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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스라엘 역사

영국신사77 2007. 2. 3. 23:08
                           2. 이스라엘 역사

                                                                                                         블로거 : yydeokk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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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4 오후 9:59 
        

 이스라엘 역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그것은 곧 성경의 역사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성경은 또한 이스라엘 역사와 더불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소개된 많은 이스라엘역사는 외국인 저술의 번역물이 대부분이며, 그 역사 기술이 고대사에 집중되어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본 저술은 위에서 지적한 두 가지의 약점을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시작하려 한다. 특히 역사 기술에 있어서 신학적 의도를 배제하고, 고대사 부분과 중세 및 현대사 부분의 균형을 맞추어 서술하게 될 것이다.

[목차] 제1장 이스라엘의 기원과 민족의 형성
  1. 문명의 사이에 서 있는 이스라엘
  2. 간추린 고대근동의 역사
  3. 이스라엘의 족장들
  4. 이집트 탈출 사건과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
  5. 가나안 정복과 사사시대


 제2장 제1차 성전시대(1024 B.C.E -586 B.C.E.)
  1. 왕정의 확
  2. 사울
  3. 다윗과 솔로몬
  4. 남북 분열의 원인과 그 의미
  5. 남북 왕조의 역사
  6. 분열 왕국의 남북관계


 제3장 제2차 성전시대(538 B.C.E.-70 C.E.)
  1. 바빌로니아 포로시대
  2. 페르시아 시대의 이스라엘
  3. 알렉산더 대왕의 등장과 헬레니즘
  4. 마카비전쟁
  5. 헤스모니안 왕조
  6. 로마의 통치와 헤롯대왕
  7. 제1차 유대반란과 예루살렘의 멸망
  8. 예수와 초기 기독교


  제4장 미쉬나,탈무드 시대(70-640 C.E)
  1. 성전멸망 이후의 변화들
  2. 산헤드린의 설치
  3. 제2차 유대반란
  4. 아모라(Amora)의 시대
  5. 바빌로니아의 유대인
  6. 미쉬나와 탈무드
  7. 콘스탄틴 황제와 유대-기독교 논쟁
  8. 산헤드린의 폐지와 아랍의 등장


제5장 팔레스틴의 새주인들
 1. 비잔틴(325-640 C.E.)
 2. 모슬렘(640-1091 C.E.)
 3. 십자군(1091-1299 C.E.)
 4. 마멜룩(1299-1517 C.E.)
 5. 터어키(1517-1917 C.E.)


 제6장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
 1. 디아스포라의 유대사회와 문화
 2. 중세 유럽의 유대인
 3. 유럽의 변화와 유대인 공동체
 4. 반유대주의(Anti-Semitism)


제7장 현대 이스라엘의 건설과 중동의 평화
 1. 시온주의의 태동과 그 이념
 2. 헬쩨 이후의 변화들
 3. 제1차 세계 대전과 시온주의 운
 4. 양차 대전 사이의 시온주의 운동
 5. 나치 대학살(Holocaust)
 6. 현대 이스라엘 독립과 그 과정
 7. 이스라엘의 정책과 중동전쟁
 8. 중동평화

 



                          제1장 이스라엘의 기원과 민족의 형성
                      1.문명의 사이에 서 있는 이스라엘

  한 국가의 흥망성쇠는 필연적으로 주변 국가의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맺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의 경우 약소 민족으로서 주변 강대국으로부터의 영향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누구이며, 그 사람들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이스라엘 민족은 어떤 과정에 의해 한 민족이 되었는가? 그들의 종교적 뿌리는 무엇인가? 그들의 하나님 야훼는 누구이며, 어떻게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는가? 이러한 질문들이야 말로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하기에 앞서, 이스라엘이 위치하며 살고있는 근동 지방의 다양한 역사와 변화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중동의 한 작은 나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세계 3대 대륙인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을 연결하는 교량적 위치에 놓여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고대 근동의 여러 나라들과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관계를 맺어 왔다.


  상대적으로 약세에 처해있던 이스라엘은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많은 침략을 받아 왔으며, 그들로부터의 종교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었고, 인류 문명의 발생지 가운데 하나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양대 문명과의 경제적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었다. 바빌로니아를 비롯한  앗시리아, 페르시아 제국들은 직접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에 영향을 끼쳤으며, 이집트 역시 직접 이스라엘을 지배했었다.


  뿐만 아니라 서쪽의 아나톨리아와 그리스 및 로마 제국 역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서방의 이 문명은 이스라엘을 지나, 동방의 그것과 충돌하였다. 이러한 동서의 만남도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룩된 셈이다.


  한편, 이스라엘은 '기름진  초생달'(Fertile Crescent)의 서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평야와 사막의  경계가 되기도 한다. 동쪽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줄기를 타고  초생달 모양을 이루며, 북서쪽으로 발달한 기름진 평야는  이스라엘의 줄기를 타고 내려오면서 그 끝을 이루고 있으며, 이집트로부터 북쪽으로 이어지는 사막과 만나게 된다.


  이스라엘을 지나가는 중요한 고대 도로는 양대 문명을 연결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스라엘  안에서 발달된 도로는 이스라엘의 국제적 관계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며, 도로를  중심으로 발달된 도시들과 인구의 밀집상태, 군사적 행동등 많은 사건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고대의 역대 왕들의 매우 중요한 사업 가운데 도로공사는 필수적인 요소로 여겨왔으며, 이는 곧 정복의 한 과정으로 취급되어졌다(cf.사62:10; 40:3;  57:14;  49:11; 렘18:15). 동시에 국제 상업로(international transport routes)로서의 도로의 역할은 경제 교류에 크게 기여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을 통과하는 국제로(International  Highways)는 '해변의 길'(ViaMaris)과 '왕의 대로'(the King's Highway)로 크게 구별된다. 이 두 도로는 많은 군인, 사신, 상인, 여행자들이 지나 다니는 길로써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이스라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왔다.


  이사야 9장 1절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해변의 길'은 이집트 탈출 사건에서 언급되고 있는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the way to the land of Philistine, 출13:17)과 부분적으로 일치 한다. '바다의 길'(the way of the sea)로 불리우는 이 도로는 라틴말로 Via Maris라 칭한다. 이 도로를 중심으로 발달된 도시들로는, 이집트로부터 시작하여 가자, 아스돗, 아벡(삼상4:1;29:1; 왕상20:26ff; 왕하13:17), 므깃도(왕상9:15-19, cf.계16:16), 하솔(왕하15:29), 다마스커스를 지나 메소포타미아에 이르게 된다.


  한편,'왕의 대로'는 요단 동편 산지(Transjordanian highlands)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길게 뻗은 도로로써, 민수기 20장 17절과 21장 22절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 도로는 세렛(Zeret,신2:13), 아르논(Arnon,신3:8), 얍복(Jabbok, 신2:37;3:16;민21:24,cf.창32:22), 그리고 야르묵(Yarmuk)등의 큰 와디(Wadi)가 가로 놓여 있어서 장애물이 되고 있다. 이집트 탈출의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 도로를 따라 모압산지 느보산에 이르러 가나안땅으로 들어오게 된다(신2-3장). 한편,,창14장에서는 '왕의 대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많은 도시국가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2. 간추린 고대근동의 역사
(1).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의 두 강이 흐르고 있는 메소포타미아는 3,000 B.C.E. 이미 청동기 문명을 가진 수메르인(Sumerian)들이 도시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종교, 언어, 군주를 가진 인류 최초의  고등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나스르 시대(2,800-2,700 B.C.), 메질림 시대(2,600 B.C.E.), 그리고 우르 왕조(2,500- 2,350 B.C.E.)를 거쳐 오면서 그 세력을 확장해 왔다.


