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神學 · 敎理· 교회사

기독론<백영희목사 조지직신학>

영국신사77 2007. 4. 14. 00:59

                                  제4장 기독론





         서론
         1. 예수님의 존재론
            -‘신인양성일위’와‘도성인신’
         2. 대속의 전제 조건
         3. 대속의 성격
         4. 대속의 내용
         5. 대속의 적용과 부활의 예수님
   
 



 제 4 장


 기독론



 서  론

 ▪ 교리 전개의 흐름 속에서 본 기독론

기독론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역’을 살펴보는 교리입니다. ‘예수님’을 살펴본다는 말은 하나님이 사람 되어 오신 신인양성일위를 살펴본다는 것이고, ‘예수님의 사역’은 신인양성일위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한 ‘사활의 대속’을 살펴본다는 말입니다.

교리의 전체 흐름에서 기독론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알게 되는데 성경을 통해 알려주신 면을 살펴본 것이 ‘계시론’이고, 이 성경 계시를 통해 우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심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이 ‘신론’이며, 이 성경 계시를 통해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것이 ‘인론’입니다. 이 성경 계시를 통해 우리가 알게 된 인간은 원죄와 본죄로 희망 없는 죄인이 되었으니 이 면을 살펴본 것이 ‘죄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 되어 죄값을 대신 치르고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이 일을 맡고 오신 분이 예수님이니 예수님을 공부하는 것이 ‘기독론’이고 이 예수님이 완성한 일을 공부하는 것은 ‘속죄론’이라고 합니다.


 ▪ ‘기독론’에 대한 이름과 내용

여기서 한 가지 아실 것은, ‘기독론’이라는 교리를 세부적으로 분류하고 그 이름을 붙이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혹 교리서마다 그 분류 이름과 범위가 조금씩 다르다 해도 크게 보면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유의하셨으면 합니다.

이제 이 기독론에서 살펴볼 내용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역’입니다. 이 내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풀어보면, ‘도성인신으로 신인양성일위가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사활의 대속을 완성하신 것’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2위 성자 하나님이며 이미 신론의 삼위일체에서 살펴보았지만, 이 기독론에서는 타락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직접 사람이 되어 역사하신 모든 면을 집중적으로 살피게 됩니다.

기독론은 구원의 순서로 따질 때 자존하신 하나님 다음으로 나타나는 교리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로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과 그 대속의 역사를 살펴보기 때문에 사람의 타락 다음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 역사적 종단 파악보다 교리적 횡단 연구

기독론은 신론의 삼위일체를 바탕으로 출발하게 됩니다. 앞에서 살펴본 신론에서 삼위일체론이 나오게 된 것은 이단들이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을 하는데, 교회가 그 이단들로부터 바른 교리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은 삼위일체라는 표현을 찾게 됩니다. 삼위일체론의 중심은 사실 제2위 성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인간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은 어떤 존재인가? 예수님 한 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이런 문제들이 따르게 됩니다. 

 

 


                          1.예수님의 존재론  

초대교회는 성경과 다른 주장이 나올 때마다 그 주장들을 성경으로 정죄하여 배제하고 나왔습니다. 계속되는 이단들을 다 배제하고 나자 자연스럽게 아주 종합적이면서도 간편한 교리 표현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역사적으로 전개되어 나온 그 순서를 따라 다시 그 상황을 재연하여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이 교리가 최점{으로 정리된 결과를 한꺼번에 놓고 관련 교리를 단번에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때입니다.

따라서 기독론은 특히 삼위일체론과 죄론 그리고 구원론과 밀접하게 비교하면서 공부를 해야 할 교리라는 점을 미리 염두에 두셨으면 합니다.

 ▪ 기독론의 ‘하나님’ 표현은 주로  ‘성자 하나님’

기독론은 예수님을 살피는 교리인데, 예수님은 제2위 성자 하나님이 사람 되어 오신 분입니다. 이미 삼위일체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살펴보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예수님으로 오신 하나님을 ‘제2위 성자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대부분 ‘하나님’으로만 약칭하겠습니다.

기독론 외에서는 그냥 ‘하나님’이라 할 때 대개 삼위일체 하나님 또는 성부 하나님을 약칭하고 있으나 기독론에서는 제2위 성자 하나님을 너무 많이 언급해야 하기 때문에 편리상 이렇게 바꾸어 표현하게 됩니다. 이런 호칭 변경은 사실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앞뒤 내용에서 충분히 어떤 이름을 약칭했는지 알 수 있다는 점도 참고하시라고 미리 덧붙여 말씀드립니다.



              1. 예수님의 존재론 - ‘신인양성일위’와 ‘도성인신’

 ① 역사적 교리

교회의 교리 표현 중에 그 역사가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가 신인양성일위입니다. 주후 325년 니케아 공회에서 삼위일체 교리라는 신관을 형성했고, 이후 여러 차례 공회를 통해 431년 칼세돈 공회는 신인양성일위라는 기독론의 중추 교리를 요약하게 됩니다.  

이후 오늘까지 신인양성일위는 다음과 같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람 되어 오신 분이므로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참 사람이고 이 두 분은 두 분으로 따로 계시거나 혹은 뒤섞인 한 분으로 계시지 않고, 두 분은 영원히 하나님 그대로와 사람 그대로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한 분’으로 계시는 분이라는 뜻을 신인양성일위라는 단어로 함축하고 있습니다.

 ② 신인양성일위

 ▪ ‘신인양성’

예수님의 내부 구성을 표현하는 신인양성일위의 ‘신’은 ‘신성’을 말하고, ‘인’은 ‘인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신성’은 하나님을 말하고 ‘인성’은 사람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신인양성이라는 표현에서 신성과 인성에 ‘성품’이라는 의미의 성(性)이라는 글자를 붙였다고 해서 예수님을 신성과 인성이 뒤섞이거나 혼합되어 하나 된 분으로 보면 오해입니다. 또 예수님을 하나님의 성질을 가진 일부분과 사람의 성질을 가진 일부분의 종합체로 보면 오해입니다.

예수님 속에 있는 인성은 인간적인 어떤 부분이 예수님 안에 들어 있다는 말이 아니고 온전한 사람 하나가 통째로 예수님 안에 있는데 그 온전한 사람 전체가 예수님의 일부이기 때문에 ‘인성’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신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성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일부분이거나 하나님을 닮은 요소라 해서 신성이라 한 것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 자체를 신성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완전한 하나님 한 분 전체가 예수님 안에 들어 있는데, 그 완전한 하나님 한 분 전체가 예수님을 구성하는 일부이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은 ‘신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구성을 그 출신으로 살핀다면 ‘신성 + 인성 =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그 구성 내용을 결과적으로 살펴본다면 ‘하나님 한분(1개) + 사람 한분(1개) = 예수님 한분(1개)’입니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여 둘이 되는 식이 아니고 하나에 하나를 더하여 하나가 되는 존재 형식이 예수님입니다(요1:14, 빌2:6-8, 히1:2-3).

 ▪ ‘신성’
 
예수님 속에 있는 신성은 정확하게 하나님 자체입니다. 좀더 자세하게 말한다면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 제2위 성자 하나님입니다. 성자 하나님의 일부만 예수님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고 성자 하나님을 닮은 신적 요소만 파견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바로 이 예수님 속에 계신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기 전, 예정하시기 전,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자녀로 만드시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목적을 실무로 떠맡고 나선 바로 그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대할 때는 이분이 하나님이심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바깥 부분이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첫 인상에도 예수님을 사람으로 대하고 또 우리 기억 속에도 늘 사람으로만 기억하고 있기 쉽습니다. 그분은 물론 두말할 것 없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분이 사람이라는 사실은 달리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으나 그 분이 바로 하나님 자체라는 사실은 너무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우리들입니다(요1:1, 14, 빌2:6, 히1:3).

 ▪ ‘인성’

예수님은 그 안에 참 하나님이 계시지만, 여전히 예수님은 참 사람입니다. 예수님 속에 계신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지만 그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 그 사람은 피조물입니다. 아버지 없이 몸만 빌려 입고 나왔기 때문에 원죄가 없는 것만 우리와 다를 뿐입니다. 예수님의 육체는 먹이지 않으면 굶어죽는 몸이고, 때리면 고통을 느끼는 몸입니다. 추우면 옷을 입어야 따뜻해지는 우리 몸과 꼭 같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죄를 지으면 죽어야 하고, 죄를 지어 죽는다면 예수님의 인성도 지옥을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인성이 모든 면에서 우리와 꼭 같으므로 젖을 먹었고 소년 시절을 지냈고 부모를 섬겼으며 목수라는 세상 직업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왔다가 유람하고 간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거쳐야 할 모든 일을 다 거쳤습니다(눅2:51-52, 마4:1-11, 롬8:3).

우리가 지은 죄를 우리 대신 해결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그는 죄인이 아니었으나 죄인으로 이 세상을 살았습니다. 우리 대신 악령과 세상과 사망에게 모든 것을 내맡겨야 했습니다. 악령이 원하는 대로 예수님을 시험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죄는 짓지 않아야 했습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때리든 굶기든 마음대로 할 수 있었으나 예수님은 세상에게 피동은 되지 않아야 했습니다. 언제든지 죽일 수 있으나 예수님은 죽어도 죽음에 점L 되지 않고 죽어야 했습니다(마4:1-11, 8:17, 요14:30-31, 고후5:21, 히4:15, 벧전2:24).

 ▪ ‘신인양성일위’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면서 참 사람이었고, 두 분으로 이루어졌지만 한 분이었으며, 예수님 한 분 안에 계신 하나님은 영원무궁토록 하나님이시고, 예수님 안에 계신 사람은 영원무궁토록 피조물인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면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 ‘신인양성일위’입니다. 일위라는 말은 한 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원래 한 분은 하나님이고 한 분은 사람이므로 둘이지 하나가 될 수 없는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한 분이 되어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는 것을 ‘일위’로 표현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구주가 되신 것은 제2위 성자 하나님이 비록 삼위일체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만으로도 우리의 구주가 될 수는 없습니다(히2:14-15, 9:22). 또 예수님이 비록 원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사람만으로는 우리의 구주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으로, 또 두 분인데 한 분이라야만 우리의 구주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하기 위해 하나가 되셨고, 우리에게 영원무궁토록 영생을 주시기 위해 한 분이 되셨으니 이를 ‘일위’라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신인양성일위입니다(요1:14, 10:30, 롬8:3, 갈4:4).

