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神學 · 敎理· 교회사

알미니안 논쟁 (1)

영국신사77 2007. 4. 16. 00:31

               알미니안 논쟁

 

                                                                                                   울산 북부교회 이석배목사

  오늘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사이의 교리 논쟁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논쟁 그러면, 여러분들 대부분 부담스러워하실 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부분을 살펴보는 것이 대단히 유익한 이유는, 이 논쟁은 그 시대에 가장 치열했던 역사적인 논쟁이었을 뿐 아니라, 이 논쟁으로 인해서 오늘날까지 개신교 교회가 큰 영향을 받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이 문제는 우리들 자신도 얼마든지 겪는 신앙적 난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논쟁이 일어난 시대와 장소는 1590년대와 1600년대 초엽 즉, 17세기 초의 '네델란드였습니다. 이 나라는(화란이라고도 하죠), 후에 베스트팔렌 조약(1648)으로 비로소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지만, 아직 그 이전인 이 당시만 해도, 정치적으로는 남부지역과 북부지역으로 첨예하게 구분되어져 있었고, 종교적으로는 기존의 카톨릭에 대항하여 루터적인 개신교가 먼저 들어왔었지만, 뒤이어 들어온 칼빈주의적 개신교가 들어와서 강력하게 득세하고 있는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 자유로운 나라에서 칼빈주의적 교리, 특히 <예정론>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으니,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알미니우스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사람은 오늘날의 모든 자유주의적 신학사상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감리교를 비롯해서 성결교, 오순절주의자들 할 것 없이, 이 사람과 그의 사상인 알미니안주의의 영향을 안 받은 교파가 거의 없습니다.

 

  사상은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도 칼빈의 주장과 같이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예정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발적 동의의지적인 노력이 반드시 들어있어야 한다는 내용을 그 골자로 하는 사상입니다(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니, 성경은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자, 여기에 대한 해석과 입장이 첨예하게 달라져서 이것이 큰 논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알미니우스는 어떤 사람일까요?)
  이 알미니우스 종교개혁의 난류가 유럽에 소용돌이치던 1560년에, 이 나라의 홀란드령에 있던 우데바티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에 그의 홀어머니와 형제들은 가톨릭 신앙을 거부한 까닭으로 그 지방을 점령한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여 그는 고아가 되었습니다. 그는 마르부르크 대학과 라이덴 대학에서 공부를 했고, 나중에는 칼빈주의 신앙의 본거지인 제네바에 유학해서, 칼빈의 동료요 후계자인 베자(Theodore Beza)에게서 4년 동안 배우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그의 신학적 입장에 처음부터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 후 그는 귀국해서 15년간 암스텔담에서 목회자로 사역했고, 나중에는 라이덴 대학의 신학교수로 7년 동안 봉직하다가, 49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이 논쟁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논쟁이 시작된 것은 알미니우스가 라이덴 대학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알미니우스들 특별히 적대한 사람은 같은 대학의 교수로 극단적인 칼빈주의자 고마루스(F. Gomarus)였는데, 그는 칼빈의 후계자인 베자처럼, 하나님께서는 범죄 이전 즉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얼마의 사람은 구원을 받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상관없이 멸망당하도록 예정하심으로써 당신의 공의와 사랑을 드러내신다는, 예정설 가운데서도 <타락 전 예정설>을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알미니우스는 말하기를, 이러한 주장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죄와 인간의 타락도 예정하셨다는 말이 되어,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오해받게 하는 위험한 가르침이라고 여기고는, 인간의 구원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일방적인 예정에 따른 무조건적인 선택에 의하여,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하신 선택은, 예지하신 믿음을 전제로 하신 것이며, 이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천명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은혜’도 인간이 거부할 수 있다한 점이었습니다.

 

  그는 이 은혜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선한 일의 시작이요, 계속이요, 마침이다....그러나 은혜는 저항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의하면 많은 사람이 성령을 거역하였고, 제공된 은혜를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ibid., 253, 254)



