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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교산교회

영국신사77 2007. 5. 14. 23:51
                                 강화 교산교회
 
 
 
 
 

                                    강화 교산교회, 존스 기념에배당과 옛 교회 (박물관 예정)

 

 

                        강화 교산교회 (최초 세운 교회)


  강화도 서사(현 양사면) 출신으로 제물포에서 주막집을 운영하던 이승환이 선교사 존스로부터 복음을 받고 인천내리교회에 출석하다가 세례를 받으라는 권고에 ‘나는 세례를 받을 수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고 거절하였다. 

 

  첫째는 연로하신 어머님 보다 먼저 받을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주막집을 경영하기 때문이란다. 몇 달 지난 후 존스 목사는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이승환 모친께 세례를 베풀기 위해 배를 타고 강화에 도착하였으나, 그 곳 토박이 전통 양반 가문 출신으로 유학자인 초시 김상임을 필두로, 기독교를 미워하는 주민들의 완강한 반대로 배에서 내려 강화 땅을 밟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승환은 모친을 등에 업고 배로 올라가 선상세례를 받게 하고, 자기도 곧이어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렇게 선상세례를 받은 이승환은 강화 선교의 하나의 겨자씨가 되었다. 

 

  이어 존스 목사는 전도인 이명숙을 파송하여 이승환의 집을 거점으로 4~5 인이 모임으로 강화에 첫 감리교 신앙 공동체가 탄생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강화 교산 교회이다. 

 

  후에 초시 김상임은 존스 선교사의 사려 깊은 행동을 보고, 그를 만나 하나님을 영접하고 개종하게 된다. 그의 개종은 부녀자와 천민들이나 믿는 종교로 여기고 천시하던 주민들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어, 가신과 신당을 불사르고 믿음과 말씀공부에만 전념하여, 교인 수는 폭발적으로 불어나게 되었다. 

 

  양반과 지식층의 합세로, 시루미 공동체는 서민층과 어우러져 균형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고, 강화지역 지도급 인사들이 연이어 개종해와, 시루미 공동체에서 강화 전역으로 복음을 확장시키는 초석이 되었다.

 

  후에 김상임은 신학을 마치고 목사 후보생이 되었으나, 목사안수 한 달을 앞두고 열병환자를 심방한 후 감염되어 55세를 일기로 소천 하였다. 

 

  교산 교회는 강화의 다른 지역 섬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전초기지가 되었으며, 그 흐름은 크게 다음 세 줄기로 나뉘었다.

 

  첫 줄기는 홍의(홍의교회)를 거쳐 강화 읍으로 해서 남쪽으로,

 

  둘째 줄기는 고부(고부교회)를 거쳐 중서부로,

 

  셋째 줄기는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섬인 교동으로 연결되어졌다.

 

  이러한 복음 전파의 흐름을 통해, 강화는 선교 개시 10년 안에 강화전역에 교회가 설립되는 결과를 얻었으며, 현재는 150 여개의 감리교회가 있는 섬이 되었다

 

 

                        강화교산교회


  “훗날 한국감리교회사를 쓰게 될 역사가는, 기독교회 역사 모든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사실들을 이 섬들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백성이 보여주는 희생과 헌신에 대한 충분한 역사자료가 될 것이다.”(1904년, 강화지역 선교담당 케이블선교사)

 

  선조들의 피와 땀이 없이 성장한 신앙공동체가 있을까? 강화도의 신앙역사는 감리교회 선조들의 꿈과 헌신으로 뿌려진 씨앗에 기초한다. 강화교산교회는 1893년 존스(George Heber Jones, 한국명 조원시, 1867~1919) 선교사의 복음전파를 통해, 강화 최초의 자생적 공동체로 시작해 인근 지역선교의 초석을 마련했다.

 

  올해로 창립 113주년을 맞이하며 담임 박기현 목사와 함께 △강화교회의 산파로서 초대교회 신앙유산의 회복 · 계승 · 전파 △미래교육의 산실로서 역사의식과 영적 비전을 가진 민족일꾼을 양성 △복음의 빚진 자로서 영혼구원을 힘쓰려는 3대 사명으로, 선교 2세기를 준비하는 강화 교산교회 신앙공동체를 찾아갔다.

 

 

                      선상세례로 시작된 공동체

 

  미 감리회 소속으로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다음으로 한국을 찾은 존스 선교사는, 제물포 지방 감리사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에 능통하여 한국어사전 편찬, 한국 역사와 문학, 철학과 종교 분야에 관해서도 깊이 있는 저술을 남겼다.

 

  강화지방 선교역사는 존스 선교사와 함께 그에게 복음을 전파 받은 강화 출신의 주막집 주인 이승환과 관련된다. 본인의 직업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세례를 받지 못하던 이승환이, 존스에게 강화에 살고 있는 모친의 세례를 부탁했던 것. 지역 유림들의 반대로 존스 선교사가 강화에 들어오지 못하자, 갯벌에 정박 중인 배에서 한국 옷을 입고 기다리던 존스에게 한 밤 중에 모친을 등에 업고 찾아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승환과 모친이 함께 세례를 받게 된다.

