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6)한국 최고의 목조 성당 강화읍 성당 | ||||||
[서울신문 2006-06-12 08:51] | ||||||
강화대교를 건너 강화읍에 들어선 뒤 고려궁지로 향하다가 오른쪽 좁은 골목길을 끼고 구릉 정상에 오르면 만나게 되는 강화읍성당(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북산과 남산의 가운데 지점에 한옥으로 잘 지어진 이 성당이, 바로 개항기 최대의 선교 거점이었음을 아는 이는 드물다. 전통 목조 중층 한옥의 성당은 정면 4칸, 측면 10칸의 총 40칸 규모. 팔작지붕을 얹고 목골 벽돌조로 외벽을 두른 한옥이지만, 내부공간을 전형적인 삼랑식(三廊式) 바실리카 양식으로 연출한 동서양의 정교한 만남이 이채롭다. 지금은 관할 사제 1명에, 불과 100여명의 신자가 적을 두고 있는 작은 교회지만, 1900년 세워질 때만 하더라도 강화에선 기독교를 통틀어 가장 먼저 세워진 큰 교회였다.
성공회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희준을 배출한 성당이고, 서울대교구장을 지낸 정철범 주교도 이 성당 출신. 이 성당보다 조금 늦게 강화에 세워진 온수리 성당은 현재 강화에서 교세가 가장 크지만, 여전히 강화읍성당은 이 지역 12개 교회와 기관을 대표하는 중심 성당이다.
성당의 모습은 세워질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남산을 향해 외삼문, 내삼문, 성당, 사제관이 늘어서, 마치 배의 형상을 연상케 한다. 선교사들이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가 되자.”는 뜻을 세워, 배의 모양으로 지었다고 한다.
우선 성당의 바깥 출입문인 외삼문은 뱃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강화읍내를 훤히 내려다보고 있다. 외삼문에서 3계단을 더 올라 내삼문을 지나도록 돼 있는데, 여기에는 종각이 들어서 있다.
원래 이 종각에는 1914년 영국에서 들여온 종이 매달려 있었는데, 서울대성당의 것보다 조금 작지만 음색이 아름답고 소리가 4방 30리까지 울려퍼졌다고 한다.1945년 일제에 의해 징발되었으며, 지금의 종은 1989년 신자들이 모금해 다시 매단 것이다.
종각 중간에 서서 배의 선복에 해당하는 성당의 팔작지붕을 올려다보면, 가장 먼저 ‘천주성전(天主聖殿)’이란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성당이나 예배당에서 일반적인 ‘당(堂)’ 대신 성전으로 쓴 것이 독특하다.
‘천주성전’ 현판 밑 4칸 벽면에 주련이 걸렸는데, 이 주련 위에 연꽃 무늬를 장식한 것도 인상적이다. 출입구인 전실과 회중석, 통로, 지성소(대제대), 감실(소제대), 예복실로 구성된 성당의 내부는, 바깥에서 보기와는 영 딴판.
모두 20개의 큰 나무기둥이 천장을 받치고 있는데, 전실에서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면 3번째 기둥 중간에 세례할 때 쓰이는 화강암 성천대가 있다. 6번째 기둥부터 북쪽으로 지성소와 제대가 들어서, 전체적으로 이 곳에 시선이 집중되도록 꾸몄다. 지성소 안에는 회중석 마루보다 높은 계단 위에 돌판을 깔고, 그 위에 화강암 제대를 고정했다.
이 제대는 의식을 거행할 때 신자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신성한 곳으로, 성당 전체적으로 가장 정성을 들였음을 알 수 있다. 제대 뒤 가운데 기둥에 하느님 야훼를 뜻하는 ‘만유진원(萬有眞原)’이라 쓴 현판은, 당시 선교사들이 선교의 근원으로 삼았다고 한다.
