敎育학습科學心理

두렵다, 에코의 눈빛

영국신사77 2007. 2. 28. 19:17
                                       두렵다, 에코의 눈빛


외부 모임에서 명함을 건네면 바로 돌아오는 인사가 있다. "아, 국민일보에 계시는 군요, 큰 일 했습니다!" 논문 표절에 대한 젊은 기자들의 끈질긴 보도는 학계에 큰 메시지를 던졌다. 관행의 늪에 묻혀있던 캠퍼스의 정직성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우리 학문 수준을 30년 정도 앞당겼다고 평가하는 이도 있다.

한국 사회는 왜 그토록 표절에 관대했을까. 서양 학자들은 지식을 공유의 대상으로 보는 동양사회의 전통을 지목한다. 유교사상의 영향권 아래 있던 한국과 대만, 중국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그 중심에 공자가 있다. 그의 가르침은 '지자불혹(知者不惑)'이다. 지식은 누구에게 주는 게 아니라 그저 미망(迷妄)을 걷어내는 수단이라고 본다. 지식이 콘텐츠가 아니니 값을 매길 수 없다. 명품 조각에 이름이 없고, 고려자기에 도공 이름을 새기지 않은 것도 같은 이치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었다. 정보화시대에서 아는 것은 힘이자 돈이다. 동서양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지식을 담는 가장 정교한 그릇인 논문에도 글로벌 스탠다드만 있을 뿐이다. 읽기가 짜증스러울 만큼 인용 표시가 촘촘한 외국 논문을 보면 공자의 주장이 먹힐 구석이 없다. 김병준과 이필상 세대의 불행은 공자의 그림자에서 너무 오래 머문 탓이다.

물론 사태의 일차적인 책임은 교수 집단에 있다. 학문의 방법론은 서양의 것을 익혀놓고는 적용 단계에는 동양의 문화에 기댔다. 한국 아카데미즘은 이 모순을 고백하지 않고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고백에는 성찰과 다짐이 따라야 한다. 작은 논문을 써 본 기자도 공자의 그림자 속에 숨고 싶은 심정은 마찬가지로되, 두려움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것이 학문 사회에 남겨진 숙제다.

학생들의 책임도 거론돼야 한다. 사실 지도교수와 학생의 관계는 복잡하다. 지식을 매개로 인격을 깊이 나누기도 하고, 간수와 여성재소자처럼 특별권력관계의 측면도 있다. 그러나 두 학자의 논문이 문제됐을 때 학생들이 보여준 태도는 실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다시 읽어야 할 책이 움베르트 에코의 '논문 잘 쓰는 방법'이다. 에코는 이미 30년 전에 '지도교수에게 이용당하는 것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라는 글을 노골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지도교수가 학위를 받게 해준 다음에는 학생들의 작업을 자기 것인양 활용한다…자신이 암시해준 아이디어와 학생들에게 얻은 아이디어를 구별하지 못한다." 학위를 위해서는 공자의 문화가 그립지만, 논문을 위해서는 공자를 버려야 한다.

사건 이후 대학에는 침묵이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치열한 반성문도 없고, 새로운 강령도 없다. 액션은 더더욱 없다. 한 분은 화를 잔뜩 내면서 물러났다가 의기양양하게 대통령 곁으로 복귀했고, 또 한 분은 "고려대를 사랑한다"는 묻지도 않은 말만 남기고 떠났다.

논문 세상에 공자의 인자한 수염은 없다. 에코의 형형한 눈빛이 있을 뿐이다.

                                                                손수호 편집국 부국장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