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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의 조선업 도전-1 : (1)~(3)

영국신사77 2007. 2. 27. 12:50
정주영의 조선업 도전 ③

`조선소 불가` 보고하자 박 대통령 `죽을 각오 없으면 출근하지마`

장관들에게 `이순신 장군 만나봤느냐`

이코노미스트 정주영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당부를 거절하지 못하고 청와대를 물러나왔지만 사실은 이미 일본 미쓰비시 측과 조선소 건설을 합작으로 해보자고 협의를 가졌던 일이 있었다. 그때는 정부가 중화학공업 추진을 발표하기 전이었다.

동생이었던 고 정인영(전 한라그룹 회장) 부사장과 함께 나섰던 것으로 확인됐지만 왜 실현되지 않았을까. 그때 내용이 향후 조선소 건설의 내막을 이해할 수 있는 관심의 포인트가 될 것 같다.

“미쓰비시에 가야키 조선소가 있잖아요. 거기서 100만t 규모의 도크를 증설할 작정으로 덤비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한번 해보자, 왜냐하면 일본도 그랬지만 우리 한국에 제철소가 만들어지면 반드시 경공업이 아니라 중공업으로 간다, 박 대통령이 어떤 양반이냐, 고속도로 만든다고 밀어붙일 때 봤지 않느냐, 이건 분명히 일본처럼 제철소 다음에는 중공업이다, 그렇다면 한국도 중공업 정책으로 갈 것이고, 대표적으로 추진할 게 조선소다, 그렇게 판단한 거지요. 미쓰비시 측과 접촉했어요. 그런데 반응이 신통치 않아요. 그러니 다시 가와사키중공업에 가서 하세가와 본부장하고 우메다 사장을 만나 똑같이 한국의 장래에 대해 설명하고 합작하자 했더니 좋다고 말이야, (손바닥을 탁 치며) 맞다, 그거야. 손바닥까지 때리면서 잘 봤다고 말이야, 하하항.”

日 미쓰비시와 합작 시도
그런데 왜 추진되지 않았습니까.

“그게 운이라는 거고 타이밍이라는 거예요. 뭐냐 하면, 사실 미쓰비시 측이나 가와사키에서 합작을 추진하겠다는 내부 결심은 서 있는 상태였어요. 그런데 일본이 그 당시 중국하고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던 도중인데 중국에서 ‘주4원칙’을 내놓았어요. 저우언라이(周恩來) 4원칙이라고 하지요? 그때가 70년 4월인데, 그걸 발표해서 일본이 눈치를 보게 됐거든?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가 내놓은 4원칙이라는 게 내용상으로 보면 한국이나 대만하고 경제협력을 맺고 있거나 투자하는 회사와는 무역을 안 하겠다는 거지요.”

일본의 투자에 브레이크가 걸렸네요.

“그렇게 되니까 일본 통산성이 제동을 걸고 나온다는 거지요. 그러니 별수 있어요? 결렬되는 거지. 그렇기 때문에 박 대통령이 조선소 건설을 추진할 때도 사실은 차관 도입이 주4원칙 영향 때문에 애를 먹기도 한 거예요.”

그 전에 캐나다 쪽하고도 접촉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합작이나 차관 때문이 아니고 조선소에 대한 전반적인 시장조사를 의뢰했던 거지요. 캐나다의 엑커스라는 기술회사에 시장성 조사를 의뢰했더니 조사를 한다면서 몇몇 회사하고 접촉하는 과정에서 이상한 일이 생긴 거예요. 하루는 우리 정부에 정보가 들어왔는데 메리도라고, 이스라엘 해운회사 팬마리타임 대표고 국회의원 출신이에요. 그이가 한국으로 찾아온다는 거지요. 나중에 나도 부총리한테 들었지만 우리나라가 차관을 도입할 때 중간에서 커미션을 크게 먹고 중개했던 아이젠버그라고, 유대인이 있어요. 메리도가 그이하고 같이 다니던 거상인데 조선소 때문에 온다는 거예요.”

아이젠버그라는 인물은 국내에도 알려져 있습니다만 메리도라는 사람이 조선소 건설 문제를 어떻게 알고 방문을 한다는 겁니까?

