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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위해 순교한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

영국신사77 2007. 3. 18. 20:27

                        성경을 위해 순교한 틴데일

 

                                                                                                      출처 블로그 > 행복찾기
                                                                     원본 http://blog.naver.com/khi4040/20032405193
 
 

 


                                         영국과 영어의 역사

  영어 성경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영국 민족 및 영어의 역사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로마가 주후 5세기에 영국 남부에서 군대를 철수하자, 브리튼족들은 색슨족의 도움을 받아 픽트족과 스코트족의 침략을 막아냈다. 색슨족들은 북부지방에서 승리를 거둔 뒤 돌아갔으며, 그 후에 영국 남부를 차지하려 했다.

 

  이런 싸움은 거의 150년 동안 지속되었고, 그 동안에 앵글로족, 색슨족, 이교도들 등이 고대 영국을 일곱 개의 왕국으로 나누어 통치하게 되었다. 그 뒤 이 왕국들은 주변의 좀 더 강한 왕국으로 합병되었고, 마침내 주후 827년에 에그베르트는 이 모든 왕국을 하나로 통일하여 통치하게 되었다. 이 동안에는 영국 전체에 복음의 등불이 꺼진 상태였고, 6세기 후반에 켄트의 왕이었던 에드베르트가 회심한 후에야 비로소 다시 복음의 불이 붙기 시작했다.

  색슨족이 다스리던 시절에, 덴마크족이 계속해서 영국을 침략했고 여러 지역을 다스렸다. 그러다가 주후 878년에 알프레드 대왕이 에탄둔에서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기독교 신앙을 전하게 되었다.

 

  그 뒤 150년 동안 영국인들과 덴마크족들 사이에는 계속해서 전쟁이 있었고, 영국 교회는 캔터베리의 대주교인 랑프랭에 의해 재조직되었다. 이 기간에는 앵글로/색슨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일반 백성에게 전해 주려는 시도가 있었으며, 8세기 초반에는 시편과 복음서를 번역하는 일도 있었으며, 이 때 만들어진 번역본은 현재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주후 735년에 비디는 복음서를 번역했으며, 알프레드 대왕은 자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를 원하여, 스스로 시편을 번역하기도 했다. 10세기 후반에는 아엘프릭 주교와  몇몇 사람들이 교회에서 읽을 수 있도록 성경을 번역했고, 그리하여 책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뒤 약 400년 동안은 영어의 역사에서 참으로 중요한 시기였다. 주후 1066년에서 1150년까지는 색슨족의 언어와 노르만/프랑스어가 같이 쓰였다. 그러다가 1150년 이후에 이 두 개의 언어는 서로 병합되기 시작했고, 결국 고대의 색슨어가 아니라 절반만 색슨어라는 의미의 "반(半)-색슨"(semi-Saxon) 언어라는 것으로 귀착되었고, 그 뒤 1382년에 어느 정도 영어가 정형화된 상태에서 위클리프의 영어 성경이 나오게 되었다.


                                             순교자 위클리프

  위클리프는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를 전혀 알지 못했고, 단지 그 당시에 카톨릭교회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던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불가타)」에서 번역을 시도했다. 비록 그가 만든 영어 성경이 원본이 그릇되었으므로 완전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로마카톨릭교회의 가르침과 성경 말씀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성경을 번역했다는 이유로 위클리프는 이단으로 몰려 정죄를 받고 출회를 당했으나, 그래도 1384년에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성경번역을 수행했다. 그런데 그 때까지는 인쇄술이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번역 성경은 일일이 손으로 필사를 해야했다. 보통 한 권의 성경을 필사하는데는 열 달 정도가 걸렸고, 그 가격도 만만치가 않아서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서의 일년치 봉급이나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양의 성경이 필사되자, 마침내 영국 국회는 법령을 제정하여 위클리프의 성경을 보급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영국의 아룬델 대주교는 교황에게 '저 사악한 위클리프'를 처치해 줄 것을 요청했고, 그 뒤 1408년에 그의 지휘하에 옥스퍼드 회의가 열려 '어떤 형식으로든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해서는 안되며, 아무도 그런 책을 읽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결정했고, 이 결정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이단으로 정죄 받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뒤 약 100년 동안에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위클리프의 성경을 보거나 소지했다는 이유로, 위클리프의 성경을 목에 매단 채 화형을 당하며 순교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클리프와 및 그의 동역자들의 수고로 많은 성경이 필사되어 아직까지 170권이나 남아있음을 볼 때, 그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 성경을 번역하고 필사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영어
성경이 평민들의 손에 들어가자, 큰 위협을 느낀 교황 요한 23세는 콘스탄스 공회를 열어 위클리프의 성경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이미 죽어 무덤에 안치된 위클리프의 유골을 캐내어 불사를 것을 결의했다. 그 뒤 13년이 지나서 이들은 실제로 위클리프의 무덤을 열고 그의 뼈를 불사르는 악행을 저질렀다. 이런 박해를 겪으면서도 성경을 보통 사람들의 손에 쥐어주려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노력은 계속되었으나, 손으로 일일이 필사해야 한다는 취약점 때문에 원하는 대로 성경을 보급할 수가 없었다.


