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수도의 이름을 따라 은(殷)이라고도 한다. 하(夏)·상·주(周) 3대의 왕조가 잇달아 중국 본토를 지배하였다고 하나, 하왕조는 고전(古典)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 전설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상나라 전기는 기원전 1600년부터 1300년까지이고, 도읍을 은으로 바꾼 상나라 후기는 1300년부터 1046년까지이다. |
네이버 백과사전
은[殷]
은대는 BC 11세기 후반 주(周)에 의해 멸망되기까지 6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은은 얼리터우기[二里頭期]·얼리강기[二里岡期]·샤오툰기[小屯期]로 이어지는 중국 청동기문화에 기반을 둔 왕조였다. 후기의 수도인 상읍(商邑)은 〈사기 史記〉에 기록된 '은허'(殷墟)임이 20세기초 발굴조사에서 밝혀졌고, 이곳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은'은 주대 사람들이 쓰던 호칭이며, 은나라 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상(商)이라고 불렀다. 은의 문화는 BC 17세기말경, 당시 북부에 널리 퍼져 있던 신석기시대 룽산 문화를 모체로 하여, 황허 강 남안 일대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태을(太乙)이 명재상 이윤(伊尹)을 임용하여, 하(夏)를 무너뜨린 후 은을 세우고, 호(지금의 산둥 성 차오 현[曹縣] 부근)에 도읍을 정했다고 한다. 이때가 BC 16세기초로 추정되는데, 은은 당시 황허 강 유역에서 성장하던 신흥문화의 동쪽 중심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은의 특색이었던 형제상속과 부자상속이 반복되었는데, 제10대 중정(中丁) 때 왕위계승을 둘러싼 싸움이 격화되어 세력이 약화되었고, 도읍을 여러 번 옮겼다.
BC 13세기에 19대 반경(盤庚)이 위기를 극복하고,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상읍으로 도읍을 옮긴 후 은조는 다시 왕성해졌다. 22대 무정(武丁) 이후 은대는 다시 전성기를 맞아, 산시[山西] 고원이나 산둥과 안후이[安徽] 지방으로 대정벌을 나갔다. 은이 동남 정벌에 몰두하는 동안, 서쪽 산시[陝西] 지방에서 세력을 넓히던 주나라는 BC 11세기 후반에 은을 정복했다.
복사(卜辭)에 의하면, 은 후기 사람들은 선왕을 신격화하고 왕위를 신성시했으며, 왕위 계승을 점차 부자상속으로 일원화했다. 또한 안양 시 서북 구릉지대에 거대한 왕묘를 세웠는데, 이곳에서 웅장한 청동기가 많이 출토되어 은나라 왕의 권력이 강대했음을 알 수 있다.
본래 여러 혈족집단이 뭉쳐 왕조를 만들고, 이 왕조는 여러 소부족국가 연합체의 맹주로서 세력을 유지했기 때문에, 은왕의 권력이 강해지면 다른 나라의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다. 주왕(紂王)을 포악한 군주로 묘사한 설화의 배경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는데, 실제로 주왕은 우수하고 유능한 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veryfine88 (2003-09-07 20:56) |
단군 왕검 조선 건국.
은나라는 BC 1600년경에 창건하여, BC 1050년까지 약 600여년간 존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實證 한단고기]가 인용한 <단군세기>나 <규원사화>에 의하면 13대 단군 갑오 16년(BC 1767년)에 은나라 탕왕湯王의 하 나라 정벌 기록이 있어, 건국연대 및 멸망시기가 명확하지 않다.
후직의 후손중에 은나라 말기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있었으며, 고공단보의 손자가 서백 창이고, 서백 창의 아들이 단군조선의 조력으로 은나라의 마지막 왕 폭군 주왕(紂王)을 몰아내고, 주(周)나라를 건국한 무왕武王이다.
