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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강한 정부의 역설 [중앙일보]

영국신사77 2007. 3. 13. 14:55
                   [분수대] 강한 정부의 역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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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오일쇼크가 일어났을 때 석유 수입국들의 대응 방식은 두 가지로 갈렸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즉각 석유류 가격의 인상을 허용한 반면 많은 개발도상국은 국내 기름값의 통제에 나섰다. 전자는 석유 위기에 따른 조정을 시장기능에 맡겼고, 후자는 시장을 믿지 못하고 정부가 시장에 직접 뛰어든 것이다.

과연 어느 쪽이 더 '강한 정부'일까. 외견상 유가 상승을 방치한 나라의 정부는 시장에 대한 영향력이 약하고, 유가를 통제한 나라의 정부가 힘이 센 것처럼 보인다. 결과는 거꾸로 나타났다. 기름값이 시장원리에 따라 오른 나라에서는 소비자들이 스스로 에너지 절약에 나섰고, 에너지를 절감하거나 석유를 대체하는 기술 개발이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유가 급등의 충격을 막는다며 국내 기름값을 묶은 나라에서는 석유 소비가 줄지 않았으며 오히려 가수요와 사재기, 암거래가 성행했다. 그 후 선진국들의 석유 의존도는 크게 줄어든 반면 개도국의 석유 의존도는 여전히 높았다.

'강한 정부'는 시장이나 국민의 의사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국가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정책수단을 보유한 정부다. 석유파동이라는 위기가 발생하면 국내유가 안정이란 목표를 정하고, 시장에 직접 개입해 가격 통제에 나선다. 문제는 이처럼 정부가 힘을 발휘하면 할수록 시장의 기능은 쇠퇴하고, 정책의 효과는 떨어진다는 점이다. '강한 정부'는 정책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점점 더 큰 규제와 더 강한 행정력을 동원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정책 실패가 누적되다 보면 시장과 국민으로부터 멀어지고, 정부의 권위와 영향력이 줄어 들어 종국에는 경제 파탄이나 실권(失權)이라는 파국을 맞을 위험이 크다.

미국의 국제정치경제학자 존 아이켄베리는 이를 '강한 정부의 역설(irony of state strength)'이라고 했다. 강한 정부가 강력한 정책을 펼친 끝에 힘이 빠지고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약한 정부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 정부는 출범하면서부터 줄곧 '크고 강한 정부'를 추구해 왔다. 과거사 정리나, 강남 부동산 잡기, 최근의 개헌 추진에 이르기까지 국민의 뜻과 관계없는 반시장적인 의제를 독자적으로 설정하고 밀어붙였다. 그 결과 10%대의 낮은 지지율로 버티는 '약체 정부'가 됐다. 강한 정부의 역설에 빠진 것이다. 진정 강한 정부는 시장 개입의 유혹을 뿌리치고, 힘의 행사를 자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정부일 텐데.


김종수 논설위원

2007.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