                            구텐베르크와 인쇄술

  컬럼버스가
미국 대륙을 발견하기 약 100년 전에, 독일의 멘즈라는 오래된 마을에 요한 구스플레쉬(John Gooseflesh)라는 소년이 살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천주교 사제들이 글을 쓰는 양피지를 만들어, 어려운 가계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요한은 칼로 무엇인가를 조각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불 옆에서 자기 어머니가 끓이고 있는 자주색 염색 냄비를 지켜보며, 나무에다 자기 이름을 조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글씨를 새긴 나무 조각들 중 하나가 염색 냄비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얼른 그것을 꺼내었으나, 이번에는 그 것이 그 옆에 놓여있던 양피지에 떨어졌다. 그가 나뭇조각을 집어 올리자, 그 양피지에는 'h'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세월이
흘러갔지만, 멘즈의 이 소년은 자기가 살던 옛 집에서 그 날 일어난 일을 잊지 않았다. 그 때부터 그는 그 당시까지 해온 것처럼 손으로 책을 필사하는 것보다, 더 쉬운 방법으로 책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나무 조각을 깎아 그 위에 글씨를 새기고, 염색하는 잉크를 묻혀 여러 가지 형태로 배열하는 일을 반복하다가, 드디어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인쇄기를 발명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이제는 누구나 역사책에서 독일의 요한 구텐베르크라는 사람이 인쇄기를 처음으로 발명했다는 것을 알게 될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이 일에도 성경을 널리 보급하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참으로 묘하게도,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주후 1450년에서 1455년 사이에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은 다름 아닌 "라틴어 성경책"이었다.

  인쇄술이 발명되던 그 당시에, 터키의 콘스탄티노플에서는 크리스천들과 터키 사람들 사이에 큰 전쟁이 있었고, 크리스천들은 그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대부분의 훌륭한 학교들이 몰려있던 그 도시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리스어 학자들은 유럽의 각처로 흩어져 살 수 밖에 없었고, 이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리스어 신약성경」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되었으며, 그 때까지 읽어 오던 「구 라틴 벌게이트」 번역본 대신, 원어인 그리스어로 쓰인 신약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로 인해 성경을 모든 사람들의 언어로 번역하여 누구나 읽을 수 있게 한다면 참으로 좋을 것이라고 여러 사람들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원어에 대한 연구와 인쇄기의 발명, 그리고 영어의 정형화 등으로 인해,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순교자 틴데일(Tyndale)

  이같은
변혁의 시기에, 로마카톨릭 주의와 그들의 변개된 사본을 단호히 물리치고, 개혁자들과 함께 순교하면서까지 영국의 평민들에게 영어 성경을 전해주고자 한 사람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틴데일이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헌신과 사랑이 없었더라면, 평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손에 들고 읽는 일이 훨씬 더 늦어졌을 것이며, KJV[킹제임스 성경]과 같은 놀라운 역본이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20세기의 현대인들은, 성경을 볼 때마다 성경을 보존하기 위해 피눈물나는 노력을 하고, 결국 자신의 목숨까지 바친 틴데일에게 감사를 해야할 것이다. 

                                    틴테일의 생애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이었던 틴데일(William Tyndale)은 주후 1484년 영국 웨일즈 지방의 글로우체스터셔의 노스니블리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옥스퍼드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거기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그는 어학과 다른 문학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으며, 특히 성경에 대한 지식을 크게 늘리기 시작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성경에 몰두하게 되었고, 그 결과 마그달렌 홀에서 지내면서 마그달렌 대학의 몇몇 학생들과 동료들에게 몰래 하나님의 말씀의 일부를 들려주었고, 성경의 지식과 진리에 대해 교훈을 주었다. 그의 예의범절과 행동 등이 성경 말씀과 일치했기 때문에,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가 참으로 덕스러운 성격의 소유자이며 흠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입을모아 말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점점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그 학교의 학위를 취득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틈틈이 시간을 내던 그는, 1521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옮겨가서 강사로서 몇 년 간 거기에 머물게 되었다. 이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더 많이 늘린 그는, 그 대학을 떠나서 자신의 고향인 글로우체스터셔로 가서, 기사인 마스터 웰치(Master Welch)라는 사람의 집에 기거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그의 아이들을 가르쳤으며, 주인인 웰치의 은혜를 입게 되었다. 웰치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식탁을 같이 하곤 했으며, 따라서 그에게는 대수도원장들, 집사들, 집사장들, 그리고 여러 종류의 의사들 및 교회의 녹을 먹는 성직자들 등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틴데일 선생과 함께 상에 앉아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곤 했으며, 특히 루터와 에라스무스같이 학식이 많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성경에 관한 여러 가지 논쟁 거리들과 질문 등에 대해서도 서로 의견을 나누게 되었다.