“캐나다 엑커스 측에서는 우리 의뢰를 받았으니까 이스라엘의 팬마리타임 회사하고 노르웨이의 조선회사인 아커그룹과 접촉했다는 건데 팬마리타임이나 아커 측에서 생각할 때 아, 한국에서 지금 조선 산업을 추진하고 있구나, 그렇게 판단할 수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러니 돈 냄새를 맡는 데는 귀신들이니까 팬마리타임 대표라는 메리도가 되지도 않을 조건을 잔뜩 들고 와서는 부총리한테 붙은 거지요. 좌우간 조건이 황당하고 50대 50 비율로 조선소 건설을 제의하다가 나중에는 조선소 운영권까지 자기들이 갖겠다고 나와요. 딴 데 가서 알아보라 했지 뭐. 그랬더니 부총리는 아이고, 놓치지 말라고 투덜거리고, 하하항. 하여간 별일이 다 있었어요.”

“왜 유독 현대에게 맡기느냐?”
당시 우선순위 첫 번째는 종합제철소 건설이었다. 종합제철소 건설도 수많은 일화를 가지고 있지만 특히 자금 조달 때문에 박 대통령이 직접 재일교포 사회에서 관서의 사카모토, 관동의 시게미쓰로 불리던 대표적인 실업가 서갑호씨와 신격호씨, 그리고 철공왕으로 군림하던 손달원씨한테까지 투자를 부탁했을 만큼 자금 때문에 전력투구했는데 조선소 건설을 미끼로 국제적인 로비스트들이 준동한 것도 사실이었다는 것이다.

“그때는 말이지요, 경제 건설이라는 대명제 앞에서 대통령까지 정말 권위고 체면이고 다 던지셨어요. 나보고 구라파로 다시 나가보라고 하실 적에 이런 말씀을 하는 거예요. 장관이 전부 안 된다, 그간에 다양하게 다 조사를 해봤고, 가능한 방법을 죄다 찾아봤지만 당장 현실적으로 조선소 건설을 해본 경험 있는 회사가 없는데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느냐, 도저히 조선소는 안 될 것 같다고, 전부가 그렇게 보고하더라는 거지요.

그래서 대통령께서 이순신 장군도 만나봤느냐고 소리를 질렀대요. 화가 나서 재떨이까지 집어던지면서 이순신 장군도 만나봤느냐고, 충무공이 거북선 만들 때도 경험 있는 건설회사가 있어서 가능했는지 물어봤어야 될 거 아니냐고, 막 호통을 치면서 나하고 같이 죽을 각오가 돼 있지 않은 장관들은 내일부터 출근하지 말라고, 얼마나 질책을 하셨는지 나중에 보니까 와이셔츠 단추가 두 개나 풀어져 있더라는 거지요. 그러니 생각해 보세요. 어떡하든 해야 한다는 집념 외에 권위를 생각했겠어요, 체면을 생각했겠어요? 그런 얘기를 듣고 내가 못하겠다는 소리를 더 이상 할 수가 없고 조선소를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정말 대단한 어른이셨지요.”

▶ 현대중공업의 첫 선박을 발주한 그리스 ‘선 엔터프라이즈’사의 리바노스 회장이 첫 수주 선박 명명식에서 정주영 현대 회장과 담소하고 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70년대 초, 그 무렵만 해도 현대건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잖습니까. 외형으로 보면 더 큰 기업들도 있었는데 왜 회장님한테 조선소 건설을 맡겼습니까?
“하하항, 그건 나한테 물어볼 게 아니고 박 대통령한테 물어봐야지요.”

정부는 왜 유독 현대에 조선소 건설을 당부했을까. 현대가 아니면 다른 기업에도 부탁했던 것인가. 조사된 자료에는 다른 기업에 요청했다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지금 같으면 삼성·대우·한진 등 여러 기업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70년대가 시작되는 그 시점에서 삼성은 설탕 장사, 옷감 장사 수준을 넘지 않았고 대우는 이름 없는 와이셔츠 장사에 불과했다.

베트남전으로 돈을 번 한진이 물망에 오를 수 있었겠지만 그들은 해운 쪽이지 선박 건조는 아니었다. 결국 추정해본다면 대부분의 기업이 몸을 움츠렸지만 현대가 공격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로 고속도로 건설을 수주하면서 박 대통령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 같다.

