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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데스크] 아파트 공화국의 그늘

영국신사77 2007. 2. 20. 13:54
                 [조선데스크] 아파트 공화국의 그늘

 

                                                               차학봉 부동산팀장 hbcha@chosun.com
                                                                   입력 : 2007.02.19 22:45 / 수정 : 2007.02.19 23:17

    • 차학봉 부동산팀장
    • 1993년 서울을 찾은 프랑스의 젊은 지리학도 발레리 줄레조. 서울을 뒤덮은 거대한 아파트촌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아파트가 ‘중산층의 상징’이라는 것. 프랑스에서 대부분의 중산층은 단독주택·연립주택에 산다. 대규모 아파트단지에는 저소득층 이민자들이 몰려 살고 있다. 그래서 아파트단지는 슬럼가나 우범지대의 동의어로 통한다. 유럽과 너무나 대조적인 주거문화에 대한 쇼크 탓에 그는 서울의 아파트문제를 파고들어 이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최근 ‘아파트 공화국’이란 책까지 서울에서 출판했다.

      한국은 정말 아파트 공화국이다. 본격적으로 도입된 지 30년 만에 아파트는 새로 짓는 주택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그나마 있는 단독주택조차도 아파트 재개발·재건축 바람에 대거 헐려 언제 멸종 위기에 처할지 모를 지경이다.

      땅이 비좁아서 아파트 외에 대안이 없다는 변명은 아파트 공화국에 대한 맹목적 신화일 뿐이다. 빈 집이 속출하는 농촌 논바닥에도 아파트는 오늘도 치솟고 있다. 지방에서도 60층짜리 초고층 아파트가 경쟁적으로 지어지고 있다. 땅값이 비싸 토끼장에 산다고 한탄하는 일본 도쿄에도 아파트 공급 비중은 20% 안팎이다. 우리만큼 땅이 좁고 인구밀도가 높은 네덜란드·벨기에도 아파트 천국은 아니다.

      우리가 아파트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아파트는 주거 수단이 아니라 가장 확실한 재테크 상품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정부조차도 수익성을 이유로 전국 방방곡곡에 콘크리트 상자 같은 아파트만 고집하고 있다. 그래서 “서울은 (아파트 때문에) 오래 지속될 수 없는 하루살이 도시”라는 프랑스 지리학자의 충고에 귀 기울이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값싸게, 대량으로, 빨리 지을 수 있는 주택이 아파트라는 공식도 이미 깨진 지 오래다. 초고층·호화 마감재 경쟁에다가 재테크 열풍까지 가세하면서 아파트는 오히려 주택가격 급등의 촉매제가 됐다. 아파트는 신분과 재산을 구별짓는 상징이 됐고 우리 사회의 갈등과 정신적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있다. 정보 강국, 아파트 강국답게 인터넷만 열면 전국의 아파트 시세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저 단지에 사는 사람은 얼마나 돈을 벌었는지, 나는 아파트 재테크에 얼마나 열등한지를 한눈에 알 수 있게 해준다. 멀쩡한 샐러리맨을 천하의 무능력자로 전락시킨다. 서로 비교하고 질시하고 투기 대열에 참여하도록 팔목을 잡아 당긴다.

      소득이 높아지면 선진국처럼 전원주택이나 단독주택이 유행할 것이라는 전망도 한국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이미 우리 주거문화는 되돌아갈 수 없는 깊은 강을 건넜을지도 모른다. 단독주택은 불편하고, 재테크 무능력자로 가는 지름길임을 체험하고 배운 ‘아파트 키드’가 이제 가정을 꾸려 ‘아파트 베이비’를 키우고 있다. 흙 냄새를 맡아본 세대들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주거는 문화이자 생활 습관이다. 집을 꾸미고 정원을 가꾸고 페인트를 칠해야 하는 불편과 수고스러움이 필요한 게 단독주택이다. 뉴욕에도, 도쿄에도, 런던에도 초고층 아파트는 많다. 하지만 다수의 중산층은 불편하지만 자신의 개성과 꿈을 담아낼 수 있는 단독주택을 선택하고 있다. 그게 사람 사는 여유이고 풍요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아파트에 열광하면서 진정 사라지고 있는 것은 ‘단독주택’이 아니라 삶의 여유와 주거문화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