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에우메네스와 페르가몬[버가모] (1)

영국신사77 2007. 3. 13. 21:26
 
                에우메네스와 페르가몬[버가모]

        

        에우메네스 [Eumenes;BC 362?~BC 316, 46세]

  

   마케도니아의 장군.

 

   갈데아[바빌로나아 남부를 가리키는 고대의 지명.] 출생. 알렉산드로스대왕의 후계자들 중 유일한 그리스인이며, 훗날의 페르가몬 왕국 아탈루스 왕조의 선조이다.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무()담당 부장이었으며, 대왕이 죽은 뒤에는 제국 통일파()가 되어 다른 부장들과 싸웠고, 최후로 안티고노스 1세와 싸워 패하자, 소아시아로 쫓긴 뒤 피살되었다.

  

   동료와 함께 그가 소관()하여 기록해둔 《궁정일지》(단편으로 잔존)는 귀중한 사료이다.

 

 

 

 

          에우메네스[Eumenes: BC 362?~316, 46세]

 

   알렉산더 대왕의 개인 서기관이자 최측근 장수였던 에우메네스

(성경에는 '유메네스'라고 나옵니다. 영어 표기는 'Eumenes')의 유

년 시절을 그리고 있다.

 

  에우메네스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인데, 그의 삶에 대해

서는 그다지 알려진 게 많지 않다. 그가 필립포스 2세(알렉산드로

의 아버지)에게 발탁되어 마케도니아의 서기관이 되었고, 알렉산

드로 대왕 시절에는 전술가이자 유능한 장수로 일했으며, 알렉산

더 사후 카파도키아의 태수가 되었다가, 알렉산더 대왕 사후에 벌

어진 후계자 전쟁에서 죽었다는 정도만이 알려져 있다.

 

  그의 유년 시절은 베일에 싸여 있으며, 이와아키 히토시는 이 부

분을 픽션으로서 새롭게 그려냈다. 이와아키 히토시가 설정한 에

우메네스라는 인물은, 바르바로이인이지만 그리스인으로 자랐으

며, 양부모의 죽음으로 노예 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는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으며,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는 책벌레로서 묘

사하고 있다.

   에우메네스는 알렉산더 대왕 사후의 권력투쟁에서 죽는다. 그와

같이 알렉산더의 장수였던 리시마코스는, 서부 소아시아 지방에

페르가몬 왕국(지금의 터키 지방)을 세우는데, 그의 사후 페르가몬

을 차지한 필레타이로스는 에우메네스의 후손이었으며, 그는 페르

가몬에 아타리드 왕조를 세운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에우메네스 2세는, 이집트의 파

피루스 수출 금지에 대항하기 위해, 새로운 기록 방법을 연구하게

되고, 그에 의해서 발명된 것이 '양피지'다. 또한 이 양피지를 네모

반듯하게 잘라, 여러 장 겹쳐 가죽 끈으로 묶는 새로운 제본 방법

인 '코덱스(codex : 똑같은 크기의 종이를 쌓아 끈이나 아교 등으

로 붙인 뒤 겉 표지를 씌우는 제본 방법. 현대적인 의미의 '책'의

제조 방법이다.)'를 발명하게 된다.

 

  에우메네스 2세는 책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보였던 왕인데, 그가

만든 도서관은 당시 유럽 전역에서 동경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기

록에 따르면, 그의 도서관에는 20만권 이상의 책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의 선조인 에우메네스는 세계 최초로 도서관을 만든 사람이지

만, 그의 후손인 에우메네스는 고대 최대 규모의 도서관을 만든 사

람이자, 양피지와 제본술의 발명자이다.

 

 

 

           리시마쿠스와 필레타리우스의 배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군중에 한명이면서, 이후 소아시아 일대를 점령하여 왕조를 세웠던 리시마쿠스.

