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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中國史, China, history of]

영국신사77 2007. 1. 27. 19:41
                   중국사 [中國史, China, history of]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중국의 역사.

 

 

                                           개요

 

  중국은 7,000년 전에 형성된 고대문명을 현재까지 지속·발전시켜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외래 문화의 유입이나 이민족의 정복에도 문화적 단절을 경험하지 않고 오히려 외래문화와 민족을 중국에 동화시키면서 더욱 풍부한 문화를 형성해왔다. 중국이 광활한 영토 안에 다양한 민족을 포괄하면서도 오랜 기간에 걸쳐 정치적·사회적·문화적 단일성과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중국 대륙의 남과 북이 서로 보완관계에 있어서 항상 통일을 지향했다는 점이다. 대체로 양쯔 강[揚子江]을 기준으로 나뉘는 북부와 남부 지방의 풍토와 생활양식이 서로 다르다. 북부지방은 중국을 북방민족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중국이 서북과 동북 방면으로 진출하는 데 있어서 정치적·군사적 중요성을 띤 기지였다. 남부지방에서는 전중국사회를 안정시킬 만한 풍부한 농업생산이 이루어져 경제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그러므로 북부와 남부 지방이 서로 결합되어야 비로소 강력하고 안정된 정치권력이 형성될 수 있었다. 중국 역사상 여러 번의 분열시기가 있었지만 늘 재통일이 이루어졌던 원인이 여기에 있다. 이러한 정치적·경제적 요인 외에 한자문화라는 문화적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중국에서는 은(殷)나라 중기에 갑골문자가 만들어진 이래 정치적·문화적 확대에 수반하여 차차 사방으로 확산되었다. 진대(秦代)에는 정부에 의해 서체가 통일되었고, 한대(漢代)에는 간략화되고 정리되어 이른바 '한자'(漢字)로서 한이 지배한 영토 전역에 퍼졌다. 그후 한자는 시대에 따라 쓰여지는 범위가 넓어졌으며, 이와 더불어 사상과 문화가 함께 전파되었다. 이렇게 하여 중국 문화권이 만들어졌으며, 전중국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강한 유대가 형성되었다.

 

  중국사는 중대한 정치적·경제적 변혁을 염두에 두면서 편의상 왕조를 중심으로 구분하여 서술할 수 있다. 중국사상 중대한 변혁의 첫번째 시기는 선사시대에서 문명시대로 들어가는 은나라 전반기인 BC 1700~1300년이다. 2번째는 전국시대인 BC 400~200년경으로, 이때는 씨족제가 붕괴되고 중앙집권적인 통일국가가 형성되는 과도기였으며,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발전 외에도 사상을 크게 꽃피웠던 시기였다. 3번째는 당(唐)·송(宋)의 변혁기로 일컬어지는 당말오대(唐末五代) 시기로, 귀족제가 무너지고 군주독재체제로 바뀌는 과도기였다. 4번째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초에 걸쳐 군주제가 무너지고 민주적 정치체제로 바뀌는 시기였다. 이때 중국사회는 서구열강의 침입에 의해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외에도 중국사회는 외부 민족의 침입으로 혼란에 빠진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중국사회 내부의 변혁을 향한 강한 요구로 정치·경제·문화 전반에 걸쳐 변화를 가져온 이상의 4시기가 가장 중요하다. 물론 이러한 변화들에서도 외부의 사정, 특히 주변국과의 관계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선사시대

 

 

                                                            구석기시대

 

  중국의 역사는 구석기시대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까지 란톈 원인[藍田猿人], 베이징 원인[北京原人 Homo erectus pekinensis] 등의 인류화석이 출토되어 구석기시대 중국 대륙에 호모 에렉투스, 즉 직립원인이 살았음이 증명되었다. 특히 베이징 원인의 화석이 발견된 베이징 시 저우커우뎬[周口店]에서는 40여 개의 인골(人骨) 외에도 수많은 석기와 동물화석이 함께 발굴되어, 이를 통해 베이징 원인의 생활과 거주환경을 추측할 수 있다. 산시 성[山西省] 딩춘[丁村], 광시 성[廣西省] 마바[馬] 등에서는 중기 구석기시대 유물과 함께 호모 사피엔스의 화석과 치아가 발견되었다. 삽 모양의 앞니, 넓은 코, 앞으로 튀어나온 턱 등이 몽골 인종과의 관련성을 시사해준다. 허난 성[河南省] 안양[安陽]을 비롯한 북부지방 여러 곳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의 유물도 출토되었다.

 

 

                                                            신석기시대

 

 석기 제작기술의 발달, 음식의 생산과 저장, 사회조직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중국의'신석기 혁명'은 늦어도 BC 6000년경에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신석기문화가 일찍 발전했던 곳은 토양이 좋고 물을 항상 공급받을 수 있었던 황허 강[黃河] 유역이었지만 양쯔 강 하류 유역과 남부지방에서도 독자적인 신석기문화가 발전했다. 신석기문화는 지역이나 문화의 내용으로 볼 때 단일하지 않은 서로 다른 몇 가지 문화가 공존하고 있었다.

 

  우선 북부지방에서는 페이리강 문화[裴李崗文化], 츠산 문화[磁山文化], 양사오 문화[仰韶文化], 룽산 문화[龍山文化]로 이어지는 신석기문화가 발전했다(→ 룽산문화). 허난 성과 허베이 성[河北省] 남부의 페이리강·츠산 문화는 초기 농경문화로서, 탄화된 조 외에 농경과 관계 있는 석기가 많이 출토되었다. 개나 돼지의 사육뿐만 아니라 수렵과 어로도 이루어졌다. 토기는 대부분 무늬 없는 붉은색의 발(鉢)·호(壺)·옹(甕) 등이었지만 빗살무늬나 채문토기도 발견된다. 연대는 BC 5400~5100년으로 추정된다. BC 4500~2400년으로 추정되는 양사오 문화는 북부를 중심으로 한 넓은 지역에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산시 성[陝西省]의 반포[半坡] 유적과 허난 성의 먀오디거우[廟底溝] 유적이 유명하다. 반포 유적에서는 많은 구덩식[竪穴式] 주거지, 그릇을 굽던 가마터, 묘지 등이 발견되어 양사오 문화의 성격과 당시 사회상황이 분명해졌다. 조와 기장이 들어 있던 항아리와 돌낫·돌촉·돌칼 등의 간석기[磨製石器]·뗀석기[打製石器]가 발견되어 농사를 지었음이 확실해졌다. 토기는 일상적으로 흑회색 삿무늬토기[繩蓆文土器]가 사용되었으며, 의례용으로는 채도(彩陶)가 만들어졌다. 집락(集落)에서는 집회용의 대가옥과 일반 소가옥의 구별이 있어서 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무렵 중부의 화이허 강[淮河] 유역에서는 장쑤 성[江蘇省] 칭롄강 문화[靑蓮岡文化]와 산둥 성[山東省] 다원커우 문화[大汶口文化]가 일어났다. 둘 다 양사오 문화로부터 촉발되어 일어난 독자적인 지역문화였으며, 다원커우 문화는 후기 룽산 문화의 선구를 이루었다. 신석기시대 후기에는 북부지방에서 룽산 문화가 출현했다. 룽산 문화 가운데 전형적인 것은 산둥 성 룽산 진(鎭) 청쯔야[城子崖]의 하층문화이다. 이 유적에서는 수혈 주거가 많이 발견되었는데, 바닥에 회칠을 하여 단단하게 하는 등의 기술적인 진전이 보인다. 저장용의 깊은 움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생산에 여력이 생겼음을 알 수 있다. 토기는 일상용과 의례용의 토기가 생산되었다. 의례용은 양사오기의 채도와 전혀 다른 흑색 토기로, 제작기법이 발전하여 복잡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장례제도는 남녀 합장의 형태를 취했으며, 부권(父權)을 위주로 한 가족제도로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묘에 따라 껴묻거리[副葬品]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신분의 차이가 생겼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시기가 끝날 무렵 이미 선진 지역에서는 씨족을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남부에서는 북부와 다른 독자적인 신석기문화가 발달했는데 저장 성[浙江省]을 중심으로 한 허무두 문화[河姆渡文化]가 대표적이다. 이곳에서 탄화된 쌀이 대량 발견된 것으로 보아 벼농사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농경도구로는 석기 외에 뼈연장·조개연장이 많다. 토기도 회색 바탕에 흑색 무늬를 넣은 채도가 만들어졌는데 특색이 있다. 또 대규모의 부락에는 고상식(高床式)의 대목조 건축물도 세워져 고도로 발달한 신석기문화의 단면을 보여준다. 연대는 북부의 양사오 문화와 거의 같은 시기인 BC 4300~3300년으로 추정된다.

 

 

 

                                          은·주

 

 

                                                                

 

  은대는 BC 11세기 후반 주(周)에 의해 멸망되기까지 6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은은 얼리터우기[二里頭期]·얼리강기[二里岡期]·샤오툰기[小屯期]로 이어지는 중국 청동기문화에 기반을 둔 왕조였다. 후기의 수도인 상읍(商邑)은 〈사기 史記〉에 기록된 '은허'(殷墟)임이 20세기초 발굴조사에서 밝혀졌고 이곳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은'은 주대 사람들이 쓰던 호칭이며, 은나라 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상(商)이라고 불렀다. 은의 문화는 BC 17세기말경, 당시 북부에 널리 퍼져 있던 신석기시대 룽산 문화를 모체로 하여 황허 강 남안 일대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태을(太乙)이 명재상 이윤(伊尹)을 임용하여 하(夏)를 무너뜨린 후 은을 세우고 호(지금의 산둥 성 차오 현[曹縣] 부근)에 도읍을 정했다고 한다. 이때가 BC 16세기초로 추정되는데, 은은 당시 황허 강 유역에서 성장하던 신흥문화의 동쪽 중심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은의 특색이었던 형제상속과 부자상속이 반복되었는데, 제10대 중정(中丁) 때 왕위계승을 둘러싼 싸움이 격화되어 세력이 약화되었고 도읍을 여러 번 옮겼다. BC 13세기에 19대 반경(盤庚)이 위기를 극복하고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상읍으로 도읍을 옮긴 후 은조는 다시 왕성해졌다. 22대 무정(武丁) 이후 은대는 다시 전성기를 맞아 산시[山西] 고원이나 산둥과 안후이[安徽] 지방으로 대정벌을 나갔다. 은이 동남 정벌에 몰두하는 동안 서쪽 산시[陝西] 지방에서 세력을 넓히던 주나라는 BC 11세기 후반에 은을 정복했다.

 

  복사(卜辭)에 의하면, 은 후기 사람들은 선왕을 신격화하고 왕위를 신성시했으며, 왕위 계승을 점차 부자상속으로 일원화했다. 또한 안양 시 서북 구릉지대에 거대한 왕묘를 세웠는데, 이곳에서 웅장한 청동기가 많이 출토되어 은나라 왕의 권력이 강대했음을 알 수 있다. 본래 여러 혈족집단이 뭉쳐 왕조를 만들고, 이 왕조는 여러 소부족국가 연합체의 맹주로서 세력을 유지했기 때문에 은왕의 권력이 강해지면 다른 나라의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다. 주왕(紂王)을 포악한 군주로 묘사한 설화의 배경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는데, 실제로 주왕은 우수하고 유능한 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기〉에 의하면 주는 후직(后稷)의 자손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고공단보(古公亶父) 이전의 계보에는 의문점이 많다. 문왕(文王)의 할아버지인 고공단보 때 주나라 사람들은 처음으로 기(岐:지금의 산시 성[陝西省] 치산 현[岐山懸] 근처)로 옮겨와 정착하여 점차 세력을 길렀다. 주는 허난 지방의 유력한 국가들과 혼인관계를 맺어 세력을 확대하다가, 왕계(王季) 때 은과 싸워 왕계는 살해되고 문왕이 그뒤를 이었다. 문왕은 기에서 웨이수이 강[渭水]을 넘어 동쪽으로 진출하여 풍(:지금의 시안 시[西安市] 서쪽)에 정착했다. 이때부터 동쪽으로 세력을 신장하여 결국 은으로부터 서백(西伯:서쪽의 패자)으로 인정받았다. 그뒤를 이은 무왕(武王)은 도읍을 시안 근처의 호(鎬)로 옮기고 이를 종주(宗周)라고 했다. 나아가 이곳을 동방 진출의 거점으로 삼고 군사를 일으켜 은을 정벌하고 주조(周朝)를 세웠다. 무왕은 은나라 주왕의 아들인 무경(武庚)에게 은의 옛 영토를 다스리게 하고 동생인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에게 그를 감시하도록 했다. 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成王)이 제위에 오르자 주공(周公)이 섭정했다. 관숙과 채숙이 이에 불만을 품자 주공은 은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강숙(康叔)을 그곳의 제후로 봉한 뒤 다시 동정(東征)에 나섰다. 주공은 동방경영을 위해 동도(東都) 낙읍(洛邑)을 건설했다.

 

  주는 그뒤 강왕(康王)·소왕(昭王)·목왕(穆王)의 3대에 걸쳐 강성했으며, 여러 차례의 군사정벌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다. 주는 외국 정벌로 획득한 새 영토를 통치하고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요충지에 동족 또는 이족 공신들을 제후로 봉했다. 이 제후들에게는 일정한 지역과 주민을 지배하게 하는 대신, 공물을 바치고 군사적인 책임을 지도록 하는 의무를 부여했다. 주의 봉건제도는 이렇게 만들어졌는데 무왕·성왕 때만 새로 70여 개국이 봉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군사정벌로 목왕 이후 국력이 점차 쇠퇴했다. 제10대 여왕(勵王)은 국력을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전제정치를 시행했으나 귀족들의 분노를 사 체( : 지금의 산시 성[山西省] 훠 현[縣]근처)로 망명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수도로 돌아오지 못했으며, 그가 왕위를 비운 동안에는 재상 공백화(共伯和)가 국정을 장악했다. 공백화가 처음 국정을 다스리게 된 해를 공화원년(共和元年:BC 841)이라 하며, 이때부터 중국의 기년(紀年)이 분명해졌다. 주 말기에는 흉작과 천재지변이 이어져 민심이 흉흉해졌으며, 후계 문제로 내란이 일어난 틈에 북방민족의 침입을 받아 BC 771년 수도를 함락당했다. 이로써 서주(西周)가 멸망하고 평왕(平王)이 동도(東都) 성주(成周)로 도망가 다시 왕조를 일으켰다. 그러나 옛날과 같은 위세는 볼 수 없었으며, 제후들이 독자적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은·주 시대의 문화

 

  의 문화는 BC 17세기 후반 무렵부터 허난 성의 황허 강 남안을 따라 비교적 협소한 지역에서 발생했다. 초기에는 금속의 질도 조악하고 무늬 없는 간단한 청동기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정교해지고 금속의 질도 좋아졌으며, 형태와 문양이 다양해지고 청동기의 크기도 거대해졌다. 또 후기에는 문자가 많이 사용되어 청동기에도 명문(銘文)을 넣었는데 이것은 갑골문자라고 하는 것으로 문자구성이 이미 그림문자의 단계를 벗어났다. 는 은의 문자와 청동기술을 그대로 계승했지만 청동기술은 퇴보하기 시작했고, 문양과 형태상에서도 은의 문화처럼 다양한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청동기에 새겨 넣은 금문(金文)은 은대에 비해 문장이 길었으며, 사용된 어구나 어법은 〈서경 書經〉·〈시경 詩經〉과 비슷한 점이 보이기도 한다. 은과 주의 관계에 대해 은은 동방에서, 주는 서방에서 기원했다고 보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발견된 고고학적인 자료를 통해 비교해볼 때 주와 은은 문화적인 관계가 깊었으므로, 은에서 주로의 교체도 문화와 민족의 근본적 교체라기보다는 같은 문화와 민족 가운데서 일어난 정권교체에 불과하다.

 

 

                                                 춘추전국시대

 

  춘추전국시대란 동주시대(東周時代)의 다른 이름이다. BC 770~476년은 공자가 편찬한 노(魯)나라의 편년체 사서 〈춘추 春秋〉의 이름을 따서 춘추시대라 하고, BC 475~221년은 대국들이 패자의 자리를 놓고 다투었으므로 전국시대(戰國時代)라고 한다.

