들은 이미 다수의 이방인들(고린도인들)과 소수의 유대인들(회당장 가족)과 유대교 개종자들이었다. 또한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 사역을 한 기간이 갈리오가 로마 식민지 아가야의 총독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였다는 것과 그 당시에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고린도에 살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1) 글라우디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
로마 황제가 유대인들을 로마로부터 추방한 것은 글라우디오 황제 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티베리우스(Tiberius) 황제(A.D. 14-37)도 유능한 유대인들을 사르디니아(Sardinia)로 추방했고 나머지 유대인들도 로마를 떠나게 했다. 글라우디오(Claudius) 황제 초기에는 유대인들이 상당한 자유를 누렸으나 얼마 후에 글라우디오는 유대인들을 추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다.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는 그의 「클라우디우스의 생애」(Life of Claudius)에서 “크레스토스(Chrestos)라는 사람의 선동을 받은 유대인들이 항상 소란을 피워서 그는 그들을 로마로부터 추방했다”고 기록했다. 5세기의 스페인 역사가 파울루스 오로시우스(Paulus Orosius)에 의하면 이 추방 사건은 글라우디오 9년에 이루어졌는데 글라우디오 9년은 A.D. 49년 1월 25일부터 50년 1월24일까지의 기간에 해당된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이 기간에 로마로부터 추방괴어 고린도에 도착했을 것이다.
(2)유대인 회당과 고린도 교회 초기 교인들
고린도 회당의 위치가 어디였는지에 대해 정확한 정보가 없다. 그러나 레가이론로(Lechaion Road)로부터 아고라(시장)로 들어오는 길 입구 계단 밑에서 출입문 상인방(가로대)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길고 무거운 블록이 발견되었는데, 그 위에 일부 파손된 헬라어 7개 대문자로 ‘유대인들의 회당’이 새겨져 있었다. 그 글자의 연대는 아마 5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고린도에서 발굴 작업을 하던 미국 고고학자들은 또한 종려나무 잎들과 함께 3개의 7가지 촛대(menorah)가 새겨진 대리석 받침대를 발견했다. 그 대리석 받침대 역시 5세기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회당”이란 간판과 7가지 금촛대도 당시 고린도 회당의 위치가 정확하게 어디인지 알려주지는 않는다. 고린도 교회는 헬라인들과 로마인들과 유대인들과 종들과 자유인들이 있어서(고전 12:13) 고린도시의 거울과 같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많은 고린도인들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했는데 그들 중에 스데바나 가정, 아가이고, 에라스도, 글로에의 가정 등은 헬라인들이었고, 브드나도(Fortunatus), 더디오(Tertius), 구아도(Quartus), 바울이 그 다음 방문 때 머물렀던 집 주인 가이오 등은 로마인들이었을 것이다(고전 16:15, 17;롬 16:23). 고린도 교회 초기 교인들 중에는 아굴라(Aquila), 브리스길라(Priscilla), 그리스보(Crispus), 누기오(Lucius), 야손(Jason), 소시바더( Sosipater)등 유대인들도 있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고린도 교회 안에 유대인들이 있는 것을 전제했다는 근거가 있다. 고린도 교회의 일부 신자들은 할례를 행했고(7:18) 바울이 모세 율법에 호소했으며 (9:8-10; 14:34) 일부 신자들은 구약의 해석과 적용에 익숙한 자들이라는 암시를 주었던 것이다(10:1-13).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일부 유대인들이 있었으나 주로 헬라인들과 로마인들, 즉 이방인들이 있었던 것 같다. 유대인들이 할 수 없는 이방인들의 특성으로 과거에 우상숭배를 했다는 것(6:10-11;8:7; 12:2), 신전 잔치에 참석한다는 것(8:1-10:22). 독신과 결혼(7장), 일반법정에 고소하는 사건(6:1-11), 창녀들에게 가는 것(6:12-20), 육체적 부활의 부인(15장)등이 고린도전서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의 이방인 교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면서 헬라적 세계관과 윤리관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다시 말해서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안에 ‘고린도’가 아직 많이 들어 있어서 ‘환자’를 살리기 위한 과감한 수술이 필요했던 것이다(Fee4). 