 

   B.C 323년 알렉산드로스 사후에 일어난 ''디아도코이''라는 후계자 전쟁에서, 독보적이던 안티고노스 1세를 다른 장군들, 즉 카산드로스,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등과 함께 공동전선을 펼쳐, BC 301년 입소스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쥐면서 ,소아시아와 트리키아 지역에  왕조를 세웠다.

   리시마쿠스는 전형적인 군인이었지, 왕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눈에 들어오는 대부분은, 군사적인 요충지나 기타 건물을 지을수있는 모든 것들을, 전투를 효과적으로 치르기 위한 대비책으로 만들곤 하였다.

   그러던 그가 눈독을 들인 곳은, 다름아닌 페르가몬이었다. 페르가몬도 참으로 유서가 깊은 지역중에 하나였는데, 그 역사는 고대 트로이 전쟁부터 시작된다. 헥토르의 아내였던 ''안드로마크''가 ''아킬레스''의 아들 ''네프톨레무스''와 결혼해서 나은 아들이 ''페르가무스''인데, 그가 성을 쌓아 만든 도시가 페르가몬이라고 한다.

   어쨌든 이러한 대공사 후, 신중하게 생각하여 제일 믿음직하고 부지런하며 능력 있는 사령관 ''필레타리우스(Philetarius)''에게 맡겼는데, 그중에는 알렉산더 대왕
으로부터 자신의 몫으로 물려 받은  금화 9천 탈렌트도 함께 있었다.

  
그러던 중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를 담당했던 카산드로스가, 권력을 잡은지 4년만인 BC 297년에 후손이 없이 죽게 되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리스, 마케도니아 지역을 두고 리시마코스와 셀레우코스, 그리고 공성자로 알려진 디미트리오스 간의 묘한 세력전이 벌어졌다.

   그렇지만 그곳을 갖게 된 것은 리시마쿠스였다. 왜냐하면 마케도니아 지역을 통치하던 리시마쿠스는, 카산드로스의 사망소식을 듣자마자, 전광석화 같이 그리스 지역을 흡수 합병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그리스 지역의 대부분은, 리시마코스에게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럴즈음해서 페르가몬의 필레타리우스는 페르가몬의 주인이 되길 소망하여, 시리아의 왕  셀레우코스 1세와 비밀리에 만나 밀약을 맺게되는데, 밀약의 내용은  그가 리시마쿠스를 공격한다면 리시마쿠스가 자신에게 맡겼던 보물을 내주겠다고 약속한다. 평소 리시마쿠스의 그리스 지역 통합을 탐탁치 않게 여기던 셀레우코스는, 이를 반갑게 받아 들인다.
 
   이러한 제안을 받아드린 셀레우코스와, 리시마쿠스 사이에 전쟁은 불가피해져,  드디어 기원전 281년 시리아와 소아시아의 주인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셀레우코스의 재빠른 공격으로, 힘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리시마쿠스는, 리디아의 쿠르페티온 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 이 전쟁에서 페르가몬의 지원으로, 셀레우코스는 이길 수 있었다. 이리하여 리시마코스의 제국 중에서 아시아 영토에 대한 지배권은, 마침내 세레우코스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만일 페르가몬의 필레타리우스가 배신만 하지 않았더라면 어떠했을까?  분명한것은 페르가몬의 필레타리우스가 지원만 하였다면, 시리아와 소아시아 그리고 그리스에 대한 지배권은 셀레우코스가 아닌 리시마쿠스였을 것이다.
 
   한편 리시마쿠스 장군이 전사하자, 페르가뭄의 이 보물은 고스란히 필레타리우스 장군의 소유가 되었다. 필레타리우스는 이 보물을 사용해 페르가뭄을 더욱 요새화하고, 인근 지역과 동맹을 맺으면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 시켜 나갔다. 그는 스스로 왕위에 등극해 페르가뭄 왕국을 건설했다.