 

 

                                            춘추시대

 

  주 왕실이 동천하고 세력이 약해지자 100여 개국이 넘는 중원(中原) 지방의 제후들이 반독립적인 상태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이 나라들은 서주 시대 이래 존재하던 읍제국가(邑制國家)가 발전한 것이었다. 이들은 국도(國都)의 세력권 내에 크고 작은 읍들을 복속시켰는데, 국도의 정치력이 쇠약해지면 곧 제후의 이합집산이 격심하게 되고, 제후세력은 급속히 약해졌다. 그래서 춘추 제후는 국도에서 정권을 확립하고 여러 읍의 맹주라는 입장을 확고히 하는 데 노력했다. 이렇게 성립된 제후는 다시 회맹(會盟) 외교를 통해 상호간의 세력과 균형을 도모했다. 허약해진 주 왕실을 대신하여 제후국 가운데 강자를 중심으로 여러 국가들이 회맹을 하게 된 데에는 남방의 강국인 초(楚)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작용했다. BC 658년 초가 정(鄭)을 침입했을 때 제(齊)의 환공(桓公)이 이듬해 제후들을 이끌고 초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으며, 그 여세를 몰아 제후들과 규구(葵邱:지금의 허난 성 란카오 현[蘭考縣])에서 회맹하여 패업을 성취했다. 환공이 죽은 후 제는 내분으로 쇠약해지고 그 뒤를 이어 진(晉)의 문공(文公)이 중원의 맹주가 되었다. 그는 BC 633년 북진해온 초를 성복(城 : 지금의 산둥 성 쥐안청[城])에서 대파하고, 돌아오는 길에 천토(踐土:지금의 허난 성 정저우[鄭州] 동북쪽)에서 제후들을 모아 회맹했다. 문공이 죽은 후 진이 내분으로 세력이 약해지자 초가 다시 진(陳)과 함께 송을 침입했고, 나아가 육혼(陸渾:지금의 간쑤[甘肅], 산시[陝西] 서부에 속함)의 융(戎)을 치고 낙(:지금의 허난 성 뤄양[洛陽])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초의 장왕(莊王)이 주 왕실의 상징인 보정(寶鼎)의 경중(輕重)을 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양쯔 강 유역에서 세력을 쌓아 북방의 패자가 된 초를 위협한 것은 춘추 후기에 세력을 키워 급성장한 오(吳)나라였다. 오왕 합려(閤閭)는 BC 506년초의 도읍인 영(: 지금의 후베이 성[湖北省] 장링 현[江陵縣])을 함락시키고 BC 482년 맹주의 지위에 올랐다. 그후 오는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으며 월은 다시 초에게 패자의 자리를 빼앗겼다.

 

 

                                                                 전국시대

 

  춘추시대 초기에 200여 개가 되던 제후국은 말기에 이르러 10여 개국으로 감소했다. 각 제후국 내에서는 실력을 키운 일부 세경(世卿)이 독자적인 가계(家系)를 형성했다. BC 5세기말경 제에서는 진항(陳恒)이 간공(簡公)을 살해하고 실권을 장악했으며, 진(晉)에서는 한(韓)·위(魏)·조(趙)의 3씨(氏)가 구요(苟瑤)를 멸망시키고 국가를 3분했다. 이때 중국에는 제(齊)·연(燕)·진(秦)·초(楚)·한(韓)·위(魏)·조(趙)의 7개 국가가 큰 세력을 형성하고 서로 패권을 다투었다. 이 전국 7웅(七雄) 가운데 가장 먼저 발전한 나라는 위였다. 위의 문후(文侯)는 이회(李)와 서문표(西文豹)를 등용하여 농업생산력을 증진시키는 한편, 오기(吳起)·악양(樂羊) 등의 장군을 기용하여 영토를 확대했다. 그러나 상앙(商)의 변법을 통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급속히 강국으로 부상한 진(秦)의 공격을 받아 BC 340년 수도를 안읍(安邑:지금의 산시 성[山西省] 샤 현[夏縣])에서 대량(大梁:지금의 허난 성 카이펑 시[開封市])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진이 강성해지자 BC 318년초의 회왕(懷王)은 진 동쪽의 위·조·한·연·제와 함께 남북으로 동맹하는 합종책(合從策)으로 진에 대항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진은 6국 각각과 동맹하는 연횡책[連橫策]을 써서 합종을 방해하고 계속적인 침략으로 여러 중원 국가들 가운데 우위를 차지했다. 진은 BC 260년 장평(長平) 싸움에서 조를 이겨 조의 세력을 약화시킨 뒤 연합한 초·조·한·위의 마지막 저항도 물리치고, BC 221년 중국 전역을 통일했다.

 

 

                                        농업과 상공업의 발전

 

  춘추시대 이래 중국에서는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다른 문명과 달리 단철보다는 주철이 먼저 일반화되었는데 무기로 적당하지 않은 주철은 주로 농기구로 사용되었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과 전국시대 이후 우경(牛耕)의 출현은 농업생산력을 현저히 증대시켰다. 또한 수리관개 시설의 발달로 경지가 확대되었다. 이것은 농민의 이주를 촉진시켜 세수(稅收)를 증진시키려는 목적 외에도, 전통적인 공동체 안에서의 농민을 포함한 전토지와 백성을 국가가 장악하려는 새로운 경제정책이기도 했다. 농업의 발전과 함께 상공업 분야에서도 두드러진 변화가 있었다. 이 시기에 제철업·제염업·상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대상인들의 이야기도 전해지며, 민간수공업자나 중소 상인들의 활동도 활발했다. 상공업의 발달로 도시발전이 촉진되어 각 제후국의 수도가 상업도시로도 크게 번영했다.

 

 

                                  제자백가(諸子百家) 사상

 

  춘추전국시대에는 열국이 분립하는 정치적 혼란 가운데 사상과 문화가 꽃을 피웠다. 또한 천문·역법·수리·토목·건축·공예에서도 전례 없는 발전을 보였다. 특히 예(禮)를 중심으로 한 유가사상의 성립은 주목할 만하다. 공자는 부자와 형제를 축으로 하는 가족도덕을 기본으로 하고 사회적 규율로 예를 중시했다. 또한 덕치주의에 의한 정치론을 전개했고 군신(君臣)의 의(義)를 강조했다. 그는 인(仁)의 사상을 확립하여 유교의 기본원리로 삼았다. 전국시대에 위의 문후, 제의 위왕(威王)·선왕(宣王) 때에는 유가를 비롯해 여러 사상가들도 자신의 교단을 이끌고 제후왕과 공(公)의 정치에 접근하여 세력을 확대하려 했다. 이들 교단과 그들의 저작을 총칭하여 제자백가라고 한다. 이 가운데 묵가(墨家)는 공리주의(功利主義)의 입장에서 겸애(兼愛)·비공(非攻)·상동(尙同)·상현(尙賢)·천지(天志) 등의 이념을 강조하고 군권(君權) 강화를 주장했다. 유가(儒家), 특히 맹자는 천명의 지배하에 도의적 정치, 즉 왕도(王道)를 행할 것을 주장하고 인성이 본래 선함을 믿어 수양을 중시했다. 법가(法家)는 군권을 절대화하고 법(法)과 술(術)에 의해 신상필벌(信賞必罰)을 엄격히 할 것을 주장했다. 도가(道家)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를 주장했다. 이들 제자백가는 각각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고 서로 비판하면서 깊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진·한

 

  진·한시대(秦漢時代)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중앙집권적인 통일국가가 성립했던 시대로, 진나라 시황제(始皇帝)의 전국통일(BC 221)부터 후한의 멸망(AD 220)에 이르는 약 440년간을 말하는데, 이 사이에 네 나라가 흥망했다.

 

 

                                                               

 

  산시[陝西] 지역을 발판으로 한 진은 주가 낙읍으로 천도하던 해에 주왕에게 제후로 인정받았다. 춘추시대에는 목공(穆公:BC 659~621 재위) 때 잠시 중국 서북부 일대를 지배하면서 중원의 여러 나라들과 어깨를 겨룰 정도로 발전했지만 그후로는 위세를 떨치지 못했다. 이민족의 요소를 다분히 지닌 후진국으로 간주되던 진은 전국시대 효공(孝公:BC 361~338 재위) 때 강대해지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BC 256년 주를 멸망시켰다. 진왕 정(政)은 천하를 평정한 후 전국에 군·현(郡縣)을 설치했다. 그는 천제에 비견하는 절대자라는 의미에서 자신의 존호를 황제라고 하고 시황제임을 선포했다. 그는 나라마다 달랐던 화폐·도량형·문자서체를 통일하고 반란을 미리 막기 위해 무기를 몰수했다. 나아가 정치를 비판하는 유가들의 책을 모아 불사르고 유생 460여 명을 생매장시켰으며(→ 분서갱유) ,장대한 능묘와 궁전을 짓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징발했다. BC 214년 광둥·광시 지방과 베트남 북부를 정복했으며 흉노를 정벌하기도 했다. 또 조(趙)와 연(燕)의 장성을 수축·증축하여 만리장성을 쌓았다. 이처럼 계속되는 대규모 공사와 정복전쟁으로 인해 농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시황제가 죽은 후 농민반란이 일어나고 반진(反秦) 세력이 봉기하는 등 국운이 급격히 쇠퇴하다가, BC 206년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의 연합군에게 패하여 결국 멸망했다. 그해 항우는 자립하여 서초(西楚)의 패왕임을 선포하고 유방을 비롯한 공적이 있는 장군 18명을 각지에 분봉했다. 그러나 이들은 항우의 조치에 불만을 품어 곧 산둥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항우가 북상한 사이에 유방은 한중[漢中:지금의 산시 성(陝西省) 난정 현(南鄭縣)]에서 군사를 일으켜 옛 진의 땅으로 들어가 항우와 대적했다. 4년간의 싸움 끝에 패한 항우는 BC 202년 자살했으며, 유방이 제위에 올라 수도를 장안(長安)에 세우고 한을 창건했다.

 

 

                                                         의 성립

 

  유방은 진의 제도를 많이 답습했지만 지방행정에서는 군현제를 변형시킨 군국제(郡國制)를 채용했다. 당시 한의 직할군은 황허 강 중류지역 서쪽에 국한되어 있었으며, 한신(韓信) 등 7명의 장수를 봉한 제후국이 전체의 60% 정도를 차지했다. 한의 황제는 사실은 이름뿐인 패왕에 불과했다. 유방은 재위중 창사 왕[長沙王] 이외의 이성(異姓) 왕들을 차례로 정복하고 유씨 일족을 봉했으며, 왕국의 법제와 관제를 한과 같게 했다. 그러나 한의 황제는 절대적인 황제권을 확립하기 위해 왕국을 억압하고 그들의 권한을 박탈할 필요가 있었다. 경제(景帝) 때 오초7국(吳楚七國)의 난을 계기로 제후왕의 영지와 권한을 줄이는 정책이 강화되었다.

 

  무제(武帝) 때에는 왕의 영지를 자식들에게 분할·상속시키게 했다. 종묘제사 때 제후가 헌상하는 황금의 규정을 엄격히 하여 BC 112년 이 규정을 어긴 죄로 106명의 제후를 처벌했다. 제후왕에 대한 각종 규제를 강화하고 왕은 단지 조세를 받아 살아가는 존재로 만들었다. 또 주자사(州刺史)를 설치하여 지방행정에 대한 감찰체제를 확립했다. 이같은 노력으로 무제 때에는 군현제도에 의한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었다. 무제는 오랫동안 한을 괴롭혀왔던 북방의 흉노족을 정벌하고, 이곳에 하서4군(河西四郡)을 설치했다. 이밖에도 남월국(南越國)·동월국(東越國)·서남이(西南夷) 등을 정벌하고 각 정벌지에 군을 설치했다. 대규모의 대외원정이 해마다 계속되어 한편으로는 재정난이 심각해지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제 지배체제가 강화되었다. 그는 향리(鄕里)에서 현량(賢良)·방정(方正)·효렴(孝廉)의 사(士) 등을 추천하게 하여 신진관료로 등용했다. 또한 동중서(董仲舒)의 헌책(獻策)에 따라 춘추 공양학파(公羊學派)의 유학을 관학(官學)으로 삼아 이것을 문교·사상 정책의 기본으로 정했다. 그결과 유교가 황제 지배의 사상적인 기초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혁명사상을 끌어들여 후에 왕망(王莽)의 제위찬탈을 긍정하게 되었다. 무제는 경제발전에도 적극적이었다. 농업개발을 장려했으며, 관중[關中:웨이수이 강 일대]에서는 대규모 관개공사를 시행하고 황허 강의 치수공사도 벌였다. 재정궁핍을 구제하기 위해 민간의 화폐 주조를 금지하고 통화를 오수전(五銖錢)으로 통일했다. 또 각종 조세를 늘리고 상인에 대한 자산세를 설치했으며 밀고제에 의해 징세를 철저히 했다. 나아가 염철전매·균수평준법(均輸平準法)·각고(:술 전매)를 통해 국가의 재정을 충실히 하고 민간경제의 안정을 꾀했다.

 

  이와 같이 융성했던 한 제국도 무제가 죽은 다음부터는 점차 쇠퇴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무제가 치세중에 승상과 어사대부 등 외조(外朝) 관료의 권한을 억눌렀던 것이 측근인 내조(內朝)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나아가 외척과 환관의 전횡을 야기한 화근이 되었다. 한편 향리에서는 호족들에 의한 토지겸병이 증대되고 일반 농민들이 몰락하여 호족에 의탁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이때문에 향촌사회의 공동체적 질서가 무너지고 계급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왕망의 정치

 

  이같이 사회적·정치적 위기에 직면해 있던 한은 왕망에 의해 잠시 단절되었다. 그는 원제(元帝) 왕황후(王皇后)의 일족이었는데 주위의 두터운 신망을 얻어 대사마에까지 올랐다. 애제(哀帝)가 죽은 후에는 9세인 평제(平帝)를 옹립하고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들어 정치의 실권을 잡았다. 그는 어린 황제를 보필한 공로를 인정받아 안한공(安漢公)이라는 칭호를 받았지만 AD 5년에 반란을 일으켜 평제를 살해했다. 8년 자신이 제위에 올라 국호를 신(新)이라 하고 당시 유행하던 참위설(讖緯說)로 제위찬탈을 정당화했다. 유교를 열렬히 신봉했던 왕망은 제위에 오르자 주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유교주의적인 이상국가를 건설하고자 각종 개혁에 착수했다. 토지문제에서는 왕토사상(王土思想)에 기초하여 토지소유를 제한하고 토지와 노비의 매매를 금지했다. 화폐는 기존에 통용되던 오수전을 폐지하고 새로 대전(大錢)을 주조했으며, 도화(刀貨)·포화(布貨)·화천(貨泉) 등의 수십 가지 화폐를 발행했다. 이상의 여러 개혁들로 인해 경제적 혼란이 일어나 곳곳에서 농민반란이 발생했다. 특히 18년 산둥 성 낭야(琅邪)에서 일어난 '적미(赤眉)의 난'은 번숭(樊崇)의 지휘 아래 거대한 집단을 형성하고 장안까지 침입했다. 호족들은 스스로의 보호를 위해 무장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농민군과 협력하여 왕망 정권에 반기를 든 사람들도 있었다. 난양[南陽]의 유씨 집단은 유현(劉玄)을 황제로 세워 왕망에 대항했다. 24년 유수(劉秀:光武帝)가 유현에 이어 황제가 된 후 적미군을 평정하고 호족군들도 항복시켜 한을 다시 일으켰다.

 

 

                                     후한의 흥망

 

  광무제가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은 그가 한의 재흥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여러 지방호족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족 지주정권의 성격을 지닌 후한은 왕망의 토지소유 제한정책을 완화하고 노비매매의 금지령을 폐지했다. 그밖에 왕망이 만든 여러 제도를 폐지하고 행정의 규모나 군비를 가능한 한 축소하여 불필요한 것을 없앴으며, 민생의 안정과 생산의 회복에 힘썼다. 다만 왕망이 중시했던 유교만은 더욱 적극적으로 장려하여 태학과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설치했다.

 

  광무제부터 명제(明帝)·장제(章帝)에 이르는 약 60년간은 국내 제도가 정비되고 주변국과의 관계도 안정되어 후한의 최대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4대 황제인 화제(和帝) 이후로는 어린 황제가 잇따라 제위에 오르고 황실의 혈통이 끊기는 일도 있어서 외척과 환관 등이 다시 실권을 장악했다. 화제 때의 두씨(竇氏), 안제(安帝) 때의 등씨(鄧氏), 순제(順帝) 때의 양씨(梁氏) 등이 대표적 외척이다. 반면에 전한(前漢) 선제(宣帝) 무렵부터 지방호족 출신이 군·현의 관리나 중앙관료가 되는 경우가 잦아졌는데, 광무제가 호족의 도움을 받아 후한을 세운 뒤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광무제는 예교(禮敎)를 중시했으며 태학을 세워 사인(士人)을 양성했는데, 이들은 관리로 진출하는 일 외에 향리에서 정치를 비평하며 '청의'(淸議)를 조성했다. 청의의 공격목표는 주로 외척과 환관들이었고, 이때문에 화제 이후 환관과 조정 내 사인들의 충돌이 잦아졌다. 환관들은 황제의 힘을 배경으로 사인들을 탄압했으며, 166, 169년 2차례에 걸쳐 사인들을 체포·투옥·사형하는 당고(黨錮)의 화(禍)를 일으켰다. 2번째 당고에서 100여 명이 사형당하고 600~700명이 금고(禁錮)에 처해졌다. 이 사건으로 청류파 관료는 정계에서 자취를 감추었으나 향리의 청의운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이후 위진남북조시대 귀족정치의 저류를 형성했다.

