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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시우스 1세(대제) [Theodosius I] 前候 황제

영국신사77 2007. 3. 9. 08:25

 그라티아누스 Gratianus, Flavius Augustus. (재위 375-383) 西.


  발렌티아누스 1세의 장남으로 부황 치세 중인 367년에 이미

정제(正帝) 칭호를 받았는데, 이때 그의 선입은 전 갈리아 군단의 동의를 얻었다. 부황이 급사했을 때 불과 17세였지만, 이미 온갖 미덕을

갖추었음을 과시함으로써 군대와 국민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군의 일부에서는 그라티아누스 황제의 이복동생인 겨우 4살된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옹립하고, 그를 제위에서 추방하려는 강한 움직임이 있었다.

 

이때 조금이라도 잘못했다간 내란으로 치달을 상황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라티아누스가 현명하고 온당하게

나갔으므로 내란만은 피할 수 있었다. 즉, 동생이 제위에 오르는 것을 쾌히 승낙하고 그를 그의 모후와 함께 평화로운 밀라노 궁전에 살게 함으로써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통치케 하고, 자신은 좀더 곤란한 알프스 산맥 이북의 각 속주 통치에 임하기로 하면서, 책모의 주모자들에 대한 처벌이나

해임은 사태가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보류시키는 방침을 취한 것이다.

 

그리하여 얼마 동안은 전 로마제국의 통치가 동방의 발렌스 황제와 서방의 그라티아누스와 발렌티니아누스

2세 황제, 이 3명의 연서(連署)로 행해지게 되었다. 그의 치세의 태반은 갈리아에서, 라인강 대안에서 침구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는 이민족들과의

대치에 쫓겨 다니는 군사작전으로 메꾸어졌는데, 이 때문에 동방황제인 숙부 발렌스가 패사했을 때도, 구원 차 달려가기에는 너무도 원격한 지역에

머물러 있었다. 숙부인 발렌스 황제가 사망한지 5개월 간이나 공위로 남아 있던 동방황제자리에, 일찍이 황제인 자기보다 인기가 더 높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했던 선제(先帝)대의 최대의 국가공훈자인 테오도시우스 장군,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인 테오도시우스를 지명함으로써 동 가문에 보상하고 또

속죄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동서 로마를 통치할 체제를 갖추었다(379년 1월).

 

그라티우스 황제는 만20세를 맞이할 때까지는 최고의 명성으로 찬양된 왕고(往古)의 여러 황제에 못지 않을 정도로 인망이 높았었다. 타인에게 호감을 주는 그의 인품, 우아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행동거지가 모두 국민의 마음을 크게 매료했던 것이다. 열심히 신을 믿는 가톨릭교도라 하여 교회측의 신망도 두터웠고, 문학에 대한 깊은 조예는 문인들 속에서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20세 이후의 그는 아부만을 일삼는 주변의 아첨꾼들이 잘못 유도한 탓으로, 정무는 내팽개치고 수렵에만 몰두하는 등 차차 사람들의 빈축을 사게 되었고, 군대로부터도 지지도를 잃어갔다.

 

때마침 브리타니아 속주의 군사령관이던 막시무스가 그라티아누스 황제에게 불만을 품은 브리타니아 주둔군 장병들에 의해 추대되어 황제를 참칭한 다음, 곧 갈리아 지방에 상륙 침입하였다(383년). 그라티아누스는 이에 맞서 싸우기 위해 급히 파리로 향했으나 휘하 장병이 도망치자 황제도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리용에서 자객의 손에 걸려서 죽었다. 그때 그의 나이 24였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 Valentinianus II. (재위 375-392) 西.


  불과 4세의 나이로 이복형제 간인 그라티아누스 황제와 공치제 형태로 이탈리아. 아프리카 통치를 담당했었다.

그리고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횡사했을 때,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12세에 불과했다.

 

  이후 테오도시우스 1세의 감은(感恩)의 애정과 또 야심이 없는

그의 커다란 포용력에 지탱되어,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서로마 황제의 지위를 보존할 수 있었다. 그간 참제인 막시무스와의 전쟁이 있었는데, 이때는

수도에서 쫓겨나 외지로 망명한 신세가 되었는데,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도움으로 막시무스가 처형된 뒤에는 다시 서방황제로 복위될 수 있었다.