 ③ 도성인신

우리의 구주가 되시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 되어 오신 과정은 요한복음 1장에서 잘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특히 요1:14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하셨는데 1절 이하에서 제2위 성자 하나님을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표시했고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한자로 요약하면 ‘도성인신(道成人身)’입니다. 말씀 도(道), 될 성(成), 사람 인(人), 몸 신(身)이라는 뜻이니 ‘말씀’ 사람의 몸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여기 ‘말씀’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표현한 것은, 제2위 성자 하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을 피조물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맡았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고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어 하나님을 알렸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서 죽고 우리를 살려낸 모든 희생도, 작게 본다면 죄에서 구원한 것이고, 크게 본다면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리는 역사입니다(요1:4-11, 골1:15).



                                      2. 대속의 전제 조건

  예수님께서 신인양성일위의 존재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를 대속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신인양성일위로 오셔야 했는지, 또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들이 있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① 신인양성일위

 ▪ 인성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신 이유는 모든 택자를 대표하는 신분이었기 때문에 사람과 같은 신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사람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려면 사람으로 와서 그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사람이 맞을 매를 짐승이 대신 맞거나 나무토막이 대신 맞는다면 값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지은 죄로 사람이 당해야 할 고통을 대신 받으려면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으로 그 고통을 받아야 그 죄의 고통에 값이 계산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셔야 했습니다(롬8:3, 히2:14, 9:22)

아담이 인류의 대표였기 때문에 아담의 범죄는 아담뿐 아니고 모든 인류 전체의 범죄가 되고 인류 전체에게 그 범죄에 해당되는 고통이 가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2의 아담이 되어 택자의 대표로 택자를 구하기 위해 온 것이므로 예수님은 반드시 사람이라야 했습니다.

첫째 아담이 첫 시험에서 악령을 이겼더라면 모든 인류에게 영원한 승리를 가지게 하여 영생했을 것인데 실패하였으므로 모든 인류를 사망에 이르게 했습니다. 이제 둘째 아담으로 예수님이 오신 것은 첫째 아담의 실패로 희망이 없게 된 인간 중에 택자들에게는 다시 한번 영생의 기회를 주기 위해 왔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1차적으로 범죄의 죄값 해결을 대신 치르기 위해 왔지만 2차적으로는 죄값을 치른 택자들에게 영생의 기회를 다시 한번 주시기 위해 악령에게 한번 더 도전을 하는 택자의 대표로 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승리하므로 모든 택자에게 영생을 가지게 하려면 첫째 아담처럼 예수님도 사람이라야 하기 때문에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고전15:22).

혹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꼭 사람으로 왔어야 했는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역사는 어느 것 하나라도 필연적으로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우연으로 되는 것이 없고, 또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일을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하는 일도 없습니다. 혹 사람의 눈에는 모세가 바로왕의 딸에게 들어간 것이 우연처럼 보일 수 있고, 또 다윗이 솔로몬을 후임으로 세워도 되고 다른 아들을 세워도 되는데 솔로몬을 택해 본 것으로 당시 역사를 읽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사람의 눈에 그렇게 보였을 뿐이지, 그 전부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적인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전부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신 것은 사람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사람이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지은 죄는 사람이 해결해야 하는 필연의 길이 있기 때문에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왜 사람으로 와야 하는 것이 필수적인 조건이냐고 묻는다면,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신 것을 봐서 그것은 필연적인 조건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성경에 가장 빠르고 바른 대답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전제로 해놓고 나서 그 다음 이치를 따져보면 어리석고 둔한 인간이지만 진리를 깨닫는 길을 어렵게 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했습니다.

첫째 아담의 범죄가 대표범죄였기 때문에 이후 모든 사람이 원죄를 가지게 되었고 또 둘째 아담이 우리를 대신 해서 죽고 부활하여 죄값을 해결하고 영생을 마련한 것을 결과적으로 보아서 우리는 예수님의 인성은 사람을 대표하고 대신하기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롬5:14-18).

 ▪ 신성

예수님은 그 외모가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이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예수님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사람만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비록 죄가 없다 해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으로만 계셨다면 한 사람만 구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속에 무한하신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 한 분의 희생은 겉으로는 한 사람의 수고였지만 그 이면에는 택한 자 전부를 다 구원하고도 남는 하나님의 무한이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인성은 사람이 지은 죄를 사람으로서 대신하고 사람의 죄값을 대신 받는 구주의 기본 자격을 위해 필요했고, 예수님의 신성은 예수님이 구원하고자 하시는 택자 전부를 다 구원할 수 있는 구주의 지불 능력을 위해 필요했습니다. 아들이 가게에서 1만원 빚을 졌다면 아버지가 1만원으로 대신 갚고 아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10명인 아버지가 아들이 각각 1만원씩 빚을 졌다면 그 아버지는 10만원이 있어야 해결할 수 있습니다(히9:23-28).
 
 ▪ 신인양성일위

예수님께는 신성도 있고 또 인성도 있었지만, 이 두 요소가 우리처럼 신인양성‘일행’의 관계가 아니고 신인양성‘일위’이었습니다. 한분 예수님으로 일위가 된 것은 인성이 있어야 구주가 될 수 있고 신성이 있어야 택한 사람 전부를 구할 수 있는데, 이 2가지 요건을 한 분이 가지고 있어야 동시에 해결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신인양성일위가 되신 것입니다.

인성과 신성이 합하여 한 존재라야 구주가 될 수 있는 자격과 택한 사람 전부를 구할 수 있는 용량이 된다는 점에서 예수님은 일반 다른 성자와 근본적으로 같을 수가 없습니다. 우선 사람이라면 죄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예수님과 같은 수준의 사람은 존재할 수가 없고, 둘째는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과 동행하는 관계이거나 동업하는 관계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요1:1, 10:30, 빌2:6).

아브라함이 비록 신앙의 조상이고 예수님 족보에도 조상이라고 기록되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손을 잡고 다닌 인간이고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손을 잡고 동행했던 바로 그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성이 그 하나님입니다(요8:58).  

따라서 예수님은 이방 세계 인물과 비교한다면,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와 함께 세계 4대 성현으로 분류될 분이 아니라  3명의 성자를 없는 가운데에서 만들었고 그 3명의 성자들이 평생 찾고자 했던 절대자가 바로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3명의 성자들이 예수님을 믿었더라면 천국을 갔을 터인데 그들에게는 그런 기회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지금 지옥 밑바닥에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도 알지 못하고 입으로 밥을 먹는다 해서 사람과 개를 같은 존재라고 분류하는 동물학자가 있다면 그는 동물학자이기 이전에 그 자신이 동물일 것입니다(롬1:22-23).

 ② 죄인의 모양

 ▪ 죄인을 대신한 신분

롬8:3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서 반드시 가져야 할 사전 조건이었습니다. 대속이란 죄를 대신 해결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죄를 대신할 사람이 죄인의 위치에 서게 됩니다.

만일 돈만 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액수만 지출하면 되겠지만 인간의 죄는 돈 얼마를 가지고 계산할 죄가 아니었습니다. 만일 아담이 악령의 유혹을 물리치고 시험에서 이겼더라면 악령은 영원히 아담이 부리는 아담의 점L 되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이 싸움에서 인간이 지게 되어 인간은 죄로 인하여 악령의 점L 되었습니다. 벧후2:19에서 우리의 싸움을 가리켜, 진 자는 누구든지 이긴 자의 점L 된다고 한 원칙이 있습니다.

따라서 죄를 지어 악령의 점L 된 사람을 구원하려면, 그 사람의 지은 죄값은 말할 것 없이 다 치러야 하지만 동시에 그 죄값 중에 우리가 죄인 된 그 신분 자체도 죄값이니 그 죄값을 치르려면 예수님은 우리 대신 죄인이 되어야 했습니다(롬8:3).

 ▪ 악령의 왕권적 지배

죄를 지은 적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 자체는 죄인이 아니지만 우리를 대신하고 우리를 악령에게서 구원해 내려면 예수님은 악령의 점L 된 우리 대신 당신이 악령의 점L 되어야 합니다. 점L 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예수님은 비록 만유주 하나님이며 죄 없는 몸을 입고 오신 분이지만, 우리 때문에 악령에게 완전히 붙들려 악령이 자기 원하는 대로 예수님을 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때리면 맞아야 하고 굶기면 굶어야 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으면 박혀야 하는 것이 예수님의 신분입니다.

만일 그렇게 악령이 예수님을 마음껏 왕으로서 자유 하다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면, 이제 예수님도 우리를 구원하기는커녕 예수님도 악령의 점L 되어 우리와 같은 신세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처결권은 세상을 점령한 악령이 자기 마음대로 하고, 그 악령에게 완전히 자신을 다 내맡기면서도 죄는 짓지 않아야 하는 것이 예수님이 죄인을 대신하여 죄인의 모양으로 오셔서 죄인을 구원하는 과정입니다(마4:1-11, 요14:30-31, 롬5:14-17).

오늘 우리 믿는 사람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이고 또 그렇게 해야 하지만 그 대신 세상은 우리를 신앙 때문에 마음껏 죽일 수도 있고 고통을 줄 수도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 전능하신 신성, 무죄한 인성의 신분을 포기

예수님 속에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지만, 우리를 대신하고 우리를 구하기 위해 자진해서 이 땅 위에 오신 이상 그분은 마치 죄인이 죄를 지어 묶여 사는 것처럼 이 세상에게 자신을 내 맡겨야 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전능하신 신성이 천하를 당장에 뒤엎을 수 있지만 무지 무능자처럼 죄인으로 그 사형 형벌을 조용히 다 당했습니다. 예수님 속에 하나님은 무지 무능한 바보로만 보였습니다. 전능자의 실력과 솜씨를 한 번도 써보지 않았습니다. 만일 사용했다면 예수님 속의 신성은 ‘하나님’으로서 문제가 없지만 ‘구주’로서는 자격 미달입니다.