중앙의 정치가 쇠퇴해지자 흉노족을 대신하여 오환족(烏桓族)과 선비족(鮮卑族)이 북방을 침입하기 시작했다. 서역 여러 나라들도 한을 배반했으며 산시[陝西] 지방의 강족(羌族)이 반란을 일으켰다. 국내에서는 기근과 반란이 이어져 빈곤한 농민들 사이에 미신과 민간종교가 확산되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촉(蜀:쓰촨 성[四川省] 서부)의 장릉(張陵)은 주술과 부적으로 병을 고치고 평안을 준다는 오두미도(五斗米道)를 퍼뜨렸다. 거록(鉅鹿:지금의 허베이 성[河北省] 쥐루 현[巨鹿縣])의 장각(張角)도 이것과 유사한 태평도(太平道)를 허베이·허난·산둥 일대에 퍼뜨려 잠깐 사이에 많은 신자를 확보했다. 이들은 종교왕국의 건설과 한의 타도를 목표로 삼았는데, 이때문에 한의 탄압을 받게 되자 184년 황색 머리띠를 두르고 일제히 봉기했다. 이것을 '황건(黃巾)의 난'이라고 하는데, 얼마 후 장각이 죽자 황건의 세력도 약화되었다. 그러나 그후에도 크고 작은 농민반란이 일어나 각 지역이 황폐해졌고, 반란 진압을 기회로 곳곳에서 할거세력이 출현했다. '황건의 난'을 기화로 환관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허베이의 호족으로 사예교위(司隸校尉)였던 원소(袁紹)는 동탁(董卓)에게 지원군을 요청하고 궁중에 들어가 189년 8월 2,000여 명의 환관을 죽였다. 뒤늦게 달려온 동탁은 소제(少帝)를 폐하고 헌제(獻帝)를 옹립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192년 동탁은 부하에게 살해되었고, 원소는 허난에서 일어난 조조(曹操)에게 격파당했다. 조조는 동북지방의 오환을 정복하여 북부지방을 평정하고 오의 손권(孫權), 촉의 유비(劉備)와 대립했다. 그러나 적벽(赤壁:지금의 후베이 성 자위 현[嘉魚縣] 동북쪽) 대전에서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에게 패했고, 그뒤로는 세력이 강남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는 220년 헌제에게서 제위를 물려받아 황제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전후 400년에 걸친 한조도 멸망했다.

 

 

                                      사상과 문학

 

  전한 초기에는 황로사상(黃老思想)이 유행하다가 무제 때 동중서의 헌책(獻策)으로 유학이 국교가 되었다. 당시 유학은 진의 분서(焚書)에 의해 경전을 모두 잃어버린 후, 학자들이 암송하여 전해온 내용을 당시의 문자인 예서(隸書)로 기록한 경전에 의거했다. 이를 금문학파(今文學派)라고 한다. 이에 반해 고문학파(古文學派)는 진대(秦代) 이전에 사용되던 과두문자(文字)로 씌어진 경전에 의거했는데, 고문은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새로운 경학을 필요로 하던 왕망에 의해 잠시 발전했다. 후한초 광무제는 학자들을 모아 금문학과 고문학을 절충하고 5경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논한 〈백호통의 白虎通義〉를 편찬하게 했다. 그후 종래 어느 한쪽만을 진경(眞經)으로 인정하는 경향에서 벗어나 2가지 경전을 함께 연구하는 학풍이 일어났고, 정현(鄭玄)·허신(許愼) 등에 의해 훈고학·문자학이 발전했다. 한대에는 산문으로 가의(賈誼)의 〈신서 新書〉,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반고(班固)의 〈한서 漢書〉, 왕충(王充)의 〈논형 論衡〉 등의 우수한 작품이 많이 나왔다. 특히 〈사기〉는 한대의 기념비적인 역사책으로 기전체(紀傳體)라는 새로운 체제를 창조하여 이후 2,000년간 중국 정사(正史)의 모범이 되었다.

 

 

                                              위진 남북조시대

                                                  위·진 시대

 

  조비가 제위에 오를 무렵 강남에서는 손권이, 촉에서는 유비가 자신의 세력 기반을 굳혀 3국 정립의 형세를 이루었다. 오는 저장·장시 등의 산지에 사는 산월(山越)을 굴복시켰고, 촉은 재상 제갈량(諸葛亮)이 국정을 보좌하여 윈난[雲南] 지방의 원주민을 복속시켰다. 그러나 이 두 나라보다는 중원에 위치하여 세력을 키운 위(魏)의 국력이 가장 강했다. 위는 사마의(司馬懿)의 아들인 사마소(司馬昭)의 계획에 따라 263년 촉으로 토벌군을 보내 항복시켰다.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司馬炎)은 265년 제위를 물려받아 진(晉)을 세웠다. 진은 280년 오를 평정하여 천하통일을 달성했다. 통일 후 무제, 즉 사마염은 자신의 일족을 여러 나라의 왕으로 봉했다. 또한 봉왕(封王)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그들에게 병권을 주어 지방관을 다스리도록 했다. 이것은 관리들에게 봉왕에 대한 충성심을 갖게 하고 봉왕은 황제에게 충성하도록 하여 관리들에 대한 황제의 지배를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그러나 사실상 봉왕제의 강화가 도리어 동족간의 싸움을 격화시켜 '8왕의 난'(291~306)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때 여러 왕들이 흉노를 비롯한 북방민족의 무력을 이용함으로써 이들 민족은 본격적으로 중원의 분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결국 316년 흉노의 유씨(劉氏)에 의해 뤄양과 장안이 함락됨으로써 서진은 멸망했다.

 

 

                                                  남조

 

  서진이 멸망하자 이미 강남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낭야왕(琅邪王) 사마예(司馬睿)가 건강(建康:지금의 난징[南京])에서 즉위하고, 317년 동진(東晉)을 세웠다. 월남한 북부의 호족들이 진을 구성했으며, 강남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일종의 호족연합적인 성격의 정권을 만들었다. 동진·유송(劉宋)·남제(南齊)·남양(南梁)·남진(南陳)으로 이어지는 남조의 왕조들은 정치적·군사적 기반이 취약했고, 정치상의 싸움과 반란이 잇따랐다. 그러나 남조는 북부지방이 분열되어 있었고, 북부와 양쯔 강을 사이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곧 멸망하지 않고 589년까지 명맥을 이어갔다. 오와 이들 5개의 남조 국가를 합하여 6조(六朝)라고 한다.

 

 

                                                         5호16국과 북조

 

  5호(五胡)란 흉노(匈奴)·갈()·선비(鮮卑)·저()·강(羌)의 다섯 북방민족을 말하는데, 이들 민족들이 세운 성(成:漢)·하(夏)·전조(前趙)·후조(後趙) 등의 16국은 몹시 불안정했으며, 존속기간이 모두 짧았다. 이들 국가에서는 호인(胡人)은 부족단위로, 한인(漢人)은 군현제에 따라 지배하는 이중지배체제를 취했으며 한인의 사인을 정치에 적극 등용했다. 문화적으로는 군주들이 대체로 불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고승을 국가의 고문으로 받아들여 민심의 안정을 꾀했다. 군소국가가 난립하던 북부지방을 처음 통일한 인물은 북위(北魏)의 태무제(太武帝)였다. 그는 강력한 북방 민족의 군사력과 최호(崔浩) 등 한족 지식인들의 협력에 힘입어 북부를 통일하여 지배할 수 있었다. 통일 후 태무제는 흉노·선비 등 북방민족의 부족제를 해산하고 그들을 한족의 편호(編戶)처럼 호를 통해 지배하는 방식을 취했다. 북방에는 6진(六鎭)을 세워 선비족의 호족 자제들을 그곳으로 보냈다. 효문제(孝文帝)가 뤄양으로 천도한 뒤 국방상 주요전선이 북에서 남으로 이동했다. 이에 따라 진민(鎭民)은 냉대받고 천민화되어갔으며,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들에게 혹사당했다. 523년 결국 6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난은 이주영(爾朱榮)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이후 북위에 정치적인 혼란이 시작되었다. 서쪽 장안의 우문태(宇文泰)는 534년 고환(高歡)을 피해온 수(修:孝武帝)를, 동쪽 업(業:지금의 허베이 지역)의 고환은 선견(善見:孝靜帝)을 각각 황제로 옹립하여 결국 북위를 동위와 서위로 분열시켰다. 550년 동위에서는 고환의 아들 고양(高洋)이 효정제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아 제(齊)를 세웠다. 이렇게 시작된 북제(北齊)에서는 선비족 중심주의가 크게 대두되었다. 우문태는 동위에서 도망쳐나온 효문제를 옹립하여 서위를 세웠다. 그는 앞서 효문제가 폐지했던 북방민족의 성(姓)을 다시 사용하게 하는 등 동위와 마찬가지로 선비색이 짙은 정권을 세웠다. 이것은 우문태가 죽은 후 우문호(宇文護)가 세운 북주(北周)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북주는 577년 북제를 병합했지만 4년 뒤 외척인 양견(楊堅)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581년 제위에 오른 양견은 남북조시대의 오랜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400년 만에 중국을 재통일했다. 양견은 북주를 세운 우문태 휘하에서 활약한 무장 집안에서 태어났다. 선조는 북방의 무천진(武川鎭)에서 군인생활을 하고 선비족과 통혼할 정도로 북방민족의 생활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북조 후기에는 선비족과 한족이 정치적·사회적으로 대립했는데, 북주는 고대 〈주례 周禮〉의 이데올로기를 관제 등에 채택하고 선비의 토착화를 진전시키는 동시에 한족 관료를 중용하여 두 민족을 체제적으로 융합시키려 했다. 이같은 북주의 노선을 계승한 수는 더욱 의식적으로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추진하고, 중국 전통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선비계의 호성(胡姓)을 폐지하고 양견 스스로 후한 이래의 명족인 홍농(弘農) 화음(華陰) 양씨(楊氏)의 후예라고 선전했다. 양견은 대흥성(大興城)을 수도 장안으로 이름지었다. 또한 개황율령(開皇律令)을 반포하여 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집권화를 위한 관료지배를 강화했다. 강력한 군사력을 구축하고 북방 돌궐(突厥)에게 이간책을 써서 내부분열을 꾀했다. 또 명목상 독립상태에 있던 양쯔 강 중류의 후량(后梁)을 정복하고 이어 강남에 있던 남조 최후의 왕조 진(陳)을 공격했다. 왕자인 진왕(晉王) 광(廣:후의 煬帝)을 총사령으로 한 수의 수십만 대군은 문약한 진을 곧 패배시키고 589년 천하통일을 실현했다. 천하를 통일한 뒤 문제(文帝), 즉 양견은 중앙과 지방의 통치조직을 중앙집권화하고 호족세력을 억압했으며 백성을 철저히 관리했다. 호구 조사를 강행하여 백성을 모두 호적에 등록시켰으며, 수적법(輸籍法)을 실시해서 조(租)와 조(調)를 효과적으로 징수했다. 또한 남북을 잇는 운하를 건설하고 균전제(均田制)에 의해 민생안정을 꾀했으며, 관창(官倉)의 비축을 늘려 국가의 부를 충실히 했다.

 

  양제는 황태자를 실각시키고 아버지 문제를 시해한 뒤 제위에 올라 대외팽창정책을 계속 추진했다. 토욕혼(吐谷渾)·임읍(林邑:찬파의 중국 이름)·유구(流求) 등지에 원정대를 보내고 멀리 떨어진 여러 나라에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입공(入貢)을 강요했다. 또 남녀 100만 명 이상을 차출하여 대운하를 만들고 뤄양 서쪽의 대리궁(大離宮) 외에도 운하를 따라 몇 개의 궁전을 지었으며 이로 인한 원성에도 불구하고 다시 무모한 고구려 원정을 강행했다. 수의 대군은 고구려의 끈질긴 저항으로 거의 괴멸되었다. 제2차 원정에서는 도중에 일어난 반란으로 전국은 다시 동란에 휩싸였다. 이 동란중에 돌궐 방위의 요지인 태원(太原)의 유수(留守) 이연(李淵) 부자도 반기를 들었다. 각지에서는 관료·귀족이 모두 군사를 일으켜 전국은 군웅할거 상태가 되었다. 이연은 돌궐의 원조를 받아 가장 먼저 수도 장안을 제압하고 우위에 섰다. 618년 놀이를 위해 행차중이던 양제가 친위군의 반란으로 시해되자 이연은 곧 제위에 올라 당을 세웠다. 수는 급격한 중앙집권화와 외정(外征)의 실패로 38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이연의 아들인 이건성(李建成)·이세민(李世民) 형제는 뛰어난 용기와 지략으로 각지의 할거세력들을 차례로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했다. 당초 내정의 주안점은 양제의 정책을 폐지하고 모두 수나라 초기 개황시대의 제도로 되돌아가는 데 있었다. 수의 관료와 할거세력 지배하의 지식인들도 당에 많이 흡수되었다. 수나라 말기의 혼란을 경험했던 이들은 국력의 회복과 민생안정을 지상과제로 하여 당의 기초를 굳히기에 노력했다. 이세민은 천하평정 뒤 태자인 형과 동생들을 죽이고 아버지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방현령(房玄齡)·두여회(杜如晦)·위징(魏徵) 등의 명신을 기용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국위를 떨쳐 '정관(貞觀:627~649)의 치(治)'로 일컬어지는 시대를 만들었다. 7세기 중엽에는 율령체제를 완성시켜 광범위한 소농민을 기반으로 하는 대제국의 기초를 마련했다. 대외적으로는 동돌궐·토욕혼·철륵(鐵勒)·서돌궐을 차례로 격파하고 티베트를 정복했으며, 고창(高昌)에서 구자(龜玆:쿠챠)·우전(于) 등의 서역 요지에 전진기지를 설치하는 등 한대 이래 최고의 위세를 과시했다.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高宗)이 병사하자 황후인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자기의 아들을 제위에 오르게 하고 섭정했으며, 결국 스스로 황제가 되어 주(周)나라를 수립했다. 측천무후의 포학한 성격을 강조하여 부정적인 인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유능한 서족(庶族) 출신 인재들을 과감히 등용하는 등의 혁신적인 정책을 시행하여 긍정적인 인물로 평가하기도 한다. 무주(武周)가 무너진 뒤, 중종(中宗) 황후의 섭정으로 국정이 다시 혼란스러워졌지만 이융기(李隆基:뒤의 玄宗)가 군사를 일으켜 안정을 되찾았다. 현종의 즉위와 함께 성당시대(盛唐時代)가 개막되었다. 개원연간(開元年間:713~741)에는 인구증가에 의한 경지부족, 부병제(府兵制)의 붕괴, 빈부의 격차 등의 사회모순에 대처하여 정관시대의 제도로 복귀를 꾀했고, 측천무후 때의 조류에 역행했으나 사회변화에 대응하는 새로운 전문능력을 갖춘 실무관료에 의존해야만 했다.

 

  현종 제위 후반의 천보연간(天寶年間:742~756)에 노년기에 든 현종은 정치에 흥미를 잃어 양귀비(楊貴妃)의 오빠인 양국충(楊國忠)이 정권을 장악했다. 변방 10명의 절도사체제와 이민족 장군의 중용 등에 의해 지방세력의 비중이 커져 중앙의 권위를 위협했다. 755년에는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 반란군이 뤄양에 이어 장안까지 점령했고 황제는 쓰촨으로 피난했다. 난은 위구르족의 도움을 받아 일단 진정되었지만, 10년에 걸친 동란으로 수·당 전기의 지배체제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더욱이 반란 토벌에 변방민족의 군대가 동원되어 외족이 군사적으로 우세하게 되었다. '안사의 난'중에 국내 각지에도 병권을 통솔하는 절도사가 설치되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민정을 담당하는 관찰사도 겸해 지역적으로 강력한 지배권을 구축하고 당에 반항하기도 했다. 현종 이래 수적으로 증대한 환관들은 점차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고 병권에까지 개입했다. 헌종(憲宗)이 환관에게 살해된 뒤 당말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의 황제가 환관에 의해 옹립되었다. "과거에서 당락을 결정하는 사람은 국노(國老), 즉 환관이고 그들에게 선발된 수험생이 곧 천자이다"(定策國老門生天子)라는 말이 당시의 세태를 잘 반영하고 있다.

