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神學 · 敎理· 교회사

제6장 하나님의 계시와 그릇된 계시론자

영국신사77 2007. 3. 29. 00:07
 
 
               제6장 하나님의 계시와 그릇된 계시론자 
 
출처 블로그 > 쉴만한물가
원본 http://blog.naver.com/mokpojsk/130003811071
소재열노곡제일교회 목사, 말씀사역원장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렘 14:14)

                             계시란 무엇인가?
  계시(αποκαλυπσιζ)의 본래 뜻은 희랍어 καλυπτω(I hide, 내가 숨기다, I conceal)라는 동사에서 왔으며, 감춘다는 말에 απο가 붙었으므로 열어 내어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계시란 ‘감춘 것을 개봉하는 것’으로 글자 풀이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 희랍어의 일반적인 계시의 의미가 성경에 기록될 때는, 그 일반적인 의미가 곧 성경의 의미가 되는 것은 아니다. 헬라 세계에서 사용되는 일반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가, 성경에 채용될 때는 전혀 다른 의미의 단어로 채용되고 있다(서철원, 서론, 26).

  예를 들어, 헬라 세계에서 복음이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했느냐 하면, 전쟁에서 승전보를 알리는 기쁜 소식 내지는 노예들에게 해방의 자유를 선포할 때 복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할 때는, 그런 의미로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전쟁의 승전보라는 기쁜 소식의 의미를 다 삭제한 다음, 그 단어 안에 새로운 의미를 집어넣어서 복음이란 단어의 의미로 만들어 사용했다. 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었다.
 
  이제 복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전혀 다른 복음이라는 단어가 되었다. 단어는 같지만 그 의미는 서로 다르다.

  마찬가지로, 계시라는 단어가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감추어졌던 것이 개봉되고 전혀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 계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특별한 일이 알려지는 것이라든지, 특별한 전문가에 의해서 여태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알려지는 것이나, 발견하지 못한 특별한 것을 진리로 만들어 발표하거나, 혹은 어떤 다른 신들로부터 이상한 것이 오면 그것이 계시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필립 샤프(Phillip Schaff)라는 교회사가의 증언에 의하면, “헬라어가 성경 언어로 쓰일 때는 성령의 세례를(축자영감) 받아 그 의미와 깊이가 전혀 달라져서 성경을 기록한 언어로 사용되었다”라고 했다. 따라서 Kittel의 성경 사전에서는 헬라어를 분석할 때, 보통 어원에 있어서 헬라어 원문에서 어떻게 쓰였는가를, 다음에는 헬레니즘 세계에서 어떻게 쓰였는가를 따진다. 본래 성경 전체의 문맥에서 헬라어 용어들이 어떻게 쓰였는가를 살펴서, 바른 뜻으로 해석하고 이해해야 옳다.

  결국 성경 전체에서 본 계시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자기 현시, 즉 자신의 나타남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 하나님의 자기 현시는 하나님의 뜻, 목적, 계획, 교훈, 능력과 지혜가 다 포함된다.
 
  이렇게 볼 때, 참 종교란 하나님의 계시로만 성립이 가능하다. 이방 종교들도 최소한 자기들의 종교로서의 주장을 하기 위하여, 그 근본 진리들이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계시에 의존해 있다고 하여, 어떻게든지 다른 초월적인 세계에서부터 왔다는 것을 많이 강조한다.

  이 이야기를 종합하면 우리들이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게서만 계시하시고, 계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분만이 초월해 계신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가짜들도 자신들의 종교의 초월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어떤 계시에 기초한다고 하지만 그들은 다 가짜다.

  계시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결핍으로, 감추었던 사실을 열어 보여주는 것 자체를 계시로 이해하고 있어, 마치 마귀도 계시를 한다는 오류를 범하는 자들도 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의 사역을, 하나님의 계시자로서의 메시아(하나님의 아들 됨)의 표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예수님의 행위와 자신들의 행위와 동격으로 해석하여, 마치 자신이야말로 이 시대의 메시아인 듯한 신학의 혼란을 보여주고 있다.


                             유일계시와 제일계시

  성경에 기록된 특별 계시는 66권으로 종결되었다(웨스트민스터 1장 1, 6절). 오늘날은 더 이상 특별 계시를 주시면서 역사하시지 않는다.
 