  이 때에
하나님의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실제로 그 일을 수행해 온 틴데일 선생은, 이런 문제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간단하고도 분명하게 그들에게 제시하곤 했다. 그들의 의견이 자신의 의견과 다를 때면, 그는 언제고 성경을 펴서 그들 앞에서 명백한 성경 구절을 보여주곤 했으며, 이로써 그들의 오류를 논박했고 자신의 말을 확증시켜 주었다.

 

  이처럼 그들은 얼마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서로 의견을 제시하고 논쟁을 하고는, 마침내 지쳐서 마음속으로 틴데일에 대한 불평을 품기 시작했다. 일이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진행되자, 그 지역의 사제들은 선술집이나 다른 곳에서 함께 모여 틴데일에 대해 비난과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으며, 그의 말이 이단 교리임을 확증시키려 했고, 또한 비밀리에 그를 주교의 종교법 고문 및 주교의 관리들 중 다른 이들에게 고소하였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주교의 종교법 고문이 새로 임명을 받고는 여러 사제들에게 출두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틴데일 선생도 그 안에 끼어 있었다. 틴데일이 그들의 위협에 대해 미심쩍어 했는지 혹은 그들이 자기에게 누명을 씌우려 했음을 그가 알고 있었는지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단지 그가 밝히 드러낸 바와 같이, 그는 그들의 비밀 고소에 대해 의심쩍어 했으며, 그래서 거기로 가는 길에서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크게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굳건히 설 수 있도록 자기에게 힘을 주실 것을 간구했다.

  그가
종교법 고문 앞에 설 날이 오자 그 고문은 틴데일을 심하게 위협하였고, 마치 그를 개처럼 취급하며 그에게 욕설을 퍼붓고는, 아무도 고소 한 일이 없는 일들에 대해서 그의 책임을 물었다. 그 지역의 사제들이 거기에 있었지만 아무도 그를 고소하지 않았으므로, 간신히 그들의 손에서 벗어난 틴데일 선생은 집을 떠나서 다시 자기의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거기에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한 의사가 있었는데, 그는 주교의 고문으로 있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틴데일 선생과 잘 알고 있었으며 그에게 많은 호의를 베풀었다. 틴데일 선생은 그에게 가서 자기의 마음을 열고 성경에 관한 여러 가지 의문점들을 털어놓았다. 그 의사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교황이야말로 성경이 말해주는 바로 그 적그리스도라는 것을 당신은 알지 못하는가? 그러나 말조심하게. 당신이 그런 의견을 가진 것을 알게 되면, 목숨이 달아날 걸세."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틴데일 선생은 우연히 어떤 신학자와 사귀게 되었는데, 그는 매우 학식이 깊은 사람으로 인정받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며 논쟁을 하다가, 마침내 틴데일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에 대해 그의 견해를 물었다.

 

  그러자 그 위대한 박사는 다음과 같은 신성 모독적인 발언을 하게 되었다. "성경이란 필요 없소. 보통 사람들이 읽도록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단지 교황뿐이오. 교황의 법 없이 사느니, 차라리 하나님의 법 없이 사는 게 훨씬 더 낫소."

 

  이 말을 들은 틴데일 선생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으로 충만한 채 이같은 신성모독 발언을 참지 못하고는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나는 교황과 그의 모든 법에 도전하는 바이며, 만일 하나님께서 목숨을 살려주신다면, 앞으로 몇 년 내에 쟁기를 끄는 소년으로 하여금 교황보다 더 많이 성경을 알 수 있게 할 것이오."