 

  한편 지방에서는 교역이 발달하고 화폐유통이 활발해졌으며, 소금·차·술 등의 전매수익이 재정의 주된 수입원이 되었다. 도시의 전통적인 시장체제가 무너지고 상업이 더욱 활발해졌다. 한편 번진(藩鎭)에서는 병란과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특히 '황소(黃巢)의 난'은 전매정책으로 괴로움을 받는 주민과 연대관계에 있던 사염상(私鹽商) 무리를 핵심으로 하급병사와 굶주린 농민이 가세하여 당 제국을 거의 황폐화시켰으며, 한때 장안까지 점령했다. 난은 곧 진압되었지만 투항한 황소의 부하 주온(朱溫)이 당을 멸망시키고 제위에 올랐다.

 

 

                                                                 

                                       송의 건국

 

  중국은 당을 멸망시킨 주온이 후량(後梁:907~923)을 세운 뒤부터 소위 5대10국으로 불리는 분열시대가 시작되었다. 후량 이후 후당(後唐:923~936)·후진(後晉:936~947)·후한(後漢:947~951)·후주(後周:951~960)로 이어지다가, 후주의 금군(禁軍)을 장악했던 조광윤(趙匡胤)이 제위를 이어받아 송을 세워 70년 만에 천하를 통일했다. 태조·태종 때는 각지에 할거하는 절도사의 권력을 빼앗아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는 것을 당면과제로 삼았다. 먼저 태조는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채택하여 문관 관료정치기구를 확립했다. 절도사는 관할지방에서 수도로 불러들였으며, 그들의 군대를 해체하여 그 가운데 정예부대로 금군을 확충·강화했다. 나머지 군대는 주(州)에 속한 상군(廂軍)이 되었지만 주로 관청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데 활용되었다. 태조는 과거제도에 황제가 최종결정을 내리는 전시제도(殿試制度)를 도입했다. 기존의 2급제에 전시가 도입된 3급제는 황제 독재체제 확립에 중요한 기여를 했고, 그후 명·청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초기 이래의 문치주의는 군대의 약체화와 조정 대신들간의 당파싸움이라는 폐단을 낳았다. 송은 요(遼)가 차지하고 있는 연운(燕雲) 16주를 회복하는 것이 건국 이래의 숙원이었지만, 실지 회복은커녕 진종(眞宗) 때 맺은 맹약에 의해 매년 요에게 은 10만 냥, 비단 20만 필을 세폐(歲幣)로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종(仁宗) 때에는 세폐가 더 증가했다. 서북변경에 탕구트족이 세운 서하(西夏)도 송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1044년에 맺은 화약에 따라 송은 서하에 매년 은 7만 2,000냥, 비단 15만 3,000필을 보냈지만 서하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자주 국경을 침범했다. 이때문에 송은 항상 대군을 산시[陝西] 지방에 배치해야만 했는데 여기에 드는 방위비가 세폐와 함께 막대한 액수에 달했다. 한편 조정에서는 과거제도와 관료제도상의 모순이 붕당을 형성하여 4대 인종 이래 당파싸움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와 같이 인종 이래 내치(內治)와 외교상에서 누적된 폐해를 해결하는 문제가 가장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제6대 신종(神宗)은 제위에 오르자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왕안석(王安石)을 기용해 개혁을 단행하게 했다. 왕안석은 신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신법(新法)이라는 혁신적인 정책들을 연이어 실시했다. 신법은 각 방면에 걸친 개혁방안이었지만 기본은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여 대지주·대상인의 발호를 막고 중소 지주·상인을 보호·육성하여 나라의 기초를 견고히 하는 데 있었다. 그는 세법을 정비하여 재화의 운용을 합리화함으로써 국가재정을 충실히 하고, 군대와 풍부한 재력을 바탕으로 하여 대외적으로 적극적·진취적인 대응을 하고자 했다. 신법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어 국고수입이 증가했다. 그러나 대지주·대상인과 보수적인 정치가·학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신종이 죽은 후 정권을 장악한 수구파에 의해 모두 폐지되었다.

 

  신종·철종(哲宗)·휘종(徽宗)의 3대에는 신·구 양파를 둘러싸고 격심한 당쟁이 이어졌다. 당쟁은 갈수록 정책보다 당파를 위한 싸움으로 타락하여 그 폐해가 송의 내·외정책에 큰 타격을 주었다. 휘종 때는 이미 재정이 극도로 궁핍해진데다가 재상인 채경(蔡京)의 무분별한 사치와 낭비로 심한 착취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무렵 만주 쑹화 강[松花江] 지류인 아르티카 강 유역에 살던 여진족의 일부인 완안부(完顔部)는 1115년 아구다(阿骨打)의 영도하에 금(金)을 세워 요를 치고 요동지방을 차지했다. 송은 금과의 동맹으로 남북에서 요를 협공해 건국 이래의 숙원인 연운지방의 회복을 이루려 했다. 금군은 송과의 맹약에 따라 파죽지세로 요를 물리쳤지만 송은 요에게 패하여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 공략에 실패했다. 연경은 금군에 의해 함락되었으며, 1125년 요도 멸망했다. 송은 금에게 거액을 지불하고 연경 및 6주를 넘겨받았지만 그때부터 금은 공격 목표를 송으로 돌리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1127년 금군은 결국 수도 카이펑을 점령하여 황제와 종실 3,000명을 북으로 끌고 갔으며 온갖 금은 재화를 빼앗았다. 결국 송은 멸망했다.

 

 

                                              남송의 발전

 

  송이 멸망할 때 휘종의 9번째 아들인 강왕(康王)은 고종으로 즉위하여 남송을 세웠다. 그는 항저우[杭州]를 수도로 정해 임안부(臨安府)라고 했다. 남송이 안정되자 악비(岳飛) 등의 일부 장군들은 군대를 이끌고 금군과 맞서 분투했다. 그러나 금의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진회(秦檜)가 황제의 신임을 받아 주전론자(主戰論者)들을 탄압하고, 1142년 금과 굴욕적인 화평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송은 금의 신하임을 인정하고 매년 은 25만 냥, 비단 25만 필의 세폐를 보냈다. 2대 효종(孝宗) 때는 금에 대한 남송의 열세도 다소 만회되었고, 중흥의 시기를 맞아 강남·화남 지방의 개발이 진척되어 국력이 충실해졌다. 남송은 국토가 북송 때보다 반으로 줄었지만 경제력 에 있어서는 북송을 능가했다. 3대 광종(光宗) 때 주희(朱熹)를 탄압한 한탁주(韓)가 사람들의 비난을 받자 자신의 세력기반을 굳히기 위해 금과의 전쟁을 일으켰으나, 송이 패하여 다시 불리한 조건으로 화약을 맺었다.

 

  이 무렵 고비 사막 북쪽에서는 몽골족이 칭기즈 칸의 지배 아래 힘을 키워 금을 압박했다. 금이 난을 피해 변(:지금의 카이펑)으로 천도한 뒤부터 송은 금에게 보내던 세폐를 중단했다. 1233년 송은 오고타이 칸이 이끄는 몽골군과 협공해 금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몽골군과의 제휴가 곧 깨지고 송은 몽골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몽골의 쿠빌라이 칸은 1271년 원(元)을 세우고 본격적인 남송 정벌에 나섰다. 송은 원의 공격에 적절한 대응을 취하지 못하다가 1276년 결국 수도가 함락되어 원에 항복했다. 문천상(文天祥)·장세걸(張世傑)·육수부(陸秀夫) 등이 공종(恭宗)의 형인 단종(端宗)을 옹립했으나 단종이 몽골군에 쫓기다가 병사하자 다시 공종의 동생 병(昺)을 세우고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야산[厓山] 싸움에서 패해 육수부가 어린 황제를 업고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으며, 1279년 송의 명맥도 완전히 끊어졌다. 남송은 황제 9명에 153년간 지속되었으며, 북송까지 합치면 황제 18명에 320년간 지속되었다.

 

 

                                       사회·문화

 

  송대에 일어난 사회변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육조 이래의 문벌귀족이 쇠퇴하고 '사대부'(士大夫)라는 새로운 지배층이 출현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유교적 지식과 교양을 갖추고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누렸다. 당시 이들은 형세호(形勢戶)라고도 불렸으며, 대토지를 소유하고 이것을 전호(佃戶)에게 경작시켰다. 또 과거시험을 통해 관호(官戶)가 되면 직역(職役)과 잡역(雜役)을 면제받는 등 각종 특권을 누렸다. 그리고 수리개발, 향약 등의 교화사업, 사창(社倉) 등의 구휼사업을 통해 향촌사회에서 실력을 키워갔다. 농업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은 새로운 지주층이 출현한 배경이 되었다. 이 시기에 화북 한전(旱田) 지대에서는 소맥이 주식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소맥재배가 확대되었고, 소맥과 조의 조합에 의한 2년 3모작이 실시되었다. 강남지방에서는 관개시설의 발전으로 수전(水田)이 증가한 것 외에도 벼의 2기작 시행과 내한성이 강하고 수확량이 많은 품종의 도입으로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크게 증가했다.

교통시설의 발달과 화폐의 광범위한 유통은 상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도시상업을 규제하던 시제(市制)와 방제(坊制)가 무너져 자유로운 상업활동이 가능해졌으며, 성(城) 밖에서도 초시(草市)가 열렸다. 초시를 중심으로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상업도시들이 곳곳에 형성되었다. 사상에 있어서는 훈고·주석 위주의 한·당 유학에서 벗어나 천리(天理)와 인성(人性)의 연구를 중시하는 주자학(朱子學)이 나타났다. 북송의 주돈이(周敦)에서 시작되어 남송의 주희에 이르러 완성된 주자학은 상하 신분질서에 기초한 윤리적 덕목을 강조하여 전제 왕조의 지배질서를 밑받침해주는 관학으로 자리잡았다.

 

 

                                                                     

                                             정치

 

  칭기즈 칸에서 시작되는 몽골 제국은 13세기 중엽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거의 전지역을 정복하고 원(1271~1368)을 세워 약 1세기에 걸쳐 이곳을 지배했다. 원나라는 킵차크·차가타이·오고타이·일 한국(汗國)을 포괄하는 몽골 제국의 종주국이었고, 중국 전통을 이은 정통왕조로 세조 쿠빌라이 칸에 의해 처음 세워졌다. 몽골 제국은 원래 몽골족의 거주지인 북방 초원지대를 본토로 하여 피정복민이 거주하는 남방의 여러 성(城)과 농경지대를 본토에 예속된 속령으로 지배한 유목민 제국이었다. 그러나 쿠빌라이 칸이 원을 세워 몽골 제국은 초원지대만이 아니라 농업지대까지 지배하는 새로운 유형의 정복왕조로 변모해갔다. 처음에 쿠빌라이는 몽골 제국 제4대 황제 헌종(憲宗) 몽케 칸에 의해 중국 방면의 국정을 담당하는 대총독으로 임명되어 중국 통치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형인 헌종이 죽자 자기의 봉토인 개평부(開平府)로 돌아가 그곳에서 스스로 제5대 황제에 올랐다. 그는 개평부를 상도(上都)로 이름짓고 뒤에 대도(大都)로 이름을 고친 중도(中都:지금의 베이징)와 함께 옛 도읍인 카라코룸에 대신하는 수도로 삼았다.

 

  또한 고비 사막 남쪽의 내몽골과 황허 강 북쪽의 화북지구를 신제국의 본토로 삼고 이제까지 몽골족의 근거지였던 북몽골 초원을 신본토에서 지배하는 변경지구로 삼았다. 쿠빌라이의 행동과 새 제국의 성격에 불만을 품은 구몽골 본토의 유목세력은 쿠빌라이의 막내동생인 아리크 부가를 옹위해 항전에 나섰지만 결국 패해 북몽골 지역이 모두 쿠빌라이 정권에 흡수되었다. 또 북방이 혼란한 틈을 타 산둥을 본거지로 하여 일어난 이단(李壇)의 반란도 쿠빌라이에게 진압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쿠빌라이는 종래 중국 땅에 할거하고 있던 많은 한족 봉건제후를 해체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일찍부터 그들이 갖고 있던 군정권(軍政權)과 민정권(民政權)의 분리를 강행해 옛 봉건제후들에게는 단지 병력을 지휘하는 군관의 지위만 주었으며, 민정권은 새로 각지에 설치한 지방행정관청인 노부주현(路府州縣)에 통합시켰다. 민정을 담당하는 중서성(中書省), 군정을 담당하는 추밀원(樞密院), 감찰기관인 어사대(御史臺)를 설치하여 중앙집권적인 관료체제를 정비했다. 1271년 국호를 대원(大元)이라고 했다. 체제를 정비한 원은 남송정벌에 나서 1272년 양양성(襄陽城)을 함락시키고, 4년 뒤 수도 임안(臨安:지금의 항저우)을 정복했다. 3년 후 남송 잔여 세력들의 저항도 모두 진압되었으며, 1279년 원은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대제국이 되었다.

 

  거대한 중국 대륙 전체를 지배하게 된 원은 소수 지배민족이 인구나 생산력에서 훨씬 우세한 피지배민족을 다스릴 수 있도록 엄격한 민족차별정책을 취했다.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민족을 크게 국족(國族)·색목인(色目人)·한인(漢人)·남인(南人)의 4개 부류로 분류했다. 국족이란 지배민족인 몽골족을 가리키고, 색목인이란 투르크계·이란계·유럽계 등의 서방에서 건너온 인종집단을 말한다. 한인은 발해인·여진족·거란족·한족 등 금의 지배하에 있던 사람들, 남인은 남송의 지배 아래 있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 색목인은 국족인 몽골족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았으나, 한인은 색목인보다 한 단계 낮은 대우를 받았다. 남인은 가장 냉대받고 정치에도 거의 참여하지 못했다. 7,000만 명의 한인과 남인이 100만 명도 안 되는 몽골족에게 차별 대우를 받으며 지배되던 원대에는 민족간의 갈등이 심각했다.

 

  5대 황제인 영종(英宗:사디바라)이 태정제(泰定帝) 일파에 의해 암살된 후 제11대 황제이자 원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토곤테무르)가 즉위한 때까지, 10년간 조정에서는 일대 내란이 일어났다. 내란이 진정된 뒤에는 다시 권신(權臣)들에 의한 전권(專權)이 이어졌다. 이같은 중앙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지방에서는 독립의 경향이 싹터 관군의 힘이 약해졌으며, 산둥과 강남지구에 한인·남인들에 의한 민족적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미 혼란에 빠진 중앙의 조정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해 반란은 점차 다른 지역에까지 확대되었다. 1368년 순제가 결국 명군(明軍)의 공격을 받아 대도를 버리고 고비 사막 북부로 도망갔다가 그곳에서 죽음으로써 원은 11대 98년 만에 멸망했다.

 

 

                                          경제

 

  원의 남송정복은 종래의 국경 내에서만 허용되던 송대의 제한적 경제권을 남과 북을 잇는 전대륙적 경제권으로 확대시키는 역할을 했다. 원은 강남지역의 풍부한 물자를 활용하기 위해 남북간의 교역을 더욱 촉진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양쯔·화이허·황허 강을 잇는 대운하를 다구[大沽]까지 연장하여 현재와 같은 형태로 완성시켰다. 한편 1280년에는 사상(私商)들에 의한 남북간 곡물교역을 허용하여, 그후 이 일에 종사하는 상인들 가운데 대상인으로 성장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14세기초에 정부의 탄압으로 사상들의 교역은 중단되었다. 원은 전국적인 경제교류를 활발히 촉진시키기 위해 신용화폐를 많이 유통시켰다. 쿠빌라이는 국초부터 중통교초(中統交)와 지원교초(至元交)를 발행하여 이것을 전국적으로 유통시켰다. 그러나 유목민 지배층의 무절제한 낭비와 방대한 액수에 이르는 군사비 등의 중압으로 재정적 위기에 부딪혔으며 이를 통화량 팽창으로 해결하여 통화가격이 하락하고 인플레이션이 유발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문화

 

  피정복민에 비해 비교적 낮은 문화수준에 있던 원의 지배층은 다른 민족의 종교와 풍습에 대해 관대하고 포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몽골족 자체는 원래 샤머니즘을 숭배했지만 이미 주변 유목민들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불교·도교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특히 원의 경우에는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쿠빌라이는 티베트 불교의 일파인 샤카파의 승려 파스파[八思巴]를 국사(國師)로 삼아 티베트 문자를 모방한 파스파 문자를 만들게 하고, 이것으로 종래의 위구르 문자를 대신해 몽골어를 기록하게 했다. 원은 유교에 대해서도 관용을 보여 소수의 유학자를 정치에 참여시키기도 했고 후에는 과거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수 특권층을 제외한 일반 유학자들은 중하급관료에 진출하는 데 그쳤으며, 강남의 유학자들은 기회도 주어지지 않아 유학자들 사이에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사인층보다 더 큰 곤란을 당했던 것은 무거운 조세부담과 끊임없는 부역징발에 시달렸던 일반 민중들이었다. 이때문에 이들은 백련교(白蓮敎)나 백운종(白雲宗)과 같은 비밀결사에 가담해 후에 원에 대항하는 민족봉기를 일으켰다. 이것은 원 붕괴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정치

 

  명을 세운 주원장(朱元璋)은 빈농 출신으로 어려서 부모형제를 잃고 전국을 유랑하다가, 25세에 홍건군의 부장 곽자흥(郭子興)의 병사가 되어 처음으로 군대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후 계속 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냈고, 1356년 양쯔 강을 넘어 집경(集慶:지금의 난징)을 기반으로 하여 차츰 판도를 넓혀갔다. 1363년 장시·후베이에서 진우량(陳友凉)을 격파하고 다음해 자립하여 오왕(吳王)임을 선포했다. 1367년 장사성(張士誠)·방국진(方國珍)을 장쑤·저장에서 격멸하여 마침내 화중[華中] 일대를 제압했다. 이어 서달(徐達) 등을 북쪽으로 보내 원군(元軍)과 대결하게 하고, 다음해인 1368년 정월에 제위에 올라 국호를 명(明), 연호를 홍무(洪武)라고 했다. 서달의 군대가 8월에 대도(大都:지금의 베이징)를 함락시켜 원은 고비 사막 북쪽으로 물러났다. 1383년 윈난에 남아 있던 원의 일족인 양왕(梁王)을 멸망시켜 비로소 중국 전체를 통일했다.