 

  이 장면을 헤스(M.Hess)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기독교를 미워하는 주민들의 난폭한 반대로, 세례예식은 마을에서 거행되지 못했다. 아들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존스 박사가 배에서 기다리고 있는 해안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은빛 찬란한 달밤에 한 노파의 기쁨의 잔이 넘쳤으니, 이는 죄 씻음 받은 기쁨의 잔이었다. 그녀는 강화의 겨자씨로 불리었다.”

 

  강화의 양반 중 이 과정에 감명을 받은 이가 있었다. 벼슬을 하지 않고 초시 신분으로 교항(현 교산)에 서당을 차려 후학을 양성하며 지역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던 김상임이 바로 그다. 김초시는 이승환 모자에 대한 존스 선교사의 사려 깊은 행동을 본 이후 한문성경을 전해받고 읽은 가운데, 자신이 찾던 ‘정감록’의 ‘십승지지’란 주요 비결이 바로 성경의 ‘십자가지도’ 임을 깨닫고 개종을 결심한다.

 

  이후 김상임이 마을의 가신과 산당을 불사르고, 말씀 공부에 집중한 결과, 교산교회 신앙공동체의 교인 수가 급증하게 된다. 서민층 일색이던 신앙공동체에 양반층이 합세함으로써, 강화교산교회는 복음을 전 지역으로 확산시키게 된다.

 

  김상임은 존스 선교사의 배려로 인천의 신학회와 평양의 신학회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02년 4월 김기범, 김창식 목사에 이어 감리회의 한국인 3대 목사후보가 됐으나, 목사안수를 몇 달 앞두고 전염병이 창궐한 마을에 심방을 갖다가 감염돼 55세를 일기로 소천한다.

 

  이후 교산교회 성도들은 김상임을 강화의 바울로 부르며 그의 신앙의 길을 따르며, 연이어 홍의교회(1896)를 거쳐 고부교회(1897) 상도교회(1899) 등 강화 전 지역의 교회개척을 위해 헌신하며, 강화 어머니교회의 역할을 감당하게 됐다

 

 

                    글, 사진출처- 기독교타임즈 2006.10  이준협 기자

 

 

 

 

 

 

                 [서울, 경기지역] 강화 교산교회

 

 

출처 블로그 > 해나의 이야기
원본 http://blog.naver.com/jeongdaiee/60024786525
 
 
 



  교산교회에 복음을 처음 전한 사람은 존스(조원시 1867-1919)목사이다.

 

  존스목사는 21세 때인 1885년 미감리회 소속 선교사로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다음 세 번째, 최연소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한국어에 능통하여 한국어 사전을 편찬, 한국 역사와 문학, 철학과 종교분야에서도 깊이 있는 저술을 남겼다. 인천 제물포교회(현 내리교회)에 부임한 이래 제물포지방 감리사로 활약하면서, 지경 내 44교회를 관리하며 인천과 강화를 선교 거점으로 삼고자하였다.

  그러던 중에 1892년, 강화도 서북 해안 양사면 시루미 출신이었던 이승환이 찾아와 ,자기 어머니에게 세례를 요청하였다. 존스는 강화도 시루미로 가게 되었으나 ,그 마을 김초시라는 양반이 방해하여 이승환이 자기 어머니를 업고 나와 선상에서 세례를 베풀었다. 이어 이승환도 세례를 받았다.

 

  이에 존스목사는 전도인 이명숙을 파송, 이승환의 집을 거점으로 4~5인이 모임으로 강화의 신앙공동체가 탄생되었다. 바로 이것이 강화 최초 교회인 교산교회의 시작이다. 이렇게 해서 교산교회는 강화지역의 모교회 역할을 한 곳으로 1893년세워졌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는 1년 후 김초시에게 임했는데, 그도 존스에게 세례를 자청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가 바로 강화 기독교의 선구자인 김상임 전도사이다. 1894년 10월에 세례 받은 그는 1896년 5월부터 교항교회 전도사, 1898년 본처 전도사 직분을 받고, 강화구역 10여 곳의 교회(가정교회 포함)를 맡아 목회하며 선교사업에 힘썼다.

 

  강화 복음화의 초석이었던 김상임은, 1899년 존스목사가 인천 우각동에 세운 한국 최초의 신학회와 1900년 평양 신학회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02년 4월에 감리교에서는 김기범, 김창식 목사에 이어 3번째 목사 후보가 되었으나, 이 영예를 넉 달 앞두고 열병환자를 심방한 후 감염되어, 55세를 일기로 소천하였다.

  김리브가 권사는 강화 초대교인 김봉일의 딸로서 김상임의 손자 며느리였는데, 시아버지 대에서 신앙의 명맥이 끊길 뻔 한 위기를 넘긴 신앙의 전사였다. 김리브가 권사는 10절이 넘는 찬송가를 200여 수나 외워 부르는 찬송가 할머니였다고 한다.

 

  교산교회는 창립 110주년을 기념하여 존스 기념예배당(150평)을 건축 봉헌하였고, 기존의 석조 예배당은 김상임 기념 예배당으로 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