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린 스텐디쉬 박사
권세 있는 귀족들과 영국 왕의 비호 아래에서 존 위클립은 과감하게 성경의 첫 번째 번역판을 만들어 냈다. 만일 귀족들과 왕의 지지가 없었으면, 그의 이러한 행위로 인해서 그는 화형대 위에 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일반 평민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교회에 의해서 반역 행위로 간주되었다.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한 고통과 교황권의 성직자들에 의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위클립은 그의 기념비적인 업적을 완성시켰다.
위클립이 번역한 성경은 많은 잘못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는 5세기 경에 제롬에 의해서 편찬된 라틴어 벌게이트[Latin Vulgate:일명 불가타]성경, 즉 로마 천주교회가 사용하던 성경을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성경으로 인해서 로마 천주교회가 평민들에 대해서 쌓아놓았던 높은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결코 소멸될 수 없는 빛이 공개되기 시작하였다. 위클립의 성경은 인쇄술의 발명이 있기 전에 완성되었으므로 인쇄되어 출판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필사본은 가격이 매우 높을 수 밖에 없었으며, 그로 인해서 오직 부유 계층의 사람들만이 그것들을 살 수 있었다.
1516년, 에라스무스가 헬라어 표준 원본을 사용하여 새로운 희랍어 성경을 만들었는데, 이 성경에서 로마 천주교회가 사용하던 라틴 벌게이트 성경의 많은 잘못된 점들이 올바로 교정 되어졌다. 이 성경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며,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적인 운명을, 성경을 해석하고 풀이하는 자들에게 의지하는 영적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에라스무스가 편찬해낸 새로운 희랍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려는 도전이 틴데일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 결과 그는 엄청난 박해를 받게 되었으며, 영국을 떠나 유럽의 이곳 저곳을 유랑하게 되었지만, 마침내 영어 성경이 사용될 수 있게 되었다. 1535년, 틴데일은 벨지움에서 체포 되었으며, 그로부터 일년 반 후 그는 순교로서 그의 일생을 끝마치게 되었다. 순교 직전에 그가 한 마지막 외침이 아직도 기록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다. “오, 주여! 영국 왕의 눈을 열어 주소서!”
틴데일의 성경은 후에 마일즈 커버데일 주교에 의해서 완성되었는데, 이 성경은 마태 성경 또는 커버데일 성경이라고 알려지게 되었고, 후에 영국 왕에 의해서 인준되었다.
1538년경, 모든 성직자는 교회 안의 편리한 장소에 영어로 된 성경책 한 권을 비치해야 된다는 법령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 후, 강력한 교권의 압력으로 인해서 국회는 다시 한 번 틴데일 성경을 법으로 금지시켰으며, 성경은 또 다시 평민들의 손으로부터 제거당해야만 하였다. 로마 천주교인인 영국의 메리 여왕 시대 동안에는, 마태 성경의 편집자들인 토마스 크래머와 존 리절을 포함하여 수백 명의 신실한 개신교도들이 화형대 위에서 연기로 사라졌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 때에는 개신교가 복권됨에 따라서, 성경이 다시 대중들에게 이용될 수 있게 되었다. 틴데일 성경의 개역 본인 유명한 제네바 성경이 1560년경에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메리 여왕 시대의 박해를 피해서 제네바로 피신한 개혁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제네바 성경은 많은 부분이 올바르게 번역되었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읽혀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서 상당한 숫자의 그리스도인들이 영국 교회의 형식주의를 거절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거절과 저항은, 청교도들과 영국 국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핍박을 가져오게 했으며, 이러한 핍박은 그들로 하여금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신세계인 미국으로 이주하도록 유도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 때에 또 다른 중요한 성경이 영국 교회의 주교들에 의해서 등장했다. 이 성경은 1568년에 여왕에게 바쳐진 것으로서, 비숍 성경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청교도 운동이 강력하게 펼쳐져서 1593년에는 영국 국회에 의해서 “불충성한 사람들”로 낙인찍히게 되었고, 그들에게는 영국을 떠나라는 추방령이 내려졌으며 이에 불복하는 자들에게는 사형에 처하게 되었다.
1603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자, 스코틀랜드의 킹 제임스 6세가 그 후계자로 선정되어 대영제국의 제임스 1세 왕(King James 1)이 되었다. 청교도들은 총력을 기울여 새로운 왕에게 그들의 처지를 호소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왕이 런던으로 즉위식을 거행하러 가는 도중에, 그들의 처지와 형편을 자세히 기록한 “밀리너리 청원서”를 왕에게 전달하게 되었다.
1604년 1월 14일, 제임스 1세 왕(킹 제임스 1세)은 영국 국교의 주교들과 존 레이놀드가 이끄는 4명의 청교도 지도자들과 옥스포드 대학의 학장이 참석한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왕은 새롭고 보다 정확한 성경을 편찬해 낼 것을 결정하였다.