훗날 현대조선소가 현대중공업으로 독립하고 조금 뒤에 입사했지만 정몽준 전 현대중공업 회장(현 국회의원)이 중역들과 담소하던 중에 나름대로 풀이했다는 내용은 이렇게 전해진다.

“박 대통령도 처음에는 조선에 대한 충분한 지식 없이 조금 단순히 생각하셨던 게 아닌가, 우리가 건설을 해왔기 때문에 인부들을 동원하는 데는 자신이 있을 거고, 거기다가 철골 구조? 땅 파서 도크 만드는 거? 그런 건 눈 감고도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거기다가 조선이라는 것도 영어로 십빌딩(shipbuilding)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작업장도 공장이라고 안 하고 십야드(shipyard)라 하고, 더구나 배는 제조가 아니고 건조다, 우리가 얘기를 할 때도 선박을 제조한다 하지 않고 건조한다고 그런다, 선박 건조. 그러니 땅만 있으면 회장님은 해낼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신 것 같지 않아요? 하하.”

어쨌든 정주영 회장은 참모 둘을 데리고 구라파 쪽으로 다시 자금을 구하기 위해 나선다. 그런데 정 회장의 기질을 엿볼 수 있는 두 가지 지시사항이 이때에 있었다. 하나는 차관 문제가 결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구체적인 사업 계획서를 만들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조선소를 건설할 부지를 잡으라는 것이었다.

현대건설 안에 별도의 조선사업부까지 만들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에 대한 도전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나섰다는 의미였다. 당시 현대건설 부사장이었던 김영주 한국프랜지 명예회장 회고가 들을 만했다.

“그게 안 되면 회장의 권위도 떨어지지만 앞으로 어떤 사업을 하게 되든 직원들한테 신뢰를 주지 못하는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선언하기도 어렵고 더구나 부지까지 마련하라는 말씀은 굉장한 리스크가 되는 겁니다. 근데 그 당시가 어땠느냐, 자금 확보도 기술 제휴사도 결정 안 된 상태 아니에요? 명예회장(정주영) 명령은 떨어졌지, 현대건설에 해양대 출신이나 조선학과 출신들을 전부 조선팀으로 옮겨놓고 일을 벌이는 겁니다. 나중에 다 사장, 회장 했지만 백충기·황병주·김형벽·이정일·이정상 그런 사람들이 무조건 와야 해. 그런데 기능공이 있나? 전국에서 안 되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고, 그런 사람들까지 전부 긁어모으고 말이지, 엉망이었지 엉망.”

자금 한푼 없는데 “부지 마련하라”
정 회장을 수행해 차관 구입에 앞장섰던 백충기 전 현대건설 사장도 조선소 건설은 기막힌 상황에서 시작됐다고 했다.

“나부터도 건설에서 차출이 되고 보니까 조선사업부가 건설회산지 중공업회산지 구분이 안 됐어요. 그러니까 뿌리는 전부 건설쟁이들이지요. 그리고 내가 회장님 모시고 첨에 뉴욕하고 텔아비브에 갔을 때 처음 거대한 조선소를 봤는데 조선소 주변이 하나의 거대한 도시고, 그 주변에 사는 기능공들이 이미 엔지니어급 수준이라서 대접부터가 달라요. 그러니 저 정도는 돼야 수주도 하고 경쟁력이 있을 텐데 우리가 인적 자원도 없는데 저런 조선소를 만들 수 있겠나 싶고 말이지요. 눈앞이 깜깜해지는 거지요.”

어쨌든 참모를 데리고 나가셨는데, 대통령이 회장님한테 유럽 쪽에도 나가보라고 하실 때는 가능성을 내다보고 그러셨을까요?