예수님의 인성 역시 비록 피조물이었지만 죄가 없는 분이었기 때문에 범죄 이전 에덴동산의 아담과 같이 만물 위에 호령할 수 있는 만물의 주인공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대신하고 우리를 죄에서 구하려 오셨기 때문에 자신이 당할 필요가 없고 침해를 입을 필요가 없는 무죄자의 자격을 다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악령에게 져서 점L 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마26:53, 사53:1-9).  

이러므로 예수님의 고난은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모든 택자의 모든 죄값과 그 영원한 형벌 전부를 대신했던 걸음입니다. 세상에 자기 신념과 이방 종교와 국가와 가족을 위해 예수님과 같이 대신 죽어 일을 해결하는 경우는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그들의 죽음은 비교 자체를 할 수 없습니다(롬5:6-8).

 ③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법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신 예수님은 우리가 죄를 지어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된 상태로 하나님을 상대해야 합니다. 에덴동산 범죄 이전 하나님과 아담 사이가 아니고, 범죄 이후 하나님과 죄인 사이가 된 상태의 죄인 자격으로 하나님을 상대해야 합니다. 죄를 지은 이상 인간은 하나님께 심판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도움과 그의 은혜를 구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죄값을 물어 어떻게 냉대하고 팽개쳐도 스스로 하나님을 향해 은혜를 구하고 그 법을 따라 살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대신하려고 나선 예수님을 상대한 것을 지공과 지성의 법대로 처리했다고 표현합니다. 자녀를 향한 사랑의 법으로 상대한 것이 아니라, 죄인을 엄벌하는 가장 공평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법으로 예수님을 대했습니다. 비록 예수님이라 해도 다른 죄인이 죄를 지었을 때와 꼭 같이 엄하게 다스렸고 또 다른 죄인이 죄를 지었는지를 심사할 때 그 엄한 성결의 법을 그대로 적용했습니다(눅22:37, 사53:6, 10).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어 오되 자원하여 좋아서 대신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의 대속을 막지는 않았습니다. 악령이 제 실력으로 아담에게 접근하여 아담으로 하여금 좋아서 죄를 짓게 한 것처럼,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원하는 마음으로 아담과 그 후손 중에서 택자들을 살리려고 나선 일이므로 역시 막지 못하고 또 막지 않았습니다(눅22:15). 또 예수님에게 엄한 법으로 하나님의 최고 성결로 검사를 했지만 예수님께서 온전하게 행동하여 조금도 그 법을 어긴 것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법으로도 예수님의 대속은 온전했습니다.

이는 인간에게 주신 자유성의 원칙이니 인간을 만드신 최초의 원칙이며 가장 중요한 법입니다. 원하고 원하여 행하는 것은 막지 않는 법이 하나님의 자유의 율법입니다. 아담이 죄를 짓는 것도 악령이 유혹하여 지옥으로 데려가려는 것인 줄 알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아담이 스스로 원하여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막지 않았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그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자원하여 나섰고 그 죄값을 전부 다 치렀으며 그 다음 악령이 모든 죄의 왕권으로 예수님을 범죄케 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심지어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을 의인이 아니라 죄인으로 상대하여 하나님의 법을 엄하게 적용하며 그 흠과 점을 찾았으나 완전하게 통과했으므로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게 된 것입니다(롬8:3-4).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지성과 지공의 법 적용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미리 알고 각오해야 하는 전제 조건들이었습니다. 이런 모든 조건을 전부 다 통과해야 우리를 구할 수 있는데, 이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이 사람 되어 오신 신인양성일위의 예수님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구원할 구주가 될 수 있는 전제 조건들을 안다면,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구주가 될 실력도 자격도 조건도 맞출 수가 없습니다. 현 교회가 예수님 외에도 그 행동이 너무 착하거나 인류에게 미친 공로가 너무 지대한 성자와 성녀들은 일반인 이상으로 대접해야 한다 해서 예수님이 계시는 구주 자리에까지 여러 인물들을 올리려는 발상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들은 ‘구주론’인 기독론의 근본조차도 혼동했습니다. 이는 불신 세계의 희망사항일 뿐입니다(고후11:4, 갈1:6-9).

 ④ 대속의 희생 - 성자 하나님의 도성인신

 ▪ 사람 되신 희생

자존하신 하나님께서 피조물 중에 하나인 사람으로 오신 희생은 예수님의 모든 희생을 다 내포하는 희생입니다. 완전자가 불완전자로, 전지자가 무지자로, 전능자가 무능자로, 창조주가 피조물로 오신 이 희생은 교회가 평생을 되새기며 가르칠 부분이기 때문에 이곳 교리서에서는 간단하게 넘어가겠으나 이 부분은 설명할 부분이 적어서가 아니고 너무 많기 때문에 평생 새기고 연구할 과제로 남겨두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 되어 오신 희생을 생각할 때는 한편으로 우리 인간이 인간의 자리만으로는 부족해서 하나님이 되려고 하나님 자리로 올라갔으니, 인간이 하나님이 된 그 죄를 대속하는 데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으로까지 낮아져야 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빌2:6-8).

이 희생은 한편으로 만일 우리를 위해 대속에 성공을 하게 되면 사람이 하나님 되려다가 타락한 그 타락을 고쳐서 이제는 사람이 하나님 같이 온전하고 거룩하고 깨끗해지며 하나님의 보좌에 앉게 되는 데까지 올려놓을 수 있는 희생입니다(요14:3, 계3:21).

 ▪ 낮아지신 희생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 땅 위까지 낮아지셨으니 더 이상 낮아질 곳이 없어 내려가지 못했습니다. 더 내려감으로 우리를 위해 유리할 곳이 있다면 더 내려갔을 분입니다. 지옥 형벌의 영원한 고통까지를 감당하셨으니 실제로는 이 땅보다 더 낮은 지옥에까지 내려가신 것인데 사람의 눈으로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까지 내려온 것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이 땅까지 낮아졌다고 쉽게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 되어 오신 ‘예수님의 낮아짐’을 그 사시던 하늘에서 이 땅 위에까지 낮아졌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는 첫 신앙의 어린 사람들에게 알기 쉽게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위치는 하늘나라보다 더 높습니다. 그 이상이 없고 달리 다른 위치로는 표시할 수가 없어 보통 ‘지상(至上)’이라고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간적으로 높은 것이 아니라 지식적으로 실력적으로 권위적으로 기타 모든 면으로 높은 분입니다. 하나님은 높은 분이라고 하다보면 혹 1등과 2등이 있는데 2등이 아니고 1등이어서 높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그분의 높음은 우리 인간과 비교 자체가 되지 않고, 피조물끼리는 등수를 따져서 높낮이를 표현하지만 하나님의 높으심은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 높음입니다(사46:5-9, 단4:17).  

사람이 하나님 한 분 밑과 만물 위에 자리를 가졌으나 주신 자리를 만족하지 못해서 올라가려다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를 대속하실 구주는 올라감으로 지은 죄를 대신하기 위해 내려올 필요가 없는 지고의 자리에서 제일 낮은 자리로 내려온 것입니다(엡4:9, 빌2:6-8).

이 낮게 오신 예수님의 희생의 대속이 끝까지 성공을 하게 되면 예수님의 희생 때문에 우리는 지옥 밑바닥까지 떨어진 데에서 다시 건짐을 받되 예전 자리만큼만 올라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구하시려고 낮아지신 예수님의 인성이 올라간 자리로까지 올려지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이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예수님이 앉은 그 자리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바로 그 길을 열어놓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요14:3, 계3:21).‘  

 ▪ 가난해진 희생

없는 가운데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만드신 분입니다. 따라서 만물의 참 소유주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우리 인간이 네 것이라 또 내 것이라 하는 것은 실은 참 소유주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고 인간끼리 정해놓은 소유 개념이니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소유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없는 가운데에서 전부를 만들고 그 만들어놓은 만물이 움직일 수 있도록 모든 힘을 주고 있는 하나님만 진정 소유주니 이분만 부유한 분입니다. 그분이 사람 되어 오면서 단 하나도 가진 것이 없이 오셨으므로, 원래 전부를 다 가진 분이 전부를 다 내놓은 것입니다. 전부를 다 가진 그분의 소유는 영계와 우주 전부이고, 그분이 내놓고 가난해 진 상태는 가진 소유물은 물론 가진 몸과 생명까지도 전부 다 세상 임금에게 맡겨 자유로 처분토록 했습니다. 따라서 그냥 우리가 보통 말할 때 가난해진 정도가 아니고 전무가 되었습니다. 이 희생이 우리를 위한 희생입니다. 신론에서 하나님을 아는 만큼 이 기독론에서는 예수님의 대속의 희생을 알 수가 있습니다(눅9:58).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것 이상으로 가지고 싶어 아담이 죄를 지었고 아담의 후손되는 오늘 우리도 만유주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것이 있는데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을 가지려 하므로 범죄 했습니다. 이 죄를 사하려고 대속의 제물로 오신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가진 분인데 모든 것을 다 내놓았습니다.

이 가난해진 대속의 희생은 십자가 사활로 대속의 성공을 이룬 뒤에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다 넘겨받는 부요자가 되는데, 예수님의 이 부요하게 되심은 바로 우리 택자의 것이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가난해지신 희생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필수적인 선행 조건인데, 이 가난해지신 희생은 대속 사업을 성공한 뒤에 가난한 우리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다 주시게 되는 대속이기도 합니다(고후8:9).

 ▪ 무능해진 희생

예수님은 전능자며 주권자입니다. 능치 못하심이 없는 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악령에게 세상 왕권을 인정하고 예수님은 그 수하에 점L 되어야 합니다. 전능하신 주권자 하나님으로서의 권리는 전혀 사용하지 않아야만 우리를 대속하는 구주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전능자 하나님께서 무지 무능자가 되어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 죄값을 치른 것입니다(요14:30-31, 사53:2, 7).

그러나 예수님이 무지무능자로 오셔서 우리 죄값을 치르고 대속을 완성하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이 무능자로 오신 그 공로 때문에 타락 후 무능자였던 우리가 유능자가 됩니다. 원래 인간이 가진 위치까지로만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도성인신하신 예수님의 인성이 가진 주권과 능력까지 가지게 됩니다.