  그러다가 이들의 세력은 서북쪽에서 발흥한 셈족의 아카드인(Akkadian)들에 의해 멸망하면서, 메소포타미아를 넘어 소아시아, 이란의 고원 지대를 포함한 거대한 아카드 제국(2,350-2,050년 B.C.)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중앙 집권적인 관료 국가를 이룩하였으며, 왕이 곧 신이었다. 국가 건설의 주역인 사르곤 대제(Sargon I)는 그야말로 '위대한 왕'이요, '신의 대리자'였다. 기원전 2,150년경 아카드왕조는 비셈족계의 산악인들의 침입으로 그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하면서 100여년을 보낸다. 1976년  에블라(Ebla)에서 발견된 약 16,000여개의 토판문서는 이 시대의 법률, 종교, 교역등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수메르 복고 시대(2,050-1,950 B.C.)를 거쳐 바빌로니아 왕조로 이어지는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함무라비왕(1,728-1,686 B.C.)의 법전이 완성되기도 하였다. 바빌로니아의 발흥과 함께 마르둑(Marduk) 신은 만신전의 최고의 신으로서, 당시 에테메난키(Etemenanki) 신전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풍부한 문헌들-바빌로니아의 창조설화와 홍수 설화, 점성술과 제의 신탁등-은 고대 사회의 성왕한 문화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2) 이집트
  팔레스틴을 사이에 두고 발생한 또 다른 하나의 문명은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의 기록대로 "나일강의 선물"이라 일컫는 이집트 문명이었다.


  이집트는 가장 안정된 정치적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그 나라가 사막과 바다에 의해 고립된 사실에 기인한다.

 

  고왕조(제1-6왕조,2,850-2,200 B.C.E.)의 시작은 메네스의 통일 국가로부터 이룩된다. 고전적 개화기를 맞은 제3왕조에 들어서면서, 불가사의라 일컬어 지는 피라밋(Pyramids) 건설은 이들문명의 대표적 표상이 되었다.


  중왕조 제1기(제7-10왕조, 2,200-2,052 B.C.E.)는 여러 지방 군주들의 반란과 폭동으로 인한 혼란기였으나, 제2기(제11-13왕조,2,052-1,790 B.C.E.)에는 다시 국가의 통일을 이루어 테베(Thebe)를 중심으로 그 문명의 자리가 바뀌었다.

 

  제3기(제14-17왕조,1,710-1,570 B.C.E.)에 들어서는 아시아로부터 온  힉소스(Hyksos) 의 침략으로 통치권이 넘어가면서, 이집트 내부에는 많은 구조적 변화를 맞게 된다.


  이집트 왕조의 꽃이라 일컬어지는 신왕조(제18-24왕조,1,570-1,085 B.C.E.)는 아흐모스(Ahmose), 투트모스(Tuthmoses), 아메노피스(Amenophis), 투탄카문(Tutankhamun), 람세스(Ramses), 세티(Seti), 메르넵타(Mernepta)왕으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화려하게 발전하였다.


  이집트인들은 주기적인 나일강의 범람과 함께 농업이 크게 발달하였으며, 이러한 현상은 역사를 순환하는 것으로 보게함으로써, 메소포타미아와는 달리 이집트인들에게 유동적인 사고의 특징을 가져다 주었다.


(3)소아시아
  고원 지대와 에게 해안의 저지대에 이르는 서부 아시아는 독자적인 소아시아의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힛타이트 제국(Hittite, 1,800-1,460 B.C.E)으로써, 성경에서는 이들을 헷족속으로 부르고 있다. 그들은 1,530년B.C.E. 바빌로니아를 침공하여 그를 정복하기도 하였으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사이의 세력 균형을 조정하고 중재하는데,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하였다.


(4)고대 근동과 팔레스틴
  고대 근동 지역의 여러 왕국들은 각각 시대의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제국으로 발전하였으며, 그들은 관개 농업을 발전시키고, 국가간의 무역, 외교, 동맹 체결, 패권을 획득하기 위한 전쟁등을 통하여 발전해 왔다. 그들에게 있어서 종교는 기존의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합법화시키는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그들은 제국들의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관리들을 수반으로하는 행정구역을 만들었으며, 강력한 식민지 정책을 구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팔레스틴은 여러  민족의 이동과 이주와 함께 인구가 증가하고 도시 국가들이 세워지며, 여리고, 므깃도, 하솔, 게셀등의 도시들이 견고하게 요새화 되었다. 이 시기에 페니키아에서는 초기 가나안 언어인 알파벳 문자가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가나안 사람들의 이 언어는 고대 히브리어의 모체가되었다.


  고대근동의 이러한 정치사에 대한 관찰은 이스라엘의 기원을 확인하는데 있어 다소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은 어느정도 사실이나, 우리가 이스라엘의 초기 삶이 보도되어 있는 성경 안으로 들어가 보면, 고대 팔레스틴의 복잡하고 다양한 문화적, 사회적 특징을 만나게 된다. 다시말하면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는 보다 넓은 근동의 상황 속에서 이해되나, 동시에 그들 고유한 상황과 특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 이스라엘의 족장들
(1)족장 이전의 팔레스틴
  족장 이전의 팔레스틴의 환경에 관하여는 우리가 아는 사실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 왜냐하면, 성경의 역사는 아브라함의 이주 이후의 역사부터 취급ㅎ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동안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로 인하여, 족장 이전의 모습에 관하여 대강의 모습을 구성할 수 있는 정도이다.


  기원전 2,000년의 팔레스틴을 포함한 고대 근동의 역사는 인종적, 문화적,정치적 패턴의 대 변혁기였다. 이집트는 신왕조(New Kingdom Dynasty,18-24왕조,1570-1085년)의 시작과 함께 막강한 힘을 뻗어 나갔으며, 북쪽의 힛타이트제국 역시 엄청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팔레스틴은 이러한 강대국들의 틈에서 여러차례 지배를 받아 오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아모리인(Amorite)의 이동과 함께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이들의 이주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독자적인 문화와 종교의 발전을 이루며 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외에도 그 후 에돔, 모압, 암몬, 블레셋등의 세력들이, 함께 팔레스틴에 머물며 살게 되면서, 가나안 문화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형태를 이룩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문화는 주로 도시국가(City-State) 형태를 갖춘 고등문화 수준이었다. 한 통치자(왕)를 중심으로 하여 귀족 계급을 두고 있으며, 때로는 도시국가 간의 동맹 체제를 이루면서, 중앙 집권 형태의 구조를 가진 제국들과 맞서 나갔다.


  시리아-팔레스틴은 대략 1550~1225년 B.C.까지 이집트의 속국에 불과하였다. 최근 발견된 엘 아마르나(El-Amarna) 문서는, 이집트의 식민지의 상황을 알수 있는 매우 중요한 외교 문서로써, 이 시대의 가나안의 환경을 이해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가나안의 도시 국가의 목록-세겜, 라기스, 아쉬켈론, 예루살렘, 가자등-과 군대 규모, 정복한 도시 통치자들을 다스리는 방법등에 관한 다양한 기록을 담고있다.