  오늘날은 성령께서 특별 계시인 성경과 함께 더불어 역사 하신다. 성령께서 성경 계시를 깨닫게 하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신다.

  그런데 오늘날도 마치 특별 계시가 주어진 줄 안다. 예를 들어서 특별 계시가 어떻게 주어졌는가? 꿈을 통해서 환상을 통해서 병고침과 귀신을 쫓아내면서 주어졌다. 이런 다양한 방법과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런 계시가 66권으로 종결되었다는 말은 이제 오늘날은 그런 방법으로 특별 계시를 주시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말은 오늘날에는 꿈과 환상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또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일이 없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오늘날의 이런 것들은 다 일반 계시 내지는 일반 은총의 범주에 속한다.

  그런데 마치 자신이 꾼 꿈이 성경 계시의 수단이 되었던 꿈과 동일시하려는데 문제가 있다. 자신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행위를, 성경에서 자신을 특별 계시하기 위한 예수님의 병고침과 귀신 축출과 똑같은 것으로 생각하려고 한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려는 자들은, 오늘날에도 계속 성경 계시와 같은 계시가 꿈과 환상을 통해서 병고침과 이적을 통해서 계속된다고 믿고 있다.

  오늘날의 계시는 성경보다는 조금 못할 뿐이지, 성경과 같은 계시가 오늘날에도 계속된다고 믿는다. 즉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계속 계시하신다고 믿는다. 이 이야기는 성경만이 유일한 계시, 유일한 생명의 진리라고 믿지 않는 자들이다. 오늘날에도 성경과 동일한 생명의 진리와 특별한 계시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성경은 그 계시 가운데 제일된 계시라고 한다. 이런 주장은 주로 잘못된 신비주의, 혹은 범신론에서 주장하고 있다
 
 

                                      계시 위에 세워진 교회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다. 계시의 근거 위에 세워지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계시의 오해 및 왜곡은 기독교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아픔을 감수하면서 가려내고 도려낼 것은 도려내야 한다. 많은 수의 군중보다 진리가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정말 제대로 된 교회라면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교인수에 의해 모든 가치가 결정될 것이 아니라 바른 계시의 선포를 최우선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어떤 교회가 계시를 최우선으로 내세운다고 해서 그 교회가 반드시 옳은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으로서의 신학적 정통성(계시)이 있어야 한다. 그 신학적 정통성은 성경 구절이나 몇몇 단어를 원어로 해석한다고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경 전체의 흐름에 접근하고 있느냐에 의해서 판가름난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거짓 계시에 의존해 있으면서, 자신들만큼은 계시의 말씀에 의존해 있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맺는 말
  계시의 오해는 성령의 내적 조명을 직통계시로 연결시켜 설명하는 목회자들에게서 잘 나타난다. 소위 신비적 체험이나 영성을 강조하는 자들에게서 더욱 잘 드러난다. 신비적 체험을 이야기할 때, 우리들은 과거 역사적으로 퀘이커파의 신비적 체험을 주의해야 한다.

  “퀘이커파와 그 외의 신비주의자들에 의하면, 내적 광명으로 새로운 내용의 계시가 온다고 본다. 그들은 외적인 성경 계시를 충족한 것으로 믿지 않고 하나님의 내적,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로 새로운 내적 광명에 의해서 새로운 계시 내용이 온다고 말한다. 계시가 어디로 온다고 하느냐면 이성에 온다고 한다. 그러므로 신비주의도 자유주의에 귀착하여 근세사상으로 넘어오는데 제일 먼저 선두 역할을 했다”(서철원, 서론, 15).

  이런 내적 신비를 새로운 계시 형태로 설명하는 자들 중에는 예배 시간에 임한 신비적 경험들을 직통계시로 설명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오늘 성령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예배 시간에 이런 말씀을 하라고 해서…”라는 형식을 취한다. 심지어 “성령께서 오늘 나에게 말씀하셨는데 아무개를 도우라고 말씀하셨다”라고 하면서 돕지 않으면 큰 일이 있을 것이라고 협박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런 식의 신비적 체험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 우리들의 마음을 감동 감화하시고 은혜를 깨닫게 하셔서 깊은 영적 교통 가운데 거하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