따라서 무능자로 오신 예수님의 희생은 우선 우리의 형벌을 대신 받기 위해 그런 상태로 오신 것이지만 동시에 예수님께서 무능자 되심으로 우리는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의 부활의 인성을 본받아 그런 예수님의 위치에 갈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막10:40, 빌3:21).

 ▪ 수치 받은 희생

예수님은 천군 천사를 비롯하여 만물이 영원무궁토록 영광을 돌릴 제2위 성자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공중에 권세 잡은 악령이 자기 마음껏 다스리는 이 세상에 오셔서 그 악령이 주는 수치를 전부 다 받아야 했습니다. 지극히 영광스런 하나님께서 지극히 수치스런 만물의 찌끼가 되었습니다(사53:3). 그러나 그 수고로 우리 죄값을 없애고 나아가 그 수치스러운 상황에서 대속의 완성을 이루게 되자 하나님도 지극히 기뻐하시고 만물도 기뻐하고 심지어 지옥에 있는 죄인들까지도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빌2:6-11).

예수님께서 그렇게 수치스런 죄인으로 오신 것은 한편으로는 대속 이후에 그렇게 영광스러워진 바로 그 영광을 오늘 우리 믿는 택자들에게 주시려고 했던 것입니다(골3:4, 살후1:12, 2:14).

 ⑤ 사생활과 공생활의 희생

예수님의 희생에서 흔히 쉽게 넘어가는 부분 중 하나가 사생활의 희생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정을 나선 것은 30세 되던 때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평범한 가정에서 부모를 모시고 형제들과 함께 세상 일반 생활을 꼭 같이 했습니다. 이때 생활을 두고 보통 예수님은 가정생활에서도 모범을 보였다는 정도로 참고하는데, 실은 이 가정생활도 바로 우리를 대속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어느 한 틈도 한 종류도 빠짐없이 전부 우리를 위해 우리 대신 역사하였으니 예수님의 사생활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가정생활이나 세상 일반생활 중에서 지은 죄를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생애가 일반 우리 인간들이 태어나서 자라고 성년이 되는 전 과정을 그대로 다 통과한 것은 그 전 과정을 밟아가며 죄와 불의와 원수된 것과 절망한 죄를 해결한 것입니다. 어리기 때문에 어려서 짓는 죄를 어린 시절의 주님이 그 죄값을 대신 치렀고 또 어린 사람이 어리기 때문에 짓는 그 죄를 어린 예수님으로 이겼고 또 어리기 때문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을 어린 예수님이 어리면서도 대신 행하여 우리를 대속한 것입니다.

가정생활에서 사회생활에서 또 복음을 전하는 신앙생활에서도 우리는 그 형편 그 환경 그 사정에 따라 각각 여러 종류의 죄를 짓습니다. 이 모든 생활환경과 살아가는 과정까지를 그대로 다 대신 살아가면서 해당되는 모든 죄를 전부 대속했습니다(막6:3, 눅2:51, 3:23).


 
                                3.대속의 성격  

  따라서 예수님의 희생은, 우리를 하나님 닮은 존재로 만드시려고 목적을 정한 그 목적 세계에서부터 포함되어졌음을 알아야 하고, 또 신인양성일위가 되신 예수님의 신분에서도 그 희생은 살펴져야 하며, 우리가 지은 죄의 4가지 종류와 그 죄로 인한 결과와 그 죄로부터 구원받고 구출되는 과정에서도 그의 희생은 어떤 차원에서 어떤 면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부활로 이제 예수님의 고생이 완전히 끝이 났다는 그 순간도 실은 또 다른 차원의 영원한 희생이 진행되는 시작이었음을 알아야 진정 예수님의 희생을 더 깊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는 예수님의 생애 33년 중에서 그 출생과 그 어린 시절과 성장과정과 장년이 되고 이제 복음을 전하게 되는 그 일생 전부가 우리를 위해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정이었고, 그 하나하나가 전부 우리를 지극히 영광스런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는 일에 꼭 필요한 희생이었음을 자세하게 살펴야 할 것입니다.

 ① 대표적 행위

예수님의 대속은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 대표로 행한 행동입니다. 마치 첫째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 전 인류를 대신하여 대표로 행동했고 그 첫 행동이 실패하여 죄를 짓자 그 죄가 다 우리의 범죄가 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속주로 행한 모든 행위와 그 행동으로 인한 결과는 전부 우리의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대속주가 되기 전에 이미 우리를 위해 오셨고 우리를 위해서 사활의 대속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 다른 것은, 첫째 아담의 죄는 죄이므로 모든 이에게 사망으로 그대로 이어졌으나 둘째 아담의 구원 역사는 둘째 아담이 대신하겠다고 약속한 우리 택자들만을 위해 베풀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속을 받은 사람이 그 혜택을 누려 나가는 것은 ‘순종’으로 가능하게 했으니, 그 대속을 처음 받아 중생되는 것도 또 중생 후 그 대속을 누리는 것도 전부 순점T니다. 다른 말로 ‘믿음’입니다(롬5:14-19).

 ② 목적의 중심

예수님의 대속은 좁게 보면 죄 때문에 죽어 지옥에 갈 우리를 천국으로 구해낸 희생입니다. 그러나 이 대속은 하나님의 전체 사역에서 본다면, 자존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기 이전 하나님께서 당신을 닮은 자녀를 만들기로 목적을 정하시던 자존의 첫 사역에서부터 확정된 일입니다. 즉 우리를 하나님께서 목적 대상으로 정할 때부터 ‘대속’이라는 과정을 통과하도록 했으니, 예수님의 대속은 사실 하나님의 목적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닮은 존재를 만들어 그에게 완전자의 모든 것을 영원토록 주기로 작정을 할 때, 하나님의 모든 것을 주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천국만 만들어 처음부터 우리를 천국에서 살도록 하는 방법도 있고, 세상을 만들어 세상을 통과한 다음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주신 다음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지옥생활을 겪게 한 다음 다시 구원하여 천국으로 올려 영원히 사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 것을 하나님은 전지자이므로 다 아시고 또 그 방법 중에서 하나님으로서는 가장 큰 고생과 희생을 해야 하지만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가장 많은 것을 주실 수 있고 또 가장 온전하게 만드는 방법은 세 번째 과정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지가 그것을 알고 그렇게 목적을 정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같은 온전자를 만든다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의 총론이라 할 수 있고, 인간을 타락시킨 다음 대속으로 다시 회복시켜 온전하게 만들어간다는 과정은 하나님의 목적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락을 겪은 다음 다시 구원받게 될 인간과, 타락을 겪지 않고 천국에서 처음부터 영원토록 그대로 살게 될 인간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양이 틀리고 그 은혜의 양이 다르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결과도 다르게 됩니다. 타락을 겪고 나서 구원받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면 하나님이 사람 되어 대신 죄값을 치러야 하는데 그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그 인간을 다시 살게 하려면 신인양성일위로 부활하여 하나님께서 영원히 인간을 입고 살아야 하는 영원한 희생을 해야 합니다.

그 대신 타락을 겪지 않고 바로 천국에서 영원토록 살게 하면 하나님이 만든 소유물이나 인도 등 다른 은혜는 받는다 해도 하나님 스스로 사람 되어 희생하고 또 영원토록 사람을 입는 수고는 필요 없게 됩니다. 타락의 방법을 거치면 하나님으로서는 하나님의 전부를 다 투자해야 하는 사랑이 필요하고, 타락하지 않는 방법을 택하면 하나님 자체는 희생할 것 없고 다른 수고만 하면 되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전달되는 희생이 다르면 우리에게 전해진 은혜의 종류와 크기가 다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받은 양만큼 우리 인간의 영광과 실력과 부요와 지식은 많아지게 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여 거저 은혜를 주시되, 논밭만을 떼서 주는 자식으로 상대하는 그런 부모에 그치지 않고, 또 논밭은 물론 인생사는 지혜와 사업에 성공하는 비결까지 가르쳐 주는 그런 아들로 상대하지 않는 부모에 그치지도 않았습니다. 또 그보다 더 나은 아들로 상대하여 논밭과 인생 성공법만 가르쳐 줄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갈 현장에 항상 함께 동행 하며 일일이 현장 지도까지 다 담당하는 그런 아들로 상대하는 데에 그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보다 더 나은 아들로 상대하여 이 모든 것을 다 주시고 거기에 더하여 아예 내가 더 좋은 경험과 실력을 갖도록 하기 위해 대신 죽어주고, 말하자면 군에도 대신 갔다 와 주고 감옥에도 대신 살아주고 그리고 이후 사장이 된 나 속에 들어와서 나와 떨어질 수 없는 하나가 되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신다면, 그 사랑의 크기는 앞에서 예를 든 그런 경우도 비교할 수 없게 훨씬 클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은 좁게 보면 죽을 구덩이로 들어간 아들을 살려낸 구원입니다. 그러나 넓게 보면 이미 세상을 만들기 전에 우리를 만드시기로 먼저 작정하셨고, 우리를 만드시기로 작정할 그 순간에 우리를 만들되 어떤 존재로 만드느냐는 그 목적의 성격과 내용까지를 미리 확정하셨는데, 바로 그 목적 속에는 하나님께서 날 대신 죽고 날 대신 사람의 몸을 입고 영원히 살아야 하는 가장 큰 희생과 투자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완전자 전지 전능자 사랑의 하나님께서 날 사랑하신 사랑의 실상이요, 대속이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존 다음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사역의 첫 순서가 되는 목적의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갈1:4, 벧전1:2, 계1:1-6).

 ③ 단번 해결

예수님의 대속은 우리를 위한 단번의 해결입니다. 횟수로는 단번이며 그 시간적 효력은 영원토록이며 그 범위는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 전부를 완전히 해결한 것입니다. 이를 ‘단번 구원’, ‘영원 구원’, ‘완전 구원’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는 순식간이었습니다. 단 한번의 죄였는데 그 죄로 인하여 다시는 인간 스스로는 회개할 수도 없는 멸망에 떨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대속도 단번 대속입니다. 단 한번의 대속으로 그 죄를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해결한 대속은 하나님의 무한이 동참하여 해결했기 때문에 미래에 지을 죄까지, 또 영원무궁토록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자본을 전부 다 해결할 수 있는 은혜였습니다. 죄로부터 빠져 나오는 것도 단번 해결이었지만, 우리의 영원에 필요한 자본을 마련한 것도 단번 해결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대속은 2천년 십자가에서 단 한 번만 있었지만 그 효력은 과거 4천년 구약 역사 전체에도 미치고 2천년 이후 신약 역사 전체에도 미치며,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 영원무궁토록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문제가 전부 완성된 하나님의 수고였습니다.