                    (2) 아브라함의 이주와 이스라엘의 여명


  구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최초의 이스라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시작된다:"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아브라함의 순종은 이스라엘 문명사(history of civilization)의 전환점이 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팔레스틴의 원주민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처럼 다른 지역에서 살던 한 유목민의 이주로부터 시작되었다. 본래 아브라함의 고향은 메소포타미아의 한 도시 우르(Ur)였다. 당시 이 도시는 메소포타미아의 최고의 도시 국가였다. 그는 '기름진 초생달' 지역을 지나, 가나안이라 일컬어지는 팔레스틴 땅으로 이주해 들어왔다. 그가 지나간 하란(Haran) 역시 매우 번창했던 도시였다.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를 떠나 가나안에 입주하던 시기를 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 고고학자인  올브라이트(Albright), 그릭(Glueck), 드보(De Vaux)등은 이 시기를 2,000~1,500년 B.C.E., 즉, 중기 청동기시대(Middle Bronze Age)로 잡았으며, 이러한 주장은 유프라데스의 마리(Mari)에서 출토된 문서에서 뒷바침되고 있다. 그러나 코프만(Kaufmann), 고든(Gordon), 아이스펠트(Eissfeldt)등은 가나안 정복과 정착 시기와 비슷한 기원전 14세기로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의 성경적 근거로 창15:16을 들고 있다:


  "네 자손은 4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야곱 이후의 4대는 야곱-레위-고핫-아므람-모세이다. 그런데 대표적인 시대 착오적인 성경의 기록으로써 족장들의 기록에 '약대'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창12:16;24:10;  30:43; 31:17등). 인간이 낙타를 길들여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2세기였다. 이처럼 성경에서의 년대는 일반적인 년대나 족보와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cf.대상7:22-27).


  이처럼 이 시대의 년대를 정하는 일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작업을 성경의 역사적 기록이나 자료, 또는 고고학의 증언을 통한 확증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 보다는, 일반 정치적, 지리적 자료, 그 시대의 관습이나 법률, 사회 경제적 지위, 혹은 생산 및 자기 방어에 대한 관심을 균형있게 연구함으로써, 보다 가까운 조상들의 시대의 상황을 그려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이 살던 시대의 삶의 상황과 형태는 반유목문화적(Semi-nomadic) 형태를  띄고 있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유리하는 아람인"(신26:5)으로써 여기 저기 이주하면서 살았다. 세겜(창12:6;33:18),  베델과 아이(창12:8), 헤브론 근처(창13:18; 35:27), 브엘세바(창26:25)등의 중앙산지가 그들의 중요한 거처들이었다. 이 곳은 잘 발달된 목초지로 목축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또 족장 가운데  이삭은 부분적으로 농업을 하기도 하였다(창26:12). 이들은 분명히 사회, 경제적으로 반유목문화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유목문화의 특징으로는 1)계절에 따라 이주하는 생활, 2)가축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조직 사회의 구성-족장을 중심으로 한 씨족이나 부족 사회(각 부족의 특색), 3)지파간의 권리 보호를 위한 계약 제도 형성(규율), 4)계약 위반자에 대한 철저한 피의 복수법(명예), 5)손님에 대한 융숭한 대접과 친절한 행위(나그네 보호법), 6)상속법등을 들수 있다. 유목민들은 대체로 열려진 광야에서 살면서, 종교적이거나 혹은 정치적인 것이거나 간에, 그 어떤 속박도 용납하지 않는 자유를 가진 자들이었다.


  이러한 족장들의 삶의 형태는  최근 고고학적인 발굴 자료를 통하여 어느정도 확인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발굴을 통한 자료가 직접적으로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에 관한 자료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 시대의 문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초기 히브리인들의 이름들은 대부분 근동지방의 고고학적 자료에서 나타나는 이름들과 유사한 셈어적 이름들-야곱, 아브람, 나홀, 데라등-이라는 사실에서,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유사한 주민들이 살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를 요약해 보면 먼저 족장들은 한 곳에 머물러 살지 않았으며, 도시 문명지대의 영향권 밖에 머물면서 도시 문명을 건설하지 않았고, 천막을 치고 이주하던 생활 구조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몇몇 무덤(cf.창23;35:19-20)이 발견된 것을 제외하고는 고고학적인 증거를 거의 발견할 수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동시대의 특성이 족장들의 역사의 직접적인 '증거'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성경에 기록된 족장들의 시대 상황과 잘 들어맞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다만 아브라함에 관한 유일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구약 성경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관심은, 아브라함 이후의 족장들(Partriarchs)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씨가 확산되는 근거가 되었다는 점과, 그들이 살 땅을 유산으로 받았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12:2,7).

                       (3)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


  아브라함 이 후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소위 족장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족장들은 단지 고독한 개인이 아니라 꽤 규모가 큰 씨족들의 추장들이었다.


  이 시기의 팔레스틴은 수없이 많은 유목민 씨족들로 뒤섞여 있었으며,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이들 가운데 한 집단들을 대표하고 있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 그리고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들의 역사와 삶은 대체로 고대 이스라엘의 문화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특히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면서 [이스라엘](Israel)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데, '하나님과 씨름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야곱은 4명의 아내로부터 모두 12명의 아들을 두고 있는데, 그들은 이스라엘의 각 지파의 조상이 된다. 레아에게서 낳은 장자 르우벤을 비롯한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블론, 라헬에게서 낳은 요셉 과 베냐민, 빌하에게서 낳은 단과 납달리, 실바에게서 낳은 갓과 아셀이 그들이다(창35:22-26). 이스라엘의 역사는 12지파의 역사로 전개되어 가고 있으며, 각 지파간의 협력과 갈등의 역사이기도 하다.


  한편, 요셉의 생애는 그가 살던 시대의 배경을 무대로하여 문학적으로 잘 구성된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는 형들의 미움으로 이집트에 팔려 갔으며(창37장), 머슴살이를 시작으로 이집트의 총리 대신에 이르기까지 지혜롭게 살아간다(창38-41장). 훗날 가나안 땅에 큰 기근이 들어 야곱과 그의 형제들이 이집트로 내려와 살게  된다(창42-46장). 바로 여기서 요셉의 이야기는 족장들의 약속과 이집트 탈출 사이의 연결 고리를 이루고 있다.


  종합하면 주전 20-18세기 '기름진 초생달' 지역의 북부 문명 지대안으로 수많은 이주민들이 들어왔으며, 그들은 작거나 큰 조직 사회를 형성하였다. 팔레스틴에로의 이주가 제법 오랫동안 계속되어 오면서 이 지역의 문화를 결정해 나갔다. 특히 족장 중심의 성경 기록은 이 시대의 여러 민족들의 이주와 더불어 이해될 수 있으며, 이들은 각각 개별적인 민족 혹은 부족으로써 존재해 오던 것이, 하나의 계보(부족집단)로 결합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대체로 반유목민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족장들은 각각 씨족의 수호신을 숭배하고 있었으며, 토착적인 종교 제의가 행해졌다.


  이러한 여러 각기 다른 전승들이 하나의 체계적인 전승으로 묶여, 확장 혹은 손질을 보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전승은 조상들의 역사를 고증하기 위한 전승의 편집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영웅적인 조상들을 새로운 사회 종교적 질서(socioreligious order)의 창립자 또는 선각자로 찬양하기 위한 보도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초기 이스라엘의 족장들의 역사는, 성경 이외의 이들에 관한 직접적인 자료 부족으로,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이들이 살던 시대의 시대적 정황을 통하여 유추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족장들의 초기 유산은 이스라엘의 민족 의식과 신앙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쳐왔으며, 그런점에서 족장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신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을 자신의 '조상'이라 부르는 것은, 역사상 타당한 이유가 없지 않은 것이다(창15:6;롬4:3;히11:8-10).