 

 

 

 

     

        페르가몬(버가모) 왕조(BC 241-133) [페르가몬지도]


 

   소아시아에서 번영을 누린 헬레니즘 제국의 하나이다.


 

  에우메네스( BC362-316)는 알렉산더의 후계자중 유일한 그리스인으로, 마케도니아를 통일하려고 셀레우스코1세와 싸워, 초반에는 승리하여 이집트까지 쫓아 냈으나, 최후에 패하여 암살되므로 제국은 분열되었다.

 

  에우메네스가의 한사람이 도둑왕조를 세운 내력은 이러하다.


 

  페르가몬의 견고한 성안에는 성스러운 산이 있고, 이 산에 보석을 감추어두면 도적질하지 못한다는 전설을 믿어, 많은 사람이 이 산에 보물을 감추었다.


 

  이 보석을 에우메네스가의 한사람이 전부 훔쳐, 그 재력에 의하여 한 왕가를 건설한 것이 아탈로스(앗달리아)왕가이다.


 

  BC 3세기 전반에는 트라키아왕에 속하였으나, 필레타이로스가 독립을 쟁취하여, 아탈로스1세(재위 BC 241-197) 때 왕국이 되었다.


 

  에네메스(재위BC197~160) 2세가 성을 건설하여 최성기를 맞이하였고, 로마가 힘이 커지므로 대시리아전 때는 로마 편에 협력하여 소아시아의 서쪽을 지배하였다.


 

  제6대 왕 아탈로스 3세(재위 BC 138-133)의 유언에 따라 왕국을 로마에 귀속하여, BC 133년 소아시아의 한 주가 되었으며, 수도 페르가몬은 후에도 번창하였다.


 

  이 도시에 장서 20만 권의 책을, 애석하게도 불쏘시개로 터어키군이 전부 태워 버렸다.


 

  이 왕국에 속한 도시는, 성경 사도행전과 계시록에 기록된 7교회중 하나인 버가모 교회이다.

 

 

 

 

페르가뭄(버가모)

                     페르가뭄 (버가모)

 

   방비하기에 너무 수월한 천연의 요새에 위치하고 있는 페르가뭄

 

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 인간이 거주 했었다. 그러나 페르가뭄이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페르시아 침략 시기부터이다. 다른

 

에게해 연안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페르시아 침략을 받아 속국

 

이 되었다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구출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322년 알렉산더 대왕이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

 

그가 점령했던 방대한 영토는 그의 충실한 4장군에 의해 분할 점

 

령 되었다.

 

 

  셀레우코스(seleukos) 장군이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산드로스(kassandros) 장군이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지역을, 프톨

 

레마이우스(ptolemaius) 장군이 이집트 및 리비아 지역을, 그리고

 

리시마투스(lysimachus) 장군이 에게해 및 지중해 지방을 각각 나

 

누어 가졌다.

 

 

  따라서 페르가뭄도 다른 에게해 연안 도시들과 함께 리시마쿠스

 

장군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페르가뭄이 천연적 요새임을

 

깨달은 그는, 아크로 폴리스 꼭대기에 성을 쌓도록 명령 하였다.

 

 

  리시마쿠스 장군은 이 곳을 군사 기지로 만든 후, 부지런하고 유

 

능한 자신의 장군 필레타리우스(philetarius)를 이 곳의 성주로 임명

 

하는 한편, 알렉산더 대왕으로부터 자신의 몫으로 물려받은 9,000

 

탤런트의 금화와 보물을 이 곳에 맡겼다.

 

 

   그러나 리시마쿠스 장군이 전사하자, 이 보물은 고스란히 필레

 

타리우스의 소유가 되었다. 필레타리우스는 이 보물을 사용해 페

 

르가뭄을 더욱 요새화하고, 인근 지역과 동맹을 맺으면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 시켜 나갔다. 그는 스스로 왕위에 등극해, 페르가뭄

 

왕국을 건설했다. 필레타리우스 이후, 유메네스(eumenes)와 앗탈로스

 

(attalos)는 이름을 가진 왕들이 차례로 페르가뭄 왕국을 통치했다.