죄의 종류도, 그 죄 하나하나가 미치는 영원무궁한 지옥 형벌까지도, 그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완전에 도달하는 데에 부족한 문제까지도 전부 해결하되, 창세로부터 세상 끝날까지 우리 택자 전부를 다 포함하여 그들의 모든 것을 다 해결했습니다.

이는 어느 한 인간의 육체가 도를 닦아서 이룰 수 있는 그런 인적 요소에 속한 작업이 아닙니다. 시간적으로도 영원무궁 후까지를 해결했고 그 상대도 하나님의 완전을 상대하여 영원토록 그를 닮는 것이므로 인간 단독으로는 생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단, 이 대속의 완성은 십자가 위에서 단번이었지만 이 대속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시는 배급은 모든 택자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고 살아가다가 교회로 부르심을 받게 되는 그 순서를 따라 나누어주고 있습니다. 그 대속을 실제로 입혀 주시는 시간과 장소와 형편은 각자 예정을 따라 배급됩니다. 또 그 사람이 중생 된 이후 남은 평생을 살아갈 때, 그에게 해당되는 신앙의 분량과 방향을 따라 각자에게 대속의 실효가 적용되어 성화되는 양은 각각 다릅니다. 분명한 것은 이 모든 해결의 법적 실질적 완성은 2천년 십자가의 사활로 단번이었습니다(롬6:10, 히7:22-28, 9:12, 25-28, 10:10).



                              4. 대속의 내용

  예수님의 대속을 크게 2가지로 나누면, 죽음으로 해결하신 것과 부활로 해결하신 것이 있습니다.

  첫째, 죽음으로 해결하신 것은 우리가 죄를 지어 그 결과로 고통을 당해야 하는 그 고통을 대신 다 당해야 하고 또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가 싸워야 할 죄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또 우리가 불의로 살았던 값을 대신 당해 죽어야 하고 우리 대신 의를 만들기 위해 싸워 죽음으로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친 문제나 영생에 대한 소망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롬5:6-11, 골1:22, 히9:15, 벧전3:18).

  둘째,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를 대신하여 해결한 것은 영생에 관련된 모든 것입니다. 이 죽음과 이 부활로 우리를 대신하신 것을 합하여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죽고 부활하여 해결해 놓은 것을 가지고, 이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가지신 그리스도직, 즉 제사장 노릇과 선지자 노릇과 왕 노릇을 할 수 있도록 했으니, 이 면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성경은 예수님의 이름을 ‘기름부음’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도로 가르쳤고, 기름부음이라는 뜻은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의 역할을 뜻하는 것입니다(롬6:5, 10, 빌3:10, 벧전1:3, 계20:6).


 (1) 죽음의 대속

 ① 4가지 죄값 면제를 위한 죽음

예수님의 대속은 우리 죄를 면제하기 위해 죄의 값을 치른 행위입니다. 죄의 결과는 첫째 하나님과 단절시키고, 둘째 인격과 행위와 모든 소유까지를 다 부패시키며, 셋째 모든 종류의 고통을 형벌로 받는데 이 모든 형벌의 끝이 없으니, 넷째 그 상태를 지옥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면제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의인에게 주시는 보호와 안보를 철회했고 부패한 인간의 모든 불편을 다 겪어야 했으며 마지막 십자가에서는 우리 택자 전체의 영원한 지옥 고통까지를 다 끌어서 감당했습니다.

이 4가지 죄의 결과를 예수님 인성 한 몸에 33년을 겪었고 마지막 십자가의 죽음은 그 영원을 다 한 곳에 모아 고통을 가했으며 예수님은 그 고통을 전부 겪으므로 우리 죄값을 완전 면제시켰습니다.

좀더 분설한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위해 대신 죽은 죽음인데, 이 죽음은 죄로 인하여 우리가 당할 고통을 대신 받고 평생을 살다가 마지막으로 그 죄의 고통을 다 치르고 죽은 죽음입니다. 둘째, 이 죽음은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산 불의의 죄로 인하여 당할 고통 전부를 대신 치르고 그 불의로 인해 당할 것이 전혀 없도록 가해진 형벌을 받고 죽은 죽음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이 하나님과 떨어짐으로 당해야 할 그 고통을 당하며 평생을 살았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숨이 다할 때는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이 당해야 할 모든 고통을 다 안고 죽었습니다. 넷째, 예수님의 죽음은 소망을 포기한 인간이 절망 때문에 당해야 할 고통을 평생 겪었고 마지막 죽음에 그 절망의 고통이 다 포함된 죽음이었습니다(롬4:25).

 ② 4가지 죄와 투쟁으로 죽은 죽음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는 신분입니다. 예수님이 행한 것이 하나면 우리가 가질 것이 하나이고, 예수님이 행한 것이 한 종류라면 우리가 받을 것도 한 종류뿐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되 우리가 지은 죄의 결과인 고통만을 대신했다면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받을 혜택은 죄의 결과인 고통에서 면제받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하여 당할 우리의 고통을 예수님이 대신 겪어 우리가 그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면제해 주신 것이 대속하신 은혜 중에 첫째로 알아야 하지만, 대속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겨야 할 죄를 대신 이김으로 우리에게 죄를 이긴 공로를 대신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평생과 그 마지막 죽음의 절정은, 한편으로는 우리가 지은 죄값을 대신 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싸워 이겨야 할 죄를 대신 싸워 이겼으니 이것도 예수님의 대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죄를 이긴 이 대속 때문에 우리는 죄의 형벌을 면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죄와 싸워 이긴 사람이 되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고전15:3, 57, 갈1:4).

첫째로,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 조상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이겼어야 할 ‘말씀을 어기도록 하는 죄’를 이기고 죽은 죽음이었습니다. ‘말씀을 어기라는 죄’를 우리 대신 싸워 이겨주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믿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을 어기게 하는 죄’와 싸워 이겨 주신 대속의 공로를 입었으니 우리는 법적으로 또 기본적으로 죄에게 이긴 사람들입니다(마4:6-7).  

둘째로, 예수님의 대속은 인류 조상 아담이 제 마음대로 살면 안 되는데 자기 마음대로 살라고 시키는 불의의 죄에게 져서 죄의 점L 된 것을,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기까지 싸워 불의의 죄를 지어라고 하는 죄에게 승리하고 죽었습니다. 불의의 죄는 예수님에게 예수님 마음대로 살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 뜻대로 살기 위해서 목숨을 내놓았고 하나님 아버지 뜻대로 살고 자기 뜻대로는 살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죽었으니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 대신 불의의 죄를 이긴 죽음입니다(마27:42, 벧전4:2).

셋째로, 예수님의 대속은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살도록 했던 죄를 이기지 못한 아담 대신에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살도록 만드는 그 죄를 이겨 우리가 승리한 승리를 만들었습니다. 이 승리의 최점: 예수님 목숨이 이 세상에서 다하도록 싸우고 마지막에 이 싸움을 위해 가진 호흡 하나까지도 다 소진하게 되면서도 끝까지 하나님과 화친한 생을 살았기 때문에 이런 삶을 끝까지 하는데 하나님과 원수 되라는 죄가 그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예수님을 하나님과 원수 되도록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과 원수 되라는 죄’에게 이긴 승리자가 되었고 그 승리는 오늘 우리의 승리가 되었습니다(롬3:25, 5:10, 엡2:16, 골1:20-21).

넷째로, 소망을 버리고 절망 가운데 살게 하는 죄가 예수님을 평생토록 그리고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따라가며 절망시키려 했으나 예수님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소망 가운데 소망으로 살면서 소망 때문에 죽었습니다. 따라서 절망시키려는 죄는 예수님을 이기지 못했고 그 대신 예수님이 절망의 죄를 우리 대신 이겨, 오늘 우리에게 절망의 죄를 승리한 사람을 만들어 주셨으니 예수님의
대속은 우리를 소망의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눅23:46).

 ③ 4가지 의를 위한 대속의 죽음

예수님이 죄로 투쟁한 대속은 죄의 종류가 4가지이므로 4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어긴 죄, 불의의 죄, 원수 된 죄, 절망의 죄로 죄를 나누되, 이 죄들을 지어 받아야 하는 고통을 대신 받고 나아가서는 이 죄들과 싸워 이기다가 죽었으며 더 나아가서는 이 죄의 반대되는 의를 이루려다가 죽은 죽음입니다.

예수님 죽음의 첫 단계는 말씀을 어긴 죄의 값을 다 받고 죽었고, 그 죽음 이면에서는 말씀을 어기라는 죄와 싸우다가 그 죄에게 피동 되지 않으므로 죽었고, 그 죽음 더 깊은 이면에서는 말씀에게 붙들려 말씀대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대신 죄의 값만 받은 것이 아니고, 또 죄로 더불어 싸워 이긴 대속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의를 이루어 의인이 되게 한 첫 번째 대속의 죽음입니다(요15:10).

둘째 의는, 예수님이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살았던 불의의 죄 값을 다 겪고 죽었는데 이 죽음 안에는 우리 마음대로 살라고 몰아붙이는 불의의 죄와 싸우다가 그 죄에게 지지 않고 한 번도 예수님이 자기 마음대로 행한 일이 없이 죽었으니 이것이 불의의 죄와 싸워 이긴 승리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불의의 죄와 싸워 죽는 그 내면에서는 불의의 죄를 짓지 않으려고만 하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불의의 죄를 짓지 않는 동시에 오히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다가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무엇이든 어떤 희생이든 아낌없이 순종했고 최점{으로 죽음까지를 요구해도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 순종에서 죽었으니, 예수님의 대속의 가장 깊은 속에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다가 죽은 의의 죽음입니다. 이 죽음이 우리를 대신한 것이니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순종한 의인이 되어 중생하고 있습니다(요12:49).

