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숲- 정진국 목사 "이스라엘영적 노정기" 성경의 숲
2006/12/14 10:27 |
이스라엘 영적 노정기
정진국 목사 |
지금부터는 이스라엘의 민족 형성사를 지나서, “이스라엘의 영적 노정기”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를 인류고대사라고 부른다면, 12장부터 50장까지를 이스라엘 민족 형상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상 따지고 보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말하는 하나의 테마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우리가 살펴볼 이스라엘의 영적 노정기는 출애굽기부터 여호수아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한 테마의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11장까지의 인류고대사에서 성경은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느냐?”에 대한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창세기 12부터 마지막 50장까지는 “그럼 이스라엘은 어떻게 민족이 형성되었느냐?”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출애굽기에서 여호수아까지는 “이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구속을 이루어 가시는가?”하는 것이 나와 있습니다. 이 영적 노정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 경륜의 그림. 바로 그 복음의 그림을 어떻게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느냐?”를 봐야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여정과 오늘날 신앙의 여정
이 이스라엘 영적 노정기는 오늘날 모든 신앙인들의 믿음생활을 보여주는 하나의 거대한 비유와 같습니다. 이 책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께서 이 부분을 통해 자신의 신앙생활을 점검하시고, 또 앞으로의 신앙생활이 향해야 할 방향을 밝히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대략적인 구성이 창세기 50장까지 모두 갖추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애굽에서 살면서 그 수가 많아져, 마침내 완성된 민족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애굽에서부터 출애굽기의 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이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에게 약속하신 것은 가나안입니다. 그런데 7년간 대기근이 일어나면서 창세기 47장에서 이스라엘의 가족들은 모두 애굽으로 가게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 이스라엘의 여정은 애굽에서 시작해서 가나안까지 이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우리 신앙의 노정을 예표하고 그림으로 보여주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적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하여 가나안까지 가게 되는 이 과정이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설명은 앞서 이스라엘 민족이 갖는 세 번째 특징으로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들의 역사는 신앙인들의 영적 노정을 보여주는 하나의 그림”이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앙생활이란 무엇이냐?” “믿음 생활이란 무엇이냐?” “은혜라는 게 대체 무엇이냐?” 등등의 사실들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건이 무엇일까요? 바로 유월절 사건입니다. 유월절 사건 이후에 저들은 홍해를 거치게 됩니다. 그 후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성막을 짓습니다. 그리고 성막 중심의 제사 규례들이 제정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한 이스라엘 민족은 12명의 정탐꾼을 통해 정탐을 합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의 결과로 인해서 광야생활을 하게 됩니다. 대부분 출애굽 이후로부터 가데스 바네아까지 도착하는데, 약 2년이 걸린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광야 생활은 38년 정도 하게 된 것으로 보는 관점이 지배적입니다. 그리고 광야 생활을 마감하는 위치에서 이제 저들은 요단강을 건너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가나안 정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애굽에서 부터 가나안까지 이스라엘의 여정입니다. 애굽은 무엇인가?
이러한 이스라엘의 여정은 우리들이 거치게 되는 신앙생활의 중요한 여정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애굽이 의미하는 것은 세상입니다. 죄악에 물든 세상이 곧 애굽인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의 왕 바로는 세상을 지배하는 사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이 노예생활은 거듭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 겪고 있는 죄로 말미암는 노예생활을 의미합니다. 즉,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우리에게 죄악 속에서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애굽은 죄악된 세상에서 우리가 사탄에 노예로, 죄의 노예된 삶을 살고 있던 그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로써 살고 있을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구원의 역사가 진행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10번째 재앙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애굽을 탈출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탈출의 직접적인 근거가 된 것입니다. 유월절이 무엇입니까?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출 12:21~23)”
유월절은 곧 구원입니다. 어린 양의 피를 문의 인방과 좌우설주와 발라 죽음으로부터 피해가는 것입니다. 유월(逾越)절이라는 이름도 “넘어가다, 지나가다”라는 의미입니다. 그 어린양의 피를 보고 넘어가는 것이 바로 유월절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유월절은 거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애굽을 떠나야 합니다. 10번째 재앙과 그 재앙으로부터 넘어가는 유월절은 애굽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시발점으로써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유월절 이후에 바로가 “떠나도 좋다”고 말했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전히 애굽에 남아서 노예로 살려고 한다면, 유월절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우리들은 이제 애굽을 떠나야 합니다. 곧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제 애굽을 떠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가나안으로 향해야 할 것입니다. 가나안은 곧 천국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가나안이 “우리 삶속의 승리생활”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는 죄악된 세상을 떠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승리생활을 향해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결과적으로는 천국을 향해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가나안의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라는 것은 단지 “내가 구원받았다”하는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이냐?”라는 질문과 함께 “무엇을 향한 구원이냐?”를 자기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무엇으로 부터”와 “무엇을 향한”에 대한 구원의 두 가지 성격을 여러분들이 밝히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홍해란 무엇인가?