킹제임스 1세는 성경에 대한 깊은 지식이 있었다. 그는 고전 언어에 있어서 능통하여서 요한 계시록을 해설하는 글을 쓸 정도였으며, 또한 시편의 일부를 번역하였다. 그는 성경을 번역하는 일을 맡게 될 번역자들을 선정하는데 있어서 매우 주의 깊었는데, “성경을 개인적으로 연구하는데 있어서 고통을 감수했던”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이, 번역자들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요구 조건이었다.
이 역사적인 놀라운 사명을 위해서 선택된 사람들은 당시 청교도들의 지도자 이었던 레이놀드 박사를 포함해서 모두 47명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금전적인 대가도 받지 않을 정도로 경건한 학자들이었는데, 번역사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6팀으로 나뉘어서 일하기로 했다.
그 6팀은 크게 두 그룹으로 대별할 수 있는데, 한 그룹은 히브리어에 정통한 전문가들로서 이루어졌는데, 그들은 구약 성경을 번역하였고, 다른 그룹은 헬라어의 전문가들로서 신약 성경을 번역하였다.
3년에 걸쳐서 각 학자들은 개인적으로 자신에게 할당된 부분을 번역하였는데, 이 때 그들은 번역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제정한 15개 항목의 번역의 원칙을 준수해야 되었다.
두 번째 단계로서 각자가 번역한 성경을 자신이 속한 팀의 다른 사람이 번역한 것과 비교하는 작업이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이런 식으로 한 팀에서 자신들에게 할당된 번역이 완성되었으면, 그것을 다른 두 팀으로 보내어 다시 비교 검토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하여 감추어졌던 성경이 펼쳐지자 틴데일과 커버데일이 끼친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했던가가 분명히 드러났다. 커버데일은 “산문체의 대가”로서 평가받게 되었다. 제임스 1세 왕이 주도하여 편찬해 낸 킹제임스 성경은 커버데일 주교의 문학적 특출함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성경 전체의 번역이 일단 완성되자 각 팀에서 두 명의 학자들이 차출되어서 마지막 교정과 검토에 들어갔다. 그들은 한 사람이 자신들이 번역한 성경을 크게 소리내어 읽으면, 다른 학자들은 다른 언어, 즉,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태리어로 된 성경을 들고 보면서 자신들이 번역한 영어 성경을 재검토하였다. 만일 그들이 어떠한 문제를 발견하면, 그들은 모두 모여서 그것에 대해 토의 하였다.
이와같은 가장 정밀한 검토의 과정을 거친 후에, 새로운 번역본은 인쇄소로 보내지게 되었다. 이런 검토와 확인의 과정을 거치는 데에 총 9개월이 소모되었고, 그 후에 당시의 낙후된 인쇄술에 의해서 성경이 출판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1611년에 킹제임스 성경은 대중에게 읽혀지기 시작했다.
킹제임스 성경의 초판 이후에도 계속적이고 부분적인 개역이 이루어졌는데, 이중에는 언어의 변화로 인해서 이루어진 개역도 있었다. 1629년 첫 번째 개역이 있었고, 이어서 1678년에 캠브리지 대학에서 좀 더 상세한 개정이 이루어졌다.
제임스 1세 왕 당시 초판이 나왔을 때, 인쇄하는 과정에서 몇몇 실수가 생겼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일곱째 계명의 “간음하지 말지니라”에서 부정어인 “not”(~아닌)을 빼고 인쇄를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서 당시 인쇄를 맡았던 왕궁의 인쇄 기술자는 300파운드의 벌금을 내야 되는 징계를 받았던 것이다.
18세기에 들어서 언어의 현대화를 위해서 개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1762년 캠브리지의 트리니티 대학의 토마스 파리스 박사는 킹제임스 성경의 개정본을 만들었다. 또한 7년 후에는 옥스포드 대학의 벤쟈민 블레이미 박사에 의해서 다시 한 번 개정판이 나왔는데, 이 두 개정판이 오늘날 성경의 권위 있는 개정판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원어에 없는 표현은 이탤릭체로 성경에 표시했으며, 65,000개의 관주 해석을 삽입했는데, 그 중 절반은 유사한 성경절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들이다.
세계의 성경 역사 가운데, 킹제임스 성경만큼 충실하고 깊은 주의와 기도로서 이루어진 성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편히 앉아서 읽을 수 있기 위해서는, 위대한 개혁자들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피가 화형대 위와 고문대에서 바쳐지는 숭고한 헌신이 있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무관심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진정 우리가 과거에 성경의 보존을 위해, 자신들의 생애와 목숨을 바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깊은 감사의 정신을 마음에 품은 채 성경을 대한다면, 우리는 좀 더 성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블로그 > 예언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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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제임스 성경을 왜 흠정역이라고 하나?
국어사전에 나오는 '흠정(欽定)'이란 말의 뜻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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