의를 위한 예수님의 세 번째 대속의 죽음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죄값을 당하면서 죽는 그 죽음 속에 하나님과 원수 되라는 악령의 유혹을 물리치고 죽었습니다. 하나님과 등을 지라고 협박하고 굶기고 마지막에는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죽이고 있었는데 그 최후 호흡 한번이 남았을 때까지도 예수님은 하나님과 원수 되라는 죄에 굴복하지 않으므로 그 생명을 끝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과 원수 되라는 죄를 이긴 대속입니다. 바로 이 대속의 죽음에는 하나님과 하나 된 화목의 생으로 살려는 노력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면에는 하나님과 하나 되려고 노력했고 하나님과 하나 되었으며 하나님과 하나 된 그 연결이 어떤 외부의 충격과 방해와 사망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끊어지지 않고 최후 호흡을 끝마쳤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은 하나님과 하나 되는 화친을 만든 대속입니다. 이 대속은 곧 오늘 우리가 중생되는 그 순간 기본적으로 가지게 됩니다(마4:10).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절망하도록 만드는 절망의 죄에게 지지 않고 끝까지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죽었으니 이 죽음 안에는 하늘의 영원한 소망을 놓지 않고 소망 가운데 죽었으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소망의 공로, 소망이라는 의를 만들어 주신 대속입니다(눅23:46).

 ④ 예수님의 죽음의 성격

 ▪ 예수님의 사망이 가지는 3가지 의미

예수님이 죽음으로 우리를 대속했다고 표현할 때의 ‘죽음’은 임점G 순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 기간 전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것은 생애 기간 중에서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우며 가장 넘기기 어려운 순간이었기 때문에 이를 생애 기간 전체의 고통과 대속의 희생을 대표한 시점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망이 가지는 의미는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생애 기간 전체를 가리키고, 둘째는 예수님이 당한 고통의 최고 절정을 가리키며, 동시에 예수님의 생전 활동의 마지막 순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으로 우리를 대속했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는 순간의 고통으로만 우리를 구원한 것으로 인식하기 쉬운데, 예수님은 출생으로부터 성장과정을 거쳐 장년이 되고, 또 복음을 전하다가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죽게 되는 이 모든 생애 기간 전체가 우리 구원을 위해 당한 고난이었고, 그 고난 전부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대신 행동한 것입니다.

 

  물론 그 가장 어려운 순간이며 가장 절정을 말하라 한다면 당연히 십자가상의 죽음입니다. 이제 이후로는 더 이상의 고통도 없으며 이 순간의 승리로 최후 확정이 되기 때문에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지, 십자가상의 죽음만이 죽음의 대속을 말하고 그 십자가 죽음 이전의 생애는 우리 대신 죽는 고통을 당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그 순간순간이 이어져서 그의 평생이 되었고, 그의 평생의 마지막 순간이 십자가였습니다. 악령은 이 순간을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으므로 최악의 고통으로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도전했고, 예수님은 승리했기 때문에 십자가는 예수님의 고난을 대표하는 표현이 된 것이지, 십자가에서 당한 고통만이 전부는 아닙니다(사53:3).

 ▪ 하나님의 지공지성법과 악령의 주권법

  일반인의 사망은 그 종류에 상관없이 자연사입니다. 병사 옥사 고문사 자살 사고사 등 여러 형태가 있지만 그 전부를 줄이면 일반인이 당하는 죽음의 형태이므로 ‘자연사’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망은 우리를 대신한 대속의 죽음인데, 이 죽음이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죄 때문에 악령의 종이 되어 있고, 악령은 우리에게 왕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악령의 주권이 가하는 고통을 다 당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범죄한 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므로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 적용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법이 우리를 지공과 지성으로 상대하며 엄히 판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죄인으로 당하고 거쳐야 할 순서를 하나님의 법도 요구하고 또 악령은 아예 자기에게서 빠져나갈 수 없도록 그가 가진 죄의 주권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망은 일반인의 자연사와는 아주 다른 고통과 차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예수님이 죽는 그 순간까지 흠과 점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속한 신경 세포 하나까지라도 부족이 있어 하나님의 법에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당장 죄인이라고 판정을 해버리고 악령이 승리했다고 선언하게 됩니다. 또한 악령은 예수님에게 죄인의 왕으로 자기 종을 대하는 권세와 방법을 동원해서 죄를 짓도록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마27:39-44).  


 (2) 부활의 대속

 ① 대속의 범위

 ▪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주신 대속의 범위

  대속이라는 의미를 좁게 해석하면 지은 죄값을 대신 해결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의미를 좀더 넓게 해석하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것을 대신 해결해 준다는 의미가 됩니다. 죄는 말씀을 어긴 것도 죄이지만, 하나님의 온전에 미달된 것도 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말씀을 어겨 지옥 갈 것을 대신 형벌 받고 지옥형을 면하게 한 것도 대속이지만, 우리가 이겨야 할 죄를 대신 이겨 우리에게 죄를 이긴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것도 대속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행할 의를 우리가 행하지 못한 것을 대신 행한 것도 대속이며, 더 나아가 우리가 누려야 할 복을 우리 스스로 마련하지 못한 것을 대신 마련해 준 것도 대속이며, 제일 넓게 대속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같은 사람이 되도록 정한 목적에 필요한 것을 대신 마련한 것까지 다 대속입니다.

 

  하나님의 사역 첫 출발 때 작정한 하나님의 ‘원래 목적’에 우리가 미달된다면 이 미달된 면을 대신할 수 있는 분은 주님뿐입니다. 우리를 그 목표에 달성하도록 대신 마련한 모든 수고도 대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 비유한다면, 사람을 죽인 일이 없다며 자기는 살인범이 아님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있는 힘 다하여 사랑하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죄의 형벌을 받지 않았다고 인생의 목표를 달성했다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장 수준 낮은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뒤에 또 범죄할 기회가 온다면 다시 죄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니 이것이 역시 큰 걱정입니다. 그 사람 속에 범죄할 가능성을 뽑아버려야겠는데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을 다른 사람이 수고해서 자기 속에 이제 범죄의 가능성을 가진 인격을 완전히 개선시켰다면 이것이 한 차원 높은 대속의 세계일 것입니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범죄 하지 않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그를 위해 한 사람이 헌신하여 그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었다면 죄인을 사랑의 사람으로 만든 그 수고를 대속이라는 개념에서 삭제한다는 것은 너무 시야가 짧다고 하겠습니다. 살인범을 이렇게 사랑의 사람으로까지 만들었다면 이 일에 들어간 모든 수고는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으로 이룬 일입니다.(고전15:10, 딤전1:13-15, 요15:12-17)

 ▪ 십자가의 부활로 주신 대속의 범위

살인자 우리를 사형집행에서 건져 주시고, 살인할 가능성도 없도록 개조시키시고, 이제는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것까지가 예수님이 죽기까지 하셔서 이루어놓은 일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감옥 밖에 나온 우리를 실제 그런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은 수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죽음으로 해결해 놓은 모든 해결이 법적 해결이었는데, 이제 부활로 말미암아 그 모든 법적 해결이 우리가 실제 생활에서 누리고 살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대속은 죽음으로 우리 문제를 절반 해결했고, 부활로 우리에게 남은 문제 절반을 다시 해결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부활이라는 것은 죽음으로 우리 문제를 전부 해결한 주님께서 이제 죽기까지 고생한 대가로 다시 생명을 얻어서 평안하고 좋게 살게 된 것으로만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생은 죽음까지 고생이 절반이고 부활하심으로 나머지 절반의 고생, 즉 영원무궁토록 우리를 위해 끝없는 고생을 하겠다는 고난의 시작입니다. 시간으로 말하면 죽음까지 고생은 33년이고 부활로 인한 대속의 고생은 영원무궁이므로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두고 말하자면 죄로부터 구해내는 것은 죽음으로 해결했다면 부활로 해결하는 것은 죄에서 구원해낸 우리에게 새 인생을 살도록 한 것이므로 이런 시각에서 반반으로 나눌 수 있는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참 고생, 진정한 대속의 수고는 지상에서 33년 세월과 마지막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의 절정과 하나의 매듭은 될지라도 예수님이 우리 위해 고생할 고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 고생 전부를 두고 말한다면 죽음까지의 고생은 극히 일부분입니다.

그 고생을 두고 일부만 먼저 설명한다면, 죽음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인성을 버릴 수 있었으나 부활로 우리를 대속하여 부활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실 여러 은혜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성을 다시 찾아 입게 되었는데,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께서 영원히 다시는 인성을 벗을 수 없도록 입고 사시는 수고를 자청한 것입니다.(롬6:10, 고전15:20-21, 벧전1:3)

 ② 부활의 성격

 ▪ 인성의 변화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하여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고 인성에 대한 본질적 변화만 있었습니다. 신성은 자존자 완전자 영원불변의 하나님이므로 인성의 대속 역사에 동참한 수고가 전부였으나 인성은 우리와 꼭 같은 사람으로 와서 인간이 당할 고생을 다 당하되 한 인간이 당할 고생이 아니고 모든 택자 전부의 영원한 고생을 다 당했으므로 그 인성의 고난은 우주적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이제 그런 차원의 인성 고난은 완전히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의 인성은 다시는 죄와 상관이 없고 책임도 없을 뿐 아니라 그 인성은 신성에게 붙들려 하나님 보시는 하나님 기준에 흠 없고 점 없는 인성이 되었는데, 그 인성은 하나님과 한 분을 이룬 인성이므로 그 인성은 바로 신성 하나님과 나뉠 수 없는 제2위 성자 하나님의 위치에 올랐습니다. 따라서 부활로 인하여 예수님의 인성은, 피조물인 연약한 인간에서 출발하여 우주와 영계를 영원히 다스릴 만유주 하나님이 되었으므로 그 인성은 부활 이전의 인성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인성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시공의 제한을 완전히 벗어 그 시공의 제한을 초월하셨고, 우리 모든 택한 사람을 중생시키고 영원토록 영생케 하는 구주시며 또한 만물의 끝날에 만물을 심판할 심판주시고 택자들이 영원히 사모하며 자라가며 닮아가야 할 길을 앞서 걸어가신 우리의 영원한 목표가 되었습니다.(요14:19-20, 엡4:15, 골3:1-4, 벧전1:3)  

바로 이런 예수님의 위치를 가리켜 하나님 보좌에 함께 앉았다고 했는데 이 보좌에 앉으신 분은 예수님의 신성이 아니고 예수님의 인성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은 원래부터 그 자리가 자기 자리이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피조물인 예수님의 인성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앉을 자존자가 아니었으나 이제 신인양성일위의 인성이 신성에게 완전 순종하므로 인성이 신성과 하나가 되었고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인성은 예수님의 신성인 하나님의 위치에 앉게 되었습니다(막16:19, 히8:1).