▒ 이상에서 살펴 보았듯이, 중원에 왕조를 세웠던 삼황오제나 하.은.주 모두 근본은 동이족이며, 환국(桓國)을 계승한 환웅시대의 배달국이 그 뿌리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주나라 무왕 이후 중원의 동이족이 어떻게 잔존하여 분포되어 왔는지, 지나족(차이나China 즉, 화족(華族)과 동이족(東夷族)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무엇이며 인체상의 어떤 요소로 판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본인도 깊은 지식이 없어, 고대사와 종족분포에 전문적인 역량이 높은 분들의 참여를 바라고 있다. 더구나 역사 이래 동이족들중 상당수가 저 넓은 대륙에서 오랜 기간동안 여러 경로를 거쳐서 지속적으로 혼혈이 되어 왔고 문화적으로 흡수되어 왔다면 무슨 근거로 민족을 구별해 낼 수 있겠는가. 쓸데 없는 고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요즈음 북한을 탈출하는 조선족 여인들 중에는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중국인과 결혼하거나 몸을 파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참으로 마음이 착잡할 뿐이다.
당시 은나라 왕실에는 주왕의 숙부인 비간(比干)과 기자(箕子), 그리고 주왕의 이복 형제인 미자(微子)가 있었다[공자는 이 세 사람을 '은(殷) 3인仁'이라 하였다]. 미자가 숙부인 비간과 기자를 찾아와 나라의 장래와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의논을 하자, 비간과 기자는 우선 다른 곳으로 가서 당분간 피신해 있도록 권고하였다. 그런 뒤 비간(比干은 주왕 앞에 나아가 간언을 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죽게 되었다. 주왕은 비간의 간언을 듣고, '내 들으니 성인(聖人)은 심장에 구멍이 일곱 개라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겠다.'하고는 비간을 죽여서 그 심장을 꺼내 보았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기자(箕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척하며 남의 종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주왕이 이를 알고는 기자를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이렇듯 포악했던 주왕도, 주(周)의 무왕(武王)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불에 타 죽는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아마도 [林氏先祖寶鑑]에서 비간을 '마지막 왕자'라고 표현한 것은, 을제(乙帝)를 이어 받은 마지막 주왕(紂王)이, 하나라의 걸왕(傑王)과 더불어 폭군의 대명사처럼 회자되고 있으며, 나라를 망치고 무수한 충신들을 참살한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왕통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는 숨은 뜻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林氏先祖寶鑑에 의하면, 은나라 '마지막 왕자 비간'이 순국하자, 비간의 부인인 진씨(陳氏)는 잉태한 몸으로 장림산(長林山) 석실에 피신하여, 그 후에 아들을 낳으니 처음 이름을 천(泉)이라고 지었는데, 천(泉)의 나이 3세때에 은 나라가 망하고 주(周)가 건국되자, 주의 무왕(武王)이 그 혈통을 찾아 장림산의 '림'을 따서 林氏를 사성(賜姓)하였고, 굳굳하게 성장할 것을 뜻하여 '견(堅)'이라는 이름으로 호칭하였다고 한다. 비간의 능(陵)은 현재 중국의 하남성 위휘시(河南省 衛輝市)에 있으며, 그 후손들이 춘추로 제향을 드리고 있다고 한다. 비간의 후손에 대한 상세 내용은 아래 [비간의 후손] 내용을 참조하시라. ▒ 기자箕子 기자(箕子)는 비간(比干)의 친 동생이다. 기자에 관한 내용은 이일봉님의 [實證 한단고기]을 인용해보자.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한 뒤에 은나라의 폭군 주왕에 의해 투옥되어 있던 기자를 석방하고, 그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는 얘기가 정설처럼 내려오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정치적.군사적 정황으로 미루어 실로 공상소설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는 기록은 후대에 왜곡.날조된 기사가 분명하다. 무왕[武王]은, 주왕[紂王]의 아들인 무경[武庚]을 제후로 봉해서, 옛 은나라 백성들의 동요와 반란을 막고 은나라의 제사가 끊기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그런데 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成王이 즉위하자, 무경은 무왕의 다른 형제들과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무경이 죽자 미자[微子]가 제후의 자리를 이어받았는데, 이를 송[宋]나라라 하였다. 송나라는 옛 은나라 땅에 있었다.
