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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를 틔워줘야 입구에 몰리지 않겠나. 이공계 위기를 타개하려면 결국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서울대 자연대 오세정(사진) 학장은 27일 이공계 학생들의 '의학 고시' 열풍을 취재한 본지 보도(2월 27일자 1, 8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공계 학과에 입학한 뒤 10년 가까운 고생 끝에 박사학위를 따도 자리 잡을 곳이 없는 현실에서 의대.법대.교대로의 '몰림 현상'을 탓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 학장은 "예전과 달리 등록금이 없어 학교를 못 다니는 학생이 줄어들었지만 장학금만으로 학생을 끌어들이겠다는 발상은 근시안적"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학위를 따면 '창피하게 살지 않을' 정도의 생활이 가능한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말했다.
또 "의사나 변호사 등의 직종은 인력 수급을 통제할 수 있어 외국에 비해 '자격증 프리미엄'이 높다"며 "이를 적절한 수준으로 줄여나가야 학생들의 쏠림 현상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오 학장은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진 뒤 연구소 연구원들의 정년이 축소되고 직장을 그만두는 사람이 생기면서 '이공계 출신은 힘이 없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며 "이공계에 덧씌워진 이미지를 벗기는 작업도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아울러 "기업들도 단기 성과에 급급하기보다 멀리 보는 혜안이 필요하지만 학생들도 이공계 출신 CEO가 다수 배출되고 있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려대 생명과학부 이상호 교수는 '시스템 개혁'을 주문했다. 그는 "의대 박사과정과 의학전문대학원이 우수 이공계 인력을 빨아들이면서 이공계 대학원은 피폐해지고 있다"며 "이공계 위기는 영향평가를 제대로 하지 않고 무리하게 추진한 교육제도의 탓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공계 박사학위 소지자들이 갈 수 있는 자리가 한정돼 있어 '고등 룸펜'으로 남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영국 등 외국처럼 정부 출현 연구소를 확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넷에도 '개탄 목소리'=사회 각계에서 이공계 현실을 개탄하고 개선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학생과 부모들의 e-메일이 쇄도했고, 인터넷에선 1000건 가까운 댓글이 달렸다. 이공계 기피 현상이 새로운 것이 아닌데도 이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었다.
일본 도쿄대에서 화학공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는 한 독자는 "도쿄공대가 KAIST와 자매결연이 돼 있어 교환학생으로 많이 오는데 상당수가 의학 대학원 진학을 고민한다"며 "공학도 입장에서 현실이 안타깝다"고 전했다. 특히 사회에서 이공계가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지적이 많았다. 'kylii'라는 아이디를 쓰는 네티즌은 "일본 기업의 경우 나이 50이 돼도 연구원을 하고 그 후에도 자기 선택에 따라 주 4일 근무를 하면서 정년까지 보내는 경우가 많다"며 "40대에 잘리는 기업에 가려고 하는 우리 이공계생들은 부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권호 기자 [조선일보]
◆오세정(54) 교수=경기고를 수석 졸업하고 서울대를 수석 입학해 물리학과를 공부한 뒤 미 스탠퍼드대에서 이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제록스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1984년부터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99년부터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04년부터 서울대 자연대학장을 역임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