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암브로시우스 [Ambrosius]

영국신사77 2007. 3. 9. 18:15
          암브로시우스 [Ambrosius, 340~397.12.7]
요약
 초대 가톨릭교회의 교부이자 교회학자이다. 니케아 정통파의 입장에 서서 교회의 권위와 자유를 수호하는데 노력하여, 신앙·전례() 활동의 실천 등에 큰 공을 남겼다.
본문

 340년 독일 트리어에서 출생하였다. 부친과 사별한 후 로마로 가서 수사학을 공부하고, 368년 변호사가 되었으며, 370년에는 북이탈리아의 리구리아주 밀라노집정관()이 되었다.

 

 밀라노에 있을 때 밀라노 성당의 주교 후계자 논쟁을 수습하여 아리우스파()와 가톨릭 양쪽의 신망을 얻어 374년 세례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주교가 되었다. 이후 니케아 정통파의 입장에 서서 교회의 권위와 자유를 수호하는 데 노력하여 신앙·전례()·성가() 활동의 실천 등에 큰 공을 남겼다.

 

 뛰어난 설교가로 그가 남긴 기록이 바로 저서가 되었는데, 반()아리우스파의 여러 저술 외에도 《성직에 관하여 De officiis ministrorum》 《6일간의 천지창조론 Hexėmeron》 등이 유명하다.

 

 A.오리게네스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이 행한 성서의 우의적 해석()을 도입한 외에 로마의 히폴리스, 이레나이우스, 안티오키아이그나티우스 등을 연구하여 동방신학을 서유럽에 이식하였고, 마리아의 무원죄()를 주장하여 중세 마리아 숭배의 시조가 되었다. 또 《암브로시오 성가》로 불리는 찬미가집을 만들어 ‘암브로시우스 선법()’이라는 4가지 선법을 제정하여 그리스도교찬미가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는 암브로시우스를 존경하였으며, 또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설교를 듣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고 한다.

 

 밀라노에는 386년 그가 창건한 성당이 현존하고 있는데, 이 성당과 밀라노시()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제목 : 밀라노대성당
출처 : © encyber.com
설명 : 이탈리아 밀라노. 고딕건축의 걸작인 밀라노대성당은 수백 개의 첨탑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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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브로시우스 [Ambrosius]

 
  (영)Saint Ambrose.

  339경 갈리아 벨기카 아우구스타트레베로룸~397 밀라노.

  축일은 12월 7일.

  밀라노의 주교, 성서 비평가.

 

 

                                        개요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한 중세 개념의 전형이 된 여러 사상을 맨 처음 내놓은 인물이다. 그의 저서들은 라틴 웅변의 걸작으로 인정받아왔으며, 그가 지은 찬송가들을 통해 그의 음악적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기억되고 있다. 또한 위대한 그리스도교 신학자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개종시키고 세례를 준 교사로, 교회가 로마 제국의 폐허 위로 떠오르는 환상을 본 모범적인 주교로도 기억된다.

 

 

                                      초기경력

  아우구스타트레베로룸(트리어)에 있는 공관(公館)에서 갈리아 총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곧 아버지가 죽는 바람에 로마에 있는 한 저택에서 성직자들과 과부가 된 어머니, 수녀가 된 누이 마르첼리나와 함께 살았다. 370년경 정식으로 아이밀리아-리구리아의 총독이 되어 밀라노에서 살았는데, 374년 뜻하지 않게 밀라노 시민들이 그를 주교로 선포했다. 평판 좋은 국외자로서 분쟁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선거를 피하기 위해 협상을 통해 후보로 선출된 그는 세례도 받지 않은 평신도에서 8일 만에 주교로 탈바꿈했다. 연줄이 좋지만 이름 없는 원로원 가문 출신이었던 그는 지방 총독의 역할은 무시해도 될 만큼 밀라노의 주교직을 훌륭하게 수행하여 당대의 문화 및 정치 생활을 유능하게 이끌어갔다.

 

 

                                   교회행정상의 업적들

  밀라노에 자리잡는 경우가 많았던 황궁과 여러 차례 대립하는 동안 암브로시우스는 로마 원로원에 대권을 부여하는 공화정의 이상과 사악한 민중지도자의 기질이 결합된 대담성을 보여주었다. 384년 로마 원로원의 이교도 구성원들이 항소한 '종교관용령'이 배격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그 원로원 의원들의 대변인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는 그의 친척이었다(편지 17·18). 385~386년 아리우스파 이단자들이 교회를 사용하도록 내주지 못하게 했다. 388년 암브로시우스는 유대인 회당을 불태운 주교를 처벌한 황제 테오도시우스를 꾸짖었으며, 390년 테살로니키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테오도시우스가 이를 진압하고자 그곳 주민들을 대학살한 죄에 대해서 공식적인 고해성사를 베풀어주었다. 이렇게 전례없는 간섭을 했으면서도 그는 충성심이 강한 인물이었으며, 특히 383, 386년 트리어의 탈취자 막시무스를 공식 방문하는 등 외교관으로서도 뛰어난 자질을 발휘함으로써 신임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편지들과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 테오도시우스의 장례식 조사인 〈De obitu Valentiniani consolatio〉(392)·〈De obitu Theodosii〉(395)에서 중세의 그리스도인 황제 개념, 즉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는', 따라서 주교의 조언과 책망에 복종하는 교회의 충성스러운 아들 개념을 확립했다.