 

 

  이들은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와 세력 다툼을 벌였지만, 이들의 침략

 

을 무난히 물리치고, 에게해 및 지중해 연안에 제법 큰 국가를 건

 

설했다. 또한 여러 차례 호전적인 갈라티아(Galatia)인들의 침략을

 

받아 위기에 몰리기도 했지만, 그 때마다 왕들의 뛰어난 지기로 이

 

들의 침략을 분쇄할 수 있었다.

 

 

   유메네스 2세 시대(195 ~ 159 B.C)에 페르가뭄 왕국은 최전성기

 

를 맞이했다. 그는 학문을 장려해, 학자, 시인, 예술가들과의 토론도

 

즐겨했다. 역사가(pythias)나 철학자 메난드로스(menandros)등이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며, 유명한 궁정시인 레키아데스

 

(lechiades)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충복이었다. 또한 유메네

 

2세는 아크로폴리스를 각종 기념물과 신전으로 치장했다.

 

 

   오늘날 남아있는 대부분의 유적은 이 시기에 세워진 것이다.

 

우스 신전도 그의 통치시기에 완공되었고, 앗탈로스 1세에 의해

 

세워진 도서관은, 이 시기에 최대로 확장 되어 이집트의 알렉산드

 

리아의 도서관에 이어, 당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장서를 소유

 

하기도 했다. 의료기관 이었던 아스클레피온(asklepion)도 확장되

 

어, 에게 연안의 모든 도시들로부터 환자들이 모여 들었다. 성벽도

 

더욱 높이 쌓아 올려, 오늘날에도 페르가뭄의 성벽은 유메네스 2

 

세의 성벽이라고 부른다.

 

 

    한 때 소아시아 지역에서 제법 큰 세력을 떨쳤던 페르가뭄 왕국

 

도, 점차 강성해져 가는 로마의 세력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국 앗탈로스 3세 시대에 페르가뭄 왕국은 종말을 고했다. 앗탈로

 

3세는 정치보다는 동.식물학,독극물학 등의 학문을 더 좋아해 ,

 

정사는 모두 재상에게 맡기다가 항거할 수 없는 힘을 느꼈는지,

 

은 학문에 미쳐서인지 분명치 않게, 자신의 방대한 국가를 기원전

 

133년 로마 제국에 헌납 했다.

 

 

   앗탈로스 3세의 자진 헌납으로, 이제 페르가뭄은 로마 시대를

 

맞이했다. 그러나,페르가뭄은 과거의 화려한 영광을 잃지 않았다.

 

로마 제국은 페르가뭄을 아시아 주의 수도로 삼아, 도시를 더욱 치

 

장했다. 특히 페르가뭄은 아우구스 황제와 트라잔 황제 시대에 이

 

들의 총애를 받아, 황제의 신전을 건축할 특권(neokorus)을 얻었

 

.

 

 

  당시 소아시아 지방에서 황제의 신전을 건축할 수 있는 특권

 

은, 오직 한 도시에만 주어졌다. 따라서 황제의 신전을 건축한 도

 

시는 그 앞에 “NEOKORUS” 라는 칭호를 붙였으며, 이것을 자랑으

 

로 여겼다. 오늘날에 복원 되어 있는 트라잔 황제의 신전은, 멀리

 

산밑에서 보아도 그 위용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남아있는 유적은 대부분 아크로폴리스(Acropolis)”라고

 

불리는 산꼭대기에 있다. 깍아지른듯한 절벽 꼭대기의 천연의 요

 

새에 성을 쌍아 ,이 곳에 궁전, 원형극장, 도서관, 각종 신전들을 세

 

웠다.