 

  한족 왕조를 다시 세운 홍무제는 원의 이민족제도를 폐지하고 중국 고유의 제도로 돌아간다는 복고주의적 방침 아래 적극적으로 내정개혁에 착수했다. 우선 행정의 최고기관인 중서성을 폐지하고 6부를 독립시켜 황제에 직속시켰다. 통수권을 갖는 대도독부(大都督府)를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로 분할했으며, 감찰과 사법을 담당하던 어사대를 도찰원(都察院)으로 고쳐 좌우도어사(左右都御史)를 두고 각각 황제에 직속시켰다. 중앙에서 3권을 분립시킨 것 외에 지방에서도 이미 원대의 행성(行省)을 폐지하고 행정을 맡는 승선포정사사(承宣布政使司), 군사를 맡는 도지휘사사(都指揮司使), 감찰을 맡는 제형안찰사(提刑按察司)를 설치했으며, 지방장관을 황제에 직속시켰다. 나아가 국가권력의 기반인 군대를 확보하기 위하여 세습군호로 이루어진 위소제도(衛所制度)를 창설했다. 국가재정이 확립되자 이것을 기반으로 전국에 이갑제(里甲制)를 실시하여 향촌 통치의 철저화를 꾀했다. 이러한 개혁들을 통해 명은 중국 역사상 더욱 강화된 중앙집권에 의한 군주독재체제를 확립했다.

 

  안정된 기반 위에 오르자 홍무제는 금의위(錦衣衛)를 중심으로 하는 전국적 감시체제를 만들어 창업공신을 비롯한 여러 중신들을 제거하는 한편, 혈연관계만을 중시해 23명의 아들을 전국 요지에 분봉시켰다. 1398년 홍무제가 죽고 손자인 건문제(建文帝)가 제위에 올랐을 때, 이들은 이미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건문제가 여러 왕들의 봉지를 줄이려 하자, 연왕(燕王)이 반란을 일으켜 4년간의 싸움 끝에 제위를 찬탈했다.

 

  이렇게 즉위한 영락제(永樂帝)는 찬탈자라는 지위상의 오점을 만회하기 위해 대외정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우선 동북쪽의 여진을 다스리고 남쪽 안난[安南:지금의 베트남]의 정권 다툼에 개입하여 명에 의한 직접통치를 확립시키는 한편, 몽골의 타타르 부족에 대한 원정을 5차례 지휘했다. 또 인도양을 거쳐 동아프리카까지 원정대를 보내기도 했다. 내정에 있어서는 북방의 방위를 위해 수도를 북평(北平)으로 옮기고, 이곳의 이름을 베이징으로 고쳤다. 천도를 위한 준비로 강남의 쌀을 북으로 옮기는 데 필요한 해운과 회통하(會通河) 등의 대운하를 부활시켰다. 이외에도 내각제도를 창설하고 중앙군인 경영(京營)을 강화했으며, 특무기관인 동창(東廠)을 설치하는 등 황제권의 강화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6대 정통제(正統帝) 때에 이르러 환관 왕진(王振)이 정권을 독단하여 명초 이래의 정치기구가 점차 문란해졌다. 이때 몽골 고원에는 오이라트 부족이 에센 태사(太師)의 통솔하에 강대해져서 전몽골을 지배하에 넣고 중국 북부 변경을 위협하다가 1447년 대거 침입했다. 왕진의 무모한 권유로 정통제가 직접 정벌에 나섰지만 토목보(土木堡:허베이 성 화이라이 현[懷來縣])에서 크게 패하고 황제 자신은 포로가 되었다. 이것을 '토목의 변(變)'이라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병부시랑 우겸(于謙)이 황제의 동생을 제위에 앉히고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면서 베이징을 단호히 사수하여 결국 에센은 물러가고 정통제가 되돌아와 복위했다. 이후 명의 대외정책은 매우 소극적으로 되어 선왕의 업적을 지키는 데 불과했다.

 

  성화제(成化帝)·홍치제(弘治帝) 때는 무사평온한 시기가 잠시 지속되었다. 정덕제(正德帝)·가정제(嘉靖帝) 때는 다시 환관이 정권을 휘두르고 황제가 정치를 돌보지 않음으로써 정치가 문란해져 민란과 종실 봉건왕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가정제 때는 북쪽 변방에서 몽골의 타타르 부족이 더욱 강성해져서 중국 국경을 자주 위협했으며, 남동 연해지방에서는 왜구가 발호했다. 만력제(萬曆帝) 때 내각수보(內閣首輔) 장거정(張居正)이 그동안의 적폐를 개혁하고 황허 강의 치수공사를 완수했으며, 전국적인 토지 장량(丈量)을 실행하고 전부요역(田賦役)의 불균형을 시정하는 등 국가재정의 충실을 기하는 치적을 올렸다. 그러나 1582년 장거정이 죽자 만력제는 곧 정치를 게을리하고 환관을 중용했다. 환관의 발호로 정치가 부패하자 재야 사인·학자들과 일부 관료들 사이에서 환관에 대한 격렬한 비판이 일었다. 이들 반(反)환관파 사람들은 동림당(東林黨)으로 불렸는데, 천계제(天啓帝) 때 환관 위충현(魏忠賢)에 의해 대대적인 탄압을 받아 정계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그동안 만주에서는 여진의 여러 부족이 누르하치(奴兒哈赤)의 강력한 통치력을 바탕으로 통일되어 강대한 세력을 형성했다. 누르하치가 1616년 후금(後金)을 건설하자, 명은 후금을 견제하기 위해 대군을 파견했지만 패하고 선양[瀋陽]·랴오양[遼陽]을 후금군에게 빼앗겼다. 북방 방위에 드는 군사비를 조달하기 위해 명이 각종 부과세를 징수하여 농민의 세금부담이 과중한 데다가, 1628년 산시 성[陝西省]에서는 옌안[延安] 지방의 대기근으로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반란군은 기민(飢民)과 도망한 병사들을 흡수하면서 세력이 점차 확대되어 허난·쓰촨·후베이·안후이까지 세력을 뻗쳤다. 1643년 이자성(李自成)이 이끄는 반란군이 베이징을 함락시키자 숭정제(崇禎帝)는 자살하고 명은 멸망했다.

 

  명대의 관제는 집권적 군주독재체제의 확립을 목표로 하여 정비되었던 점에 특징이 있다. 초기에는 잠시 원의 제도를 답습했지만, 1380년 홍무제는 최고 행정기관인 중서성을 폐지하고 6부를 독립시켜 각각 황제에 직속시켰다. 이로써 재상이 없어지고 각 부 장관인 상서(尙書)는 개별적으로 정부 분담의 책임을 질 뿐, 총괄권은 황제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군사기관에서도 대도독부가 오군도독부로 개편되어 분할된 통수권이 황제에게 직결되는 구조가 되었다. 지방의 각 성에는 민정을 담당하는 승선포정사사, 사법을 담당하는 제형안찰사, 군정을 담당하는 도지휘사사가 설치되어 각각 대등한 권한을 부여받고 황제에게 직속되었다. 그러나 황제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하는 것이 쉽지 않았으므로 홍무제는 전각대학사(殿閣大學士)를 고문으로 두었다. 영락제 때 이것이 내각제도로 발전하여 대학사의 권한이 강화되었고, 중기 이래 내각의 수보(首輔)는 실질적으로 재상과 동등한 지위를 누렸다. 명대의 일반 백성은 민호(民戶)와 군호(軍戶)가 분리되어 있었다. 민호는 이갑제에 따라 편성되어 전부(田賦)와 요역을 부담하고, 군호는 군둔제(軍屯制)에 기초한 위소(衛所)로 조직되어 군역을 담당했다.

 

 

                                       사회·경제

 

  명초에 홍무제는 원말의 대란으로 황폐해진 농업생산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함과 동시에 주곡생산 외에 부업생산으로 목화·견·마 등의 재배에도 힘을 기울였다. 명 중기 이래 화폐경제의 발달과 함께 주곡을 중심으로 하는 자급자족적인 생산이 점차 붕괴되면서 이들 부업생산은 상품작물로서 더욱 중요해졌다. 하층농민들은 과중한 부세로 인한 가계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상품작물을 재배했다. 명대의 특징적인 사회변화로 은을 중심으로 한 화폐경제의 발달을 꼽을 수 있다. 명초에는 대명보초(大明寶)라는 지폐와 동전이 함께 사용되었다. 그러나 보초의 태환(兌換)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발행 후 회수가 적절히 이루어지지 않아 가치가 날로 하락하여 은의 사용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중기 이후에는 도시뿐만 아니라 농촌에까지 은이 보급되었다. 이러한 현실은 세제(稅制)에도 반영되어 1436년 금화은(金花銀)이라는 부세의 은납화가 강남에서 시작된 것을 필두로 다른 세역에까지 확대되었다. 이러한 은경제의 보급에 힘입어 16세기 후반에는 중국 세법 가운데 양세법 이래의 대개혁이라고 할 만한 일조편법(一條鞭法)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일조편법은 부세와 요역을 단일화하고, 징수를 간소화하여 은납화한 세법이다. 이러한 제도가 시행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은경제의 보급 외에 상품경제의 발전과 토지소유관계의 변화가 주요요인으로 작용했다.

 

 

                                           문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이라는 명대의 특징은 문화에서도 두드러져, 관학인 주자학이 교육의 중심이자 과거시험의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주자학에 의한 학문과 사상의 통제가 반발을 불러일으켜, 선종(禪宗)의 영향 아래 정좌(靜坐)에 의한 마음의 수양을 주장하는 심학(心學)이 일어났다. 왕양명(王陽明)은 심학을 발전시켜 절대적 유심론의 입장에서 양지설(良知說)을 주창하고 지행합일론(知行合一論)을 전개했다. 그의 학설은 후에 좌우 양파로 나뉘어, 명말에는 좌파 중에서 인간의 욕망을 전면적으로 긍정할 것을 주장한 이지(李贄)가 나왔다. 그러나 주자학이나 양명학이 점차 공론화되자, '심'의 문제보다는 사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명말청초에 실학을 중시하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이 일어났다. 문학에서는 시문보다 소설·희곡 등의 서민문학이 꽃을 피웠다. 중국의 4대기서(四大奇書)인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수호전 水滸傳〉·〈서유기 西遊記〉·〈금병매 金甁梅〉가 이 시기의 대표작이며, 구우(瞿佑)의 〈전등신화 剪燈新話〉도 유명하다.

 

 

                                                                

                                     성립과 발전

 

  명대에 만주의 여직(여진의 옛 이름)은 건주여직(建州女直)·해서여직(海西女直)·야인여직(野人女直)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16세기말 누르하치가 건주여직을 통일하고 이어 해서여직의 여러 나라들을 통합했다. 만주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된 누르하치는 후금을 세우고 칸[汗]의 지위에 올랐다. 누르하치에 이어 칸에 즉위한 홍타이지(皇太極)는 우선 물자확보를 위해 조선을 침공하고 형제관계를 맺었으며, 다시 서쪽의 찰합이부(察哈爾部)를 멸망시켰다. 그는 원의 직계가 대대로 이어오던 옥새를 손에 넣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국호를 대청(大淸)이라고 했다. 국가기구의 중심은 누르하치 때에 만주족을 재편성하여 만든 군사·행정 조직인 팔기제(八旗制)였지만 홍타이지는 한족 지식인을 대거 등용하고 명의 중앙관제를 모방하여 6부 등을 설치했다. 홍타이지가 죽고 어린 순치제(順治帝)가 즉위하자 숙부인 도르곤이 섭정했다. 1644년 명이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하자 청은 투항해온 명의 장군 오삼계(吳三桂)의 도움을 받아 산하이관[山海關]을 넘어 베이징에 입성했다. 청군이 베이징에서 이자성을 몰아낸 뒤 순치제는 선양에서 베이징으로 옮겨와 이곳을 수도로 정했다. 이때부터 청은 명을 계승하여 중국의 왕조가 되었다.

 

  청은 원이 몽골 지상주의를 내세웠던 것과 달리 중국을 지배하기 위해 한족의 협력을 구했다. 만주족은 원래 수렵민족이면서 농경을 겸하고 있어 유목민족인 몽골족과는 달리 한족과 같은 농경국가로 발전하기를 원했다. 또한 몽골족처럼 중국에 진출하기 전에 서방의 이슬람과 이란 같은 수준 높은 문화를 접할 만한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문화수준이 높은 한족을 지배하는 데 지식인들의 협력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한족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주자학을 정치이념으로 채용했으며, 명의 관료를 등용하고 즉시 과거를 시행했다. 중앙관청에는 만주족과 한족을 병용하고 한족도 만주족과 같은 지위로 임명했다. 청이 입관한 후 청에 대한 저항세력을 평정하는 데는 20여 년이 걸렸다. 이 과정에서 큰 공로를 세운 오삼계(吳三桂) 등의 군벌이 윈난·광둥·푸젠 성에 봉해져 제후에 맞먹는 반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이들은 강희제(康熙帝)가 자신들을 축출하려 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1683년 강희제는 결국 이들을 진압했으며, 같은 해 타이완[臺灣]까지 정복했다.

 

  청은 강희제·옹정제(雍正帝)·건륭제(乾隆帝) 때 전성기를 누렸다. 국내적으로 정치가 충실해졌으며 대외적으로도 세력이 크게 확대되었다. 강희제는 1689년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헤이룽 강[黑龍江] 유역을 확보했으며, 몽골의 준갈이군(準爾軍)을 물리쳐 이 지역을 세력권에 포함시켰다. 건륭제는 다시 한번 준갈이를 평정한 뒤 그들과 손을 잡고 청에 반항하던 동투르키스탄의 위구르족을 다스렸다. 그결과 청의 영토는 톈산 산맥[天山山脈] 남북으로까지 확대되었는데 이곳을 새로 개척한 땅이라 하여 신장[新疆]으로 이름붙였다. 이외에도 건륭제는 여러 차례의 외정을 통해 국력을 과시했으며, 이때 청의 판도는 최대에 달했다. 즉 중국 본토, 만주, 타이완을 직할령으로 하고 내몽골·외몽골·칭하이[靑海]·티베트·신장을 간접통치했으며, 베트남·타이·미얀마 등과 조공관계를 맺었다. 국내정치에서도 이 시대의 황제는 대체로 유능했으며, 환관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관료제도가 원활히 운용되어 오랫동안 국내 평화가 유지되었다. 이로써 안정된 사회와 경제 발달이 이루어졌으며, 인구가 증가하고 개발이 진행되었다. 당시 서남부 각 성의 오지에는 먀오족[苗族] 등의 소수민족이 토관(土官)·토사(土司) 등의 원주민 지배자에게 간접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한족들의 이주가 증가하면서 중앙에서 파견된 정식관리인 유관(流官)이 토사 등을 대신하여 다스리는 개토귀류(改土歸流) 정책이 실시되었다. 이것은 특히 옹정·건륭 기간에 대규모로 실시되어 이 지역들도 중국 본토와 똑같은 통치를 받았다.