지성소 북쪽 1칸을 2계단으로 높이고 제대를 놓은 후, 정면에 성체를 봉안하는 성막을 안치했는데, 이곳이 작은 예배가 이루어지는 집회공간. 성당의 구조상 미사때 사제가 신자들에게 등을 보인 채 집전하는 형식이 살아 있는 유일한 성당이기도 하다. 나름대로 초기 교회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유배지 강화에, 이처럼 큰 성당이 세워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초기 선교사들이 이곳을 영국의 이오나(Iona) 섬처럼, 신앙의 성지로 삼으려는 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 서안에 있는 이오나 섬은 6세기쯤 콜롬바(Colomba)가 들어가 교회를 개척하고 수도원을 세운 성공회의 뿌리.
유배지 강화도도 당시만 해도 소외와 핍박의 땅으로 교회가 전혀 없었다. 선교사들은 강화외성 출입문인 진해루 밖 나루터에서, 한옥 한 채를 마련해 처음 선교를 시작했는데, 바로 이곳이 강화 최초의 교회인 셈이다. 당시 조선정부가 해군을 육성하기 위한 해연총제아문을 설치해, 그 직속으로 조선수사해방학당[해군사관학교]을 1893년 이곳에 설립했던 것도, 성공회가 이곳에서 가장 먼저 선교를 시작할 수 있었던 요인. 당시 영국인 해군장교와 포병교관이 임명되고, 통역으로 고용된 성공회 교인이 영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강화읍성당이 축성된 것은 성공회 3대 주교인 조마가(트롤로프) 신부때.1899년부터 터닦기를 시작, 1년간의 공사를 거쳐 1900년 11월15일 축성식이 열렸다. 조마가 신부가 신의주에 직접 가서 백두산 원시림 적송을 뗏목으로 강화까지 운반했으며, 도목수는 경복궁을 신축할 때의 도편수였다고 전해진다.
조마가 신부는 지금도 80세 이상의 고령자들에게 회자될 만큼, 강화도 지역에서 그의 치적은 곳곳에 담겨있다. 기와와 석재는 모두 강화산을 썼으며, 성당내 석물과 담장 기단은 인천에서 온 중국인 석공들이, 담장 미장은 강화 주민들이 맡았다.
강화읍성당이 축성된 뒤, 감리교, 장로교 등 개신교와 천주교가 앞다투어 선교에 나서 교회들을 세우면서, 그야말로 강화는 종교 각축장이 되어갔다. 지금 강화읍성당 주변에 감리교 중앙교회, 장로교 성광교회, 천주교 강화성당 등 강화지역에선 가장 큰 교단의 중심 건물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어, 당시 선교전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강화읍에선 지금 이 교회들과 주변의 고려궁지, 용흥궁 등을 연결하는 문화벨트 조성공사가 추진중이다.
■ 강화도 의병운동과 교회
1907년 강화도에서 기독교 인사들을 중심으로 번졌던 정미 의병운동은, 지금까지 큰 아픔으로 남아있다. 정미 의병운동이란 정미조약 직후 강제해산당한 군대 출신들이 의병을 조직해 무력투쟁을 전개한 사건.
이동휘 연기우 지흥윤 유명규 등이 주도한 의병들이, 일본인 순사와 일진회 강화지부 총무였던 강화 군수 정경수를 살해했는데, 이와 관련해 일본군 수비대가 의병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교인과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강화 의병운동의 핵심인 이동휘는, 강화 진위대장 출신으로 1905년 강화읍에서 감리교로 개종한 인물. 강화읍교회의 권사로서 강화 지역을 순회하며 선교사들로부터 ‘강화의 바울’이란 별명을 얻었다.
이동휘가 감리교 권사였다는 사실 때문에, 감리교회는 민족주의 단체로 인식됐고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이에 비해 성공회는 직접적인 무력투쟁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중도적인 입장을 택해 많은 주민들을 구한 공을 강조하고 있다.