 

 

  산밑의 평원에는 두 개의 유적이 남아 있다. 하나는 그리스-

 

로마 시대에 에피다우루스(epidaurus)와 코스(kos)와 함께 3대 의

 

료기관의 하나였던 아스클레피온이다. 당대의 유명한 의사 사티로

 

(satyros)나 갈레누스(galenus)가 이 의료원에서 활약 했으며,

 

로마 황제들을 비롯해 많은 유명 인사들이 이곳에서 치료를 받고

 

완쾌 되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히포

 

크라테스(hypocrates)가 페르가뭄에서 태어난 것이다.

 

 

   또 하나의 유적은 붉은 벽돌로 지어져 흔히 붉은 궁전 (RED

 

HALL)” 이라고 불리는 신전인데, 이집트 신인 세라피스 (serapis)

 

나 이시스(isis) 신을 모시던 신전이다. 길이 60m , 26m 규모의

 

이 신전은, 나중에 기독교가 공인 된 후에는 교회로 바뀌었다가,

 

터키인들의 정복 후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다. 

 

 

 

 

 

                           페르가몬(Pergamun)

    에게 해에서 25.6㎞ 떨어진 미시아 지방에 있었던 고대 그리스

도시.

 

  카이코스 강(지금의 바키르 강)의 넓은 유역 북쪽에 외따로 솟아

있는 높은 구릉지에 있었다. 오늘날 이 자리에는 터키 이즈미르

주 베르가마가 있다.

 

  페르가몬이 존재했던 때는 BC 5세기부터이지만, 헬레니즘 시대

(BC 323~330)에 아탈로스 왕조의 왕궁이 세워지고 나서야 비로

소 중요성을 얻게 되었다. 아탈로스 왕조의 요새와 궁전은 구릉

위에 서 있었고, 도시는 구릉 기슭에 있었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아래쪽 평야에 도시가 세워졌다.

 

  아탈로스 왕조 치하에서 이 도시는 형식상으로 자치권을 가졌지

만, 행정의 거의 모든 측면에서 사사건건 왕의 간섭을 받았다. 처

음에 아탈로스 일족은 셀레우코스 왕국의 신하로서 페르가몬을

다스렸지만, 에우메네스 1세가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1세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BC 263).

 

  BC 241년에 에우메네스 1세가 죽자, 그의 조카인 아탈로스 1세

가 왕이 되어, 갈라티아인을 물리치고 왕이라는 칭호를 취했다.

이 왕조의 이름은 그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페르가몬(미시아)을 중심으로 한 아탈로스 왕조의 영토는 BC

188년에 이르자, 원래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토였던 리디아(에게

해 연안에 있는 그리스 해안도시들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 프리

기아의 일부, 리카오니아 및 피시디아(BC 183)의 일부를 병합하

여 훨씬 넓어졌다. 이러한 영토확장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

코스 2세와 다투던 로마와, 아탈로스 왕조의 에우메네스 2세가

동맹을 맺은 덕분이었다.

 

  에우메네스의 아들이자 2번째 후계자인 아탈로스 3세는, 후계

자를 남기지 않고 죽으면서 BC 133년 왕국을 로마에 넘겨주었으

며, 로마는 그것을 받아서 BC 129년에 아시아 속주를 설치했다.

 

  아시아 속주에는 이오니아와 페르가몬의 영토가 포함되었지만,

나머지 지역은 로마의 신하인 이웃 왕들의 몫으로 남았다. 페르가

몬 왕국은 아탈로스 왕조의 통치자들과 로마에, 농산물과 은 등의

많은 부를 안겨주었다.

 

  아탈로스 왕조의 통치자들은, 페르가몬 시를 헬레니즘 시대의

모든 그리스 도시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

었다. 페르가몬은 그 당시의 가장 뛰어난 도시계획을 보여주는 본

보기이며, 이곳의 도서관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다음 가는 훌륭

한 것이었다.