“전혀 아니지요. 대통령이나 나나 답답한 심정은 똑같은데 일본하고 미국에서 차관을 못 준다고 하니까 구라파도 나가보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찾아나선 곳이 영국이에요. 그때 우리가 영국 런던에 현대건설 지점을 설치해놓고 정희영 상무가 지점장인데 백충기 부장인가? 같이 데리고 갔을 거예요. 그런데 우린 차관이 급하잖아요. 영국에 도착했지만 무작정 어딜 두드리겠어요? 그때 아이디어를 준 사람이 평소 알고 있었던 데이비스라는 미국인 국제금융 브로커예요. 브로커라는 말이 우리나라에서는 부정적인데 세계시장에서는 그렇지가 않지요. 그 사람이 한국전에도 참전했던 공군 조종사 출신인데 ‘우선 조선소를 만들면 기자재를 어디서 구입할 거냐. 그걸 공급하는 회사부터 정하고 그 회사가 거래하는 은행을 움직이게 해라.’ 이거예요. 정말 그때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기발한 방법이잖아요? 그 사람들의 주거래 은행을 소개받아라 이거지요.”


이호·객원기자·작가
출처 : 이코노미스트 874호

정주영의 조선업 도전① `도박도 목숨 거는 도박이었다` [조인스]
미국과 일본에서 차관 얻는 데 실패…박정희 대통령, `도망가지 마라`
2007/01/19 오후 12:40 

정주영의 조선업 도전①  `도박도 목숨 거는 도박이었다` [조인스]

미국과 일본에서 차관 얻는 데 실패…박정희 대통령, `도망가지 마라`
정주영의 조선업 도전①
이코노미스트우리나라 조선업은 몇 년째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전 국민이 세 끼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던 시절, 산업기술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조선소를 만들겠다는 과욕을 어떻게 가질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강력한 리더십과 개척자 정신이 없었다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중심에 산업 발전에 사활을 걸었던 박정희 대통령과 정주영이라는 걸출한 사업가가 있었다. 두 사람의 불타는 의지가 울산 앞바다를 한국 경제의 전진기지로 만들었고, 지금 세계 조선업 1위의 기초를 쌓은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번 호부터 정주영의 조선업 도전기를 연재한다. 그의 불굴의 투지가 CEO들과 독자에게 새롭게 조명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부동의 세계 1위를 고수하고 있는 한국 조선업계가 2006년 9월 15일 세 번째 생일을 맞았다. 세계 최강 조선국의 위용을 뽐내고 있는데도 변변한 기념일이 없었는데, 2004년 국내 조선업 수주가 1000만GT를 달성한 9월 15일을 기념해 ‘조선의 날’을 제정하고 제3회 기념식을 한 것이다.

우리나라 조선업의 위용이 어떤가. 세계적인 조선·해운 시황 분석기관인 영국의 클랙슨이 발표한 세계 조선소 순위에서 현대중공업을 비롯해 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현대미포조선·현대삼호중공업이 1위에서 5위까지 독식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 대표’ 산업으로 조선은 전자와 함께 굴절 없는 성장을 해왔다. 지난해에는 사상 처음으로 200억 달러 수출 고지를 돌파하고 동시에 수주액도 400억 달러를 달성하는 등 그 어느 해보다 풍성한 실적을 기록했다.

“배 건조가 토끼 임신보다 빨라”

한국의 조선업이 양적인 성장만을 해온 것은 아니다. 기술에 있어서도 세계 조선업계를 긴장시킨 지 오래됐다. 대표적인 것이 세계 조선업계가 꿈꾸어오던 무(無)도크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다. 무도크 건조 현장이 세계 최초로 공개된 것이 2004년 10월.

현대중공업이 러시아 노보십에서 수주한 10만5000t급 원유 운반선을 육상에서 건조해 진수하는 데 성공하면서 도크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했던 인식을 일거에 가능한 현실로 증명해보인 것.

한국 조선업의 기술적 향상은 특수선 제작에서도 만족하지 않았다. 어느새 ‘꿈의 상선’으로 불리는 1만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 건조 시대를 열고 있었던 것이다. 1만TEU급(1TEU는 길이 20피트 컨테이너)이라면 통상적으로 컨테이너 박스 1만 개를 적재할 수 있는 선박이다. 갑판 면적이 상암 월드컵 경기장의 2배가 넘는 초대형으로 추측하면 된다.

세계 최초라는 말을 하도 여러 번 써서 이젠 싱겁다고 할 정도가 됐지만 또 한번 이 기록을 경신하는 초유의 사건을 현대중공업이 저질러버렸다. 1만2000TEU급 컨테이너선 개발을 어느새 끝냈다고 발표했다. 기술적 성장세가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누구도 예단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는 셈이다. 이를 두고 세계적인 선주들이 남긴 말이 있다.