  틴데일에 대한 사제들의 불평은 점점 더해갔으며, 그들은 끊임없이 틴데일을 향하여 짖어댔고 욕을 했으며, 그를 보고 이단이라고 말하면서 여러 가지 일에 그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로부터 많은 시달림과 괴롭힘을 당하면서, 결국 그는 그 지역을 떠나서 다른 장소를 찾아볼 수밖에 없는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주인 웰치에게 가서 그에게서 떠나도 좋다는 은혜를 입게 되기를 간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인이시여, 내 생각으로는 이제 더 이상 이 지역에 머무를 수 없으며, 비록 주인께서 그들의 손에서 나를 보호하시려 한다 해도, 나를 보호해 주는 것으로 인해 많은 불명예를 당할 것을 확신합니다. 이 점에 대해 참으로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어 틴데일 선생은 자기 주인의 호의를 입고 곧 바로 런던으로 오게 되었고, 떠나오기 전 그 지방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거기에서도 얼마 동안 말씀을 선포하게 되었다. 그는 그 당시 런던의 주교였던 톤스탈(Cuthbert Tonstal)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서, 또한 톤스탈의 학식을 매우 높이 평가한 에라스무스의 추천의 말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서, 만일 자기가 그의 일을 도울 수 있으면 참으로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왕의 감사관인 길포드 경에게 자기가 그리스어에서 영어로 번역한 소크라테스의 연설을 가지고 가면서, 틴데일은 그가 자기를 위해 런던의 주교인 톤스탈에게 이야기 해줄 것을 고대했다. 그런데 그는 틴데일을 위해 그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주교에게 편지를 써주고는 자기와 함께 주교를 방문하자고 했다. 그래서 그는 편지를 써서 헬비스웨이트라는 이름을 가진 그 주교의 종에게 편지를 넘겨주었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게 이 세상 일들을 처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틴데일에게나 자신의 교회에게나 최상의 것이 되지 않음을 보시고는, 그로 하여금 그 주교의 눈에서 큰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셨다. 그 주교는 현재 자기 집에 사람이 너무 많아 틴데일을 위해 자리를 내어 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런던의 주교에게서 거절을 당한 틴데일은, 런던의 부시장인 뭄무스의 집에 가서 자기를 도와달라고 간청을 했다. 그러자 그는 틴데일을 자기 집으로 받아들였는데, 그 집에서 틴데일은 매우 착실한 사제로서 밤낮으로 연구를 하며 지내게 되었으며, 주인의 호의로 삶은 음식만을 먹었다.

  이처럼 1년 정도를 런던에 머물면서 틴데일 선생은 이 세상의 행로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으며, 특히 복음 선포자로 불리는 자들의 행실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다. 그들은 교만했으며 스스로 권위를 세웠고, 특히 고위 성직자들의 겉치레는 그들의 다른 행실들과 함께 그에게 큰 불쾌감을 가져다 주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주교의 집에서 신약성경을 번역할 수도 없고, 또한 영국에서도 그 일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섭리로, 뭄무스와 기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그 지역에서 떠나도 된다는 허가를 받아 독일로 떠났다. 거기에서 이 선한 사람 틴데일은 자신의 조국에 대한 책임감과 열성에 불타서, 어떤 힘든 일이나 수고도 마다하지 않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주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그 확실성에 대한 깨달음을 자신의 영국 형제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하여 노력을 했다.

 

  이 점에 대해 마음속에서 깊이 생각하며 또한 프리스와 함께 의논하면서 그는,  성경이 보통 사람들의 언어로 번역되어, 가난한 사람들조차도 명쾌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는 성경이 보통 사람들의 눈앞에 그들의 모국어로 쉽게 주어져, 그들이 스스로 본문의 뜻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들을 진리 안에 굳게 세울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어떤 진리를 가르친다 해도,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성경에 근거를 두지 않은 궤변이나, 자기들이 고안한 전통 등으로 이 진리를 저지할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며, 또한 보통 사람들이 성경 본문의 올바른 의미를 찾아낸 경우에라도, 진리의 대적자들이 본문을 조작하여 본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틴데일 선생은, 하나님의 성경 말씀이 보통 사람들의 눈에서 가리워 진 것, 바로 그것이 교회 내의 모든 불행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토록 오랫동안 바리새인들 같은 성직자들이 행해온 가증한 행위와 우상숭배를, 성경이 없으므로 찾아 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 부패한 성직자들은 전력을 다하여 성경 말씀을 짓누르려고 애를 썼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이 말씀을 읽지 못하게 하거나, 혹은 그들이 읽는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궤변으로 그 말씀의 올바른 의미를 흐리게 했다. 또한 이들은 자기들이 만든 각종 가증한 것들을 경멸하는 자들을 위협과 속박으로 얽어맸다. 또한 그들은 본문의 의미와는 다르게, 성경을 자기들의 목적에 맞추어서 마구 뜯어 고쳤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들이 그들이 말한 모든 것이 다 거짓임을 마음속에서 확신한다 해도, 그들의 교묘한 술책을 이기고 나갈 방도가 없었다.

  이런 저런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이 선한 사람 틴데일은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성경을 자신의 모국어인 영어로 번역하여, 자기 고국의 단순한 평민들에게 큰 유익을 끼치고자 했다.

 

  그는 처음에 독일의 함부르크로 갔으나, 영국의 주교들과 사제들이 그가 하려는 작업을 매우 싫어한 고로 정탐꾼들을 고용하여 그의 일을 방해했고, 친구를 사귀지도 못하게 하고, 그의 성경을 인쇄하는 일도 하지 못하게 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신변에 큰 위협을 느꼈다.