고린도 교인들 대부분은 철학자들이나 귀족들이나 세력가들이 아니었고 노예들도 있었으나(1:26; 7:20-24) 스데바나(1:16) 와 에라스도(Erastus)는 예외였다. 고린도 교회에는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 사이에 갈등도 있었던 것 같다(11:17-34). 극장을 지나가는 거리의 북쪽 끝 작은 광장에 보도를 수리하는데 사용되었던 블록에 “에라스도는 자신의 재무관직에 대한 보답으로 사비로 이 보도를 놓았다”는 글귀(ERASTUS PRO AEDILITATE S〔UA〕P〔ECUNIA〕 STRAVIT)가 발견되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 문안에서 고린도 교회 교인 중에 “이 성의 재무 에라스도”를 언급했다(롬 16:23). 에라스도는 고린도 성의 재무로서 상당한 권력과 금력을 소유한 정치적인 엘리트였던 것 같다. 바울이 설립한 고린도 교회에는 이렇게 유력한 이방인 교인들이 있었지만, 유력한 유대인 회당장 가이오와 그 일가와 이방인으로 유대교에 개종한 디도 유스도도 있었다. 고린도에서 바울을 반대한 유대인들이 난동을 부렸을 때 바울을 변호한 사람은 소스데네라는 회당장이었는데, 그는 아마 그리스보의 후임이었거나 아니면 다른 회당의 회당장이었을 것이다. 소스데네는 바울이 1장 1절에서 언급한 소스데네의 형제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3) 갈리오 총독
바울이 고린도에 체류한 기간이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으로 재임하던 기간과 겹친다는 것을 보았다. 갈리오는 네로(Nero)의 가정교사인 로마 철학자 세네카(Annaeus Seneca)의 형제로서 아가야 총독이었다. 갈리오는 그의 아버지의 친구이며 유명한 수사학자인 갈리오(Junius Gallio)에게 입양되었다. 세네카는 자신의 형제 갈리오를 높이 평가해서 그의 책 두 권(De Ira, De Vita Beata)을 갈리오에게 헌정했다. 갈리오는 성격이 명랑하고 정치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고린도에서 유대인들이 일으킨 선동사건에 개입하지 않은 것을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플리니(Pliny)에 의하면 갈리오는 총독이 된 후 중병에 걸려서 병을 고치기 위해 바다 여행을 했다고 한다.
2. 고린도교회에 서신을 쓴 계기
바울이 A.D.50년경(49-51년)에 고린도에 가서 복음을 전함으로 고린도 교회를 창설하였다(행 18장). 바울은 고린도에서 18개월간 복음을 전한 후에 에베소에 있을 때에 고린도전서 ‘이전의 편지’(Previous Letter)를 고린도에 보냈던 것 같다(고전 5:9). 바울이 어떤 계기로 그 편지를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편지는 탐욕과 강도와 우상숭배와 아울러 특별히 신자들 중에 성적인 부도덕에 빠진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 내용이었다. 바울은 그 후에 A.D. 53-54년경 에베소에서 고린도전서를 써서 고린도에 보냈다(16:8). 그렇다면 바울이 왜 고린도전서를 써서 보냈을까?
바울은 글로에의 집 편으로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1:11).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 분파들이 있었고 그들 사이에 분쟁이 이었던 것이다. 바울은 또한 고린도 교회로부터 편지를 받게 되었다. 결혼과 독신에 대한 질문과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질문이 그 편지의 내용이었던 것 같다(7:1;8:1). 고린도 교회의 편지는 에베소에 있는 바울을 방문한 고린도 교회의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를 통해서 바울에게 전달된 것 같다(16:17).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다룬 내용 중에 어느 부분이 말로 들은 것에 대한 편지이고 어느 부분이 고린도에서 온 편지에 대한 회신인지 1-4장의 내용, 즉 글로에의 집 편으로 들은 내용과 편지로 문의한 7-10장의 내용을 제외하고는 확인하기 쉽지 않다. 어쨌건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로부터 들은 내용과 편지로 받은 내용은 고린도 교회의 분파 문제(1-4), 간통 문제(5장), 세상법정 고소 문제(6장), 결혼과 독신 문제(7장),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8-10장), 공예배와 성찬식 문제(11장), 영적인 은사 문제(12-14장), 육체적인 부활 문제(15장)등이었다. 바울은 이러한 사회적, 윤리적, 교회적, 신학적 문제에 대해 신학적이고도 실제적인 해결책을 고린도전서에 기록했다. 특별히 신학적으로 볼 때 고린도전서는 분파문제를 십자가의 복음으로 해결함으로 시작해서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는 문제를 육체적인 부활을 증언하는 것으로 해결함으로써 끝나는 서신으로 상당한 의의가 있다.