우리가 오늘날 이집트의 지도를 살펴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살던 고센 땅(출 9:26)은 이집트의 북부지방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나일 강 삼각주가 있는 그곳이 바로 고센 땅입니다. 이 사실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굳이 홍해를 건너지 않았어도 애굽으로부터 나와 광야를 거쳐, 시내산으로 갈수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육지를 통해 충분히 “출애굽”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 때문에 오늘날 일부 신학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지 않고, 육지를 통해 갈대밭을 지나 출애굽 했다.”라는 주장까지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해 홍해로 인도하셨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홍해를 건너서 출애굽하였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굳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육지가 아닌 바다로 인도하셔서, 홍해를 건너게 하셨을까요? 이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홍해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고전 10:1~2)”
신약성경에서 바울은 홍해사건을 무엇으로 표현하고 있습니까? 애굽에서 살던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이 구름기둥의 인도를 받아 바다 가운에로 지나며,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즉, 성경에서는 이 홍해 사건은 곧 세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홍해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받는 세례에 대해서, 그 성격을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홍해는 애굽의 경계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넘으로 해서 완전히 애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 홍해를 완전히 건넘으로 해서 다시는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홍해는 애굽으로부터 완전히 떠나는, 다시는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게 하는 경계선입니다. 즉 이 홍해는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근절하기 위한 세례인 것입니다. 다시는 죄악된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는 세례. 그것이 바로 홍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받고 난 후, 홍해를 건너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고도 여전히 세상에 머물러서, 죄 속에서 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곧 홍해를 건너지 않은 사람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형식적으로 세례를 받고, 여전히 세상에 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세례의 성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마음으로는 홍해를 안 건너고, 형식적으로만 세례의식을 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삶은 구원받은 사람인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인지 구별이 안갈 정도입니다. 하지만 여려분,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구원을 잘못배운 사람인 것입니다. 구원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남이며, 그 과정에서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써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 죽음과 부활이 곧 구원받은 사람의 세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나는 세상으로부터 죽은 사람입니다”라고 선포를 하는 것입니다.
이 홍해는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애굽을 완전히 근절시키는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고 나면, 더 이상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됩니다. 물론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면서 때때로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은 생길 수도 있지만, 실제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홍해를 건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홍해를 건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들 마음속에 세상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면, 내가 정말로 홍해를 건넌 사람인가하는 것을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홍해는 완전히 애굽을 끝내는 사건입니다. 시내산의 율법.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고난 이후에 시내산으로 인도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율법을 받게 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율법에 대한 성격을 명확하게 짚고 넘어갔으면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사건과 홍해 사건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이 두 사건은 이건 철저한 은혜입니다. 저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한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을 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통해 철저한 은혜로 가나안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시험을 받습니다. 이 시험이 바로 율법입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쌔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출 15:25b~26)”
하지만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율법을 다 지켜 행하겠다는 식으로 교만을 부립니다. 여러분, 출애굽기부터 신명기까지 등장하는 수많은 율법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많은 조항들을 다 지켜 행한다는 것은 너무 어렵고 힘이 들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민수기와 신명기에서 도리어 “우리가 다 지키겠습니다”라고 반응을 보입니다. 또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지키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온 회중이 곧 그를 진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하니라 (민 15:36)”