 

  이때 아르보가스트(아르보가스테스)라는 프랑크족 출신 용장이 있었는데, 그는 그라티우스 황제 치세부터 황제를 도와 기병대 총사령관의 지위에 올랐고, 막시무스의 반란으로 황제가 횡사한 뒤에는 테오도시우스 황제 휘하로 넘어가 막시무스를 쓰러뜨리는 전쟁에 크게 공헌했고, 전후에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 휘하의 갈리아군 총사령관 겸 정무총감에 임명되어 전권을 휘둘렀다.

 

  그가 남 몰래 서방제국을 지배하려는 야망을 품고 점차 독수를 뻗쳐 발렌티니아누스 황제의 측근에서 충직한 신하들을 모두 멀리하게 하는 등 야망달성을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시킨 후, 드디어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그의 방안에서 목 졸라 죽이고, 에우게니우스라는 수사학자를 괴뢰로서 제위에 앉힌 후 배후 실력자가 되었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교살당했을 때의 나이는 21세였고, 날짜는 392년 5월15일이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대제) Theodosius I. (재위 379-395) 東.


  그라티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처형된 테오도시우스 장군의 아들로서, 야인 생활 4개월만에 그라티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동방황제로 선임되었다. 스페인 출신으로서 그의 아버지 테오도시우스는 발렌티아누스 1세 치세 시, 브리타니아 속주.상 다뉴브 지방.아프리카 등지에서 독군으로 혁혁한 전공을 세움으로써 명성이 갑자기 올랐지만, 이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실각당한 후 사형에 처해졌다.

 

  이때 그의 아들인 테오도시우스도, 군대 사령관으로서 여러 번 공훈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강제전역 당한 후 고향인 에스파냐 벽지에서 아무런 야심이나 불만도 없이 유유자적한 은거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숙부인 발렌스 황제가 전사한 후 그 후계자를 누구로 지명할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 끝에, 이 은거 중이던 테오도시우스를 지명한 것은 위와 같은 경위가 있었던 만큼 얼마간 기이한 감도 있지만, 워낙 국가가 다사다난한 처지에 놓여 있었던 만큼, 그를 지명한 것은 테오도시우스 부자 2대가 세운 공훈과 명성, 그리고 그의 인물됨됨이에 모든 것을 기탁할 생각 외에도 어떤

면에서는 속죄 보상하려는 심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당시 그의 나이 33세로서 국민이나 군도 놀랐지만 일제히 환호로서 그를 맞이하였다. 제위에 오른 그는 용기와 지략으로 고트군의 침략에 대항함으로써, 한때 거의 완전하게 상실했던 자신감을 로마 장병들 사이에서 부활시켰다.

 

  뿐만 아니라 끝내는 고트족의 왕인 아나타리쿠스(아나타릭)의 환심을 얻었고, 또 그를 성대하게 장사 지내 주는(381년) 등으로 그들의 신용을 얻음으로써 기적적으로 전면적인 항복을 받게 되었는데, 이것은 발렌스 황제가 패사한지 불과 4년 후에 올린 성과이다.


  383년에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비운으로 갔을 때에는, 사태가 너무도 급박했기 때문에 은인의 구원에 달려가지 못했고, 그후의 정세도 참제 막시무스의 세력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부득이 하게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참가시켜 3제 공치의 형태로 로마제국을 분담통치하되, 다만 참제 막시무스에게는 알프스 이북 영토만으로 만족한다는 내용의 서약을 받아내어 타협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일시 평화를 유지하게 된 테오도시우스는 제국 전 영역을 통하여 완전히 우상숭배를 폐지시키고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탄압하는 등 국내의 종교문제 개혁에 열의를 보였다.

 

  그런데 막시무스가 자기에게 주어진 영역만으로 만족했더라면 오랬동안 3제

정립(鼎立)형태가 계속되었을지 모르나, 원래 야심 만만한 그였던 만큼 387년에 이르러 알프스 산맥의 험한 고개를 속여서 넘은 다음, 약체였던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이탈리아에 침공해 들어갔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테오도시우스 황제도 궐기하지 얺을 수 없어, 양자 사이에 내전이 시작되었는데, 사태는 어이없이 끝났다(388년). 민심이 이미 참제에게서 떠나가 있었는데, 붙들린 막시무스는 격분한 병사들의 손에 참수되었다.