         4. 이집트 탈출(Exodus) 사건과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
(1)민족의 이동과 '아삐루'


  성경 전승에 따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들의 보도가, 요셉의 이집트에로의 이주 기사(창37장 ff)를 깃점으로, 팔레스틴의 족장 전승의 흐름이 이집트 이후의 모세 전승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러한 성경의 기록에서 이스라엘이 단일한 족보상의 발전 과정을 거쳐 출현하였다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으며, 성경도 이스라엘 민족이 대단히 복잡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으며, 또 극히 잡다한 출신 배경을 가진 성원들을 포괄하였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이집트로 이주한 야곱의 혈속(nefesh,"person"(JPS);"generation"(RSV);씨족)은 모두 70인이었다(출1:5;cf.창46:8-27). 이집트 사람들은 그들을 '히브리'라 일렀다. 그런데 성경은 400년(창15:13) 혹은 430년(출12:40)간 종살이를 한 후 이집트를 탈출해 나온 사람들을 600,000명의 "이스라엘 자손"(bnei israel)과 중다한 잡족"(erev rav,"mixed multitude")들이었다(출12:37-38)고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더불어 탈출한 사람들을 "이스라엘 중에 섞여사는 무리"(ha-esafsaf,"riffraff in their midst"(JPS);"Rabble that is among them"(RSV),민11:4)라고도 불렀다.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이집트로부터 가나안으로 이주한 이들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대규모 하류민 집단이었음이 확실하다. 조상들의 전승과 관련해서 볼 때, 이집트 탈출의 무리들은 이스라엘의 자손들뿐 아니라, 전쟁 포로 혹은 노예들이 포함되었다. 노예들의 반란과 탈출이라는 사건이 이스라엘 민족의 이주와 연합되어, 이집트 탈출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사실 히브리인들의 정체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추론들이 있다. 특히 가장 유력시 되고 있는 학설가운데 하나는 아삐루(apiru)와의 관련설이다. 주전 14세기경의 엘 아마르나 문서(el-Amarna Letters)는, 종종 하비루(hbr)라고 표기된 침입자들에게 대항하는 상황에서, 팔레스틴의 도시 통치자들이 이집트 바로에게 원조를 요청하고 있는 글이 발견된다. 주전 1360년경 예루살렘의 도시 군주 압디-헤바(Abdi-cheba)는 이집트왕 아메노피스 IV(Amenophis)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사람들이 나의 주, 왕 앞에서 나를 비방하고 있읍니다...어찌하여 너희는  아삐루('Apiru)를 사랑하고 지역의 감독관은 미워하는가? ... 아삐루는 왕의 모든 나라를 약탈합니다..."


  비슷하게도 킬티(케글라,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도시)의 슈바르다타(Schuwardata)도 "나의 주 왕께서는 아삐루가 다..(무기?)를 가지고... "라는 문구가 발견되며, 또 이집트의 아메노피스 II의 한 비문(주전 1400년경)에서도 포로민인 '아삐루 3,600명'이 언급되어 있으며, 라암세스 II(주전 13세기)때의 서신에도 "라암세스 미아문 돌들을 운반하는 ...,거대한 이집트 궁전과 사원의 문을 위하여 일하는 군인들과 아삐루들에게 군량미를 주어라"는 기록이 있다. 라암세스 IV의 원정에 참여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nt 지파들의 800명의 아삐루"가 나온다.


  아삐루는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가나안 및 이집트등지에 흩어져 살던 뚜렷하지 않은 백성(inconspicuous people)임에 틀림없다. 이들 아삐루는 대체로 땅이나  소유가 없는 외국의 용병(mercenary  soldiers)이나 약탈자(guerilla bands), 또는 포로민들과 노예들(slave labor)로써, 사회의 가장 자리에 뿌리없이 살아가는 "떠돌이"(wanderers) 혹은 "국외자"(outsiders) 였다. 그것은 종족적(racial or  ethnic)인 개념이 아니라, 사회 계층적(social stratum)인 개념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사람들은 아삐루('Apiru)를 이브리('ibri,"히브리인")와 동일시 하였다. 구약에서 이브리가 완전한 자유인이 아닌, 종이나 남녀에게 사용되었던 것과 같이 (출21:2;신15:12), 그것은 "가족의 소속이 없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주로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권리가 없는 약한 외국인을 통칭하는 의미로도 사용되게 된 것이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된 "히브리 사람 아브람"을 최초로 말하고 있으며, 가나안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 사이로 들어와, 체류(거주,ger)하는 모습이 분명하다(창14:13).


  가나안에 머물던 히브리인들의 뿌리는, 야곱이 이집트로 이주한 이후 약화된다. 특히 이들의 이주는 이집트의 베니 하산(Beni-Hasan) 무덤 벽에서 발견된 벽화(19세기 B.C.E.)를 통하여, 당시의 삶의 양태를 알 수 있다. 이 그림에는 수염 달린 사람들, 활 쏘는 사람(bowman), 음악가, 당나귀를 탄 여자와 어린이, 그리고 양과 염소 등이 어우러져 있다.

 


                      (2) 연대기와 이집트 탈출의 시기


  성경의 본문은 연대기적 골격을 제공해 주는 몇 개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먼저 솔로몬은 이집트를 탈출한지 480년 후에 성전 건축을 시작하였다고 한다(왕상6:1). 성전의 주추돌을 놓은 시기는 967-958년 B.C.E.가 확실하다. 역으로 계산하면, 이집트를 출발한 시기는 기원전 15세기, 즉 1447-1438년 B.C.E.년경이 된다. 출12:40에서는 이집트에서의 체류기간을 총 430년이라고 진술하고 있는데(창15:13에서는 400년), 이에 의하면 야곱이 이집트로 내려간 것은 기원전 19세기, 즉1877-1868년경이 될 것이다. 이에 성경의 여러 연대표를 통하여 추정해 보면(창47:9;25:26;24:5;12:4) 아브라함이 고향 하란을 떠난 시기는 2092~2083 B.C.E.년경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의 연대기는 성경 밖의 여러 자료와 비교할 때 상치되는 점이 많다. 먼저 사마리아 오경(Samaritan Pentateuch)과 70인 역(Septuagint)에 제시된 수치가 히브리어 성경(MT)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는 점과, 보다 중대한 문제는 15세기 이집트 탈출설을 가정하는 것은 성경에 묘사된 당시 이집트의 정치적 상황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며, 또 고고학적으로 이스라엘이 1400-1250년대에 가나안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집트 탈출의 년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이집트의 증거 자료의 제시일 것이다. 이집트 탈출 년대를 기원전 15세기로 보는 입장은 이집트로부터 힉소스족을 몰아낸 제18왕조(Thutmosis III,1468-1436년 B.C.E.)는, 추정컨대 아시아인을 무척 혐오하게 되면서 그들이 지배하고 있던 히브리 노예들을 가혹하게 억압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운다. 이는 성경의 요셉이 힉소스계의 바로에게 총애를 받은 것과, 그 뒤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출1:8)인 제18왕조가 아시아계인 히브리인들을 학대하는 것과 일치한다. 또,1425-1350년 B.C.E.동안에 가나안의 여러 도시국가들을 무너뜨리며 활동하던 아삐루(apiru)에 관한 엘 아마르나 문서의 언급은, 성경의 기록에 나오는 가나안 정복을 위한 이스라엘인들의 활동과 일치하는 기록으로 설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장은 성경에 나오는 여러 다른 기록과 정황에 관하여는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면 히브리 노예들이 노역에 시달렸다는 비돔(Pitom)과 라암셋(Ramses)(출1:11)은 텔타 지역의 아름다운 목초지의 도시로써, 이집트의 수도인 테베(Thebe)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 이러한 정황은 오히려 제19왕조의 라암세스 II(1290-1224 B.C.E.)의 그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즉 제19왕조는 텔타평원에 있던 힉소스의 수도인 아바리스(Avaris)에 도시를 재건하여 "라암셋의 집"(Raamses)이라 불렀으며, 그 외에 몇 개의 도시를 건설하고, 가나안과 시리아 출정 기지로 삼고자 대규모의 건축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건축을 위해 아시아계의 노예들이 징집되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은 것이다.