“현대중공업 제1야드에서 제2야드를 다 돌아보기도 전에 벌써 세계 기록이 경신되는 것 같다. 배를 건조하는 게 토끼가 임신을 시키는 것보다 빠르고 번갯불로 찍어내는 줄 알았다.”

그런데 조선업계는 여기서 멈추려 하지 않는다. 그동안 황무지처럼 내버려두었던 요트 건조에 뛰어든 것이다. 막강한 조선 기술에다 정보기술(IT)을 결합한 고부가 제품을 만들어 요트 분야까지 석권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얘기다.

요트는 레저·경기용 딩기(Dinghy: 6m 이하) 급과 연안·대양 항해용 크루저(Cruiser) 급으로 나뉜다. 현재 세계 요트 시장은 미국(2만여 척)과 프랑스(8000여 척)·영국(3000여 척)이 주도하고 있다.

국가정보원 자료에 의하면 요트 시장이 2004년에 151억 달러(약 14조원) 정도였지만 2010년에 이르면 210억 달러로 예상된다고 했다. 이 엄청난 시장을 우리 조선업계가 냄새를 맡고 있지 않았을 리 없다.

이런 한국의 조선 산업 성과는 분명 우연히 다가온 것이 아니다. 어쩌면 ‘두 사람’의 야심 찬 의기투합에서 그 질주의 시동이 걸리게 됐다고 해도 무리한 평가는 아닐 것이다.

이 나라 조선 산업을 부흥시킨 주역이 고 박정희 대통령과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었다고 할 때 부인할 수 있는 자료가 있을까? 기자가 조선소와 관련해 정주영 회장을 만나 취재한 것은 꽤 오래 전이다. 조선 산업의 태동기부터 듣고 싶어서였다. 인터뷰는 86년부터 92년까지 몇 차례에 걸쳐 이뤄진 것이다.

▶거제도 조선소 전경.


조선 大國 만든 두 사람

지금은 비교도 안 되는 규모지만 세계에서 7개국밖에 소유하지 못하고 있던 50만t급 조선소 건설을 우리 정부에서 계획했던 것이 1972년으로 기억됩니다. 당시 정부에서는 한국의 산업 형태를 중화학공업으로 선회하지 않으면 미래의 산업 중흥이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정부가 야심적으로 추진했던 것이 조선소 건설 아니겠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에요, 하하하.”

당시 정부는 조선소가 완공되면 연간 2억5000만 달러의 외화 획득이 가능해진다는 전망을 했고, 그 시점에 우리나라 수출 총액이 11억7300만 달러밖에 되지 않았던 점에 비춰볼 때 엄청난 금액인데, 과연 조선 산업이 될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겠습니다. 그 중차대한 사업을 박정희 대통령이 회장님에게 추진하라고 할 때는 각별히 당부한 말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만.
“하하하…, 당부고 뭐고 도망치려고 하다가 잽힌 거지요. 못 피우는 담배까지 대통령 앞에서 뻑뻑 피워대면서 버티기도 했고 말이지요. 담배는 대통령이 피우라고 주시니까 피할 수 없어서 피웠지만. (웃음 속에서 잠시 회상하다가) 사실은 조선 산업이라는 게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게 아니에요. 그 얘기하면 내용이 많아요. 요즘 젊은이들은 모르고 있는데, 처음에 박 대통령이 고민을 무척 하셨습니다. 1, 2차 경제개발을 추진하면서 수출 시장을 확대해야 한다, 그래가지고 16년 동안이나 끌어왔던 무역 및 관세에 관한 일반협정(GATT) 가입도 하지 않았어요? 근데 수출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으니까 사력을 다해보았지만 GATT에 가입했어도 한계가 있었어요. 그 당시 경공업 중심의 노동집약 산업으로는 수출도 어렵고 경제 성장의 한계가 있었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돌파구는 중화학공업을 추진해야 된다, 그렇게 판단하신 거예요. 그래서 3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되기 전까지 중화학공업을 가시적으로 역동시킬 수 있도록 해야겠는데 그러자면 우선 필수적으로 육성해야 되는 게 뭐냐, 그게 조선이니까 1단계로 조선 산업을 선택한 겁니다. 그런 배경을 알아야 해요. 조선 산업을 하게 되면 물론 초기는 단순한 조선 공업 수준이 된다 해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미래가 있는 거거든? 거대한 조선소를 만들고 초대형 선박을 건조할 수만 있게 된다면 일시에 기계·철강·전기·전자·해운 등 수많은 연관 산업을 급성장시킬 수 있잖아요. 그걸 내다보신 거지요. 대단한 양반이셨지요.”