 

  한편 콜론에 인쇄소가 있었으므로 그는 그 곳으로 가서 자신의 성경을 인쇄해 줄 인쇄공을 찾아냈다. 그는 영국의 주교들과 사제들이 이 작업이 끝난 것을 알면 자기를 체포해 갈 것임을 알고, 모든 것을 비밀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숨을 건지려면 빨리 도망가라는 제보가 그에게 들어왔다. 술에 취한 인쇄공으로부터 그의 신약성경이 거의 인쇄될 단계라는 것을 듣게 된 카톨릭 사제가 그를 체포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간신히 원고들을 챙겨 마틴 루터가 살고 있던 보름스로 도망갔고, 거기에서 처음으로 주후 1524~1525년경에 자신의 영어 신약성경을 출간하게 되었다.

 

  그때 그는 두 종류의 성경을 만들었는데, 하나는 크기가 컸고 다른 하나는 작았다. 그 이유는 영국의 성직자들이 큰 성경들을 찾아낸다 하더라도 작은 것들은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성경들을 영국으로 보내는 일이었다. 그는 큰 통이나 짐짝에, 옷가지나 밀가루 등과 함께 이 성경들을 숨겨, 마치 다른 상품처럼 꾸며서 영국으로 보냈다. 이렇게 해서 수많은 성경들이 영국에 들어와 판매되었으며, 이를 알게된 성직자들은 항구를 조사하여 성경을 찾아냈고, 찾는 대로 불태워 버렸다. 한편 영국 런던의 주교인 톤스탈과 토마스 모어 경은 너무나 화가 나서 틴데일의 영어 성경을 '거짓되고 실수투성이 번역'이라고 불렀으며, 또한 그의 역본을 없앨 방법을 모색했다.

  그런데 그 당시 포목상이었던 패킹턴이라는 사람이, 톤스탈 주교와 함께 앤트워프에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틴데일을 사랑하였으나, 그 주교에게는 반대로 말을 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노력하던 주교는, 어떻게 하면 틴데일의 신약성경을 다 사들여 불태울 수 있을지 그에게 물어보았다.

 

  이에 대해 패킹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주시여! 주교가 원하신다면, 저는 여기 있는 어떤 상인보다도 이 일을 더 잘 처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네덜란드 사람들과 틴데일에게서 성경을 사들여 여기에서 판매한 외국 사람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교님께서 원하신다면, 저는 그것들을 사들이기 위해 돈을 지불할 것입니다. 제가 그리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을 차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주교님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인쇄된 것 중에서 판매되지 않은 것을 모두 차지할 수 있게 할 것을 약속합니다."

 

  이 말을 들은 주교는 이제야 말로 이 일을 끝장 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는 그에게 말했다. "패킹턴 선생, 부지런히 이 일을 수행하시오. 그 성경들을 구해주시오. 비용이 얼마가 들든지 다 지불하리이다. 내가 그것들을 다 모아, 성 바울 십자가에서 불사를 것이오." 이에 패킹턴은 틴데일에게 가서 이 모든 것을 알려 주고는, 서로 협약을 맺었다. 그리하여 런던의 주교는 틴데일의 남은 성경을 모두 입수했고, 패킹턴은 감사하다는 말을 들었고, 틴데일은 돈을 얻게 되었다.

  이 일 후에 틴데일은 동일한 신약성경을 다시 한번 수정한 뒤 새롭게 인쇄해서 이전의 세 배나 되는 많은 양의 성경을 영국으로 보냈다. 런던의 주교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패킹턴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했다. "외부에 그토록 신약성경이 많이 돌아다닌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자네가 그것들을 모두 다 사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이에 대해 패킹턴은 이렇게 말했다. "분명히 저는 구할 수 있는 모든 성경을 구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후에 더 많은 성경을 인쇄한 것 같습니다. 그들이 활자와 인쇄기를 가지고 있는 한 이 일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쇄기까지 다 사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이같은 대답에 주교는 웃고 말았고, 그 문제는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틴데일을 도와주던 콘스탄틴은, 그 당시 영국의 종교법 고문이었던 토마스 모어 경에 의해 어떤 이단 교리에 대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모어 경은 그에게 물었다. "콘스탄틴! 내가 묻는 한 가지 질문에 솔직히 답변하기 바란다. 그러면 너를 고소한 다른 모든 혐의에 대해서는 호의를 베풀 것을 약속한다. 바다 너머에 틴데일과 조이와 및 다른 일당이 있는데,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들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있어. 너는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이니, 돈의 출처를 알고 있을 거다. 청컨대, 그들을 돕는 자들이 누구인가 내게 말하도록 해라."

 

  이에 대해 콘스탄틴은 대답했다. "내 주여, 당신에게 진실을 말하겠나이다. 우리를 도운 사람은 런던의 주교입니다. 그가 신약성경을 불태우기 위해 우리에게 엄청난 돈을 주었습니다. 그 돈은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의 유일한 후원자이며 위로자입니다." 이에 대해 모어 경은 이렇게 말했다. "맹세코 나도 그러리라고 생각했지. 왜냐하면 주교가 그 일을 하기 전에 내가 주교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말했으니까."