하지만 율법은 하나님의 시험이지, 정말로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여기서부터 또 꼬이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켜 행하겠다고 함으로 인해서 제 3의 실패를 향해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제 1의 실패는 홍수로 끝나고, 노아 후손들의 바벨탑으로 인한 2의 실패는 언어의 혼잡으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율법을 지키겠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교만으로 인해 인간은 제 3의 실패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시작되는 율법시대는 예수 그리스도 때 까지 이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까지 인간은 끊임없이 넘어지고, 쓰러지며 철저하게 실패의 댓가를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출애굽기 32장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모세가 율법의 증거판을 들고 내려오기도 전에, 그들은 이미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 오라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 오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출 32:1~4)”
율법의 가장 기초라고도 할 수 있는 “우상숭배의 문제”에서 실패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시면서 그들을 시험하고자 하셨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는 이 어려운 법들을 다 지킬 자신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소서.” 라고 반응하길 바라셨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들이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연약한 인간임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죄를 범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속하기 위해서 그 방편으로 성막을 짓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막이 왜 중요한지 아십니까? 성막은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속하고, 죄로 인해서 멀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목케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어겼을 경우에 그들을 구속하고,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으로 만들어 진 것입니다. 참된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구약의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하나님께서는 임시적으로 율법을 어긴 사람들을 구속하고 구제하기 위해 성막과 제사 제도를 세우셨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성막과 제사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으로 인한 고통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신약에 들어서 베드로는 율법을 “멍에(행 15:10)”라고 말했으며, 야고보는 율법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는 것(행 15:19)”이라 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때부터 율법으로 인해 “멍에”에 매여, “괴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시내산과 가데스 바네아. 그리고 광야 생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민수기 13장에 이르러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곳은 가나안땅의 입구와도 같은 곳이며,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땅으로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40일이 지난 후 돌아온 정탐꾼들의 보고는 2가지로 갈라지게 됩니다.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민 13:31~33)”
이처럼 10명의 정탐꾼들의 보고는 상당히 부정적입니다. 하지만 나머지 2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은 다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민 14:8~9)”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탐꾼 10명의 말을 들으며, 오히려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합니다. (민14:1~4, 14:10)
여러분, 이 우스운 상황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시험하실 때는 다 지키겠노라며, 교만을 떨던 그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에서는 그 땅은 힘들다고 합니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며,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을 돌로 쳐 죽이려 합니다. 이 모순된 상황이 보이십니까? 그러니까 율법은 “주세요”하던 그들이 은혜는 “못해요”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데스 바네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니까 시내산과 가데스 바네아는 이런 맥락에서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은 교만입니다. 그리고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을 거부한 것은 불신입니다. 이 교만과 불신으로 인해서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간의 광야생활이 시작하게 됩니다.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수 사십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찌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 하셨다 하라 (민 14:33~34)”
애굽에서 출발하여 가나안의 입구인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할 때까지 2년쯤 시간이 걸렸습니다만, 이제 가데스 바네아부터 광야를 빙빙 돌기 시작하여 38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요단강을 건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점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잠시 시내산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자칫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당시 정상적인 방법으로 율법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우뢰와 번개를 동반한 빽빽한 구름 속에서 굉장히 위압감을 주시며 찾아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다 떨 정도로 무섭게 임하신 것입니다.(출 19:16) 그리고 하나님께서 율법을 하나씩 제정해 가실 때, “하나님 우리는 그것들을 지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허락해 주소서” 라고 했어야 될 그들이 오히려 교만하게 율법을 지키겠다는 태도를 보입니다.