당시 주민들이 전란을 피해 강화성공회 성당이나 수녀원에 모여들었는데, 성공회 단 아덕(터너) 주교가 일본군 대장과 두차례 담판하여 일군을 물러나게 함으로써 화를 면했던것. 성공회는 “일군의 공격을 사전에 막아 주민들의 희생을 줄였지만, 일본군의 무력행동에 대한 비판없이 사태수습에 나선 것은 아쉬움”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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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120년 (17)] 강화읍교회… 시련의 섬에 ‘믿음의 방주’ 새역사 | |
[국민일보 2003-01-14 15:20] | |
3칸 솟을지붕의 외삼문과 3칸 단층의 내삼문, 큰 조선배 모양을 한 터 위에, 동서 방향으로 자리잡은 한옥 두채. 큰 본채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0칸의 40칸 장방형 2층 탑 모양이다. 팔작지붕의 단아한 추녀 자락, 청·녹·황·흑·백색으로 단청한 서까래와 지붕위 12개의 치수두(置獸頭), 처마끝은 물고기 모양의 막새기와로 마감하고 있다.
“무시무종 선작형성 진주재(無始無終 先作形聲 眞主宰) 선인선의 율조증제 대권형(宣仁宣義 聿照拯濟 大權衡) 삼위일체천주 만유지진원(三位一體天主 萬有之眞原) 신화주류 유서물 동포지락(神化主流 庶物 同胞之樂) 복음선파 계중민 영세지방(福音宣播 啓衆民 永世之方)” 정면 기둥에 붙어있는 주련에 쓰여진 글귀다.
“처음과 나중이 없으나 모습과 소리를 먼저 지으셨으니 참 주재다. 어질고 옳음을 널리 펴서 무리를 구하니 큰 저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니 세상 만물의 참된 근원이시다.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나와 만물을 기르니 동포의 기쁨이다. 복음을 널리 전해 백성을 깨우치니 영원히 사는 길이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섬 강화도. 고려와 조선 두 왕조가 외세의 말발굽에 짓밟히는 현장을 묵묵히 눈물로 지켜봐야 했던 섬이다. 그러나 마리산의 정기 아래 몽골과 청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였고, 서구열강의 포화를 몸으로 막아낸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1893년 복음이 전해졌다. 성공회 워너 선교사가 진해루 밖에 집을 사서 기도처로 삼았던 것. 본격적인 선교는 1897년부터 시작됐다.
워너 선교사의 후임으로 강화에 부임한 마크 트롤로프 신부는, 1899년 가을 강화읍 강화내성에 배 모양의 터를 닦았다. 배 머리쪽은 서향으로 출입문을 두고, 배 한가운데에 예배당, 배꼬리 부분에 사제관을 배치했다. 성공회 선교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지만, 자재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트롤로프 신부는 신의주에서 백두산의 적송을 구해, 뗏목으로 강화까지 운반했다. 경복궁 중건 때 도편수였던 사람이 목수를 맡았고, 중국인 석수가 강화돌을 다듬어 담장 기단과 석물을 만들었다. 기와는 강화흙으로 구웠다.
1년여의 공사 끝에 모습을 드러낸 강화읍교회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아름다움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교회 건물이기도 하다.
예배당 내부는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이다. 내부에 중층을 만들어 창문을 달고 자연채광을 하도록 했다. 북쪽에 제단을 두는 우리 습관과는 달리, 서양식 내부 배치에 따라 동쪽을 바라보고 예배하게 했다. 200여명이 동시에 예배드릴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지었다.
1914년에는 교회 뒤편에 성 미가엘신학원을 설립, 성공회 성직자를 배출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영국에서 종을 보내왔다. 이 종은 1945년 일제가 공출해갔고, 1989년 성도들이 청동제 범종(높이 1.6m,무게 750㎏)을 마련했다.
현재 교회에서 사용하는 성찬 접시와 잔은 1900년부터 사용해오던 것이다. 교회 기(旗)는 보존을 위해 액자에 넣어 보관하고 있다.
2000년 11월 축성 100주년을 맞았고, 정부는 2001년 1월4일 사적 424호로 지정했다. 서울 정동제일교회 문화재 예배당에 이어 두번째다. 천주교에서는 서울 명동성당과 약현성당이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관할 사제인 천용욱 신부는 “당시 기독교를 통해 유입된 신문화가, 한편으론 전통문화의 계승을 가로막기도 했다”며, “강화읍교회는 피선교지의 생활과 풍습을 존중하는 성공회의 토착화 선교정신이 살아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전재우기자 jw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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