  영어 신약성경을 6판까지 출간한 후에 틴데일 선생은 구약성경 번역에 착수했으며, 1530년에 창세기와 신명기 번역을 마쳤고, 그 다음 해에는 모세 오경을 끝마쳤다. 이와 동시에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계속해서 읽고 읽어도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매우 경건하며 학문적인 서문을 작성했다. 한편 1535년에 그는 할 수 있는 데까지 그를 따라가며 많은 도움을 준 커버데일의 도움을 받아 신구약성경 전체를 인쇄했다. 이 책들을 영국으로 보내자, 그것들이 어둠 속에 갇혀 있었던 온 영국 민족의 눈에 얼마나 큰 빛을 가져다주었는지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틴데일은 처음 영국에서 떠난 후에 독일로 갔으며, 거기에서 루터와  다른 학식 있는 사람들과 회의를 가졌다. 그 뒤 그는 잠시 그 곳에 머무르다가, 다시 네덜란드로 내려가서, 대부분의 시간을 앤트워프에서 보냈다.

 

  틴데일의 경건한 책들, 특히 그가 번역한 영어 신약성경은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자마자 해외로 퍼져 나갔으며, 경건한 사람들에게 참으로 큰 유익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경건치 못한 사람들은 - 일반 백성이 자기들보다 더 현명하게 되는 것을 시기하고, 진리의 빛으로 인해 자신들의 어두움의 일들이 분별되는 것을 두려워하던 사람들 - 적지 않은 동요를 일으켰다.

  그 때에 틴데일은 이미 구약의 신명기를 번역했으므로,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이것을 인쇄하려는 생각을 품고 배를 타고는 그 곳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해변에서 배가 좌초하는 바람에, 그는 자신의 모든 책과 저술물과 필사본과 돈과 시간을 잃게되었고, 하는 수 없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른 배로 함부르크에 갔는데, 거기에는 약속한 대로 커버데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모세 오경 전체를 번역하는 일을 도와주었다. 그들은 1529년 부활절에서부터 12월까지, 경건한 과부인 엠머슨 부인의 집에서 이 작업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 때에 그 도시에 땀을 많이 흘리게 하는 병이 돌아서, 함부르크에서의 일을 급히 끝내고는 다시 앤트워프로 돌아갔다.

  하나님께서 보통 사람들의 말로 된 영어 신약성경을 널리 퍼지게 하려 하셨을 때, 그 임무를 수행하여 성경을 번역한 틴데일은 그 책에다 글을 추가하여 만일 자신의 번역 안에서 잘못을 발견한다면 학식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수정했으면 좋겠다는 자신의 소망을 기록했다. 다시 말해, 그는 지식이 있고 판단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자신의 번역에서 수정을 해야할 부분을 발견하면, 예의를 갖추어 부드럽게 자기들의 학식을 반영하고 수정할 부분을 고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겸손하게 제안했던 것이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그 책이 널리 퍼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그 성경 안에 수천 개의 이단적 교리들이 있으므로 수정할 필요도 없으며 완전히 파기시켜야만 한다고 큰 소리로 주장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고, 어떤 이들은 평민들이 자기들의 모국어로 된 성경을 갖는 것은 불법이라고 말했으며, 어떤 이들은 성경이 평민들 모두를 이단으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그들은 세상의 통치자들을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이용하기 위해, 틴데일의 성경이 사람들로 하여금 왕에게 반역하게 만들 것이라고 모함하는 말을 했다.

  틴데일은 모세의 첫 번째 책 즉 창세기의 앞에 있는 서문에서 여러 가지를 분명히 밝혔다. 그는 자신의 번역본을 자세히 살펴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와, 그리고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별로 노력을 하지 않고서도 저 위대한 책인 성경을 번역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과, 자신이 번역한 성경을 비교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그들이 성경의 모든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고 인쇄상의 실수로 만일 거기에 'i' 라는 글자가 없는 구절을 발견하면, 무식한 사람들에게 이 것이 이단 교리라고 말했음을 보여주었다.

  보통 사람들에게서 성경에 대한 지식을 빼앗아 버리려는 영국 성직자들의 심술궂은 계략은 너무나도 엄청났다. 사실 이들의 임무는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 성경을 번역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성경을 번역하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

 

  틴데일이 말한 바와 같이, 이같은 그들의 시도는 세상을 어둠 속에 가두어 두고, 헛된 미신과 거짓 교리로 자기들의 야망과 탐욕을 만족시키고, 또한 자신들의 명예를 왕이나 황제보다 더 높이면서, 백성들의 양심에 타고 앉아 사람들을 다스려 보려는 그들의 교만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마침내 주교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왕의 동의를 얻어냈으며, 서둘러서 주후 1537년경에 틴데일이 번역한 신약성경을 금지시킨다는 선언문을 작성하여 공포하고,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그들은 더 나아가서 틴데일을 자기들의 그물로 사로잡아 그의 생명까지 빼앗으려고 했다. 그들이 어떻게 그 일을 추진했는가는 이제 밝혀지게 될 것이다.