 

  황제 치하에서는 불행하게도 또 한번 내전이 있었다. 그것은 아르보가스트(아르보가스테스)가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시해했을 때인데, 이의 뒤처리로서 아르보가스트 장군은 프랑크족인 자기 자신이 제위에 오르는 데에는 저항감이 많다고 생각하여, 에우게니우스라는 로마인 수사학자에게 자의(紫衣)를 주고, 자기는 배후에서 실권을 장악하여 괴뢰인 에우게니우스를 조종했던 것이다.

 

  이탈리아로 재차 침공해 들어가는 데에는 상당히 주저했지만, 결국 테오도시우스는 2년 간의 준비 끝에 결연히 군을 진발시켜 악전고투 끝에 신풍(神風)의 도움으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괴뢰참제인 에우게니우스는 참수로, 괴수 아르보가스트는 자진케 함으로써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이어서 황제는 밀라노에 입성하여 시민들의 환호를 받았지만, 국사다망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침식되어 있던 황제의 건강은, 전쟁의 피로가 겹쳐 전승 후 불과 4개월만에 국민의 통석 속에 일생을 마쳤다. 당시의 나이 48세.

 

  일찍이 이미 정제(正帝)칭호를 받고 있던 그의 두 황자들인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가 각각 동과 서의 제국을 승계하게 된다.



    아르카디우스 Arcadius. (재위 395-408) 東. &

                     호노리우스 Honorius. (재위 395-423) 西.


  두 사람 모두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장남과 차남으로서, 다 함께 어릴 때에 정제(正帝) 칭호를 받았고, 395년 1월, 부황(父皇)의 사망과 더불어 동.서 로마 제국의 통치자 지위에 올랐다. 두 제국 사이는 점차 서먹서먹해졌고, 끝내는 아주 타국처럼 되어 버렸지만, 두 황제는 다 함께 시대를 같이 하였고, 또 공통의 외적에게 시달림을 받았으므로, 여기서는 편의상 일괄하여 취급한다.


  즉위 당시 형인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17세, 동생인 호노리우스 황제는 10세였는데, 부제(父帝)의 유지에 의하여, 루피누스(Rufinus, 東)와 스틸리코(Stilicho, Flavius. 西)를 각각 사부와 보좌 역으로 삼았다.

 

  루피누스는 전형적인 간신으로서, 전적으로 자기권세의 확대와 치부에 노력하였는가 하면, 자기 딸을 황후로 들여 보내어, 막강한 절대권력을 휘두르고자 기도했지만, 그를 좋게 보지 않은 환관 에우트로피우스(Eutropius)의 교묘한 술책으로, 황제는 다른 여성인 에우독시아(Eudocia/Eudoxia)를 황후로 맞아들였다. 이것이 그가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전락하는 시작으로서, 이후 황제는 미모에 재기발랄한 새 황후와 환관 에우트로피우스의 뜻대로 움직이게 된다. 어떻게 해서든지 실권을 회복하고자 몸부림치던 루피누스는, 결국 395년 서로마 제국 황제의 후견인격인 스틸리코의 뜻을 받든 고트족 출신 장군 가이나스(Gainas)의 손에, 황제 면전에서 살해되고 만다.


  스틸리코는 루피우스와는 달리 지용을 겸비한 충직한 장군으로서, 충성스럽게 유고(遺孤)인 호노리우스 황제를 보호하였다. 선제인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조카딸이며, 대제의 양녀가 된 세레나(Serena)를 384년 이래 아내로 맞아들인 것도, 그가 충성을 다한 커다란 이유였을 것이다.