  알미니우스에 의하면, “만약 사람이 이 은혜를 거절할 수 없다면, 사람이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한 낱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러한 꼭두각시가 아니라 자녀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의 거저 주시는 은혜가 사람에 의하여 저항 받을 수 있도록 용납하셨다.”고 논증했다. 그는 요한복음 3장 16절 거듭하여 인용하면서, 이토록 확실한 성경의 논증에 기초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는 자율적인 사랑의 관계이지 일방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기계적인 관계가 아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또,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항할 수 있는 까닭은, 은혜의 속성 때문이 아니라 그 은혜가 역사하는 방식 때문임을 강조하면서, “하나님께서 범죄까지도 예정하셨다고 가르치는 타락 전 예정설은, 선택받지 못한 인간은 자신들의 범죄 여부에 관계없이, 예정된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간다는 결론에 이르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인간이 범한 죄의 창시자로 오해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라고 하면서 반대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 반대하는 자들은, 그를 5세기에 활동했던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을 좇는 이단이라고 비난했습니다. 펠라기우스 5세기 초 영국의 수도승이었는데, 인간은 범죄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은 선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적인 은혜의 역사가 없이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행할 수 있다는 일종의 도덕적인 <자력구원설>을 주장했었던 사람입니다.



  물론 알미니우스의 견해는 펠라기우스의 것과는 다른 것이지만,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보다도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서로 통하는 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알미니우스는, 자신이 삼위일체에 관하여 성경과 일치하는 확고한 신앙을 가졌음을 거듭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소시누스(Socinus)파라는 무고를 당하기도 했는데, 이는 서로간의 논쟁이 치열해지면서 감정적인 갈등에까지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무고를 당한 알미니우스는 자신의 주장이 성경적임을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밝히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적인 분위기에서 이 문제를 토의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종교회의를 열어주도록 국회에 요청했습니다만, 그러나 그의 이러한 요청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과로와 병고에 시달리던 그는, 1609년 10월, 4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그가 죽은 다음 해인 1610년에, 알미니우스의 사상을 지지하는 46명의 목사들이, 이 논쟁을 해결하는 방편으로 다섯 가지 신조를 공인해 주도록 탄원하는 항변서 국회에 제출합니다. 그러자, 이에 대하여 엄격한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자들에게서,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는 반항변서 제출하였으며, 이로 인해서, 알미니우스 지지자들은 칼빈주의에 항의하는 변자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됩니다. 

 

  이 양쪽의 다섯 가지 내용을 서로 비교해보면,

 칼빈주의 5대 강령

알미니안의 5개조 전제

1. 사람의 어떠함이나 행위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창세전에 작정하신 바꿀 수 없는 예정에 따라 구원과 멸망이 각각 정해짐.

  <무조건적 선택>

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예정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만의 속죄를 위한 것임.

  <제한된 속죄>

3. 범죄한 인간은 스스로의 구원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전적으로 타락하였으며, 실제로 중생은 회심보다 우선함. <전적인 타락>

4.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선택된 자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지 않을 수 없도록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역사하시지만, 저주가 예정된 자들에게는 이 은혜가 주어지지 아니함.

  <불가항력적인 은혜>

5.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은 결코 상실되지   않으며 끝까지 보존됨. <궁극적인 견인>


 

1. 하나님이 예지하신 바에 따라, 사람의 믿는 여부를 조건으로 한  선택에 의하여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창세전에 작정하심

  <조건적인 선택>

2.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이것을 제한시키는 것은 각 사람의 믿는 여부임. <보편적 속죄>

3. 타락한 상태의 자연적인 인간은 스스로 선하게 될 수도 없고 새로워질 수도 없다. 의지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가 없이는 인간은 자신이 구원에 대해 무력하고 무능함. <자연적인 무력함>

4.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됨이 없이는 인간의 구원은 시작될 수도    없고, 진행될 수도, 보존될 수도 없다. 그러나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는 그 역사하시는 방식 때문에 인간의 악한 의지에 의하여 거부될 수 있음. <저항이 가능한 은혜>

5.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죄와 유혹에서 능히 지키시고 보존해 주지만, 인간의 나태함에도 불구하고, 이 은혜가 상실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성경에 의하여 증명되지 않음. <조건적인 견인>


 