  런던의 등기부에서 주교들과 토마스 모어 경은 앤트워프에 있었던 것들을 다 가져다 놓고, 틴데일에게 속한 모든 것을 열심히 찾아서 조사했다. 그들은 틴데일이 어디에서 누구를 접대했으며, 그의 집이 어디에 있으며, 그의 키는 얼마며, 어떤 옷을 입는지, 어떻게 휴식을 취하는지 등을 조사했다. 부지런히 연구하여 이 모든 것을 알게된 후에, 그들은 이제 자기들의 업적을 높이 세울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앤트워프에 있던 틴데일은 영국 상인의 집을 지키고 있던 포인츠라는 영국 사람의 집에서 거의 1년 동안 기거했다. 그런데 그 곳으로 필립스라는 영국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는 잘 생긴 사람으로 신사처럼 종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무슨 이유로 그 곳에 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때 틴데일 선생은 여러 차례에 걸쳐 상인들과 함께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하러 오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런 기회를 통해 필립스는 그와 친숙해지게 되었고, 틴데일은 곧바로 그를 크게 신뢰하게 되었으며, 자기가 머무는 포인츠의 집으로 그를 데려가기도 했다. 또 그와 함께 한두 차례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틴데일은 그와 함께 깊은 친구 관계를 맺게 되었고, 마침내는 그를 포인츠의 집에 거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필립스에게 자신의 책들과 자신이 연구하는 것들 중 비밀에 속한 것들을 보여 주었다. 참으로 틴데일은 이 배신자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포인츠는 이 친구를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필립스와 알게 되었느냐고 틴데일에게 물었다. 그러자 틴데일 선생은 그가 정직한 사람이며 매우 학식이 있고 사귀기 좋은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틴데일이 그에게 그처럼 호의를 가지고 있음을 본 포인츠는, 아마도 필립스가 그의 친구들 중의 하나의 소개로 틴데일과 가까워졌으리라 생각하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필립스는 앤트워프에서 이십 마일 정도 떨어진 브뤼셀의 법정에 갔으며, 거기에서 다시 앤트워프로 오면서 황제의 변호사인 검사장과 및 기타 다른 관리들과 함께 돌아왔다. 그로부터 삼사 일이 지난 후에 포인츠는 앤트워프에서 십팔 마일 정도 떨어진 읍에 가게 되었으며, 거기에서 한 달이나 한 달 반정도 사업을 하게 되었다.

 

  한편 그가 없는 동안, 필립스는 포인츠의 집으로 가서 그의 아내에게 틴데일 선생이 안에 있는지를 물었다. 그후 그는 다시 가서 브뤼셀에서 자기가 데려온 장교들을 집 근처 거리와 문 근처에 배치했다. 정오쯤에 그는 다시 돌아와 틴데일에게 가서 사십 실링을 빌려달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침에 이 곳과 메클린 사이에 있는 통로를 지나다가 지갑을 잃어버렸소." 이에 틴데일 선생은 사십 실링을 그에게 빌려주었다. 사실 참으로 교묘한 세상 속에서 그는 남을 잘 신뢰하는 단순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에 필립스는 틴데일에게 이렇게 말했다. "틴데일 선생, 오늘 저녁에 내 집에서 식사를 함께 합시다." 그러자 틴데일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내가 저녁 먹으러 가는데 당신도 나와 함께 갑시다. 그 곳에서는 당신을 환영할 것입니다."

  저녁식사 시간이 되자 틴데일 선생은 필립스와 함께 나갔는데, 포인츠의 집에 들어가고 나가는 길은 길고 입구가 좁아서, 두 사람이 함께 지나갈 수가 없었다. 틴데일 선생은 자기 앞에 필립스를 가게 하려 했으나, 필립스는 자신의 인간됨을 보이기 위해 틴데일을 자기 앞에 가게 했다. 그래서 그렇게 큰 키가 아닌 틴데일이 앞에 갔으며, 키가 크고 잘 생긴 큰 필립스가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그는 이미 문 양쪽에 장교들을 배치시켜 놓았고, 이들은 입구에서 누가 나오는지 볼 수 있었다. 틴데일 뒤에 선 필립스는 자기 손으로 틴데일의 머리를 가리켜서 장교들이 데려가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 주었다. 틴데일을 감옥에 가둔 후에 장교들은 그처럼 단순한 틴데일을 보고 큰 동정심을 갖게 되었다고 포인츠에게 말했다. 그들은 틴데일 선생을 황제의 변호사에게 데려갔으며, 거기에서 그는 식사를 했다. 그 뒤 검사장이 포인츠의 집에 와서 틴데일 선생의 소유물 곧 그의 책들을 포함한 모든 것을 가져갔다. 거기에서 틴데일은 앤트워프에서 십팔 마일 정도 떨어진 빌보르드 성에 갇히게 되었다.