 

  아탈로스 1세의 뒤를 이은 여러 왕들은, 현지 예술가들에게 주

문한 수많은 조각품·그림·장식물과 그리스에서 수집한 많은 예술

품으로, 도시의 신전과 정원을 아름답게 꾸몄다. 로마 시대의 인

구는 2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최초의 정보전쟁
news  2004-10-02 00: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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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치포털, 인터넷 정치공론장, 百花齊放百家爭鳴의 열린 마당 2005-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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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북부 베르가마의 고대 도시 페르가몬 유적. 헬레니즘 시대에 세워진 탑의 창을 통해 본 트리야누스 신전. 그 앞에 극장의 일부가 보인다.

 

                                                                     페르가몬=안성식 기자

 

 



             페르가몬·이집트 경쟁이

                             최고 발명품 '책(codex)' 낳다

   터키의 서북 해안에서 조금 내륙쪽으로 베르가마(Bergama)라는 도시가 있다. 곳곳에 분수와 공원이 있는 인구 8만명의 아담하고 쾌적한 도시다. 중심부에 전형적인 터키풍 시장이 있고 미로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과 아라베스크 문양의 창틀로 장식된 집들이 이슬람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하지만 이 도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풍경은 마을 뒤로 우뚝 솟은 산에 펼쳐져 있는 고대 도시 페르가몬의 폐허다. 해발 396.2m의 산에 자리잡은 페르가몬은 생겨난 이야기부터가 전설적이다.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대왕이 죽은 뒤 그의 장군들은 제각기 자신의 관할지에서 왕국을 세우고 서로 치열하게 싸웠다. 리시마코스(Lysimakhos 기원전 360~281년)는 서부 소아시아 지방을 차지했다.

  그는 9,000달란트(Talent)의 거금을 천연 요새인 이곳 페르가몬에 숨겨놓았다. 1달란트가 양 300마리의 가치에 해당했으므로 이 돈이 얼마나 큰 돈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리시마코스가 시리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하자, 보물 관리를 맡았던 필레타이로스(Philetairos 기원전 343~263년)는 이 돈으로 페르가몬에 자신의 왕국을 세웠다.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은 페르가몬 왕국은, 항상 새로운 강자인 로마의 편에 서서 싸웠기 때문에 번영을 거듭했다. 기원전 190년 로마는 아시아의 마지막 그리스 왕국인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왕국을 멸망시킨 뒤, 아시아 영토 전부를 페르가몬에 양도했다.

  기원전 133년 페르가몬의 마지막 왕 아탈로스 3세(Attalos III 기원전 170~133년)는 왕국을 로마에 넘긴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이로써 150년 동안의 페르가몬 왕국 역사는 끝났다. 그리고 곧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졌다. 시작도 끝도 모두 전설 같은 왕국이었다.

  그러나 이 왕국은 양피지를 뜻하는 영어 'parchment'에 영원히 흔적을 남겼다. 이 낱말의 어원은 라틴어의 'charta Pergamenum(페르가몬의 종이)'이다. 역대 페르가몬의 왕들은 책 수집광들이었다. 특히 페르가몬 왕국 전성기 때의 왕 에우메네스 2세(Eumenes II 기원전 197~159년)는 책에 대해 광적인 애착을 가지고 있어, 왕국 안의 모든 책을 뒤져 왕궁의 도서관으로 모아들였다. 그 효과는 금방 나타나서 도서관의 장서 수는 20만권에 달해, 당시 세계 최대 도서관이었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과 맞먹는 명성을 얻기에 이르렀다.

  이집트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5세(Ptolemaios V 기원전 210~180년)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는 파피루스의 수출을 전면 금지했다. 페르가몬 왕국이 책을 더 이상 새로 만들 수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갈대과 식물인 파피루스는 나일강 삼각주에서만 자랐다.