 

 

                                                 정치제도

 

  청은 입관 후 대체로 명의 제도를 답습하면서 관제를 정비했지만 이민족 국가로서의 독특한 면도 가지고 있었다. 홍타이지 때 황제의 측근에서 문서를 작성하고 기록을 보존하기 위해 설치했던 내삼원(內三院)을 입관 후 내각(內閣)으로 개편했다. 중요한 사무는 만주족 중신과 황족으로 이루어진 의정왕대신(議政王大臣)에서 처리했다. 옹정제 때 군사기밀을 보호하기 위해 군기처(軍機處)를 설치하여 중요한 일을 처리하자 내각은 보통의 업무만 담당하게 되었으며, 의정왕대신은 유명무실해졌다. 중앙사무를 담당한 6부와 대리시(大理寺) 등은 명의 제도를 답습했으며, 변경지대의 사무를 맡은 이번원(理藩院)과 궁중 관계의 사무를 담당한 내무부(內務府) 등은 명대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기관이다. 지방행정기관으로는, 전국을 18성으로 나누어 각 성에 순무(巡撫)를 두고 2성마다 총독(總督)을 두었다. 총독과 순무는 명대에 시작된 제도로 처음에는 임시관이었지만 점차 상설화되어 청대에는 지방 최고장관의 역할을 담당했다. 군대는 8기제도(八旗制度)를 기본으로 했다. 군기가 황·백·홍·남의 4가지 색과 테두리의 유무에 따라 8가지 종류로 나뉘어져 있어 8기라는 명칭이 생겼다. 만주인은 모두 8기로 편성되어 이것을 만주 8기라 했으며, 그밖에 몽골 8기와 한군 8기가 있었다. 8기 외에 한족으로 이루어진 녹영(錄營)이 베이징과 지방의 치안을 담당했다. 청의 군사력은 융성기에도 8기 20만 명, 녹영 60만 명이었는데, 18세기말경부터 그나마 모두 쇠퇴하여 '백련교도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민병인 향용(鄕勇)이 활약했다.

 

 

                                             사회·경제

 

  청대에는 정치가 안정되면서 이제까지 수천만에 불과하던 인구가 18세기에는 3억, 19세기에는 4억으로 늘어났다. 그결과 중국 곳곳에서 개발이 진척되었으며, 이주가 금지되었던 만주와 남양(南洋:청말 장쑤·저장·푸젠·광둥의 沿海 지역을 일컬었던 이름)에까지 많은 인구가 이주했다. 사회적으로 지배민족인 만주족은 기인(旗人)으로서 우대받고 기지(旗地)를 공급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후기로 갈수록 기지를 상실하고 생활이 곤란해졌다. 한족 지주층 가운데 유교적인 교양을 갖춘 지식인들은 과거를 통해 관료로 진출하거나 향신으로서 농촌에서 질서유지 등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농민들은 치안유지를 위해 보갑제(保甲制)로 편성되어 서로 감시하고 연대책임을 졌다. 1713년 인정(人丁)이 정액으로 고정된 후 정은(丁銀)이 지은(地銀)으로 통합된 형태의 조세제도가 확립되어 지정은제(地丁銀制)가 성립되었다. 이로써 중국에서는 인두세가 소멸되고 거의 토지만을 기준으로 과세하는 방식이 정착되었다. 상업거래는 전국적인 규모로 이루어졌으며, 거대한 자본을 가진 객상(客商)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특히 신안[新安]·산시[山西] 상인이 양대 세력을 이루었는데 신안 상인은 건륭 말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대신 상하이[上海]를 중심으로 전장업(錢莊業:금융업 점포)을 경영하는 사오싱[紹興] 상인이 우세해져 이들은 후에 저장[浙江] 재벌로 발전했다.

 

 

                                                 문화

 

  청대에도 주자학이 계속 관학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명말청초의 학자인 고염무(顧炎武)·황종희(黃宗羲) 등의 실증주의적 학풍에 영향을 받은 고증학(考證學)이 두드러지게 발전했다. 고증학을 통해 역사학·지리학·음운학·금석학(金石學)·서지학(書誌學) 등이 발전하는 성과도 보였지만, 청의 엄격한 사상통제와 오랜 태평성세를 거치는 동안 고증학자들은 점차 현실과 동떨어진 문제에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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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기울어가던 청이 1840년 아편전쟁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은 이후부터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국의 전제군주제가 무너지기까지 중국인들은 가중되는 외압 속에서도 근대화를 향한 자구(自救) 노력을 계속해왔다. 그러나 위로부터의 개혁 노력이나 아래로부터의 개혁의지가 봉건세력과 제국주의의 끊임없는 방해로 모두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중국은 반식민지 사회로 전락해갔다.

 

 

                                             아편전쟁

 

  18세기 중반부터 대중무역에서 선두를 달린 서구의 국가는 영국이었다. 영국의 대(對)중국 무역은 1600년에 설립된 동인도회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동인도회사는 18세기에 중국에서 비단·차·도자기 등을 수입하고, 영국의 모직물·시계·완구류와 동남아시아 및 남아시아 원산의 향료·보석·진주 등을 중국에 수출했다. 그 가운데서도 차는 영국인이 즐기는 일상 기호품이 되면서 막대한 양을 수입하기에 이르렀다. 반면 중국은 소농업과 가내수공업이 밀접히 결합된 자연경제를 유지하고 있어서 서구 자본주의 상품이 침투하기 어려운 여건이었다.

동인도회사는 계속되는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해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그뒤로 아편을 사용하는 풍습이 중국 전역에 확산되어 아편 수입이 갈수록 증가하자 청은 아편을 엄금하고 아편 사용자를 사형에 처하는 엄격한 법률을 만드는 한편, 광저우에 임칙서(林則徐)를 파견하여 아편 수입을 금지시키도록 했다. 1830년 임칙서는 광저우에 부임하자마자 외국 상인이 가지고 있는 아편을 몰수하여 파기하고, 외국 상인들에게 앞으로는 아편을 가지고 다니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도록 했다. 그리고 이것을 거부한 영국 상인들을 마카오에서 쫓아냈다. 전부터 청의 무역제한 정책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영국은 이 사건을 완고한 청 정부에 자유무역을 요구할 계기로 삼아, 1840년 중국에 선전포고하고 광저우·아모이(또는 샤먼[廈門])·저우산[舟山]을 공격했다. 이어 북상하여 다구에 이르렀으며, 바이허 강[白河]을 거슬러 올라가 베이징을 위협했다. 청은 결국 영국에 굴복하여 홍콩 할양, 배상금 지불, 광저우·아모이 등 다섯 항구의 개항을 약속한 난징 조약[南京條約]을 맺었다. 그러나 항구가 개항된 뒤에도 영국의 면제품 수출량은 늘지 않았다. 다시 화북과 양쯔 강 연안에 개항장이 필요한 영국은 결국 1856년 홍콩에서 애로호(號)에 중국 관헌이 난입한 것을 빌미로 프랑스와 함께 중국을 공격했다. 이 전쟁으로 톈진 조약[天津條約]과 베이징 조약이 맺어져 중국은 영국·프랑스에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이외에도 영국에 주룽 반도[九龍半島]를 할양하고, 한커우[漢口]·톈진·난징 등의 항구를 새로 개항하며, 공사의 베이징 주재, 외국인의 내지 여행, 그리스도교 포교의 자유 등을 허가했다.

 

 

                                                        태평천국운동

 

  아편전쟁은 18세기말부터 시작된 중국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켰고, 거액의 배상금 부담이 농민에게 전가되어 농민의 유민화는 더욱 심해졌다. 청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곳곳에서는 폭동이 일어났다. 이때 홍수전(洪秀全)과 풍운산(馮雲山)이 그리스도교를 모방한 배상제회(拜上帝會)를 만들어 무리를 규합했다. 배상제회는 천부(天父)인 황상제(皇上帝)를 만물의 창조주로 섬기는 일신교로서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남녀노소·빈부의 차이를 두지 않는 평등주의를 주장했다. 배상제회의 이러한 주장은 과중한 전조(田租) 및 조세부담에 시달리며 불충분한 생산수단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하층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어 신도수가 갈수록 불어났다. 1851년 1월 홍수전은 배상제회 교도들을 광시 성 구이핑 현[桂平縣] 진톈춘[金田村]으로 결집시켰다. 그는 이곳에서 태평천국의 건설을 선언하고 봉기를 일으켰다. 기율(紀律)이 엄격한 태평천국군은 곳곳에서 빈농과 유민들의 호응을 받으며 북진했다. 이들은 광시 성에서 후난·후베이·장시·안후이 성으로 진격했으며, 3월에는 난징을 점령하여 그곳을 천경(天京)으로 삼았다. 수도를 정한 후 천조전무(天朝田畝) 제도를 반포하여 토지균등분배의 이상을 실현하려 했고, 농촌에 향관(鄕官)을 설치하여 군의 편제와 일치시켰다. 그러나 정부와 외세에 의한 양면 공격과 태평천국 지도부의 분열로 태평천국군은 점차 기세가 꺾였다. 1864년 홍수전이 죽고 난징도 함락되어 약 15년에 걸친 태평천국운동도 막을 내렸다. 태평천국운동은 비록 실패했지만 청의 붕괴를 가속화시켰으며, 봉건적인 정부와 외국 세력에 맞서 싸우는 민중의 단결력을 보여주었다. 태평천국의 정신은 중국인에게 반제·반봉건 운동의 상징으로 오랫동안 존속되어 왔다.

 

 

                                                              양무운동

 

  아편전쟁 이래 국제사회에 새로이 눈을 뜨게 된 청은 선진 서양문물 도입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이러한 일은 주로 증국번(曾國藩)·이홍장(李鴻章)·좌종당(左宗棠) 등의 양무파(洋務派) 관료들이 담당했다. 이들은 주로 군비(軍備)에 있어서는 서양식 훈련과 신식 무기로 무장된 군대양성에 노력했다. 군함을 구입하여 해군을 창설하고 산둥 성, 직례(直隸), 만주의 연해에 포대를 설치하여 베이징 방비에 힘을 기울였다. 또 무기·탄약·선박 등을 중국인의 손으로 직접 제작하기 위해 상하이와 푸저우[福州]를 비롯한 주요개항장에 군수공장과 조선소를 세웠다. 군수 방면에서 시작된 근대화는 곧 통신·운수·광공업에까지 확대되어 윤선초상국(輪船招商局)·개평광무국(開平鑛務局) 등이 연이어 문을 열게 되었으며, 톈진에는 전보국도 세워졌다. 그리고 광저우·우한[武漢]·상하이 등에 근대적인 직포(織布)·제사(製絲) 공장이 세워졌다. 이들은 거의 관리가 운영하거나(官辦), 관리가 감독하고 상인이 경영하거나(官督商辦), 관리·상인 합작형태(半官半民)였다. 그러나 이러한 관독상판 기업은 경영권을 관료가 장악하여 쓸데없는 직책이 많고 능력을 무시한 친분 위주의 인사가 이루어졌으며 지출상의 낭비가 심했다. 더구나 경영상의 손익 발생과 상관없이 관리에게 돌아가는 배당이 경영과 자본 축적에 큰 지장을 초래했다. 1870년에 이르러 민간 자본가들 가운데는 근대적 공장을 세우려는 사람이 있었으나 관청에서는 관영이 아니면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이같이 관독상판 기업은 근대적 산업의 자유로운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중국 주변국의 상황

 

  중국이 국내에서 동치중흥(同治中興)의 평온기를 맞는 동안 주변국들이 열강의 침탈을 받아, 중국은 서구 열강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놓였다. 러시아는 앞서 1689년의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인해 만주로 남하하는 것을 잠시 멈추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부터 다시 남하하기 시작하여 1858년 영국·프랑스와 싸우고 있는 중국으로부터 헤이룽 강[黑龍江] 이북지역을 되찾았으며, 1869년에는 우수리 강 동쪽을, 1871년에는 일리 지방을 점령했다. 영국은 인도를 완전히 식민지로 만든 뒤 싱가포르, 말라카, 말레이 반도를 차례로 점령했으며, 1886년에는 미얀마를 손에 넣었다. 프랑스는 1862년 코친차이나 동부 3성을 세력권으로 삼은 데 이어, 1883년 북부의 하노이 중부에 있는 안남까지 정복하여 베트남 전역을 보호국으로 삼았다. 통킹과 안남은 중국의 윈난·광시 지방과 경계를 이루고 있어 국방상 중요한 지점이었다. 그러므로 중국은 베트남을 적극 원조하여 프랑스 사이에 충돌이 잦았다. 결국 1884년 양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고 중국이 전쟁에 패하여 프랑스는 베트남 보호권을 인정받았으며, 베트남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육상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894년 조선에서의 세력확대를 꾀하는 일본과 현상유지를 원하는 중국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중국은 이 전쟁에서도 패해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을 맺고, 일본에 2억 냥의 배상금 지불과 타이완, 펑후 섬[澎湖島], 랴오둥 반도[遼東半島]의 할양을 약속했다. 그뒤 일본은 러시아·프랑스·독일 등 3개국의 권유에 따라 랴오둥 반도를 3,000만 냥을 받고 중국에 반환했다.

 

 

                                         무술정변

 

  양무파들은 국력 증강을 위해 서양의 선진기술은 받아들여도 정치제도나 이념의 변화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1885년 이후 하급관료와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정치제도의 개혁과 의회 창설을 요구하는 소리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공양학(公羊學)의 입장에서 공자를 혁명적 사회발전단계론자라고 주장한 캉유웨이[康有爲], 과거를 폐지하고 근대적 교육제도와 의회제도의 도입을 주장한 량치차오[梁啓超], 유교적 윤리와 전제군주제를 비판한 급진적 사상가 담사동(譚嗣同) 등이 있었다. 이들의 건의를 받아들인 광서제(光緖帝)는 1898년 6월 11일 명정국시(明定國是)를 발표하고 변법사상가들을 불러들여 변법을 위한 새 아문(衙門)을 설치했다. 그러나 100여 일 후 서태후(西太后)가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광서제의 노력도 실패로 끝났다. 캉유웨이를 비롯한 변법파들의 변법운동은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 그들은 개혁에 앞서 계몽운동을 벌여 관리나 향신들을 계몽시키는 데 노력했으나, 전통에 어긋난다는 비난만 받았다. 특히 서태후를 옹위하는 보수적인 만주족 대신들은 이 개혁에 의해 자신들의 지위가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했다. 이로써 무력을 쥔 보수파의 쿠데타로 개혁은 좌절되었고, 그후 중국은 서태후의 섭정으로 보수적·배외적인 정책을 이어나갔다.

 

 

                                                             의화단운동

 

  산둥 성에서 직례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18세기 무렵부터 의화권교(義和拳敎)라고 하는 비밀결사가, 계속되는 자연재해와 가내수공업의 몰락으로 증가하는 유민들을 흡수하여 거대한 세력을 형성했다. 이들은 손오공(孫悟空)과 저팔계(八戒)를 신으로 모셨으며, 권봉(拳棒)을 연습하면 칼과 창에 다치지 않는 신통력을 얻게 된다고 믿었다. 이들은 청일전쟁 후 민중생활이 불안해지고 배외적인 분위기가 무르익자, 교도들을 단련(團鍊)으로 편성하여 산둥 성에서 '청을 도와 서구 세력을 몰아내자'(扶淸滅洋)는 구호를 내걸고 구교(仇敎:반그리스도교) 운동을 벌였다. 1900년 직례 성(지금의 허베이 성)을 침입하고 톈진·베이징을 공격하여 철도·전선을 파괴했다. 또한 교회·병원을 불지르고 그리스도교도와 선교사, 일반 외국인들까지 습격했다. 이때 서태후 일파는 의화단의 배외운동을 도와 결국 일본·영국 등의 8개국과 전쟁을 벌였다. 전쟁이 시작된 지 2개월 만에 베이징은 연합군에게 점령되었고, 서태후와 광서제는 시안으로 피신했다.