 

 

                                문학 및 음악상의 업적

  암브로시우스가 황제들과 나눈 관계는 이탈리아의 평신도 지배 계층 사이에서 그가 누린 당당한 지위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교와 이교를 막론하고 최신의 그리스 지식, 특히 필로, 오리게네스, 카이사리아의 성 바실리우스, 이교도이며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누스의 사상을 빠른 속도로 익혔다. 설교할 때 이 지식들을 토대로 성서를 해석하고, 특히 유식한 철학적 알레고리를 써서 〈구약성서〉의 '영적인' 뜻을 변호하는 데 사용했다. 〈창조의 여섯 날들에 관하여 Hexåmeron〉와 족장들에 관한 설교들(그중에서 〈이삭과 영혼에 관하여 De Isaac et anima〉·〈죽음의 미덕에 관하여 De bono mortis〉는 그가 신플라톤주의의 신비주의적 용어들을 익히 알고 있었음을 보여줌)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암브로시우스의 주요문학작품인 이 설교들은 불행하게도 연대가 불확실하다. 이 설교들은 라틴 웅변의 걸작들로 인정받았고, 그리스 철학과 신학을 서양에 전달하려는 학자들에게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설교들을 통해 얻은 가장 유명한 개종자는 훗날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가 된 아우구스티누스였으며, 훗날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와 마찬가지로 교회 박사(스승)로 존경을 받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384년 신앙에 회의를 품은 수사학교수로서 밀라노에 가서 388년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고 그의 가톨릭 신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았는데, 이 사상은 결국 그리스도교 신학을 변화시킨 철학적 기초가 되었다.

 

  암브로시우스는 라틴 지식인들에게 그리스도교를 고전 라틴어로 번역하여 나무랄 데 없이 전해주었다. 성직자들의 도덕적 의무에 대해서 쓴 〈성직자의 의무에 대하여 De officiis ministrorum〉(386)는 키케로의 〈도덕적 의무에 관하여 De officiis〉를 정교하게 모방한 작품이다. 그는 로마의 영웅들 대신에 〈구약성서〉의 성인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귀족의 행동 모범으로 삼기 위해 노력했다. 많은 편지를 쓰고, 많은 지역을 방문하고, 많은 사람을 임명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한때 로마 총독으로 다스린 적이 있는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에 이 귀족적인 그리스도교를 강화했다. 밀라노에 있을 때 그는 새로운 동방 음악들을 도입하고, 아름다운 찬송가들(대표작들로는 〈땅과 하늘을 지으신 분 Aeterne rerum Conditor〉·〈만물을 지으신 지극히 높은 하느님 Deus Creator omnium〉)을 작곡함으로써 시민들을 '매혹'시켰다. 세례 예비자들을 가르치는 데에는 어떤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사회의 부패상을 비판했고(주로 〈나봇에 관하여 De Nabuthe〉 같은 설교),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을 자주 사면했다. 매우 엄격하게 금욕주의를 옹호했고, 그결과 결혼을 앞둔 딸들을 가진 귀족 가문들은 암브로시우스가 설교를 통해 독신의 미덕을 강요하는 예배에 딸들을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

 

 

                                           평가

  암브로시우스가 죽은 뒤에 얻은 명성은 아무런 도전도 받지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를 주교의 전형으로 보았고, 밀라노의 부제 파울리누스를 설득하여 412년 그의 전기를 쓰게 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반대자 펠라기우스도 암브로시우스를 '라틴 웅변의 꽃'으로 보았다.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들 가운데 〈루가의 복음서 해설집 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390)이 가장 널리 읽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브로시우스는 두 얼굴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황제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했으나, 교회가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의 선구자로 스스로를 간주한 적은 없었다. 그의 행동은 그리스도교가 이교도 귀족들에 의해 몰락할지도 모르며 가톨릭 신앙이 황궁의 아리우스파 지지자들에 의해 밀라노에서 뿌리뽑힐지 모른다는 뿌리 깊은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식에 대한 그의 태도 역시 시대에 뒤진 것이었다. 그는 이교도들과 이단자들이 "불신앙을 철학이라는 물감 통 안에 넣어 물들인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의 설교들은 은연중에 플로티누스의 이교 신비주의를 드러낸다. 그는 밀라노의 산암브로즈 성당 구내의 산사티로 부속예배당에 그가 죽은 직후에 그려진 모자이크에서 그가 바라던 대로 복음서를 들고 있는 소박한 그리스도교 주교로 묘사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가 주교로서 직무에 임한 태도를 보면, 그의 표현 그대로 가톨릭 교회가 로마 제국의 폐허 위에 '차오르는 달처럼' 떠오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P. R. L. Brown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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