  나아가 기원전 13세기경에 가나안의 몇몇 도시들이 파괴된 고고학적인 증거와 함께 1220년경에 이스라엘을 패퇴시킨 것에 대해 말해 주고 있는 메르넵타(Merneptah)의 승전 비문은,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원전 1225-1200년까지는 이미 가나안 내에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또 이집트 탈출의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요단 동편의 민족인 에돔인, 모압인, 블레셋인, 가나안 거민들(출15:14-15)은 12세기에 이르러서 가나안에 공존했던 민족들이라는 점도 아울러 지적하고 있다.


  요약하면 고대 이집트의 배경에 의거하여 모세 전승을 역사 비평적으로 평가한 결과, 이집트 탈출의 가능한 역사적 배경은 기원전 13세기경임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역시 하나의 가설로써, 이집트 탈출 사건이 일어난 시기를 몇몇의 자료로만 결정하기에는 성경의 전승은 너무도 다양하고 복잡하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이러한 여러 전승을 충분히 고려한 년대를 확정할 만한 성경 밖의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다만 우리는 '만일' 모세의 전승이 어떤 역사적 사건과 결부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그렇다면' 그것들은 '이 당시의' 이집트와 가나안 배경과 '이런 방식으로'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3) 지도자 모세의 전승과 역할


  모세는 자기 민족을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시킨 자로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우뚝 솟은 지도자로 나타난다. 그는 이집트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가 태어난 시대는 히브리 사람들이 아들을 낳으면 죽이도록 명령된 시대였다(출1:22). 석 달을 숨겨 키운 어머니는 그 아기를 갈대 상자(tebah)에 담아 나일강에 띄운다. 마침 나일강에 목욕을 하러 나왔던 이집트의 공주가 발견하여 궁중으로 데리고 간다. 궁중에서 왕실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그는 그 시대의 몇 몇 히브리 사람들(홉니, 비느하스, 므라리등)처럼  이집트식 이름을 가지게 된다. 모세'라는 이름은 투투-모세(Tut-Mose), 라-암세스(Ra-mses)등의 이름에서도 나타나듯이 '아들', 혹은 '태어난'을 의미하는 이름이다.


  모세는 성장하면서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자의식을 갖게 되고, 살인 사건을 경험한 후에 시나이 반도의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그곳 제사장 이드로의 가문에 들어간다. 40년의 세월을 미디안에서 생활하던 모세는, 마침내 호렙산 떨기나무불꽃 속에서 야훼(YHWH)를 만나는 체험을 한 후, 이집트에 돌아가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켜 광야로 탈출한다. 그는 그들과 광야에서 40년간 생활하면서, 그에게 나타났던 야훼와 시내산 계약을 체결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종교의 창시자라 할 수 있다. 계약의 내용대로 그는 백성들을 가나안땅 입구까지 인도한 후 그곳에서 죽었다.


  모세에 대한 성경 밖의 확실한 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그가 수립, 형성해 나간 수 많은 종교 사상이나 신앙이 어떤 곳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는가?에 관해서 말할 수 없다. 그는 이집트의 마술사들처럼 기적을 행하는 사람었고(출7-10장), 외교적 협상가였으며, 광야길을 인도한 안내자, 군사(병참) 전문가, 하나님과의 계약 중재자, 입법가, 행정가, 지휘관, 예언자였다.

 

   그에게 제외된 기능은, 왕으로서의 기능 한 가지 뿐이었다. 모세에게 부과된 역할들은 분명히 지나치게 과중하였던 것은 명백하다(민11:10-15). 새로운 사회조직을 과감히 시도해 나가는 과정에서, 모세에 대한 끈질긴 반역과 내적인 분쟁은 계속되었다.

 


                (4) 이집트 탈출의 여정(route)과 광야 생활


  이집트에서부터 가나안에 이르기까지의 행군 경로를 재구성하는 일은, 어떠한 일보다 까다롭고 힘든일이 아닐 수 없다. 민수기 33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부터 가나안 접경 지대까지 이르는 동안의 완전한 여정을 제시해주고 있는데(P자료), 이 여정은 다른 자료에서 제공하고 있는 여정과 약간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불행하게도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집트 탈출 여정의 도시 가운데 비돔, 라암셋, 카데스, 에시온 게벨, 그리고 모압 지역의 일부 도시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명은 거의 없다. 특히 "갈대바다"(yam suf,출14:21)의 위치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홍해')는, 결코 받아질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시내산의 위치이다. 기원 5세기 기독교의 전승에 따르면 시내산/호렙산은 시나이 남부에 있는 제벨 무사(Jebel Musa,"모세의 산")라 일컬어 지는 곳이다. 그러나 이 곳 이외에도 더 많은 전승들이 남아 있어, 그 산의 위치를 실증적으로 확인할 만한  독자적인 증거는 찾을 수 없다. 이 지역이 아라바의 미디안광야로 언급되는 것조차, 시내산의 위치를 결정하는데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미디안족은 실제로 당시에 남부 요단 동편, 네겝, 시내 반도에 걸친 비교적 넓은 교역로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광야 40년의 생활가운데 38년간이나 머물렀던 카데스 바네아(신2:14)에 관한 전승은, 광야 생활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성경의 몇 몇 귀절들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곧장 카데스로 갔음을 시사하고 있다(출15:22;삿11:16).

 

  카데스는 브엘세바 남서쪽 약 80Km 떨어진 아인 엘 쿠데랏(Einel-Qudeirat)과 동일한 지역인데, 그 곳은 풍부한 물이 있는 커다란 오아시스로써 농사가 가능한 곳이기도 하다. 카데스의 다른 이름이 성경의 여러 다른 곳에 남아있어(삿11:16;창14:7;출17:7;민20:1,13;겔47:19; 48:28) 이 시대의 전승이 얼마나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결과적으로, 광야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모세 전승-계약 체결과 율법 수여를 포함하는-은 시내산 전승과는 전혀 독립적인 카데스 전승과 관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을 가능케 할 만큼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경의 증거는 역사적으로 너무나 단편적이고 간접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경 이외의 정보 자료들은 너무나 개괄적이어서 성경의 전승들을 다루지 않기 때문에, 이 시대의 역사 연구는 매우 불완전한 설명에 만족해야만 하고, 완전한 설명은 보다 많은 성경 이외의 자료의 증거가 나타나야만 가능해질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광야 생활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경험으로 기록되고 있다. 특히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음으로써 이스라엘은 하나의 민족으로 형성되었으며, 율법과 언약을 중심으로 한 신앙이 바로 이 광야에서 기원 되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출애굽 사건]과 [시내산 사건]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결합되어 기록되어있다.


  광야를 일컫는 히브리어의 '미드바르'는 구약 성경에 약 270여회나 나오는데, "씨 뿌리지 못하는 땅"(렘2:2), "사막, 구덩이 땅, 간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 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렘2:6) 등으로 정의 되어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40년의 긴 세월을 지내야만 하였다. 강력한 지도자 모세가 이끄는 공동체였다 하더라도 그들은 마실 물이 부족하고, 먹을 양식이 없음을 인하여 많은 불평과 반역을 행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들에게 바위를 쳐서 물을 나게 하시며, 하늘에서 만나(Manna)를 내려 그들을 먹이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야훼 자신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라는 신앙을 갖도록 그들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반역자들은 가차없이 처벌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 생활은 하나님과의 밀월의 시대로 이해하고 있다(렘2:2).