 

  중국은 1901년 강화조약을 맺고 해관세(海關稅)·염세(鹽稅) 등을 담보로 한 4억 5,000만 냥의 배상금을 물었다. 또한 베이징 시내에 외국 군대가 호위하는 공사관 구역이 설치되고 무기·탄약의 수입이 2년간 금지되었으며, 베이징 주변의 방위를 중국 대신 외국 군대가 담당하는 등 정치·군사·경제 전반에 걸쳐 외국의 지배를 받았다. 이 단계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반식민지화가 거의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해혁명

 

  1911년 청의 철도국유화령은 광둥·후난·후베이·쓰촨 성민(省民)의 거센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민영철도를 외국에 팔아넘기는 것과 다름없는 철도국유화령의 철회를 요구하면서 도시에서는 파업, 농촌에서는 봉기가 일어났다. 일찍부터 우한 신군(新軍)에 봉기를 일으키도록 공작해온 동맹회는 신군의 일부가 쓰촨의 폭동진압에 파견되는 것을 기회로 봉기를 계획했다. 8월 20일 혁명군은 우창·한커우·한양[漢陽]을 점령하고 리위안훙[黎元洪]을 도독(都督)으로 추대했다. 리위안훙이 군정부를 조직하고 후베이 성의 독립을 선언하자 이에 호응하여 후난 성을 비롯한 전국의 각 성이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한 각 성의 대표는 상하이에 모여 쑨원[孫文]을 임시대총통에 추대하고, 1912년 1월 1일 난징에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혁명군 진압을 위해 청 정부가 기용한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쑨원으로부터 임시대총통의 지위를 양보하겠다는 밀약을 받고 2월 12일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를 퇴위시켰다. 이리하여 청은 누르하치가 즉위한 이래 12대 296년, 명이 멸망한 지 268년 만에 멸망했다. 그러나 대총통에 취임한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세력 기반인 베이징에 정부를 조직하고, 국민당을 탄압하여 국민당의 실력자인 쑹자오런[宋敎仁]을 암살했다. 1916년에는 제제(帝制)를 부활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그의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거센 저항이 일어나고 각 성이 토원(討元)의 기치를 내걸어 잇따라 독립하는 가운데 그는 실의 속에 병사했다.

 

 

                                          현대

 

  1910년대 중반부터 1949년에 이르는 격동의 30년을 중국에서는 신민주주의혁명 시기라고 부른다. 이 용어는 실패로 끝난 구민주주의 혁명, 즉 신해혁명에 대비하여 이 시기 중국혁명을 주도해나간 중국공산당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 쓰인 말이다. 사실 중국공산당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이후지만 1921년 중국공산당이 창설된 이후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주의를 주요과제로 하던 중국혁명에 영향을 끼친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신문화운동

 

  학자와 일부 정치가들은 민국 초기의 어두운 정국 속에서도 문화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중국사회를 개조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을 신문화운동이라고 하며, 잡지 〈신청년 新靑年〉과 베이징대학교가 이 운동의 중심을 이루었다. 〈신청년〉은 1915년에 창간되어 중국 청년들에게 개인의 자유와 평등, 과학적 정신을 고취시키며 중국 사상계를 선도했다. 〈신청년〉의 창간자인 천두슈[陳獨秀]는 봉건적인 윤리와 가족제도를 비판했고, 후스[胡適]와 루쉰[魯迅]은 백화문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베이징대학교에서는 차이위안페이[蔡元培]가 리다자오[李大釗]를 비롯한 진보적 지식인들을 받아들여 이곳을 신문화운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열린 파리 평화회의에서는 산둥 성에서 차지했던 독일의 권익을 일본 측이 넘겨받는 것을 승인했다. 중국 청년들은 사상혁명에 자극을 받아 정치적으로 눈을 뜨게 되어 베이징에서 파리 평화회의의 결정에 항의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상하이 등의 여러 도시로 확대되었고, 상인과 노동자들의 파업에 이어 시민들의 일본 상품 배척운동이 전개되었다. 정치운동과 사상적·문화적 개혁운동이 함께 일어났던 5·4운동은 대중적 반제국주의·반봉건주의 운동의 기점이 되었다. 1920년 여름 베이징 정부를 장악한 직례파(直隸派) 군벌이 자유화정책을 취하자, 언론활동이 활발해지고 각종 외국사상들이 번역·소개되었다. 미국의 실용주의,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 등 외국의 선진사상들이 많이 소개되었는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주의 학회들이 만들어졌다. 리다자오와 천두슈는 코민테른 극동부장 보이틴스키를 만나 공산주의청년단을 만들고 이것을 기반으로 중국공산당 창설작업에 들어갔다. 1921년 제1회 전국대표대회가 열린 후 약 2년간 중국공산당은 주로 당원 확보와 마르크스주의의 선전에 주력했다. 또한 반제국주의적·반군벌적인 국민혁명의 필요성을 대내외적으로 역설하고, 철도와 공장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조직에 힘을 기울였다.

 

 

                                  제1차 국공합작

 

  창당 초기에 계속되는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던 중국공산당은 국공합작을 제안한 마링의 권고에 따라 국민당과 제휴할 것을 결정했다. 소련의 지원을 받아 광둥 성에 혁명정부를 조직한 쑨원은 1923년 국민당 개조선언과 당의 강령초안을 발표하여, 연소(聯蘇)·용공합작(容共合作)·농공부조(農工扶助)의 3대 정책을 명시했다. 또한 1924년초 공산당원을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받아들였다. 장제스[蔣介石]는 소련에 가서 소련군의 편제를 배우고 돌아와 황푸[黃]에 군관학교를 설립, 장교를 양성하고 이들을 중핵으로 국민혁명군을 조직했다. 1925년 5월 30일 상하이에서 영국인 경찰의 발포 명령으로 중국인 파업 노동자들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상하이에서는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6월 23일 영국-프랑스 연합군과 황푸 군관생도들 사이에 교전이 일어나 많은 사상자를 냈고, 공산당에 의해 지도된 파업은 16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국민당은 국민적 지지를 얻게 되어 1926년 1월 당원수가 20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1925년 5월 1,000명에 불과하던 공산당의 당원수가 1925년말에 이미 거의 1만 명이 되었다.

 

  그러나 국공합작 아래 공산당이 급속히 당세를 확장하고 공산당이 지도하는 대중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국공합작을 계속 지지해온 좌파와 국공분리를 주장하는 우파 사이에 분열이 심화되었다. 1925년 3월 쑨원이 죽은 뒤 분열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여 8월에 우파가 시산[西山] 회의파를 형성했다. 1926년 3월에는 장제스가 공산당원들을 탄압한 중산함[中山艦] 사건을 일으켰다. 1926년 7월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혁명의 당면목표인 북방군벌의 타도, 즉 북벌(北伐)을 개시했다. 북벌은 순조로이 진행되어 국민혁명군은 2개월 만에 후난·후베이를 장악하고, 1927년 3월에는 상하이와 난징을 점령했다.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부를 난창[南昌]으로 옮기고, 우한으로 옮긴 광둥 정부와 대립했다. 그는 1927년 4월 12일 대대적으로 공산당원을 살해했다. 또한 국민당 우파를 이끌고 난징 국민정부를 세워 우한 정부와 대립했다. 난징 정부가 강화되면서 우한 정부도 동요하다가 7월에 공산당과 결별을 선언했다. 이로써 제1차 국공합작이 끝이 났다.

 

 

                                  난징 국민정부 시기

 

  장제스는 4·12사건을 일으킨 후 다시 북벌에 나서 1928년 6월 베이징에 입성했다. 베이징 정부는 무너졌지만 여러 지역에 군벌이 남아 있어 전국 통일을 실현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난징 정부는 산시[山西]의 옌시산[閻錫山], 서북의 펑위샹[馮玉祥], 동북의 장쉐량[張學良] 등의 군벌과 타협하면서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고, 이들 공동의 적인 공산당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 국공분열 후 공산당은 인민해방군 건군 기념일인 1927년 8월 1일 난창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장시 성으로 쫓겨갔다. 이때 최초로 홍군(紅軍)이 조직되었다. 이들은 성경(省境) 부근의 오지에 근거지를 건설하고, 이곳에서 1929년말부터 1933년초까지 4차례에 걸친 국민당군의 포위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1934년 가을 경제봉쇄를 겸한 대대적인 공격에 밀려 근거지를 함락당하고 역사적인 장정에 들어갔다. 장시 성을 빠져나온 장정의 대오는 구이저우[貴州]로 갔다가 다시 윈난을 거쳐 쓰촨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부대는 두 파로 갈리어 한 파는 시캉[西康]을 향해 서진하고 다른 한 파는 간쑤[甘肅]·산시[陝西]를 향해 북진했다. 2년에 걸친 장정 끝에 공산당과 홍군은 모두 산시 성 옌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1935년 일본군이 만주를 발판으로 삼아 화북에서 군사도발을 일으키자 중국인들의 반일감정이 심화되었다. 중국인들은'먼저 내정을 안정시킨 뒤에 외세를 물리칠 것'(先安內後攘外)을 주장하며, 공산당 토벌에 주력하고 있는 국민당을 비판하여 즉시 내전을 중지하고 일치단결을 통해 일본군에 대항할 것을 호소했다. 공산당은 코민테른 제7회 대회의 반파시즘 인민전선 전술에 따라 장정 도중인 8월 1일 항일연합군을 결성하여 항일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할 것을 제창했다.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과 양후청[楊虎城]이 일치항일을 요구하며, 장제스를 구금한 시안 사건을 일으키자 국민당도 정책전환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이로써 항일을 위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항일전쟁 시기

 

  일본은 1937년 7월 중국에 대한 전면전을 개시하여 빠른 속도로 톈진·베이징을 점령하고 상하이까지 진격했다. 국민정부와 중국공산당은 9월 통일전선 협정을 맺고 홍군을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는 군대로 재편성했다. 주력부대는 국민혁명군 팔로군으로 이름을 바꾸고 화중·화남에 흩어져 있던 게릴라 부대를 통합하여 신사군으로 개편했다. 팔로군과 신사군은 일본군의 배후지역에서 항일근거지를 만들고 유격전을 벌였다. 일본군이 화북의 철도와 주요도시들을 점거하고 이어 광둥까지 점령하자, 국민정부는 난징에서 우한·충칭[重慶]으로 차례로 옮겨갔다. 그뒤 1939년부터 전쟁은 교착상태에 들어갔으며, 곳곳에서 소규모의 산발적인 전투가 있을 뿐 전선의 변동은 거의 없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지구전론(持久戰論)에 의하면 전략적 대치 단계였다. 이 시기에 장제스가 주력한 것은 전후의 통일문제였다. 그는 공산당에 의한 변구(邊區) 정부를 붕괴시키는 데 진력했다. 공산당은 1940년 후반에 소위 백단대전(百團大戰)을 행하고 일본군에 대해 적극적 공세를 폈다. 그러나 1941~42년에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내고 군대와 지배지역이 모두 크게 위축되었다. 근거지는 국민정부군, 왕징웨이[汪精衛] 군대, 일본군에게 봉쇄되어 재정경제 상태가 악화되었다. 이러한 경험에 비추어 1942년부터는 군사공작보다 정치공작에 주력하고, 근거지의 정치·경제를 정비하여 힘의 축적을 꾀했다. 전후의 통일문제와 관련하여 공산당은 국민당의 일당 지배의 폐지를 요구하고 항일정당 대표로 이루어진 연합정부의 결성을 요구했다.

 

 

                                        국공내전

 

  시기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여 중국에서 물러나자 국·공 양당의 군사적인 충돌이 공공연해졌다. 미국은 1944년 이래 중국의 정치에 직접 개입하여 국·공 간의 대결을 피하도록 유도하고 중국의 대일 항전력을 강화시키려 했다. 또 전후의 아시아는 통일 중국이 존재해야만 안정되리라고 생각하여, 일본 항복 후 주중대사와 사절단을 보내 조정을 시도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결국 1946년 여름 전면 내전이 시작되었다. 1946년 후반에서 1947년 전반까지 국민정부군의 공세가 계속되었지만 마오쩌둥은 전세를 낙관했다. 마오쩌둥은, 국민정부군이 공산당의 지배지역에 깊이 침입해 들어오면 국민정부군의 반 이상이 수비부대로 전환해야 되므로, 실전 부대가 감소하여 곧 공산당이 전략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리라고 확신했다. 과연 마오쩌둥의 확신대로 1947년 후반에는 공산당이 역공세를 펼 수 있게 되었다. 국민정부군의 주력이 동북·화북·산시[陝西]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된 사이 류보청[劉伯承]과 천이[陳毅]의 야전군이 황허 강과 양쯔 강 사이에 새로운 해방구를 만들었으며, 동북에서는 린뱌오[林彪]의 군대가 도시를 봉쇄하고 농촌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마오쩌둥은 12월에 열린 당중앙위원회 특별회의에서 게릴라전을 기초로 하여 인민의 지지를 받으며 수행하는 인민전쟁전략을 명확히 했다. 또한 지주의 토지를 경작 농민에게 나누어주고 독점자본을 국유화하며, 민족 상공업의 활동을 제한적으로 보장한다는 성명을 냈다.

 

  중국공산당은 동북·화북·화동의 농촌지대를 장악하고 난 뒤인 1948년 국민정부가 지배하는 도시지역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그해 가을에는 동북지방의 진저우[錦州]·선양·창춘[長春]의 세 도시를 장악했다. 이때 산둥·장쑤에서는 회해전역(淮海戰役)이라는 내전 최대의 전쟁이 벌어져 쌍방 모두 50만 이상의 대군이 참여하는 접전을 벌였다. 중국공산당은 회해전역에서 승리했으며, 1949년 1월 톈진·베이징도 점령했다. 1949년 3월 중국공산당은 제7회 전국대표대회(7전대회) 2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2중전회)를 허베이 스자좡[石家莊]에서 열고 활동의 중심을 농촌에서 도시로 옮기며, 경제정책의 목표를 공업화에 둘 것을 결정했다. 곧이어 중앙위원과 당 기관을 베이징으로 옮겼다. 4월에 공산군은 난하이[南海]·상하이·우한에 입성하고, 그위 서남·화동·화남 지역으로 각각 진격했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100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농촌에서의 농민혁명을 통해 중국혁명을 승리로 이끈 중국공산당은 농민정권적 성향을 강하게 띠었다. 농촌혁명 근거지에서의 경험과 일본 및 국민당 군대를 상대로 쌓아온 오랜 경험으로 중국공산당의 기본 성격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국공산당은 베이징과 톈진이 해방된 직후 당 공작의 중점을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할 것임을 천명했지만, 중국이 산업화되고 사회주의로 개조되는 데는 외부의 경제적·기술적 원조가 필요했다. 신정부가 수립되고 10주 후인 1949년 12월 마오쩌둥은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1950년 2월 중반까지 머물면서 스탈린과의 오랜 교섭 끝에 3억 달러의 차관제공을 약속받고 군사동맹조약을 체결했다. 1950년 6월에 발발한 한국의 6·25전쟁은 경제부흥을 준비하던 중국에 일대 전기를 마련했다. 연합군이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38。선 이북으로 북상하자 중국군은 6·25전쟁에 개입했다. 이 전쟁은 중국이 새 정부 아래 정치적 통일과 민족적 단결을 심화시키고 국민들의 긴장을 지속시켜 농업과 공업의 생산을 회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전쟁 기간중 중국은 토지개혁운동·항미원조운동(抗美援朝運動)·삼반오반운동(三反五反運動) 등의 대중운동을 전개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이밖에도 소련의 군사원조를 받아 저급한 수준으로 무장하고 있던 인민해방군을 제트기·대포 등의 장비를 갖춘 아시아 제일의 군대로 일신시켰다.