중요한 것만 예를 든다면, 하늘과 땅의 임금이 되셨고 그 통치권이 영원무궁토록 계속될 것이며, 세상 끝날까지 우리 택자들을 불러 구원하고 우리와 동행하며 우리를 책임지실 것이고 또 이 세상 끝날 우주를 심판하고 지옥에 보낼 공심판과 천국에서 영원히 영생할 우리의 세부 요소를 결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무궁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며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온전하고 거룩하고 깨끗해지도록 영원히 우리를 인도할 것이며, 우리에게 영계와 우주 모든 운영을 맡겨 마치 하나님의 모든 것을 예수님이 맡아 하나님 노릇을 하듯, 우리가 예수님의 모든 것을 맡아 예수님 노릇을 하게 할 것입니다(눅22:29-30, 계3:21).

 ▪ 영생의 실제 효력

예수님의 부활은 우선 예수님의 인성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죽음으로 마련하신 예수님의 모든 공로를 실제 입고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법에서 의롭다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준비에 그쳤고 이제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를 향해 입혀질 모든 은혜가 실제적으로 우리의 것이 되어 우리의 생활이 되고 우리의 영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이 죽어야 했던 것은 죽음으로써 해결할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죄값은 사망이므로 예수님이 우리를 대속하려면 예수님이 직접 죽어야 했고, 또 죄와 싸워 이기려면 죽기까지 싸워 이겨서 최종 승리를 해야 완전한 승리가 되기 때문에 싸워야 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시키는 순점; 전부 완수하여 의의 완성을 이루려면 예수님의 생명이 조금이라도 살아 있고는 완성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호흡 한번이라도 남아 있다면 아직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명령을 완수할 수 있을지 아니면 미달에 그칠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죽어 끝이 나야만 완성되는 것은 이런 면의 대속입니다.

그런데 죽음으로 예수님의 희생이 끝나지 않고 예수님의 신성은 인성을 다시 되찾아 입음으로 예수님은 부활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은 사망이 가장 큰 공포가 되어 있는 인간이 볼 때는 예수님이 아주 큰 출세를 한 것 같지만, 실은 예수님의 신성 하나님으로서는 만일 인성이 부활하고 그 인성을 신성이 되찾아 입게 되면 예수님의 신성인 제2위 성자 하나님은 영원무궁토록 그 인성을 입고 불편하며 고생하며 마치 우리가 독방감옥에 영원토록 사는 것 같은 고난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 인성이 우리 대속을 위해 죽기까지 고생할 때 예수님의 신성이 사랑으로 동참하며 고통을 받았지만, 이제 부활로 인하여 예수님의 신성은 영원무궁토록 제한받고 불편한 희생을 지속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희생을 바탕으로 예수님은 신인양성일위로 다시 부활했는데, 이 부활의 의미는 새생명입니다. 새로운 생활입니다. 새 역사이며 새 활동을 의미합니다.

죽음으로 완성해 놓은 모든 자격과 실력과 앞날의 소망을 이제 예수님 부활로 인하여 우리 믿는 사람들은 우리의 영원한 나라의 우리 생명으로, 우리 생활로, 우리 행동으로, 우리의 소망으로 갖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살려놓은 대속의 희생이라면, 예수님의 부활은 살아난 우리로 하여금 새생활로 영원히 살아가는 영생을 실제로 누릴 수 있게 영원한 자본과 희생을 제공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인양성일위가 부활로 새출발하고 이 신인양성일위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니 이 신인양성일위가 영원히 계속하는 한 우리의 새생명이 실제 살아가는 새생활도 영원할 것입니다.(롬6:4-5, 벧전1:3-4)

 ▪ 부활의 인성은 우리의 목표치

부활하신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은 신인양성‘일위’고 부활 후 우리는 하나님과 신인양성‘일행’이라는 점만 다를 뿐이지 그 외에는 모든 면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인성과 같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이 앉으신 그 자리, 그 실력, 그 직무, 그 영광이 우리 모든 택자들이 부활 후 영원히 천국에서 누릴 우리의 모습들입니다.

다만 예수님은 흠도 없고 점도 없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완전히 본받을 수 있는 이 세상 기간에서 중생 후 다시 예수님으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여러 면으로 부족한데, 자신의 부족만큼 또 자신이 준비하지 못한 만큼 천국에서 예수님의 인성에 미달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구원받은 사람 전체를 두고 말한다면,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토록 예수님의 인성의 완전함을 목표치로 두고 영원히 그분을 따라가고 배워가고 자라갈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하신 인성은 택한 우리에게 천국에서 영원히 접근해 갈 목표치가 될 것입니다.(엡4:15)

 ③ 부활의 희생에 대한 감사와 만물의 순종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이미 죽음으로 마련해 놓은 1차 대속에 이어 이제 이미 죽음으로 해결한 모든 것을 실제로 우리에게 입혀 영원히 살게 하셨으니 이는 넓은 차원의 대속 곧 2차 대속 사업입니다. 그러나 이 대속으로 우리를 영원히 실제 구원 효력을 받고 살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가 영원히 행복하게 되고 실제 효력을 누릴 수 있는 그만큼 대가를 치러야 했으니 그 대가가 바로 인성을 다시 입는 수고였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한번 웃을 때, 그 웃음을 위해 예수님이 당한 고통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다행스럽게 살아난 것을 이야기할 때 우리를 위해 대신 죽은 예수님의 사망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소망에 흥분할 때, 그 천국 영생을 위해 영원히 인성을 입고 불편하기로 작정하신 예수님의 신성의 영원히 계속되는 희생을 실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마치 자녀가 사용하는 학비나 모든 비용은 그 돈 액수만큼 그 돈을 벌기 위해 땀 흘린 부모의 노고가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일단 한번 죄를 지은 이상 우리를 되살려 영생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그 대가를 마련한 수고가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죄를 짓는 순간 악령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그 값을 악령에게 치르지 않고는 강제로 하나님께서 악령으로부터 우리를 빼앗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면서 동시에 공의이므로 당신이 대신 죽는 희생의 값을 주고 되찾아 왔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만족시키고 또 하나님의 공의도 그대로 지킨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 앞에 이제 다시 살려낸 우리에게 영생을 주되 우리를 만물 위의 하나님 자녀로 하나님을 대신할 통치자로 세우는 일에 우리를 기계나 종처럼 대하지 않고 자유성을 가진 실력을 갖춘 아들로 세우기 위해서는 그 아들도 고생을 해야 자기 실력을 갖게 되는 것이고 또 그 실력이 하나님과 같은 성질의 실력이 되어 하나님의 신성을 닮은 인성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신성의 영원한 자본을 투자하고 그 실력을 가진 존재로 우리를 만물 위에 영원한 교회가 되게 했습니다.

이러므로 영원한 나라에서 만물이 우리에게 순종하는 것은 배경의 하나님 때문에 억지로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대신할 훈련을 쌓았고 그 훈련 이전에 그 아버지가 그런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아들이 될 수 있도록 자원하여 모든 것을 아낌없이 투자했고 영생을 위해 영원히 하나님의 편리함을 내놓았기 때문에 어떤 만물도 하나님의 자녀 우리 때문에 원망이나 억지 순점L나 불평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보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부러워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공의를 인정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대속의 은혜를 찬양하며 그런 과정을 통해 흠 없이 점 없이 아버지 자리를 차지하게 된 우리이기 때문에 만물이 우리를 대할 때도 하나님을 대하듯이 하게 됩니다.(롬8:18-23, 히2:8)

부활 후 영원히 계속될 이 세계는 바로 자유의 세계입니다. 어느 벌레 하나도 강압에 의하여 눌려서 순종하는 법이 없고, 그 어떤 풀 한 포기도 억울하지만 참아야 할 일이 없습니다. 전부가 자유로 자율로 원하고 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와 사랑을 감사할 것인데 그 모든 중심에는 바로 택함 받고 예수님의 사망으로 구원받고 예수님의 부활로 영생을 실제 누리게 된 우리가 있을 것입니다. 만물 앞에 영원한 영광으로 나타날 우리는 바로 예수님의 죽어주심만 감사할 것이 아니고 부활의 은혜를 함께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약2:12, 빌2:9-11, 벧전1:3-4)  

 ④ 이차창조

 ▪ 이차창조의 여건

예수님의 부활에 관련하여 우리 눈에 가장 크게 확인되는 역사는 바로 ‘2차 창조’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만들던 천지창조가 1차 창조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만들어진 것은 2차 창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1차 창조의 껍데기 속에 보이지 않는 2차 창조가 완성되고 출발하고 있었습니다.

1차 창조 직후 아담의 타락이 있었고 그로 인하여 1차 창조에 속한 것은 전부 변질이 되어 영생으로 이어질 것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연결되어 영생으로 이어질 존재는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지옥으로 가야 할 존재들만 남아 있었다는 점에서 2차 창조의 주변 여건은 1창 창조 때의 환경보다 훨씬 나쁜 조건이었습니다. 1차 창조 때는 그냥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2차 창조 때는 창조를 가로 막고 나서는 세력으로만 가득 차 있는 조건이었습니다.(행4:27)

 ▪ 예수님의 부활과 이차창조

2차 창조는 예수님의 부활로 만들어졌습니다. 외형으로는 1차 창조의 것들 중에서 예수님의 사활의 완성으로 인하여 다시 고쳐지고 치료를 받아 복구가 되는 모습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 내면을 자세하게 살펴본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과 단절된 세상 속에서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의 새역사가 다시 전개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새창조를 위한 준비였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새창조였습니다. 부활은 생명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에 생명체라는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다시 하나님과 연결이라는 생명을 가진 존재를 만들었습니다.(벧전1:3, 고후5:17)

물론 1차 창조와는 다른 존재 형식을 가진 생명역사이고 존재형태를 가집니다. 중요한 것은 1차 창조의 것을 심판하고 다시 시작되는 영원한 세계는 예수님의 2차 창조에 속한 것만 존재하고 활동하는 세상이 되고, 그 이전 1차 창조 때 지속되던 모든 존재는 전부 불심판에 소멸되고 지옥으로 쓰레기처리가 됩니다. 따라서 오늘 지상에서는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새롭게 창조된 2차 창조물들이 어디 있는지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다고 하겠지만, 이 2차 창조에 속한 새것들이 장차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가장 중심에 서서 존재하고 활동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1차 창조도 그 의미가 크지만 그보다 예수님의 부활로 시작된 2차 창조의 의미는 전혀 그 차원을 달리하는 새로운 세계를 여는 출발입니다.(마22:30, 히9:11-12, 계21:1-5)

 ▪ 영원불변성의 창조

1차 창조에 속한 것은 처음부터 진동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2차 창조에 속한 것은 처음부터 다시는 변동이 없는 상태를 만들었습니다. 1차 창조 당시는 아담에게 죄가 없었고 또한 만물도 아무 저주를 받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1차 창조 상태는 아담이 죄를 지으려면 지을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부활로 새로 만들어진 2차 창조의 새생명에 관련된 것은 한번 생명을 얻게 되면 다시는 잃어버리거나 빼앗기는 수가 없는 영원 불변성의 존재가 됩니다(벧전1:3-4).