 


                 (5)이집트 탈출 전승의 사회 종교적 평가


  앞서 언급한대로, 이집트에서 탈출해 나온 사람들은 다양한 계층의 하류민들이었다. 이들을 인도해 낸 모세는 강력한 지도력으로 지휘하였으나,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있었다(cf.민11:10-15).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출한 노예들을 결속시키고 그들을 한 공동체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를 위한 가장 기본이 되고 있는 이념은 "이집트에서 압제를 당한 공통의 경험"과 "YHWH와의 계약"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족장들의 경험을 시작으로, 가나안 정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역사적 연속성의 끈은, 바로 이들이 경험한 이집트에서의 공동의 체험이었다. 이들이 외부로부터 부과된 사회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은, 이들간의 동등한 부족 공동체를 창출하기 위한 노력으로 발전되었다. 이스라엘과 잡족들을 묶어주고 새로운 공동체를 창출해 낼 수 있었던 사회적 요소를 우리는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이들을 묶어준 종교적 요소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시내산에서 맺은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인 야훼(YHWH,출3:6;6:3)와 "히브리 사람들의 하나님"(출3:18;5:3;7:16;9:1,13;10:3)인 야훼와의 계약을 통하여, '계약공동체'로 성립된 하나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한 하나님'의 '한 백성'(Chosen People)이라는 사상이다. 여기서 모세의 역할은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것이었다. 다시말하면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씨족적 경험으로서의 전역사를 가진 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탈출 이후의 고백은 야훼와의 계약을 내적 구속력의 바탕으로 삼는 '새로운 백성'(a new people)으로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비로서 이스라엘을 하나의 민족 공동체로 묶어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이스라엘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이집트 탈출의 사건은 이스라엘 전역사를 통해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호11:1;암9:7;렘2:6;시78:12-13;81:6).



                              5. 가나안 정복과 사사시대
(1) 자료
  히브리인들의 가나안 진입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그 정착 과정은 어떠하였는가? 또, 이들이 가나안 문화와의 접촉을 통하여 그들과 어떠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들에 관하여 많은 연구와 논쟁은 지금까지도 거듭되고 있다.


   기원전 1200-1000년경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선진(선진) 세력으로 존재한 것에 관한 자료는, 주로 여호수아서와 사사기(판관기)에 나와 있다. 여호수아서는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가나안 서쪽 구릉 지대의 상당 부분을 정복 할 때 이스라엘의 연합 부족들을 지휘한 방법과, 그 정복한 땅을 부족들에게 분배한 내용을 담고 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 이후부터 왕이 세워지기 이전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던 사사들의 군사 공적과 통치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이 자료에는 풍부한 전승-시, 민담, 속담등이 복합적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이러한 구성은 일정한 역사관(신명기적 역사관)을 가지고 편집되어 있으나, 단일하고 일관성있는 기사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많은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2)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과 가나안 정복


  가나안에 이주해 들어온 히브리인들의 초기 생활은, 이미 그 이전부터 팔레스틴에 머물러 살던 원주민들의 문화에 비해, 매우 뒤떨어진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 다시말하면, 가나안의 원주민들은 도시 국가(the city states)를 건설하고 막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또 고도의 문명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이들은 철기 문명(Iron Age)를 이루고 있어, 철병거를 비롯한 최첨단의 무기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적어도 이러한 가나안의 상태에서, 광야에서 이주해 들어 온 이스라엘이 어떻게 가나안을 점령하고 지배하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지금까지의 대답은 크게 3가지로 분류된다.

① 정복설(The Conquest Model)
  이 이론은,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집중적이고 통일된 군사적 정복을 통하여 점유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여호수아서 1-12장에 보도된 대로,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이스라엘의 12부족 연합체가 가나안을 체계적으로 정복해 나갔다는 데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가 성경 본문을 있는 그대로 읽으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도시들을 하나 하나 압도적으로 정복해 가면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땅을 분할하고 정착한 것으로 이해된다.


  정복설을 뒷바침 하기 위해 고고학이 동원되었는데,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갔다고 믿어지는 시기(1230-1175 B.C.E.)에 가나안 도시들- 하솔(Hazor), 므깃도(Meggido), 숙꼿(Succoth), 베델(Bethel), 벧세메스(Beth-shemesh), 아스돗(Ashdod), 라기스(Lachish)등-이 광범위하게 파괴되었다는 점과, 파괴된 몇몇 도시들에서 보여지는 새롭고 일정한 점유 방식은 이스라엘인들과 논리적으로 가장 잘 부합된다는 점이다. 이처럼 정복설 지지자들은, 성경의 기사에 대한 중요한 확증 자료를, 여호수아에게 정복된 도시들과 그에게 점령되지 않은 도시들에 관한 고고학적 증거에서 찾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전적으로 뒤바꿀만한 증거는 아니라 할지라도, 이 시대에 나타난 고고학적 자료 중 일부는 다른 것들과 현저하게 불일치함을 보여주고 있다. 즉,첫째로 여호수아서 12:7-24에 나오는 31명의 정복된 왕들의 목록은 고고학적으로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며, 또 여리고(Jericho), 아이(Ai), 기브온 (Gibeon)등지의 고고학적 결과는 성경의 기록과 전혀 상치하고 있다. 나아가 13-12세기에 파괴된 흔적을 가지고 있는 도시라 할지라도, 그 도시가 이스라엘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블레셋이나 다른 가나안의 도시들에 의한 것인지?를 밝혀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성경의 기록을 이스라엘이 반드시 이 도시를 점령하고 파괴하였다는 기록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시의 목록이 정리된 것은, 이스라엘의 승리를 원형적(archetypal)인 여호수아에게 돌리기 위해 확대된 것이 아닌가하고 의심케 된다.


  둘째로 이 이론이 대답해 주지 못하고 있는 한가지 사실은, 이러한 정복이 이스라엘 지파들의 연합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각 지파의 개별적인 것이었는지에 관한 것이다. 여호수아서13:1-6a를 제외하고, 정복 설화들의 대부분은 후대의 정리라고 여겨진다. 또, 사사기 1장에서도 보듯이, 가나안의 정복은 매우 오랜동안 계속되어진 사건으로써, 일사 분란한  여호수아의 정복

과정은 다분히 어떤 형태의 짜여진 기록임이 틀림없다.


  세째로 여호수아서 24장의 세겜 총회와 결부시켜 볼 때, 중앙 지역의 군사적 공격에 관한 기사가 없이 그 땅의 중심부에 모일 수 있었던 이스라엘의 총회는, 다분히 그 지역의 다른 민족들과 평화 협정을 통해서만 가능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점이다.

② 평화 이주설(A Gradual-Peaceful Inflitration)
  이 가설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점유는 평화적 유입, 조약 체결, 그리고 자연적인 인구증가에 의한 것이었다. 이들은 성경의  전승들 사이의 상호 모순적인 성격을 밝히는데 성공하면서, 지지를 얻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평화적 유입, 현지 민족들과의 평탄치 못한 융합, 그리고 다윗 시대에 와서야 겨우 성취된 이스라엘의 정치적, 군사적 승리라는 길고 복잡한 과정을 이론화(체계화)하였다. 이들의 이론을 뒷바침해 주는 성경의 기록들 가운데, 족장들은 대체로 거주민들과 화목하게 지냈으며, 또 가나안 도시의 전주민들이 므낫쎄에서는 이스라엘의 씨족이 되었으며(수12:17,24;17:2-3), 유다가 공공연히 가나안사람들과 결혼하기도 하였다(창38장)는 기록들을 제시한다.