 

 

                               계획경제와 사회주의적 개조

 

  제1차 5개년계획이 실시된 1953~57년에 중국은 산업화로 향한 첫걸음을 내딛었다. 소련의 경험을 본보기로 소련의 물질적·기술적 원조를 받아 수행된 제2차 5개년계획 동안 중국은 중공업 우선정책을 취하여 한정된 자원과 인력을 중공업 건설에 투자했다. 건설자금과 숙련된 기능공의 부족 등 어려움이 있었지만 제1차 5개년계획은 고도로 집권화된 계획관리체제 아래 비교적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농촌에서는 호조(互助) 합작화 발전계획에 따라 농업집단화가 시행되었다. 이것은 먼저 임시적·계절적인 간단한 노동호조의 형태에서 시작하여 전천후 성격을 띠는 호조조(互助組)로, 이어서 토지출자를 특징으로 하는 농업생산 합작사인 초급합작사(初級合作社)로 조직을 확대해가는 것이었다. 당내에서 이 운동의 성급한 전개에 대한 비판도 있었지만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호조합작화가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특히 1954년에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 초급생산합작사의 수가 10만으로 증가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합작화운동의 지나친 과속화를 비판하고, 일시 축소하는 경향도 보였지만, 1955년 7월 이후 당중앙의 지시에 따라 고급합작사 조직이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이것은 산업화에 필요한 농업잉여를 국가통제 아래 둘 수 있게 하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고급합작사의 조직으로 자신의 토지를 보유한 중농들이 불리하게 되자 그들은 크게 반발했다. 그러나 합작화는 크게 진전되어 1956년에는 거의 소련의 집단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대약진 운동

 

  제1차 5개년계획이 전반 3년간 순조로운 전개를 보이자 1956년초 공산당 중앙 일부에서 지나치게 높은 목표와 계획이 제기되었다. 저우언라이[周恩來]·천윈[陳雲] 등이 이 제기의 수정을 주장하자 마오쩌둥은 이들을 반모험주의자로 낙인 찍고 신랄한 비판을 했다. 많은 사람들은 '대약진'이라는 구호를 들고 반모험주의를 비판하는 마오쩌둥을 지지했다. 1957년말부터 마오쩌둥은 중국 각지에서 지방당 서기들을 모아 회의를 열고, 합작사를 통합하여 대형화하는 대약진 운동을 일으키도록 지시했다. 나아가 1958년 8월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인민공사(人民公社) 운동이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인민공사 창설의 명령이 나온 지 1개월 만에 전국 74만 고급합작사가 2만 6,500여 개의 인민공사로 개편되었다. 인민공사는 행정권력과 농업합작사가 결합된 조직으로서 공산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기초조직 역할을 했다. 인민공사에서는 집단노동이 장려되고 노동점수제에 의한 수확의 분배가 이루어졌으며, 여성의 노동력을 사회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공공식당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규모가 커서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없었으며, 사람들의 노동의욕을 저하시켜 노동생산성을 떨어뜨렸다. 1960, 1961년에 발생한 자연재해로 인해 식량위기가 야기되어 대약진의 전면적 재조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1960년말부터 인민공사 운동이 후퇴하기 시작하여, 농민들에게 자류지(自留地)와 가정부업을 허용하고 자유시장을 인정하여 생산의욕을 고취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1961년에는 생산대(生産隊:이전의 초급합작사)를 기본단위로 하고 예정량 이상을 생산한 생산대에는 장려금을 지급하는 방침이 채택되었다. 이외에 공업·교육·문예에서도 정책전환이 이루어졌다. 1962년에는 이미 여러 지역에서 인민공사가 해체되고 농민들의 자영농지가 부활되었다. 1962년 마오쩌둥은 대약진 실패의 책임을 지고 제2선으로 물러났으며, 류사오치[劉少奇]와 덩샤오핑[鄧小平]은 정치의 전면에서 이와 같은 재조정작업을 주도해나갔다. 조정정책은 효과를 거두어 농민과 노동자들의 생산의욕이 높아졌으며, 문화와 교육이 안정되고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자유로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우한[吳]은 펑더화이[彭德懷]의 명예회복을 위한 여론형성을 기대하고 역사극 〈해서파관 海瑞罷官〉을 발표했다. 계급투쟁과 대중운동을 여전히 중시하고 있던 마오쩌둥은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중국이 소련과 같은 수정주의로 빠지지 않을까 염려했다. 1962년말부터 인도와의 국경에서 군사충돌이 발생하고 소수민족의 폭동 및 소련이 미국과 핵실험금지조약을 맺는 등 국제관계가 긴장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은 이에 자극을 받아 농업집단화의 후퇴를 비난하고, 펑더화이 추방의 정당성을 재확인했으며, 계급투쟁을 강조했다.

 

 

                                                            문화대혁명

 

  1965년 11월 10일 야오원위안[姚文元]이 〈해서파관〉을 평하는 글을 발표하면서 문화대혁명의 막이 올랐다. 마오쩌둥이 12월 야오원위안의 글을 지지한 이래 1960년 봄에 걸쳐 그때까지 사상계를 지배해온 인사들에 대한 숙청작업이 진행되었다. 1966년 5월 '5·16통지'가 발표된 다음부터는 당위원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낸 문화대혁명이 폭발했다.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통해 자신의 사상에 좀더 충실한 후계자를 세우고, 중국공산당을 개혁하려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혁명 이후의 세대들을 혁명사상으로 무장시키고 교육·보건·문화에 있어서 엘리트주의를 청산할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목적을 위해 처음에는 도시 청년들을 홍위병(紅衛兵)으로 조직하는 대중동원의 방식을 취했다. 마오쩌둥의 대규모 궐기에 대한 지시와 '반란을 일으키는 데는 이유가 있다'(造反有理)라는 구호에 호응하여 8월 한 달 동안 베이징대학교에 모여든 인원은 200만 명이 넘었으며, 전국 각지에서는 대궐기가 일어났다. 이들은 당정기관과 공장을 습격하고 열차에서 무기를 약탈하여 무장충돌을 일으켰다. 1967년부터는 사태가 탈권투쟁으로까지 발전했고 혁명위원회라는 임시권력기구가 만들어졌다. 혁명위원회는 군·홍위병·당의 대표로 이루어진 권력기구인데 군의 힘이 가장 우세했다. 1969년 제9회 전국대표대회에서는 린뱌오가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며, 군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린뱌오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류사오치를 비롯한 여러 정치가들을 처형했다.

마오쩌둥은 정권 이양에 지나치게 조급함을 보인 린뱌오에게 불안을 느끼고 저우언라이와 손을 잡아 그를 제거하기 위한 공작을 벌였다. 그러나 장칭[江靑]과 천보다[陳伯達]는 린뱌오를 지지했다. 1971년 키신저의 중국방문은 미국에 대한 문호개방에 반대해온 린뱌오의 정치적 패배를 의미했다. 1971년 9월 린뱌오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죽은 뒤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을 권좌로 불러들였다. 당중앙의 일상공작 책임자가 된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 국면으로부터의 전환을 위해 전면정돈을 주장했다. 즉 농업·공업·문예 정책상의 정돈과 당의 정돈을 내세우고 각 성 혁명위원회의 정돈을 단행하려 했다. 덩샤오핑이 이같이 대담하게 전면정돈을 추진할 수 있던 배경에는 그가 장악한 군에 대한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의 전면부정을 의미하는 듯한 덩샤오핑의 전면정돈에 불만을 느껴 4인방의 덩샤오핑 비판에 동조를 표했다.

 

  1976년 4월 톈안먼 사건이 일어나 덩샤오핑은 결국 실각하고 화궈펑[華國鋒]이 후계자로 부상했다. 9월에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이어 4인방이 체포됨으로써 문화대혁명은 비로소 끝을 맺었다. 동란의 10년간 중국은 생산력이 저하되고 정부 기능이 마비되었다. 거리에 나선 청년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세대간 격차가 심화되었다. 또한 권력다툼에 환멸을 느낀 중국인들이 당 지도부에 불신을 갖게 되었으며, 정치에 심각한 패배주의가 형성되는 등 중국 사회 곳곳에 문화대혁명의 후유증이 남게 되었다.

4개 현대화

 

  1977년 덩샤오핑이 복권되어 예전의 지위를 되찾았다. 당은 1978년 이래 덩샤오핑의 제안에 따라 4개 현대화 건설의 기본방침을 분명히 하고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발표했다. 농업에서는 농업생산책임제를 도입하고 인민공사를 해체해갔다. 국민경제에 있어서는 시장조절의 보조적 기능을 인정하고 기업의 자주권을 확대했다. 대외개방정책을 실시하여 경제특구를 설치하고 나아가 14개 연해도시의 개방을 결정했다. 경제정책의 실행과 더불어, 정치적으로 1982년의 당 대회와 헌법개정, 그리고 1982년말부터 3년간에 걸쳐 실시된 정당(整黨) 작업을 거쳐 덩샤오핑 체제가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다.

 

 

                                개방개혁정책의 전개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화궈펑이 1980년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와 1981년 6월 중국공산당 11전대회 6중전회에서 당 주석직과 총리직을 덩샤오핑의 심복인 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쯔양[趙紫陽]에게 물려주고 퇴진했다. 이에 앞서 1981년 3월 전인대 상무위원회에서 국무원 각료들을 대폭 교체함으로써, 화궈펑의 측근들 대신 덩샤오핑 계열의 신진 실무관료들이 대거 기용되었다. 이로써 경제개혁과 개방정책을 내세운 덩샤오핑·자오쯔양·후야오방의 지도체제가 확립되었다. 1982년 제5기 전인대를 통해 '사회주의현대화'와 안정 기반의 구축을 이룩하기 위한 새로운 헌법을 채택, 국가주석제를 도입하고 주요직의 임기를 제한했다. 또한 국가중앙군사위원회를 신설하고, 특별행정구역제도를 만들어 타이완·홍콩·마카오에 대한 정책에 대비했다. 이외에도 인민공사의 정치적 역할을 박탈하고 제6차 5개년계획을 수립했다. 체제는 보수파를 배제한 채 경제개방 및 농촌 경제개혁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1983년 10월에 열린 12전대회 2중전회를 통해 정풍운동(整風運動)에 착수했는데, 이는 좌파와 문화대혁명 잔존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숙청작업이었다. 1984년 9월 영국과 홍콩 반환협정이 일단락되자 그해 10월 대폭적인 경제개혁정치를 단행했다. 1985년 9월 임시 당대회를 시작으로 중국공산당 역사상 유례 없는 대규모의 당지도부 교체를 단행, 보수세력을 대폭 퇴진시키고 신진개혁세력을 영입했다.

 

 

                                  보수파의 반격

 

  1986년 5월부터 후야오방이 백화제방(百花齊放)·백가쟁명(百家爭鳴) 운동의 전개와 함께 민주화 성향의 개혁을 추진했다. 개혁파의 주도에 따라 정치가 전개되자, 민주화에 대한 지식인들의 요구가 활발해졌다. 또한 이에 자극을 받은 대학생들이 1986년 12월부터 자유화·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여 체제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당내 보수파는 개혁파를 공격, 1987년 1월 '반(反)부르주아 자유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후야오방 총서기가 민주화시위처리 문제와 관련, 당의 집단지도원칙을 위반했다는 비판을 받아 사임했다. 이로 인해 국가 전반에 걸친 개혁정책은 다소 주춤하는 듯했다. 1988년 이래 최악의 인플레이션 및 경기과열현상으로 사회불안이 가중되는 가운데, 그해 9월 보수파의 '경제환경의 정리 및 경제질서교정계획'이 채택되었다. 리펑[李鵬] 총리는 13전대회 3중전회 이후의 조정정책 성과를 평가하여 향후 2년간의 구조조정을 골자로 하는 농업정책의 강화, 에너지·교통·통신 등 기초산업의 강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또한 경기과열과 관련, 자오쯔양 당총서기의 개혁노선을 간접 비판했다.

 

 

                                        톈안먼 사건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 전 총서기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대학생들이 그의 명예회복을 위한 집회를 열기 시작했다. 베이징대학교 학생들이 지난 1986~87년 학생시위의 책임을 물어 후야오방 전 총서기를 퇴진시킨 정적(政敵)들을 간접 비난하고, 후야오방을 찬양하는 대자보를 붙였다. 이는 일반시민이 가세하여 민주화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5·4운동 기념일에는 전국 각지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연달아 일어났다. 5월 13일 이후 톈안먼 광장에서 무기한 농성이 시작되면서 시위는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후야오방의 죽음을 계기로 표면화된 이 시위에서 학생들은 주로 정치개혁과 인권존중을 외쳤고, 이에 가세한 일반시민과 노동자들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물가고 등을 비난했다. 이들의 불만은 덩샤오핑을 비롯한 중국지도층의 무능과 부정부패에 집중되었다.

 

  덩샤오핑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리펑 총리,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은 온건책을 주장하는 자오쯔양 총서기와 후치리[胡啓立] 정치국 상무위원에 대응하여 강경책을 폈다. 5월 20일 리펑 총리가 베이징 일부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한 이후, 6월 3일 베이징 중심지역에 계엄군이 진주하기 시작했다. 6월 4일 계엄군이 톈안먼 광장을 무력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

톈안먼 사건 이후 자오쯔양 총서기가 민주화 시위를 지시, 당을 분열시켰다는 이유로 총서기, 중앙군사위원 제1부주석, 정치국 상무위원 등의 당직에서 해임되었다. 후치리 역시 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서기직을 사임했다. 이들의 후임으로 장쩌민[江澤民] 상하이 시 당서기가 신임 총서기로 선출되었고, 쑹핑[宋平] 당중앙조직부장 및 리루이환[李瑞環] 톈진[天津] 시장이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었다. 1989년 11월 6일부터 열린 13전대회 5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이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사임하고 후임에 장쩌민 총서기가 선출되었다. 또한 1990년 3월 덩샤오핑은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사퇴하고 장쩌민 총서기가 이 직책을 계승했다. 리펑 총리는 1990년 1월 11일 계엄령을 해제하고 톈안먼 광장을 개방하는 등, 사건 이후 악화되었던 대외 이미지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최근의 동향

 

  정치적 상황 면에서 중국 당국은 1990년 6월 베이징 주재 미국대사관에 피신해 있던 반체제인사 팡리즈[方勵之] 교수 부부의 출국을 허용함으로써, 톈안먼 사건 이후 악화된 서방국가와의 관계개선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어 1990년 9월 22일에서 10월 7일까지 베이징에서 제11회 아시아 경기대회를 개최하여 그동안 실추된 대외 이미지를 회복하는 작업을 가속화했다. 그해 12월 13전대회 7중전회에서 보수파의 우위를 바탕으로 양 세력이 일시적인 타협을 이루었다. 이 회의에서 국가 실정에 맞는 사회주의 건설, 개혁과 개방 정책의 지속적인 추진 등을 기본원칙으로 채택했다. 1992년 14전대회에서는 톈안먼 사건을 '반(反)혁명폭란'에서 '정치풍파'로 재평가했다. 또한 1993년 2월 이 사건을 주도했던 2명의 학생지도자를 가석방했다. 중국이 톈안먼 사건 후 경찰수배명단 1호에 올라 있던 왕단[王丹] 등을 석방한 것은 서방의 인권침해 비난을 무마시키고, 대외문제에서 인권을 우선시하겠다고 공언해온 미국 클린턴 정부에 대처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한편 2000년 하계 올림픽 대회를 베이징에서 유치하려는 의지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14전대회에서는 양상쿤 국가주석의 당직은퇴를 공식 결정했다. 양상쿤의 은퇴는 막후 최고실력자 덩샤오핑의 '당의 세대교체' 요청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전인대 상무위원장 완리, 정치국 상무위원 쑹핑·야오이린[姚依林], 우쉐첸[吳學謙] 부총리, 친지웨이[秦基偉] 국방부장 등의 원로정치국원들이 중앙위원에서 제외되었다. 1993년 14전대회 2중전회에서 국가주석에 장쩌민 총서기, 부주석에 룽이런[榮毅仁] 전 국제신탁투자공사 이사장, 전인대 상무위원장에 차오스[喬石] 정치국 상무위원이 선출되었다. 이 인사안은 덩샤오핑의 기본구상에 보수파들의 주장을 절충시킨 개혁파·보수파 간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로써 지도부의 세대교체·전문화가 실현되었으며 장쩌민 총서기가 국가 최고지도자로 확정되었다(→ 톈안먼 사건).

 

  지난 1987년 중국과 타이완의 자유왕래가 허용된 이래, 중국에 대한 타이완의 투자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이다. 공식적으로는 직교역이 금지되어 있어 타이완의 대중국 투자는 홍콩을 경유하는 간접투자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나, 질·양 면에서 모두 교역의 규모가 확대되고 있다. 1993년 3월 타이완은 중국 대륙의 기업인들이 타이완 내에서 합법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할 방침임을 발표했다. 또한 타이완의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은 앞으로 3년 이내에 베이징을 방문하여 중국 지도자들과 역사적인 회담을 갖기 위해 추진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 중국은, 1997년 중국에 반환되는 홍콩에 관하여 영국과 비밀협약에 합의했는데, 그 내용은 홍콩에 제한된 민주주의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중국은 이 협상에서 1997년에 결성될 홍콩 입법회의 전체의석 60석 중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의석을 종래의 18석에서 20석으로 늘릴 것에 합의했다. 또한 1993년 1월 장쩌민 중국공산당 총서기는 홍콩 이외에 타이완·마카오 문제에 있어서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공존하는 1국 2체제 원칙을 고수해나갈 것을 천명했다.

1997년 7월 1일 홍콩은, 1842년 난징[南京]조약에 의해 영국에 할양된 지 155년 만에, 1898년 조차된 지 99년 만에 중국에 반환되었다. 이로써 홍콩은 영국 식민지에서 중국 홍콩 특별행정구로 바뀌었다. 중국은 둥젠화[董建華]를 홍콩의 초대 행정장관으로 임명하는 한편, 지난 1995년 최초의 민간선거로 구성된 홍콩 입법국을 해산하고 임시 입법회를 구성했다. 1국 2체제 원칙에 따라 중국은 향후 50년간 홍콩의 자본주의체제를 유지하게 된다. 또한 중국은 1999년 마카오 환수에 이어 타이완을 1국 2체제로 흡수하기 위해 통일운동을 가속화하고 있다.

 

 

                                                                                                              K. G. Lieberthal 글

 

                                                                                        브리태니커 백과 > 역사 > 역사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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