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역사 문헌 가운데 이 문장만큼 간단 명료하면서 카리스마가 강하게 배어 있는 구절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 문장은 천재적인 과학자 아이작 뉴턴(1642∼1727),알버트 아인슈타인(1879∼1955)과 신학자 장 칼뱅(1509∼1564),카를 바르트(1886∼1968) 등 과학과 신학의 거장들에게 숱한 번민의 밤을 지새우게 한 구절이다. 이들에게 과학적 신학적 번민을 더한 것은 이 메시지가 최초로 시간의 도입을 알리는,그래서 우주 역사의 시작이라는 데 있었다.
따라서 시간의 실체에 대한 이해 없이 전지전능(全知全能)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은 사실상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신학자는 물론 창조과학자들의 주장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에 등장하는 첫번째 구절인 ‘태초’에 대한 명쾌한 이해는 곧바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성서의 무오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간의 실체는 무엇일까? 20세기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등장으로 시간의 실체에 대한 구체적 접근이 시작된다. 시간도 공간과 동일한 물리적 차원의 하나이며 따라서 시간과 공간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닌 서로 연결된 차원이라는 것이 이 이론의 핵심이다. 상대성 이론의 등장 이전 즉,뉴턴의 운동법칙이 지배했던 17세기부터 20세기초까지는 시간과 공간은 물리적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흘러가는 물리량이었다. 이 개념은 지금도 물리학 전공자가 아닌 다수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결코 시간의 실체에 대한 이해는 불가능하며 적어도 무한한 하나님에 대한 과학적 접근 역시 어렵다는 것이 양쪽 학자들의 주장이다.
시간과 공간이 하나로 묶여 있다는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빛의 속도에 버금 가는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정지한 사람보다 시간이 훨씬 천천히 흘러간다. 그 예로 ‘쌍둥이 패러독스’(twin paradox)를 들 수 있다.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 형제 중 형을 빛의 속도를 내는 우주선에 태워 지구로부터 1000광년 떨어진 북극성을 여행하고 돌아오도록 하면 지구에 남겨진 동생은 나이가 2000살이 되지만(죽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 우주선의 형은 아주 어린 나이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지구의 시간과 관측된 그 별의 시간은 서로 다르게 흘러간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거대한 우주에서는 절대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상대적 시간만 존재할 뿐이다. 진화론의 입장에서는 우주의 나이를 150억∼200억년,지구의 나이를 45억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창조론에서는 지구의 나이를 불과 1만년 미만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10억광년 떨어진 별빛이 지금도 관측되고 있는 천문학계의 보고는 창조론의 주장을 뒤엎기에 충분한 자료라고 할 수 있으나 이 또한 더 깊게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창조과학자들의 견해다.
그 단서를 제공한 과학자는 다름 아닌 천문학자다. 호주 시드니 머쿼리 대학의 이론물리학자인 폴 데이비스 교수는 과학잡지 ‘네이처’(2002.8.8)에 과거 별빛의 속도가 매우 빨랐다는 관측결과를 발표했다. 데이비스 교수는 대폭발시 빛의 속도는 무한대였다가 서서히 느려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창조 당시 데이비스 교수의 주장대로 빛의 속도가 무한대였다면 그때의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거의 정지한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시간이 과거에도 똑같은 속도로 흘렀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우주와 지구의 나이를 계산하는 것은 과학적 오류하는 지적이다. 젊은 지구를 주장하는 창조론이 오히려 천문학자에 의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공간과 함께 시간의 출발을 알리는 태초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발표되기 3400여년전,그것도 성서의 첫머리에 등장한다. 태초는 우주역사 즉,시간과 공간과 물질의 시작이기 때문에 인간적 시간(chronos)을 의미한다. 이와함께 무한한 하나님이 스스로 계셨을 때의 태초(요 1:1)는 신적 시간(chairos)으로 굳이 과학의 설명을 빌리자면 시간이 흐르지 않는,그래서 공간도 물질도 없는 ‘무의 영원한 때’를 일컫는다. 성서 기자는 성서의 무오성에 대해 이렇게 역설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마 5:18)
남병곤 기자 nambgon@kmib.co.kr
◇도움말 주신분:△한국창조과학회 △권진혁 교수(영남대 물리학) △이강래 교수(고신대 정보미디어학부장) △심영기 교수(인제대 나노공학부) △왕대일 교수(감신대 구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