 

  선제사후에 동서 두 제국은 차례차례로 이민족들의 반란과 침략에 고민하게 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아프리카에서 무어인 길도(Gildo)가 일으킨 반란이다. 길도는 선제에 의하여 아프리카의 독군으로 등용되었던 자로서, 397년에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스틸리코는 다음해 길도에 강한 원한을 가졌던 그의 실제(實弟) 마스케젤(Mascezel)을 토벌군 사령관으로 임명 파견하여 급속히 이를 진압하였다. 그런데 이 마스케젤도 이탈리아로 개선 후 강물에 빠져 죽었는데, 이것은 스틸리코의 모략에 의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번의 전승은 우연하게도 호노리우스 황제의 결혼식과 시기를 같이 핝다. 황후가 된 것은 다름아닌 스틸리코의 딸 마리아(Maria)로서, 황제는 이때 14세이고 황후는 이보다 좀더 나이가 어렸던 모양으로, 황후가 된지 약 10년 후에 그녀는 아이도 낳아보지 못하고 죽었다. 황제는 허약 체였을 뿐만 아니라 통상적인 남자로서의 생식능력도 결여되어 있어서. 죽을 때까지 동정(童貞) 그대로 였다고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다. 선조들과는 달리 호노리우스 황제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는 "궁정 안에서 붙들린 죄수와도 같은 생애를 게으른 잠으로 보내면서 국민들과도 친숙하지 못한 채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끈기있게, 아니 거의 무관심으로 쳐다 본 방관자였다. 그의 치세 28년이라는 다사다난한 역사 속에서, 황제 호노리우스의 이름을 들출 필요가 거의 없을 정도로 그는 무능했다."라는 말이 그에 대하여 모든 것을 이야기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연이은 외환으로 시달렸다. 테오도시우스 대제가 건재할 때는 감히 소리도 내지 못하고 조용히 있던 이민족들은, 마치 그가 죽기를 기다리기나 했다는 듯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고트족 대군이 걸출한 인물 알라리크(Alaric/Alaricus I)의 지휘하에 북방으로부터 침입하여 동방제국의 여러 속주들을 휩쓸었고, 마케도니아에서 테살리아에 걸친 그리스 땅을 무인지경을 달리는 기세로 석권하였다. 동방제국이 배치하고 있던 속주의 총독이나 군대가 저항다운 저항을 거의 보이지 않고 있는 사이에, 알라리크의 군대는 금세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각 도시를 유린했는데, 이들을 쫓고 이 지역을 구출한 것은 서로마 제국에서 온 스틸리코와 그의 군대였다(397년).

 

  이 때는 알라리크도 북쪽 에피루스로 도망가 동방제국과의 사이에서 타협을 성립시켰기 때문에, 스틸리코도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지만, 5세기에 들어서자마자, 서고트족의 왕으로 추대된 알라리크는 401년, 이탈리아로 침입하였다. 알라리크는 궁정이 있던 밀라노를 위협함으로써 전체도시가 금세 혼란에 빠졌지만, 이때도 스틸리코의 지모와 분투로 간신히 호노리우스 황제의 위급한 국면을 건져내었다.

 

  황제는 404년, 궁정을 위험한 밀라노에서 아드리아해에 면한 라벤나로 옮겼는데, 이후에는 대략 이 안온한 곳에서 나날을 보냈다. 다시 라다가이수스(Radagaisus)가 이끄는 동고트족의 침구도 있었지만, 그처럼 막강했던 스틸리코도 점차 인기를 잃고 408년 실의 속에 참살되어

생애를 마쳤다.

 

  이해는 마침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도 사망하였는데, 같은 해 알라리크의 두 번째 이탈리아 침략이 시작되고, 410년에는 제3회 침략으로 로마까지 점령 약탈당하는 한편, 로마의 수도장관이던 아탈루스(Attalus)가 일시 참제로 옹립되었다.

 

  알라리크는 이윽고 로마에서 철수하여 이탈리아 남부지방으로 약탈행각을 계속했고, 다시 아프리카를 정복하고자 시칠리아로 향하려고 할 때, 폭풍우의 방해로 머뭇거리던 중, 병환으로 급사하였다(410년).

 

  고트족은 그의 후계자로 선출된 아돌푸스(Adolphus)에게 통솔되어 갈리아 방면으로 철퇴했지만, 서로마 제국은 알라리크의 약탈이 있은 이후,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했고, 게다가 아프리카의 반달족 내습, 훈족의 왕 아틸라(Attila)의 침략으로 이어져, 줄곧 쇠망의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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