  이렇게 서로 다른 내용을 가진 두 주장이, 쉽사리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논쟁이 가열되는 가운데, 정치적인 변수가 작용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계속해서 이 종교개혁의 역사를 살펴보는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종교문제가 그냥 종교적인 원인과 동기를 가진 문제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다양한 인간의 내면적 동기가 섞여서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나라와 자기 집안과, 특히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것과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이 신앙문제가 여러 가지 양상으로 변화되어 가더라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변수는 정치적인 동기의 변수입니다. 이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알미니우스의 견해에 동조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당시 네덜란드 총연방 중의 최대 지역인 홀란드의 시민지도자요, 총연방의 주도적인 인물인 올텐바르네벨트와, 국제법의 창시자로서, 당대 최고의 학자중의 한 사람이었던 그로티우스 같은 이도 있었는데, 이들은 신앙과 신학적으로는 관용을, 정치적으로는 공화주의,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있어서는 제정일치를 주장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또한 계속되고 있던 전쟁에서 스페인쪽과 휴전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스페인과 직접 전면에 나서서 전쟁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한편에서는 전쟁에 승리해서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반드시 쟁취해야 한다고 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그 가운데 당시 네덜란드의 독립을 간절히 추구하던 윌리암의 오렌지공의 아들이자 연방의 뛰어난 군사 지도자였던 나싸우의 모리스총독이 주도적인 인물이었는데, 그는 철저한 칼빈주의자로서 이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입장에 분명하게 반대했던 것입니다. 그는 네덜란드 북부의 통치자가 되어서, 남부를 정치적 종교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스페인으로부터 재탈환할 꿈을 꾸고 있었기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칼빈파들은 거의 이 모리스와 손을 잡았기 때문에, 종교적인 반대파들은 그대로 정치적인 대적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이 총독 모리스 공(Maurice 公)은, 1618년 7월 쿠데타를 일으켜, 그의 정적(政敵)으로 알미니우스의 가르침을 지지하며, 공화제를 주창하던 지방자치주의 국가지도자 올텐바르네벨트 다른 유력한 알미니우스 지지자들을 모두 반역죄로 기소되어서 처벌을 받고 맙니다.



  후에 네델란드 국회는 국론통일과 논쟁 종식의 목적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종교회의를 소집합니다. 회의는 1618년 11월 13일부터 그 다음해 1619년 5월 9일까지 지금의 도르르레흐트라고 하는 곳인 <도르트>에서 열렸습니다. 그러나 이미 알미니안주의자들이 거의 국가반역죄로 기소된 상태에서 공정한 회의가 진행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이 자리에는 네덜란드 대표 외에도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팔라티네이트, 나싸우, 헤세, 브레멘, 스위스 등에서 대표들이 참석했으며, 특히 알미니안주의자들인 <항의파>쪽 사람들은 13명의 대표들만 참석한데다, 오직 피고의 신분으로 참석했었기 때문에 의석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결과는 뻔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6개월간이나 계속된 종교회의는 154번의 회의를 거치며 논란을 계속하다가, 예상대로 알미니안 교리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93개조의 엄격한 칼빈주의적 조항을 채택하고 마쳤습니다. 이때 나온 조항들은, 당시에 이미 나와 있던 벨기에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함께, 네덜란드 개신교의 교리적 기초가 되었습니다.



  결의된 내용은, 특히 예정론에 있어서, <타락 후 예정설>을 채택한 것 외에는 이전의 칼빈주의 예정설을 그대로 승인하고, 알미니안주의자의 5개항의 건의는 모두 이단의 신조로 정죄되었습니다. 이후에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설교를 금지 당하였고, 어떤 이들은 나라를 떠난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6년후인 1625년에 칼빈주의자였던 총독 모리스가 죽고 나자, 이번에는 항의파를 지지하는 그의 동생 프레드릭 헨리가 그 뒤를 계승하였는데, 이렇게 정치적인 분위기가 바뀌어지자, 이번에는 알미니안쪽의 사람들이 대거 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795년 이후에는 네덜란드의 한 신앙공동체로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는데, 오늘날까지 항의파 형제단, 또는 항의파 개혁교회로 존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알미니안 사상은 자기 나라에서보다도 영국에서 훨씬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감리교 운동을 일으킨 존 웨슬리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비록 같이 신앙생활을 해도,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는 칼빈이 보았던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예정의 신비도 분명히 있고, 알미니우스가 강조하고자 했던 인간의 의지와 행동도 함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그러한 신학적인 차이는 또한 그 당시의 시대적인 발생동기를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산물인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의 본질을 지켜나가되, 서로 다른 입장에 대해서도 그것이 성경의 근본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인정해줄 수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경계해야 할 부분은  이러한 차를 이해하거나 극복하지 못하게 되면,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욕심이 틈을 타게 되면서 매우 불행스러운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다른 그 공간을 타고, 마귀가 틈을 타지 못하도록 오히려 더 연합과 상호 이해에 힘쓰는 가운데, 엡4:3의 말씀과 같이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가며, 보다 더 사랑으로 하나 되는 주님의 교회를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블로거 : lodemtre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