박 대통령을 만나기 전에 정부로부터 조선 산업에 대한 구상이나 정책에 대한 사전 정보를 들으신 게 있었습니까?
“그런 건 없었구요, 그냥 정부가 처음에는 4대 핵공장(4大 核工場)을 한다고 그랬어요. 4대 핵공장이라는 건 핵폭탄을 만드는 공장이 에이구요, 1968년에 박 대통령이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 동안에 제철·종합기계·석유화학·조선을 4대 국책 사업으로 설정하고 최대한 정부가 중점적으로 육성하겠다고 밝혔잖아요? 그게 4대 핵공장이지요. 그래가지고 조선소 얘기도 나온 건데, 첨에는 김학렬(당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씨가 운을 뗐어요. 나는 솔직히 회의적이었지요.”

▶1977년 현대중공업을 방문한 고 박정희 대통령과 고 정주영 명예회장. 두 사람은 우리나라를 세계적인 조선 대국으로 성장시킨 거목이다.


“도망치려다 잽힌 것”

왜 회의적으로 생각하셨습니까?
“조선소가 그냥 됩니까? 사람들이 울산에 현대조선소를 보러 와서는 얼마나 어렵게 건설했는지도 모르고 본래부터 조선소가 있었던 게 아니냐고 해서 그냥 웃었지만, 조선소 얘기가 나온 그때만 해도 부산에 ‘대한조선공사’가 있었어요. 거기서 대충 1만여t급 배를 만들고 있었는데 그게 창업 이래 계속 적자를 봤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파산하고, 파산 후에는 한진으로 넘어갔는데 생각해 보세요. 대한조선공사가 한번도 흑자를 보지 못하고 파산했을 정도니까 우리나라 조선업이라는 게 말처럼 쉽겠어요? 결코 쉬운 게 아니지요. 물론 조선기술자라는 것도 없었고 말이지요.”

그런 정도의 국내 여건에서 조선소를 건설한다는 것은 도박에 가까운 일이었다는 말씀입니까?
“(회고해 보니 기막힌 시작이었기 때문인지) 허허헝, 도박도 돈을 거는 도박이 에이고 명(命)을 거는 도박이에요.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고비가 한두 번 있었던 게 아니에요. 하여간 정부의 강력한 의지도 있었지만 내가 반대를 하니까 하루는 김학렬씨가 대통령께서 찾는다는 겁니다. 그럴 땐 판단이 빨라야 해요. 아이고, 도망이다 하구선 도망갔다가 잽혔지요, 하하항. 근데 대통령의 의지가 여간 강하신 게 아니에요.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첨에는 자신이 없다고 했지만 워낙 눈빛부터 무서우니까 그러면 제가 한번 해보겠다고 나섰지요. 그런데 조선소를 하려면 뭣보다 차관을 얻어야 해요. 우리도 그만한 돈이 없고 정부도 돈이 없으니까. 그러니 차관을 얻으려고 이웃부터 다녔어요. 미국이 우리하고 가깝지 않습니까? 일본하고 미국을 열심히 찾아대녔습니다.”

반응이 냉담했을 것 같은데요.
“일본이나 미국이, 너희는 후진국이고 그런 배를 만들 능력이 없다, 그렇게 나와요. 한번 시작해보겠다 했는데 그렇게 나오니까 영 맥이 풀려서 발길이 안 떨어져요. 그렇지만 한두 번 거절당했다고 멈출 수 있어요? 다시 여러 사람 찾아대녔는데 결국 다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도리가 없지 않겠어요? 다시 대통령을 만나서 여기저기 다녔던 얘기를 하고 도저히 못하겠다고 그랬더니 ‘도망가지 마시오! 절대 해야 돼!’ 이러시면서 호통을 치시잖아요.”<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
leeho5233@hanmail.net]

<이코노미스트 87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