3. 고린도의 바울 반대자들
고린도후서 2장 1절에서 바울은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했다고 했다. 이 말씀은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보내기 전에 고린도 교회에 ‘근심의 방문(Painful visit)'을 한 것을 암시해 준다. 바울이 ’근심의 방문‘을 한 것을 통해 그 방문 이전에 이미 고린도 교회 안에 상당한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고린도후서 10-13장에서 언급된 대로 고린도 교회에 외부인들이 침입해 들어와서 바울을 대적하고 고린도 교회를 혼란하게 했다는 증거가 고린도전서에는 강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복음을 전하면서 거기서 나오는 것을 먹고 마실 권한을 언급하다가 12절에서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라고 했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너희”라고 하고 바울과 바나바 등을 포함한 복음 사역자들을 “우리”라고 하면서 외부에서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자들을 “다른 이들”이라고 했다. 고린도 교회에는 이렇게 외부로부터 들어와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외부인들이 바울을 대적하고 고린도 교회를 혼란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지만, 고린도전서에서는 고린도 교회 자체 내에서 바울을 대적한 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바울이 4장 18절에서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라고 했는데, 이것은 고린도 교회 안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바울의 권위를 약화시키면서 교만을 부리는 자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15장 12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했다. 바울이 분명히 고린도 교회에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15:1-4)고린도 교인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육체적인 부활을 부인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바울이 전한 복음에 도전했음을 보여준다. 4장 18절과 15장 12절을 보면 고린도 교회 안에 사도인 바울 자신과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서 도전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린도전서에서는 고린도의 바울 대적자들이 고린도후서에서처럼 바울을 공개적으로 대적한 단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바울에 대한 적대관계는 소수에 의해서 시작되어 점차 악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1:12;4:3,6,18-20;9:3;10:29-30;14:37;15:12)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의 사도적 권위와 복음에 도전한 자들은 고린도의 헬라 -로마 문화권과 바울이 전한 복음 진리 간의 괴리 때문에 도전한 것으로 보인다. 고린도 교회는 복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헬라-로마 문화권에서 중시하는 ‘로고스’와 ‘소피아’와 ‘그노시스’를 종래와 같이 중시한 결과 십자가의 복음, 즉 세상적으로 미련해 보이고 무능해 보이는 십자가의 ‘로고스’를 경시했던 것 같다(1:18-2:9). 고린도 교회는 “모든 구변”(‘로고스’)과 “모든 지식”(‘그노시스’)과 “모든 은사”를 풍족하게 받았는데(1:5-7), 그것을 십자가의 복음과 통합하지 못하고 세상적인 웅변화 지식 면에서 생각하면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그 복음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고린도 교인들이 헬라적 웅변과 지혜의 각도에서 보았을 때에 바울에게는 그런 것이 부족했던 것이다(2:1-5). 그들이 헬라-로마 문화에서 자랑하는 지도자의 웅변과 지혜와 명예 면에서 볼 때 “만물의 찌끼”와 “세상의 구경거리”같은 십자가와 이에 걸맞는 십자가의 복음 사역자 바울은 초라하게 보였을 것이다(4:6-13). 그들은 스스로 이미 성령을 받아 하나님 나라가 실현된 상태에서 다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4:8)(“과도실현”종말론, “영화 종말론”)바울은 초라하기 짝이 없으니 십자가의 복음과 십자가 복음의 사역자를 이해하지 못한 그들이 바울과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 도전한 것이다. 사실 ‘로고스’와 ‘소피아’와 ‘그노시스’와 ‘프뉴마’(성령)가 교만과 자랑의 요인과(4:6, 18;5:2;8:1) 고린도 교회안에 분파와 분쟁의 요인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바울과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 도전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바울이 9장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강력하게 변화한 것도 “바울을 힐문하는”, 즉 재판자리에 앉아 바울을 재판하는(9:3)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의 사도권을 무시한 대적자들은 심지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도 유일하신 하나님만 계시고 우상들은 없다는 ‘그노시스’(지식)에 근거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신전에서 제사과정 중 하나로 우상제물을 먹는 잔치 행사에 참석하여 그 음식을 먹는 것도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주장한 것 같다(8-10장).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도 자신의 사도권이 무시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9장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했던 것 같다. 바울은 그러면서도 자신은 자신의 사도권을 자신의 자유와 권한을 누리고 행사하기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어찌하든지 사람들을 구원하는 방향에서 사용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운 자신이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된다고 한 것이다. 바울이 9장에서 언급한 사도권, 즉 복음을 전하는 자가 복음을 전함으로써 거기서 나오는 것을 먹고 마실 수 있다는 것을 언급할 때 어쩌면 고린도 교회의 부자 신자들의 후원을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른다. 고린도 교회의 일부 부유한 신자들은 고린도 교회를 후원할 뿐 아니라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 분파 형성의 배후에도 후원자들로 있었을 것이다. 고린도 교회 안에 라이벌 가정교회들이 따로 있고 그런 후원자들이 각 분파의 가정교회를 후원했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교인들을 후원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런 후원자들이 볼 때 바울은 자신들의 후원을 거부하기 때문에(고후 11:7-11) 그들 속에 반(反) 바울적 심리가 생겨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런 상황 속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면서 그것을 구원의 복음 전파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는 말을 하였을 것이다.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에게 도전한 자들은 위에서 말한대로 ‘성령’ 문제에 있어서도 자만심을 가졌던 것 같다. 바울은 14장 36-37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했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 성령의 은사들을 받은 자들이 자신들만이 신령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심지어 바울까지도 무시하는 경향을 보였던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그렇게 교만하여 자신의 사도적 권한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한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앞서 지적한 대로 성령의 은사들을 받은 것이 마치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완성된 것처럼 생각하고 자신들은 그 완성된 천국에서 다스리는 자들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교회 안에 혼란을 초래했던 것 같다. 그들은 특별히 방언의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하나님께서 은사를 한 사람에게 다 주시지 않고 각 신자에게 분배하신다는 것과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그 지체들의 덕을 세우는 것이 은사의 목적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12-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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