  감옥에 홀로 남게 된 틴데일 선생은 변호사와 검사를 대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지만, 자신이 스스로 답변하겠다고 말하며 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또한 자신을 고소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복음을 전했으며, 성안에서 그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만일 그가 좋은 크리스천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좋은 크리스천이겠느냐는 진술을 했다.

 

  마침내 심문이 시작되었고 많은 변론이 있었지만, 아무런 변호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죽을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칙령으로 아우그스부르크 집회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주후 1536년 빌보르드 성에서 사형집행 장소에 끌려 나와, 화형대에 손발이 묶인 채 교수형 집행인의 손에 목이 졸려 죽었고 그 뒤에 화형을 당했다. 그는 화형대에서도 놀라운 열정을 갖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주여! 영국 왕의 눈을 열어주소서!"

  감옥에 있었던 약 일년 반 동안에, 그가 간수와 간수의 딸 및 그의 다른 가족들을 회심시켰다는 것을 보면, 그의 가르침이 얼마나 능력이 있었으며 그의 삶이 얼마나 성실했는가를 알 수 있다. 자신이 번역한 신약성경에 관하여, 자기의 대적들이 그 성경이 이단적 교리들로 가득 찼다며 심하게 트집을 잡았으므로, 틴데일은 자기 친구 프리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타나게 될 그 날에

   하나님께서 증거해 주시기를 바라노니,

   나는 결코 내 양심을 거슬려

   하나님의 말씀의 단 한 음절도 바꾸지 않았으며,

   땅위에 있는 모든 것 즉 명예와 쾌락과 재산을 내게 준다 해도

   이 날 결코 그렇게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 제 물품들을 여기로 되돌려 보내어 주는 아량을 베풀게 하여 주십시오. 우선 따뜻한 모자가 필요합니다. 극심한 추위로 인해 머리에 심한 고통을 겪고 있고, 계속되는 감기로 고통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감옥에서 이 증세가 매우 악화되었습니다. 또한 따뜻한 웃옷이 필요합니다. 현재 제가 입고 있는 것은 너무 얇습니다. 또 제 각반을 기울 헝겊조각이 필요합니다. 제 외투는 다 닳았고 셔츠 또한 그렇습니다......또한 제가 바라는 것은 저녁에 초가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사실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있기가 너무나 지루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라는 것은 저의 히브리어 성경과 히브리어 문법책, 그리고 히브리어 사전을 가질 수 있도록 친절을 베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는 저의 시간을 그것에 관한 연구로 보내기 위함입니다...... 겨울을 나기 전에 제게 어떤 다른 결정이 내려진다 할지라도 저는 인내하며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영광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할 것입니다. 그분의 영이 늘 각하의 마음을 인도하시길 기도하고 바라옵니다. 아멘." W. 틴데일,「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한 죄로 체포되어, 1533년 겨울 빌보르드 성에 감금되었던 틴데일이, 라틴어로 써서 성주 앞으로 보낸,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의 친필 기록」


  "주여! 영국 왕의 눈을 열어주소서!"

  틴데일이 죽은 뒤 2년만에 이같은 그의 기도가 이루어져, 1538년에 영국의 헨리 8세는 각 교구의 교회에 큰 성경을 비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뒤 「커버데일 성경」,「로저스 성경」,「마태 성경」, 「태버너 성경」, 「크랜머 성경」, 「비숍 성경」 등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 영어 성경이 출간되었으나, 사실 그 내용은 틴데일이 번역한 것과 거의 같았다.

 

  또한 그의 번역은 1611년에 출간된 KJV에 50% 이상 그대로 반영되어,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고 있다. 평민들의 손에 하나님의 말씀을 쥐어주려 했던 틴데일의 순고한 정신은 KJV의 번역으로 이어졌고, 18, 19세기 전 세계를 복음화하는 일로도 이어져, 우리 민족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지금 우리는 너무나 성경을 쉽게 구할 수 있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귀중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부디 이 작은 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고, 위클리프나 틴데일, 그리고 왈덴시아파 사람들 같은 선구자들의 순교정신을 본 받아, 올바른 성경을 지키고,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일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자료출처 : 그리스도 예수안에(http://www.inchristjesus.net/) - 여기서 말씀드리는 "킹제임스흠정역성경(영한대역)"은 "그리스도 예수안에"와 "생명의 말씀사"에서 출판한 "킹제임스흠정역성경"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제임스 성경(한영대역)"이 아닙니다.(터나누기 : khi4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