  다시 말하면 이 주장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기존 거주 지역에 평화롭게 침투하여, 정착해 나가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가나안인들에게 충분한 위협적인 존재로 커지기까지, 아주 완만한 속도로 빈터(공지)로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주설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인들이 통합되지 않은 채 각기 다른 시기에 다른 방향에서 가나안으로 들어 갔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이집트  탈출 사건에 관하여 매우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이 기록이 부분적으로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들은 이 사건을 일부만이 경험한 사건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주설 지지자들은, 이스라엘의 기원의 특성을 설명함에 있어서 고고학적 증거의 역사적 가치를 무시하거나 평가 절하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③ 사회혁명설(A Peasant Revolt or an Internal Social Revolution)
  이스라엘은 도시 국가의 군주들과 지배층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그들의 독자적인 사회 정치적, 종교적 질서를 확립한 토착 가나안 민중의 부분(sector)이었다는 주장이 최근에 전개되었다. 이 설은 정복설과 이주설의 주요  요소들을 이용하여, 그것들을 재정리하고 뉘앙스를 달리하여 이스라엘 정복에 관한 새로운 개념을 세웠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정복 과정이, 귀족적인 관료들로 구성된 도시 국가들로부터 억눌리고 소외된(marginated) 가나안 사람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계획되어 온 사회적 혁명의 과정을 통하여 이룩되었음을 강조하면서, 성경의 무력 투쟁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시국가의 억압과 고질적인 부패는, 가나안 원주민들의 농산물 수탈, 현물세, 강제부역, 징용 등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사회적 부담에 항거하는 가나안 민중들은 이에 동조하는 여러 다른 부족들과 협력하면서 동맹을 맺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때를 맞추어 기존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소외되어 이집트로 탈출한 히브리인들의 도착과 함께, 야훼 종교는 이들의 혁명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여 효과적인 혁명을 완수하는데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는 가설이다.


  그러나 가나안의 사람들 가운데는, 이러한 혁명에 동조하거나 반대하였던 그룹들도 있어서, 일관성있는 일사 분란한 사건으로 보기에는 여러 다양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들면 아모리와 시혼의 백성들(민21:27b-30), 여리고의 라합과 그녀의 일가 친척들(수2장;6:22-25), 베델의 정보원들과 그 가족들(삿1:22-26)등은 "동조자"로 나타나며, 이스라엘의 내정에 간섭하거나 상관 없이 존재했던 므낫쎄의 세겜과 다른 도시들(창48:22;수24장;삿9장), 상부 갈릴리의 도시들(수11장), 그리고 예루살렘(수10:1-5;15:63;삿1:1-8;19:10-15)등은 "중립자"로, 마지막으로 독립을 유지하면서 이스라엘의 정복을 지원했던 베냐민의 기브온과 후리족속들(수9-10장;삼하4:1-3; 21:1-14), 메르즈(삿5:23), 수꼿과 브누엘(삿8:4-17), 그리고 켄 족속(삿1:16; 4:11;삼상15:6-7;30:29)등은 "동맹자"로 나타난다.


  이상에서 살펴 본 세가지 이론은, 나름대로의 증거를 제시하면서 당시의 정복과 정착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으나, 그 어떤 한 가지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고 판단하기에는 상호간의 이론적-역사적 장점과 약점을 지니고 있다. 다만 이스라엘이 팔레스틴에 정복, 정착하기까지의 오랜 세월동안 위의 가설들이 제시하는 단순화된 묘사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였음이 분명하다. 오히려 성경은 이러한 여러 가설을 모두 종합적으로 뒷바침해 주고 있는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고 여겨진다(cf.삿6:8a-9).


  여호수아서와 사사기 모두는 이집트 탈출을 통한 이스라엘의 구원과 가나안 사람들의 축출, 그리고 가나안의 신 숭배 거부와 야훼만을 섬길 것 등에 관한 주제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가나안 사람들을 축출한 이유를 진술함에 있어서는, 두 책이 서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여호수아서에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을 축출한 것은, 원주민을 몰아 내고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사사기에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을 축출한 것은, 가나안 땅에서 자기들을 억압하던 왕들을 몰아내고 자유를 쟁취하기 위함이다.


  또, 여호수아서의 본문에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했다는 암시는 있으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받았던 억압의 주제가 겉으로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다.

 


               (3) 지파의 정착(Tribal Settlement)과 그 이후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과 정착의 방식에 대한 논의는, 초기 이스라엘의 공동체의 사회 구조의 연구와 더불어 중요한 논쟁의 주제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전통적으로 학자들의 관심과 질문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 땅을 점령하였는가? 라는 지리적, 역사적 문제에 관한 것이었는데, 보다 사회학적 관심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게 되었다. 즉,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복잡한 다양한 종족들이 결합되어 있었으며, 지파라는 조직으로 편성되었다 하더라도, 각 지파간에 얼마만큼 적절한 협조가 되었는가? 또 산악 지방을 장악하고 하나의 통일적인 사회 공동체를 갖춘 이스라엘의 공동 목표는 무엇이었으며, 가나안 정복의 과정에서 흡수한 비 이스라엘계 주민들(수9장;삼하21:1-9)과는 어떤 형식으로 존재했으며, 지파간의 결합 구조는 무엇이었는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땅 점령과 정착 과정, 그리고 이스라엘의 사회 체제와 구조를 한 묶음 속에서 이해하자는 것이다.

① 목축 유목설(Pastoral Nomadic Model)
  앞서 말한 정복론자와 평화 이주론자들은 이스라엘의 사회 구조를 기본적으로 목축 유목민으로 규정하고, 그들이 가나안을 침공하거나 정착하였다는 입장에 서 있다. 즉, 많은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사회 구조는 유목민들의 체제를 갖추고, 유목 문화의 형태를 띤 공동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이러한 가설은 철저하게 재평가되고 있다.


  물론,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언급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동은, 계절적인 이유로 인한 유목 문화적 이주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집트 탈출같은 사건에서 나타나는 이주는, 유목민의 계절적 집단 이주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의 땅(토지)에 대한 철저한 개념도 유목민적인 문화적 개념이 아님을 간과할 수 없다.


② 종교적 동맹설(암픽티오니)
  이 가설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그리이스와 고대 로마 및 에투루스칸(Etruscan) 도시 국가들의 제의 동맹과 유사한 것으로, 성소에서 행해진 야훼 제의를 중심으로 한 12부족의 종교동맹체였다. 델피(Delphi)의 아폴로 동맹에 의해 가장 잘 입증된 이 고전적인 종교, 정치 제도가 그리이스인들에게는 임픽티오니(Amphictyony)로 알려져 있는데, 일반적으로 이 말의 어원은 "이웃 구역의 주민들" 또는 "[공동 성역] 주변의 거주민들"을 의미하는 용어로 추정된다.

 

  쉽게 말하면, 이스라엘의 종교적 동맹은 중앙 성소가 있고, 부족 대표들을 중심으로 한 평의회가 있으며, 이들의 결정은 12부족들 사이에서 구체적으로 시행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중앙 성소로는 세겜(13세기), 실로(11세기), 베델, 길갈, 기브온(10세기)등에 위치 하였을 것이다. 이 시대의 사사들의 역할은 바로 평의회의 집행관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설은 본질적으로 국가 이전 형태에 속하는 사회 조직 내에서 계약과 법이 갖고 있는 기능을 설명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그것이 이스라엘  사회 전반을 설명해 주고 있지는 못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 이론의 출발점은, 이스라엘 부족들이 군주제 이전 시대에 이미 공통된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연합되었다는 사실을 객관화 하였으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였는가?에 관하여는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 또, 이들의 결정적인 약점 가운데 하나는, 부족간의 동맹 체제가 군주제 이전의 이스라엘에서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다만 부분적인 종교적 제휴 형태로써 협력하는 개별적인 부족들만이 있었다는 역사적 증거에 관하여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③ 사회 종교적 재부족화설(Socioreligious Retribalization Model)
  이 이론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유목민, 용병, 각종 장인, 그리고 하층민들로 구성된 잡다한 연합체로써, 가나안에 들어와 가나안 안에 살고 있던 같은 부류의 계층들과 제휴함으로써 보다 큰 사회 집단으로 확대 되었으며, 그러한 힘을 바탕으로 하여 도시 국가들의 군사적, 정치적 지배권으로부터 탈출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이 가설은, 이스라엘의 동맹 체체가 처음부터 사회적, 경제적 단위를 기초로 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즉, 가나안의 사회 경제적 현실이 이 곳으로 이주해 들어온 이스라엘의 종교적 신앙과 연합하여 새로운 부족동맹을 결성하여, 정착 이후의 새로운 이스라엘의 기초를 놓고 있다는 점을 설명한다. 그런 점에서 가나안인들은 이스라엘인들이 되었다.