1차 창조가 말씀의 능력으로 세상을 창조했다면 2차 창조는 하나님이 사람 되어 직접 죽고 부활하여 만든 것이며 다시는 진동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자본이 사활의 대속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히12:27)

 ▪ 택자들만을 위한 창조

1차 창조는 불택자와 택자를 함께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2차 창조는 오직 천국 구원으로 영생에 이르게 될 택자의 새생명에 속한 것만 창조했습니다. 다시는 끊어질 수 없는 절대성의 생명을 택자들에게 만들어 주시는 범위에만 한정된 창조입니다. 물론 1차 창조에 비하여 보이는 범위를 가지고 말한다면 너무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을 살펴 안다면 2차 창조는 1차 창조와는 그 범위가 비교할 수 없이 깊고 넓으니 영원무궁입니다.(벧전1:4)

 ▪ 신인양성일위의 역사

2차 창조에 속한 것이 이렇게 진동하지 않을 것이 되고 생명에만 속한 것으로 광대하게 펼쳐지게 되는 것은, 이 2차 창조에 투입된 제조 원동력이 ‘신인양성일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 되어 오셔서 직접 죽고 직접 부활하여 영원히 이 2차 창조의 배경이 되고 힘이 되며 자본이 되었습니다.

말씀이 역사하여 없는 가운데에서 만물을 만든 것이 1차 창조라면, 하나님이 사람 되어 사활의 대속 공로를 완성하고 그 공로가 2차 창조의 동력이 되었기 때문에 1차 창조와 2차 창조는 그 창조를 위해 움직이고 투자된 것이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부활한 이 영원하고 무한한 역사가 있어야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2차 창조입니다. 이런 새창조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생겨진 것이 중생이기 때문에 믿는 사람의 중생은 절대성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벧전1:3)

 ▪ 이차창조와 주일

2차 창조에 속한 것이 만들어진 그 첫날은 예수님이 부활하던 날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던 그 주일새벽에 영원히 진동치 않을 영생을 창조하는 일이 완료되었는데, 그 영생이 믿는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입혀지는 것은 재림 때까지 계속 태어나고 살아갈 중생된 사람들 각자의 생애 기간에 계속 진행됩니다.

마치 1차 창조의 첫 순간에 창조가 있었고 그때로부터 시작하여 재창조가 계속되었던 것처럼, 2차 창조가 처음 시작된 날은 예수님이 부활하던 주일이었고, 2차 창조가 재림 때까지 재창조로 이어지듯 그 새생명의 역사가 계속 되는 것은 항상 주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에 관련하여 ‘새생명’의 창조를 살펴보면서 ‘주일’을 한번 더 강조하게 되는 것은, 이 날은 그냥 쉬니까 쉬는 세상 사람의 ‘안식’일 정도에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2차 창조를 실제로 사람들에게 공급하여 생명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중심에는 주일이 있음을 특별히 살펴두어야 합니다.(눅24:1, 계1:10, 출20:11)



                             5. 대속의 적용과 부활의 예수님

 ① 땅위의 동행

부활 후 예수님은 천국으로 갔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이 그렇게 기록했기 때문에 성경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이 땅의 사역은 끝이 났으니까 예수님은 천국으로 가서 쉬시고 이곳 세상을 굽어보시고 기도하시고 응원만 하시고, 우리는 예수님 뒤를 따라 현장에서 분투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린 신앙에게 가장 외부적인 면만을 가르친 정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인성은 과거 부활 이전에 시공에 제한 받고 세상에게 침해를 받던 때와 달리 이제 시공을 초월하신 신인양성일위의 제2위 성자 하나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인성은 시공에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분은 천국에 있으면 세상에 있을 수 없고, 세상에 있으면 천국에 있을 수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또한 부활하신 인성은 세상에 있을 때처럼 피곤하면 자야하고 맞으면 아프고 쉬면 편안을 누리는 인성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쉬지 않고 오늘도 천국과 세상에 무소부재하신 분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서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옛날 제자들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 친히 육체로 손을 잡고 동행하던 바로 그때처럼 지금도 그분은 그 육을 입고 몸을 가진 예수님으로 우리와 친히 동행하십니다.

다만 부활하여 신령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심신이 다른 사람을 느끼듯이 느끼지는 못하지만, 부활 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이다가 순간 보이지 않았던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보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주님이 지금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주님으로 늘 함께 하고 있습니다. 부활 후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할 때도 있었는데 예수님이 없어서가 아니고 제자들이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보이지 않았던 순간처럼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부활 후 예수님은 승천하기까지 한 번도 제자들을 그냥 버려 둔 적이 없었습니다. 제자들 자기 시력에 볼 수 없었지 부활하신 예수님은 늘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것을 알리시기 위해 일부러 그들이 보이도록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들이 볼 수 없었던 순간도 항상 주님은 그들에게 볼 수 없는 예수님으로 함께 계셨음을 알린 것입니다.(눅24:13-17)

그리고 승천한 것은, 부활 후 승천 이전 약 40일 기간동안처럼 눈으로까지 볼 수 있는 예수님으로는 앞으로 역사하지 않겠다는 점을 보이신 것이었고 또한 주님과 세상 끝날까지 동행하는 믿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가시면서 보여주신 천국을 향한 그 모습이 바로 주님을 뒤따라 갈 우리들이 갈 길임을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따로 승천하는 모습을 그들에게 보이지 않아도 되지만 일부러 보여줌으로 오늘 우리에게 이런 여러 면을 알리고 계십니다.(행1:9)

마지막 승천하는 순간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는 상징적 의미가 아니고 또한 심정적으로 함께 하는 정도로만 말씀한 것도 아니라, 실제 존재적으로 함께 하실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느낄 수 없는 면만 예수님 생존 당시 제자들과 다를 뿐입니다.(마28:20)

 ⑤ 성령의 계대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도성인신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해야 할 모든 일, 즉 십자가의 사활의 대속을 완성하는 일의 최종 완성을 뜻합니다. 인성을 입고 영원히 희생하는 문제는 단순히 영원히 계속되는 희생이고 승천하기 이전 부활하는 그 순간으로 예수님이 우리 구원을 위해 전면에서 해결할 일은 전부 완료했습니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과 연결 지어 본다면, 신인양성일위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승천하기까지 우리를 하나님 목적하신 대로 완성품을 만드는 일에 전면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승천하신 이후에는 비록 예수님께서 인성으로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지만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 중 성령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어 우리 구원에 전면을 맡고 나섰습니다.(행1:8, 2:1-4)

구약에도 성령의 역사가 있었고, 예수님의 33년 생애 기간에도 성령의 역사는 있었습니다. 도성인신의 예수님으로 오시기 전에도 예수님은 계셨고, 또 승천 이후에도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더구나 성부 하나님은 창세 전에도 예수님의 도성인신 전에도 지상 생애 기간에도 또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도 늘 우리 구원을 위해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보기에는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 어느 위가 앞서 전면에 나서고 다른 분들은 뒤에서 간접적으로 돕는 모습으로 나타내셨습니다. 항상 분리될 수 없는 한 분 하나님이지만 동시에 또 세분이 각각 전혀 다른 존재처럼 활동하는 하나님입니다. ‘일체’로서의 하나님이 아니고 ‘삼위’로서의 하나님으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역사는 각각 전면에 나설 때가 있고 후면으로 물러설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기간 33년은 제2위 예수님이 전면에 나서서 역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배경에서 도우시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활 후 승천하셨다는 시점부터는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대속의 공로를 가지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이 일을 두고 예수님께서 내가 가면 성령을 보내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성령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를 깨끗하게 거룩하게 고쳐가는 역할을 맡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희생을 제공했다면, 성령은 그 예수님의 희생을 손에 들고 이제 우리를 씻기고 고치는데, 다만 설득하고 감화와 감동으로 역사하게 됩니다. 이 성령의 역사가 예수님의 대속을 인계받아 우리 구원을 위해 전면으로 나설 때도, 우리는 이 성령님의 역사 속에서 항상 분리할 수 없는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상대해야 합니다.  

성령이 예수님의 대속을 통해서 우리에게 왔고 그 대속을 가지고 우리를 상대하며 또 우리를 그 대속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성령에 붙들리게 되면 마지막 결과는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 됩니다. 대속을 위해 와서 대속으로 살다가 갔던 바로 그 예수님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우리 가진 것을 희생으로 바치고 그가 대속의 사람이 되는 일에 내가 주님처럼 해야 할 일을 찾아 하는 그만큼이 그 사람에게 임한 성령의 양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령의 역사로 이어집니다. 성령의 역사가 전면에 나설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항상 성령으로 우리에게 그 제자들을 상대하고 인도했듯이 그렇게 하고 계심을 실감적으로 느끼고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생활이 바로 예수님 부활이 우리에게 과거 그런 일이 있었다는 지식에서 그치지 않고 오늘 우리 생활 속의 부활 은혜로 충만케 되는 것입니다.(요14:16, 26, 15:26, 행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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