족보라는 것은 만드신 분들이 자료를 수집하고 고증을 통해, 심지어는 해외출장 조사까지 마다하지 않는 집념과 노력의 결실임을 생각할 때, 충분히 역사연구의 한 근거가 될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며, 다만, 본 林氏先祖寶鑑상에는 헌원 황제가 동이족이었음을 주장하거나, 그러하리라고 예상한 언급이 전혀 없어 섭섭하던터에,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역사 연구가이신 이일봉님의 저서 [實證 한단고기]를 발견하고 읽어본즉, 은나라에 대한 언급이 상상외로 많이 수록되어 있어, 그 내용을 위에 서술한 [은왕조가 동이족이었다는 고증 및 사례]에서 부분적으로 인용하였다.
중국 정부에서 옛날부터 이분을 추앙하기 위하여, 비간능比干陵을 위시하여 삼인사三仁祠등 여러 곳에 영정影幀을 모셔놓고 제향을 올리고 있다. 득성임씨得姓林氏는 비간공의 아드님이신 임견林堅공이신데,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임견공이 장림산長林山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장림산 중 림林자를 따서 임씨林氏라 사성賜姓하였고, 견고하게 자랄 것을 뜻하여 견堅자로 이름을 지어 임견林堅으로 호칭하니, 바로 이분이 득성시조得姓始祖이다. 그리고 이분의 아버님이신 비간공을 태시조太始祖라 칭한다.
득성시조 임견공으로부터 우리나라 임씨를 살펴보자. 득성조로부터 중국땅에서 2천년을 이어왔고, 그간에 많은 선조님들이 중국역사에 큰 공헌을 하였는데, 그중 몇 분을 소개하면 성인聖人 공자孔子의 큰손 역할을 하신 득성조 23세인 임방林放공이 계시고 득성조 64세인 진안군왕晋安君王 임록林祿공이 계시다. 이어 득성조 80세인 임온林蘊공이 계신데, 이분의 9형제가 모두 자사刺史를 지내어 9목사九牧詞라 칭하였고, 이분의 고손高孫인 임팔급 林八及공께서 당나라 말 한림학사병부시랑翰林學士兵部侍郞의 벼슬을 하던중, 변방이 극심한 혼란기를 맞아 동료 7학사學士와 함께, 고향 중국의 팽성으로부터 배를 타고 당시 통일신라의 아산만 상류로 동도東渡하여 현재의 평택시 팽성읍에 정착하시니, 이분이 우리나라 林氏의 시조가 되었다(···) -중략- 』▒ 아래는 임씨한국종친회 각 본관 대표들이 선조 제향참례를 위해 중국에 직접 방문하여 중국, 대만 등 세계의 종친회원들을 만났을 때의 기행문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 지난 1995년에 중국의 제향참례 및 조상순례를 인도하여 춘추春秋로 2회 다녀올 수 있었다. 춘계제향春季祭享은 하남성 위휘시河南省 衛輝市의 태시조 비간릉比干陵에서 행사 하였는데, 대규모의 태시조 릉과 많은 사당, 제청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비간공을 비롯하여 이분의 비碑 와 적자 득성원조 임견공과 손자 두분의 상像을 배향하여 모셔 놓았고, 오래된 수많은 비석과 넓은 광장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행사에 참여한 각 국의 종친 대표들이 각 나라 이름이 적힌 푯말을 들고 질서있게 입장하여 제향참배를 하게 되니, 3천 백여년이 지난 지금도 조상이 얼이 새로웠다. 특히 중국 정부기관에서 우리 일행을 특별히 보살피기를 호텔에서부터 호위가 삼엄하였고, 차편으로 갈 때는 앞뒤로 경찰이 에스코트를, 연도沿道에는 교통결찰이 거수경례를, 행사장에는 당비서. 시장. 서장 등 관리들이 환영하였으며, 악대까지 동원하여 환영하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또한 위휘시 목야牧野에 장림산長林山이 있는데, 이곳은 임견공 출생지로서 석굴에는 출생한 견堅공을 안고 있는 어머니 진씨陳氏의 상이 있고, 큰 글씨로[林堅出生地]란 안내석이 있었으며, 큰 비碑에는 황제黃帝(황제헌원)로부터 내려온 내력과 득성得姓하게된 내용이 담겨져 있어, 옛일을 한 눈에 회상할 수 있게 해 놓았다.