  그러나 이 가설에서 주장되는 것은, 집단의 끊임없는 공통의 위기가 이스라엘의 일체감을 강화시켜 주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통일성이 사사시대의 위기들보다 선행하였으며(삿5장), 이러한 공동체 의식은 여호와 신앙에 근거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신앙이란 이스라엘의 이집트에서의 종살이 경험과,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 평등주의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과 지파간의 체제는 극히 복잡한 과정에서 생겨났다는 것이다. 각 지파 체계는 여러 출신 배경을 가진 종족들로 채워졌으며, 의심할 나위 없이 이스라엘이 팔레스틴에 정착하여 생활을 시작한 후에야 비로서 표준적인 형태의 사회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정복 사업이 마무리 된 후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의 대표자들은, 세겜에 모여 엄숙한 선언을 통하여 여호와의 백성이 되고, 오직 그 분만을 섬기기로 서약하였다(수24장). 이 서약은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으로 표준적인 형태를 갖춘 최초의 사건으로써, 시내산 사건을 재확인하고 확대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4) 정착과 사사들의 역할


  이스라엘이 팔레스틴에서 정착 생활을  시작하면서, 왕정이 시작되기까지의 약 200여년 동안, 이스라엘은 비교적 느슨하게 조직된 지파체제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에는 중앙정부나 단일한 국가 체제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상비군 조차 가지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강한 이웃 나라들과는  구별되는, 강인한 신앙과 전통을  가지고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해 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호와의 영"에 의해 능력을  입은 사사들(shoftim,"판관")의 역할은 어느정도 인정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사사들이 사회,경제적 요소에  얼마나 충실한 지도자 였으며, 얼마 만큼의 종교적 신앙의 수호자였는가?를 밝혀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점령지는, 잘 균형 잡힌 하나의  영토를 이루고 있지 못하였다. 이스라엘의 초기 정복은 주로 산악 지대로써,  평지의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철병거가  활동하기에 좋지 못한 지역에 주둔하였다(삿1:19;수17:16). 아람왕 벤하닷은 이스라엘의 이러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하였다:"저희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저희가 우리보다 강하였거니와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저희와 싸우면 정녕 저희보다 강할찌라"(왕상20:23).


  이러한 현상은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일어난 것으로써, "골짜기 땅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에게는 벧 스안과 그  향리에 거하는 자든지, 이즈르엘 골짜기에  거하는 자든지 다 철병거가 있나이다"(수17:16)하였다. 그 외에도 여러 지파에서 이러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삿16-19장).


  가나안 정착 이후의 이스라엘의 역사에 관하여는 주로 사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주기성(the historical periodicity)을 하나의 역사를 보는 관점으로 정하여 기록하고 있다. 즉, 사사기 기자는 1)여호수아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2) 하나님께서 이방의 왕을 세워 그들을  지배하게 하여 고통을 당케하시다가,  3)이러한 위기의 시기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사사,shofet)를 보내어, 이들을 무찌르고 구원하신다는 역사의 패턴으로, 통일 왕국을 이루기까지의 역사를 반복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들 사사-옷니엘(유다 지파), 에훗(베냐민 지파), 기드온(므낫세 지파), 드보라(에브라임 지파), 입다(길르앗 지파), 삼손(단  지파), 삼갈(비이스라엘 사람)등-는 '구원자-심판자'(deliverer-Judges)의 이중기능을 가진 자로 묘사되어 나온다.


  본래 사사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이스라엘의 전체 지파를 묶는 구심점이 없던 시대에 활동하였다(삿21:25). 그들은 때로는 지파 동맹을  통하여 적들과 싸웠으며, 중앙 성소에서의 공동의 종교 제의를 통하여 그들의 이상을 실천해 나갔다.  이들은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로부터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 및 종교적 지배로부터 자신들의 평등 이념을 기초로 한 해방 공동체를 지켜 나가려는 종교 공동체의 성격을 가지고 투쟁해 나갔던  것이다(cf.삿1:1-2:5). 그런 점에서 그들은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는 "야훼의 용사"들이었다.


  사사시대의 전기간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하나의 국가를 창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증거를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또한, 가나안의  도시국가의 체제를 모방하려는 움직임도 전혀 없었다. 사사 기드온이 왕위를 거절한 이야기(삿8:22-28)와 요담의  풍자적 우화(삿9:7-21)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왕정 제도는 그 개념 자체가 부정적인 것이었다. 이는 이스라엘이 오직 여호와만이 자신들의 지도자임을 믿는 신정정치의 이상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사사들의 정복 과정에서 가정 현저하게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적은 역시 블레셋(Philistines)이었다. 이스라엘은 적어도 그들과 200년이 넘는 투쟁을 해야만 했다.

 

  불레셋은 기원전 13세기경 힛타이트 제국이 멸망한 이후, 에게(Aegean)문명의  원류에 뿌리를 두고 발생한 해양 민족(the Sea People)으로서, 새로운 근동의 질서를 세워  나갔다. 성경에 의하면, 이 해양 민족인 블레셋은 갑돌(Caphtor,암9:7)에서 부터 왔다. 또 예레미아는 "갑돌섬에 남아있는 블레셋 사람"(렘47:4)에 관하여 언급한다. 이 섬은 오늘의 크레테섬(Crete)를 말한다. 이들은 기원전  1220년 경 메르넵타(Merneptah) 제5년에 이집트 델타 평원에 나타나는 것을 시작으로, 가나안의 해안 평야에 상륙하였다.


  이들은 지리적(geographical),  인종적(ethnical), 어원적(philological) 관점에서  볼 때, 인도-유럽계(Indo-European)로 인정된다. 또,  고고학적 발굴이 활발하게 진행  되면서 이들의 기원이 점차 확실하게 밝혀지고 있는데, 특히 이들이  사용한 도자가(pottery)는 사이프러스(Cyprus), 로저스(Rhodes), 또는 남쪽 아나톨리아(Anatolia)에서 발견되는 미케네  도자기 제품(Mycenaean ceramic ware)으로써 검붉은 색깔을 가진 것이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팔레스틴의 여러 도시들-므깃도(Meggido), 텔 카실(Tel Qasile), 텔 젬메(Tel  Jemmeh), 텔  엘 파라(Tel el-Farah),  텔 아이툰(Tel  Aiytun), 아스글론(Ashkelon), 벧산(Beth-shean,삿16:23;삼상5:1-7;대상10:10)등-에서도 똑같은 형태의 것들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블레셋의 다곤(Dagon) 신,혹은 바알 제불(왕하1:2ff.)을 그들의 신으로 섬겼다.

  성경에서는 이들의 다섯  방백(방백)으로 가자(Gaza), 아스글론(Ashkelon), 아스돗(Ashdod), 갓(Gath), 에글론(Ekron)을 말하고 있다(수13:3). 이 지역은  모두 지중해 남부 해안 지대로써, 한 수장을 중심으로 하나의 통일된 국가 체제를 유지한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각각의 도시국가를 건설하고 중앙 성소를 중심으로 연맹(league)을 이루며 살았다.


  적어도 이들은 다윗왕  때(10세기)까지,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한  적이었다. 사무엘 때에 실로의 법궤가 블레셋에게 빼앗기는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으며(삼상4-7장), 사울왕은 길보아에서 벌어진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망하기도 하였다(삼상3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