  당시의 책은 30㎝ 정도 너비의 파피루스 양 끝에 둥근 나무막대를 댄 두루마리로 'volume'이라 불렸다. '말다'를 뜻하는 라틴어 동사 'volvere'에서 파생된 말이다. 가장 오래 된 파피루스 두루마리는 기원전 3500년까지 올라가지만, 보통은 기원전 2500년부터 일반화됐다.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650년에 와서야 이집트에서 파피루스를 수입해 책을 만들었다.

  파피루스를 구할 수 없었던 민족들은 얇게 말린 짐승 가죽에 기록을 했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가죽을 다루는 기술이 조잡해, 필기 도구로는 파피루스와 경쟁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집트의 파피루스 수출 금지는 페르가몬 왕국에 심각한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기록을 하지 못하고 또 책을 만들 수 없게 되면, 지식과 정보에서 경쟁국인 이집트에 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그 시대에는 책이 지식과 정보의 귀중한 매체이자 ,한권의 값이 도시의 집 한채와 맞먹을 정도로 귀중품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가전제품과 정보기기에 들어가는 칩을 얻을 수 없게 된 셈이니, 페르가몬이 느낀 위기의식이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에우메네스 2세는 파피루스를 대신할 수 있는 서사 자료를 찾아내라고 명령했다. 페르가몬의 학자들과 기술자들은 가죽을 석회 물에 2주 동안 담갔다가 틀에 팽팽하게 잡아 말리면 파피루스에 버금갈 정도로 얇은 가죽을 만들 수 있음을 알아냈다. 이렇게 해서 양피지가 발명되었다.

파피루스에 비해, 가죽은 부피가 크고 만드는 과정이 복잡해 값이 비쌌다. 성경 내용을 전부 기록하려면 양 5,000마리의 가죽이 필요했다. 그러나 양면에 글을 쓸 수 있어 어느 정도 경제성도 맞출 수 있었고, 또 보전성은 파피루스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래도 문제가 남아 있었다. 양피지를 아무리 얇게 만들어도 파피루스보다 몇 배 두꺼워 두루마리를 만들 경우 지나치게 부피가 컸다. 이에 대한 페르가몬 사람들의 대응 방법도 상식적인 것이었다. 페르가몬 사람들은 양피지를 둘둘 마는 방법 대신, 네모 반듯하게 잘라 한쪽 귀퉁이를 끈으로 묶었다. 이로써 현대 책 모양의 '코덱스(codex)'가 출현했다.

  두루마리에서 코덱스 형태의 책으로 발전한 것은 단순한 것이었지만 결과는 엄청났다. 코덱스는 두루마리에 비해, 정보 검색과 인용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우선 책은 자신이 원하는 부분까지 돌려야 하는 두루마리와 달리,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단번에 옮길 수 있었다. 또 파피루스 두루마리에서는 인용이나 검색을 쉽게 하기 위해 장과 절로 나누는 방법을 썼지만, 코덱스는 각 쪽에 번호를 매겨 훨씬 쉽게 이 문제를 해결했다. 더구나 책 끝에 찾아보기를 붙여 정보의 이용도를 더 한층 높일 수 있는 것은 코덱스에서만 가능했다.

  파피루스와 코덱스의 이런 차이는, 가위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만큼이나 큰 것이었다. 이런 코덱스의 장점에 힘입어, 결국 양피지가 파피루스를 몰아냈다.

 

  코덱스 형태의 책이 발명된 지 400년이 지난 기원후 4세기부터, 동양에서 종이가 전해져 일반화되는 13세기까지 유럽에서는 양피지만 사용했다. 파피루스는 시실리 섬과 같은 곳에서 기원후 14세기까지 명맥을 이어갔을 뿐이다.

  세계 최초의 본격적인 정보 전쟁은, 이렇게 페르가몬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페르가몬 도서관 폐허에 서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낀다. 오늘날 페르가몬의 유적은 독일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옮겨져, 일부가 보존돼 있다.

 

 



                                                                                      베르가마=글 유재원(외국어대)교수
                                                                                                              사진=안성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