다음으로 하남성 안양에 있는 은허지殷墟趾를 찾았는데, 은나라 왕궁으로서 비간공 이전에 계셨던 조상님들의 왕궁인 것이며, 고색이 짙은 상형문자와 갑골문자로 치장해 놓았는데, 보존이 잘되어 있었고 조상님들이 나라를 통치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여 태시조 비간공으로부터, 현존하고 있는 상고대 조상님들과 팔급八及공이 사시던 집까지 찾았으니, 팔급공의 계대 연결은 적중한 것이다. 우리 임씨는 황제헌원으로부터 32대 은나라 마지막 왕자인 비간比干공을 태시조太始祖로, 이분의 아들인 임견공(BC 1121)을 원시조로, 동도東渡하신 임팔급공을 시조로 하여, 뿌리가 확실하게 어어진 것이다.(…)
팔급공과 그 일행이 신라국 아산만에 정착하면서, 토성을 쌓고 뗏집을 지어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팽성彭城이란 팔급공의 고향 지명을 불러 팽성이 생겼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있겠으며, 또한 중국 당나라 성주의 고관 후손이요, 한림학사 병부시랑이란 막중한 벼슬이었던 팔급공이 토성에 사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겠다.
최근 1988년 수원대학에 의해, 팽성에 있는 농성濃城에 대한 학술발표회가 있었던 바, 팽성임씨彭城林氏(본관 평택임씨를 말함) 시조 팔급공이 축성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는 발표를 하였고, 현재 평택시에서 이 농성의 복원사업을 마쳤다. 또한 이 곳 지명을 팔급공의 고향故鄕 지명인 팽성彭城으로 지어 불러온 것이 지금까지 전해져, 현재 평택시 팽성읍으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팔급공은 이곳에서도 외침을 막는데 분투하였고, 이에 신라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하셨으니(…) 우리 한국에 있는 임씨는 기원전 1121년에 득성하여, 중국에서 2000년을, 그리고 대개가 1100여년 전에 동도하신 임팔급공의 후손들이다. 관향을 달리하고 있으나 우리 林氏는 한 할아버지(비간)의 자손임이 분명하다...』 [比干]임이 명백하다 할 것이다. 천[泉]이었던 것입니다. 3세시에 은나라가 망하고 ,주周의 무왕武王이 長林山의 林을 따서 임씨로 사성[賜姓]하고, 원래의 이름인 천[泉]을 견[堅]으로 하여, 임견공이 수풀림의 득성시조가 되셨습니다…』
|
내용출처 : [기타] http://www.eundynasty.com/%C0%BA%BF%D5%C1%B6%B4%C2%B5%BF%C0%CC%C1%B7.htm |
'偉人*人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홍장 [李鴻章] (0) | 2007.01.28 |
---|---|
청 [淸] (0) | 2007.01.28 |
주[周] (0) | 2007.01.27 |
중국사 [中國史, China, history of] (0) | 2007.01.27 |
주공 [周公, Chou Kung] (0) | 2007.01.27 |