여러분, 율법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다보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은혜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가 먼저 입니까, 율법이 먼저 입니까? 은혜가 우선입니까, 율법이 우선입니까? 이 문제에 대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우리에게 명쾌한 해답을 줍니다.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갈 3:15~18)”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절부터 시작해서 쭉 “율법이냐? 믿음이냐?”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믿음은 곧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그렇게나 강조하는 이 논쟁은 결국 “율법이냐, 은혜냐”에 대한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3장 6절부터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아브라함에 의해서 은혜의 언약을 받은 언약 백성임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17절에서 언약과 율법의 관계를 분명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을 통해 언약을 먼저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아브라함이 언약을 받고나서 430년 후에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은혜에 의한 언약 백성이었는데, 430년 후에 율법이 들어와서 언약의 내용이 바뀌게 되었을까요? 430년 동안 이스라엘은 언약 백성이었는데, 율법이 와서 그 언약의 내용이 무조건적인 은혜에서 조건적인 율법으로 바뀐 것일까요? 15절과 17절에서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결국 구원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라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은혜를 강조하는 책입니다. 그러니 “은혜냐, 율법이냐”에 대한 문제는 “구원에 대한 문제에서만 은혜. 나머지는 전부 율법”이 아닐 것입니다. 결국 구약의 모든 부분과 신약의 모든 부분. 더 나아가 오늘날 신앙생활의 모든 부분에 대해서도 성경은 율법보다는 은혜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율법은 왜 주어진 것일까요? 이 질문이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갈 3:19)”
율법은 범법함을 인해 존재하는 중보자인데, 그 중보자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만 있을 것이라 합니다. 그 중보자의 역할에 대해서는 24절에서 자세하게 이야기합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 3:24)”
몽학선생이란, 집안의 아이가 16세가 될 때까지 가정교육을 맡아서 가르치는 노예를 말합니다. 즉 노예를 가진 주인의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그 아들에게 아주 기초적인 학문을 가르치며, 학교에 데려다주는 역할의 노예를 말합니다. 이처럼 율법은 인간을 결코 지배할 수 없는 임시교사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몽학선생이 집안의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것처럼, 율법은 인간을 그리스도에게 데려다주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 아브라함을 통해서 은혜의 언약이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율법이라는 것이 등장한 이유는 “인간의 힘으로는 의에 이를 수 없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야 의에 이를 수 있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로 하여금 그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자 “율법시대”라는 시험기간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경륜적 차원에서 율법시대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율법을 계획하신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시험은 노아의 홍수와 바벨탑 사건까지 해서, 1차 실패와 2차 실패로 끝났습니다. 두 차례에 걸친 실패를 통해 “타락한 인간이 어떤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는가?”를 보여주는 샘플이 이미 충분히 제시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굳이 “인간의 의로는 안 된다”는 또 한 번의 시험을 준비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부터 시작되는 언약백성을 선택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를 이루어 가시려고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저들은 자신들이 연약하고 넘어지기 쉽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는지, 주제를 모르고 율법을 지키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은혜로 선택하셨고, 그 약속을 은혜로 이루어 가시려고 하는데,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겠다고 건방지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래? 너희들이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구나? 그래, 어디한번 지킬 수 있나보자” 하는 심정으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인간들이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악한 존재라는 것을 입증하실 목적으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제가 하나하나 성경을 찾아서 제시해드리지 않아도, 이 사실은 신약성경의 수많은 부분에서 입이 닳도록 강조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려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가 구원을 받을 길이 없구나.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을 은혜로 부르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시대라는 시험기간이 주어진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교만과 불신으로 인해서 광야생활을 거치게 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40년이라는 세월을 광야에서 허비하는 것입니다. 저는 앞에서 설명한 애굽이나 홍해가 오늘날 신앙생활의 한 부분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광야생활 또한 우리 신앙생활의 한 부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광야 생활은 “율법을 지키겠다는 교만한 태도와 은혜에 대한 불신”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승리 생활”과 “천국”인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리어 율법에 매달리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광야생활을 하게 됩니다. “우리 삶속의 승리 생활”을 눈앞에만 놔둔 채, 쓸데없이 광야를 빙빙 돌며 시간을 허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침내 요단강에 도착하여 믿음으로 요단강을 건너는 그때까지 약 38년간 광야를 빙빙 도는 것입니다. 요단강과 가나안은 무엇인가?
38년간이나 광야를 떠돌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드디어 요단강 앞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세가 죽고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교체됩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로서 새로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호수아는 히브리어식 이름입니다. 이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헬라어식으로 바꾸면 무슨 이름이 되는지 혹시 아십니까? “여호수아(Jehoshua)”는 헬라어로 “예수(Jeshua)”가 됩니다. 다시 말해 영어의 “지져스(Jesus)”와 한국어의 “예수”가 같은 뜻인 것과 마찬가지로 “여호수아”와 “예수”는 같은 이름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온 그 율법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모세는 요단강 이전에서 죽습니다.(신 34:1~5) 그리고 이제 은혜로 상징되는 예수. 즉 여호수아로 지도자가 교체되면서, 드디어 약속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가는 핵심 주체가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율법을 벗어던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를 받아들이게 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가나안 정복을 시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율법이 아닌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승리생활”을 위한 “내 자아”들과의 전쟁을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저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요단강을 통과하게 되는데, 그 방식이 홍해를 건넜을 때와 매우 흡사합니다. 물의 중간이 갈라져 마른 땅을 밟고 요단강을 건넌 것입니다.(수 3:17) 저는 앞서 홍해를 설명하면서, 그것이 세례를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홍해와 매우 흡사한 이 요단강 역시 오늘날 신앙인들의 세례를 상징합니다. 이미 홍해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왜 또 세례를 거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오늘날 신앙인들도 세례를 두 번 받아야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홍해의 세례와 요단강의 세례는 성격이 조금 다르기 때문입니다. 홍해가 세상으로부터 떠나는 사건이라면, 요단강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자아의 죽음과 부활을 보는 사건입니다. 쉽게 말해서 홍해가 죄로부터 구원받아 천국에 갈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라면, 요단강은 우리의 실생활에서 범하게 되는 죄로부터 벗어나서 거룩함을 이루어 천국을 누릴 수 있는 실질적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신앙도 그 신앙생활의 지도자를 율법에서 은혜로 교체하고,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그 분께서 이루어놓으신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그렇게 요단강을 건넌 신앙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자아”와의 전쟁에서 승리가 보장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으며, 요단강을 건너 사람은 이제 믿음으로 말미암는 힘. 즉,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을 다 몰아내고 지분을 확보해야 합니다. 가나안에서 승리생활을 마음껏 누리는 중에 가나안 일곱 족속들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여러분들은 그 일곱 족속의 죄로 인해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신 7:16) 그러므로 우리는 그 땅에 남아있는 모든 거민들. 즉, 우리가 누려야할 승리 생활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 안의 자아들을 다 진멸하고, “이 산지를 나에게 주소서 (수 14:12)”라고 말했던 갈렙처럼 우리가 누릴 지분을 확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이 가나안의 지분을 얻는 싸움. 즉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승리의 지분을 확보해내는 삶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할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가나안입니다. 죄악된 세상인 애굽이나, 율법 생활인 광야가 아닙니다. 우리는 가나안에서 승리생활을 누려야 하며,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이 가나안의 마지막 정복지가 헤브론이라는 곳인데, 이 헤브론을 결국 갈렙이 차지합니다.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며 (수 14:14)” 이 갈렙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을 정탐했던 12명의 정탐꾼 가운데, 여호수아와 함께 믿음을 가졌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즉 이 헤브론은 믿음의 결론이요, 믿음의 용사가 얻게 되는 지분입니다. 이 헤브론을 얻는 다는 것은 우리가 온전한 의와 사랑과 참된 선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에 만나를 먹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만나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지킨 유월절 이튿날에 끝납니다. 그리고 그 후로 저들은 가나안땅의 소산물을 먹으며,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다고 합니다.(수 5:12) 그러니까 광야생활 속에서도 가나안에서는 없는 부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율법적인 생활을 사는 사람들도 충분히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서 살수 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의 축복이냐?”하는 것입니다. 만나는 아무리 축복이고 은혜라 할지라도 광야에서 누리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축복을 누릴 사람이 아니라, 가나안에서 축복을 누릴 사람들입니다.
나중에 열 두 지파의 지분을 나누는 과정에서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강을 건너지 않은 요단강 동편에 지분을 확보합니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요단강 이전의 광야 지분을 확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 광야에서 만나의 축복과 은혜를 누리고 살아가면서, 마치 그것이 최고의 수준인줄 알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임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요단강 동편이 아니라, 요단강을 건넌 후의 가나안 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나안에서 축복을 누릴 사람들이며,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가나안의 축복을 누리길 원하십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영적 노정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부터 가나안까지 들어가는 여정을 우리가 출애굽기부터 여호수아까지 살펴 본 것입니다. 성경은 이 이스라엘의 여정을 통해서 우리 신앙생활의 여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 안에서 드러나는 우리 신앙생활의 여정을 하나님의 경륜적 차원에서 계시하기 위한 역사인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이 안의 곳곳에 숨어있는 복음의 핵심들을 하나씩 묵상시하다보면,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깨달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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